오지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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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
吳之湖


파일:external/sstatic.naver.net/20070510173716197558532.jpg

본명
오점수(吳占壽)

모후산인(母后山人)
본관
동복 오씨[1]
출생
1905년 12월 24일
전라남도 동복군 읍내면 독상리
(現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2]
사망
1982년 12월 25일[3]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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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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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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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령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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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화가, 개성 송도 고등보통학교 교사,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
학력
동복공립보통학교 (졸업)
전주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 학사)
배우자
지양진(池良珍)[4]

1. 개요
2. 생애
3. 작품
3.1. 처의 상
3.2. 남향집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제국일제강점기대한민국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 민족주의자.

바다가 보이는 항구, 또는 눈덮힌 겨울 풍경을 자신만의 밝고 명랑한 색채와 대담한 붓터치로 표현해낸 인상주의 그림으로 유명하다. 서구의 인상주의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자연과 기후에 맞는 빛과 색채를 통해 한국적 인상주의를 완성하였다고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오지호는 1905년 12월 24일 전라남도 동복군 읍내면 독상리(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보성군수를 지낸 아버지 오재영(吳在永)과 어머니 수원 김씨(水原 金氏) 김의군(金宜君)[5] 사이의 8남매 중 막내인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오재영은 1913년 발행된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에 그 이름이 등재된 사람으로 광주부지방위원회(光州府地方委員會) 위원, 보성군수(寶城郡守)[6], 전라남도 참사(全羅南道參事), 일본 적십자사 특별사원, 적십자사 광주지부 협찬위원 촉탁 등을 지낸 지방 유지로,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2월 26일에도 조선총독부로부터 포상을 받아 정8위로 품계가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1911년 5월 26일 군수직에서 물러났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뒤 그 해 8월 동복공립보통학교 개수 비용으로 쓸 금 50원을 기부한 공로로 이듬해 8월 조선총독부로부터 나무잔 1개를 수여받았고# 1916년 9월 1일 전라남도지방 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17년 4월 28일에는 동복지방금융조합 조합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1919년 3.1 운동 직후인 4월 1일 자결하였다.#

그는 동복보통학교에 다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졸업 후 한동안 부친 곁에서 서당을 다니며 한문 공부를 하였다. 나라 잃은 통한에 자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오지호는 강직한 성품과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한다. 이후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가 서울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하였다. 거기에는 한국인으로 맨 처음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고희동이 미술교사로 재직해 있었고, 여기서 회화의 기본을 배우고 절친 김주경을 만난다.

1922년 18세의 나이에 부모님의 주선으로 광주 부호의 딸인 지양진(池良珍)과 결혼을 했다. 이듬해인 1923년 휘문고보 4학년 때에는 나혜석, 이종우, 백남순, 이제창 등이 중심이었던 '고려미술원'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1925년 화가수업을 위해 동경에 건너간 오지호는 기초과정인 가와바다(川端畵學校)를 거쳐 1926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1931년 졸업하기까지 당시 일본 화단의 주류이던 인상주의를 배우게 된다.

1928년부터 1931년 졸업 때까지 7회~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풍경>과 <나부> 등의 유화를 출품하여 작가로의 등단에 열정을 보였으며, 김주경, 박광진 등이 '조선적인 조선의 풍광과 조선인의 삶'을 표방하면서 구성한 녹향회(綠鄕會) 동인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때 오지호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들을 보면, 풍경화와 인물작품들은 넓적하고 굵은 터치를 즐겨 썼으며, 아직 어두운 색조를 완연히 벗지 못한 모습이 보이며,(후기 오지호 회화의 특징은 밝고 명랑한 색채 사용이다.) 또한 대담한 터치의 화면들이 세잔느 풍을 느끼게 한다. 특히 <처의 상>(1936)이 그러하다. 학창시절 오지호는 '색채가 풍부할 때 형태가 충실해진다' 는 세잔느의 회화론에 감화되었으며, '동미(동경미술학교)의 세잔느' 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고향에 잠시 머물렀던 오지호는 1933년에 서울로 올라가서 동아백화점 광고부에 근무하다가 1년만에 그만두고, 친구 김주경의 추천[7]으로 9년간 송도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의 생활을 하며 개성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개성으로 오자마자 '오점수(吳占壽)'라 쓰던 이름을 '오지호(吳之湖)'라는 필명으로 바꾼다.[8] 오지호는 개성에서 마음껏 자연의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방학 때 친구 김주경과 만주를 여행하기도 하고 1938년에는 김주경과 공동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컬러화집 『김주경·오지호 2인화집』을 펴내기도 한다. 그 스스로도 훗날 이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라 말하곤 했다. 그의 대표작 <남향집>도 이때 그려진 것.

개성에서 그는 1940년대 초반 창씨개명 반대,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전쟁기록화 제작의뢰의 거부 등으로 일제에 맞선다. 송도고등보통학교의 대부분의 교사들이 창씨개명을 하였으나 오지호는 이름을 바꾸지 않고 '오점수'란 본명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 일로 그는 '불령선인'으로 찍혀 일제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다. 일본 군국주의 마지막 횡포가 기승을 부리며 압박을 가해오자, 오지호는 함경도 단천으로 피신하였다가 고향 동복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때 큰아들이 개성에 남는 바람에, 분단 이후에도 합류하지 못해 이산가족이 되버리고 만다.

해방 직후에는 1945~46년 '조선미술건설본부' 서양화부위원, 독립미술협회 결성에 이어 '조선미술가동맹'의 미술평론부 위원장, '조선미술동맹'의 부위원장 등 간부직을 두루 맡았다. 그러면서 이론적 선두주자로서 자주적 민주주의 국가건설과 함께 진보적 미술계를 만들려는 실천에 앞장섰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의 발전 없이는 바른 민족예술이 바로 설 수 없다며, 때에 따라 붓 대신 총을 들어 민주사회 건설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방 공간의 사회와 문예계에서는 좌우의 이념대립이 극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미군정의 압력에 따른 분열과 이합집산이 지속되는데 대하여 오지호는 크게 실망감에 빠졌었고, 결국 분단을 고착화시킨 남한 단독의 이승만 친미정권이 1948년에 들어서자 오지호는 낙향하여 광주에 둥지를 틀었다. 광주에서 오지호는 1949년 조선대학교 미술과를 창설하였고, '광주지구 미술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고향 동복에서 '농민위원회 위원'으로 지내다 무등산의 동북쪽 백아산에 입산하여 이른바 남부군(南部軍)인 '전남지구총사령부 출판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1월 중순경 광양의 백운산에서 군경합동작전시에 검거되었고,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석방된 뒤 조선대에 복직하였다. 남부군 시절에 오지호를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선전물 제작에 관여하면서 스케치를 꾸준히 하였다고 한다. 또 그림전시를 통해 미술교육도 했는데 그때 작품들은 산에 묻어 두고 내려왔으며, 40대 중반의 어른으로 소년들에게 논어와 맹자 같은 한자교육도 시켰다고 한다. 석방 뒤 복직과 함께 지금의 광주 지산동 초가집에 정착한 해는 1953년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오지호는 '자유'에 환호하였다. 그 자유스런 민주주의 사회아래서 마음껏 빛과 색, 나아가 '자유로운 대지 아래의 원시'를 그리고자 했고,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될 것으로 믿었다. 미술과 교수직을 임직순에게 후임으로 물려주고 작업에만 전념할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였다. 하지만 장면정권에 대한 실망이 겹쳐, 민족·자주·통일을 주장하던 진보적 인사들의 혁신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하였고, 1961년 2월 초 '전남 민자통[9]' 결성대회에 준비위원과 의장단 총무위원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5.16 쿠데타가 벌어졌고 정권을 장악한 군부 세력은 민자통을 용공친북단체로 지목하였다. 오지호는 5.16 쿠데타 바로 다음날 검거되어 상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서대문 형무소에서 10개월 가량 옥살이를 하게 된다.

오지호는 1961년 5월 17일 검거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 원심에서 7년형을 받았지만, 재판과정에서 오지호는 줄곧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였고 결국 두 달 뒤인 3월 15일 항소심에서 '북괴활동에 고무 동조하는 행위에 대한 증거의 결여로 범죄의 증명이 없다'는 증거 불충분으로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밌는 것은 이때 배석했던 판사[10]가 나중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이회창.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행인지 불행인지 당시에 그는 아내와 함께 유럽여행중 이었다. 오지호의 성격상 다시 사회적 역할을 도맡았겠지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텔레비전 화면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나중에 귀국하여 절친한 제자들에게 '그때 너희는 무엇을 했느냐'며 질책 아닌 질책을 했다고 한다.

오지호는 마지막까지 민족주의 사상을 펼쳤다. 말년까지 '문화재 보존운동'과 '한자부흥운동'[11]에 전념하였던 점이 그것이다. 기금마련 전시회나 한글한자병행 교과서 제작 등,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오히려 더한 열정을 보였었다.

1982년 9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3개월 만인 1982년 12월 25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소재 장남 오승철(吳承哲)의 자택에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결국 생을 마감했다.# 1985년에는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 34점을 기증해 대규모 유작전을 열었고 1999년에는 작가가 집필한 글들을 모은 단행본 『팔레트 위의 철학(도서출판 죽림)』이 발간되었다. 광주광역시 동구에 그의 이름을 딴 지호로[12]가 있으며, 고향인 화순군 동복면에 오지호기념관이 있다.[13] 또한, 동복면 읍애리 ~ 칠정리 간의 도로명이 그의 이름을 딴 오지호로이기도 하다. 슬하에 장남 오승우, 차남 오승윤 화백이 부친과 같은 화가의 길을 걸었고, 여러 딸들이 있으며 두 아들과 손주들 모두 회화, 조각, 큐레이팅 등 미술계에 몸담았다.

1973년 제8회 대한민국문화훈장 모란장, 1977년 제22회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2002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작품[편집]



3.1. 처의 상[편집]



3.2. 남향집[편집]



4. 여담[편집]


  • 오지호는 피카소의 입체파와 추상미술에 대해 반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이를 통해 '추상(抽象)-구상(具象)의 논쟁'을 공론화시켰다. 나중에 오지호가 피카소를 미워한 이유를 살펴보면, 피카소는 '괴기한 형식적 변모'로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며, 민중의 생존이나 혁명을 위해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사실조차 없으면서, 피카소 스스로는 공산주의자라 말하며 그것을 자신의 명예와 부를 축적하는데 이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 감찰공파 28세 탁(鐸) 항렬. 족보명은 오수탁(吳壽鐸).[2] 인근의 천변리·칠정리와 함께 동복 오씨 집성촌이다.#[3] 생일 다음 날 사망했다.[4] 충주 지씨 지응현(池應鉉)의 딸이다.[5] 김재하(金載河)의 딸이다.[6] 1909년 6월 15일 임명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을 당한 직후인 10월 1일에도 그 직책이 그대로 유지되었다.#[7] 김주경의 후임으로 들어간 것.[8] 본명이 화가로서 좋아 보이지 않아서 바꿨다고 한다.[9] 민자통은 1960년 9월 결성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로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천도교, 유교회, 민주민족청년동맹, 통일민주청년동맹, 4월혁명학생연합 등 혁신계 사회단체의 전국적인 통일운동 연합체이다.[10] 재판장 김홍규, 배석 심판관 유원?·이회창·차영조, 법무사 강현채[11] 한자부흥운동이 민족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서 한자는 한글한자병행(국한문 혼용)을 말하는 것으로 외국의 알파벳에 대응해 그 동안 우리민족이 써 왔던 '한글한자병행'을 지키자는 의미에서 그 당시에는 민족주의 사상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12] 지산유원지에서 동명동을 잇는 도로.[13] 독상리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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