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키 유키오(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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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오자키 유키오(尾崎 行雄)
생년월일
1944년 9월 11일 ~ 2013년 6월 13일
국적
일본
출신지
오사카 부 이즈미오오츠 시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나니와 상고 2학년 중퇴
프로입단
1962년 자유계약
소속팀
도에이 플라이어즈(1962~1972)
닛타쿠홈 플라이어즈(1973)[1]

1. 개요
2. 현역 시절
3. 은퇴 이후
4.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야구선수. 1960년대를 풍미한 광속구 투수였으며[2]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강타자였던 나카니시 후토시의 뒤를 잇는 괴동[3]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장훈의 고등학교(나니와 상고), 팀(도에이) 직계 후배기도 하다.


2. 현역 시절[편집]


나니와 상고 2학년이던 1961년, 학교를 여름 고시엔 대회 우승으로 이끌며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했고, 이때부터 괴동으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이듬해 학교를 중퇴하고 계약금 2천 5백만엔[4] 에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 야구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불과 17세의 나이로 도에이의 주축 선발투수로 맹활약 했고 그해 오자키는 20승 9패, 평균자책 2.42 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신인왕을 획득했다. 또한 도에이가 창단 후 처음으로 한신 타이거즈를 물리치고 1962년 일본시리즈를 제패하는데 공을 세웠다.[5]

이듬해인 1963년은 2년생 징크스 탓이었는지 7승 5패에 그치며 부진했지만 1964~1966년 3년 연속 20승을 거두었고 1965년 27승[6]으로 다승왕을 차지하였으며, 1964년, 1965년에는 탈삼진 타이틀 홀더였다. 그러나 혹사의 영향으로 어깨가 고장나는 바람에 1967년 이후 깊은 부진에 빠졌고 1973년 까지 7시즌 동안 단 9승을 거두는 데 그쳤다. 그것도 1967년(6승), 1972년(3승)을 제외한 5시즌은 1승도 거두지 못했다(...).

1973년 6월, 경기 전 연습 도중 어지럼증과 식은땀 증세로 병원으로 실려가 이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고, 1개월 간 치료를 받고 퇴원했지만 결국 그 해 불과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프로통산 107승 83패, 1010 탈삼진, 평균자책 2.70의 성적을 남겼다.


3. 은퇴 이후[편집]


현역에서 물러난 오자키는 레스토랑 경영을 거쳐 스포츠 관계 회사에서 근무하며 소년 야구팀을 지도하였고, 마스터즈 리그의 도쿄 드림스 선수로도 참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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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마스터즈 리그 등판 때.

2013년 6월 13일, 지병인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68세.


4. 여담[편집]


그의 이름은 아버지가 동명의 정치인을 동경해서 붙인 이름으로 한자까지 동일했다.

원래는 왼손잡이인데 아버지의 지시로 초등학교 5학년때 우투로 전향했다고 한다. 다만, 악력이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에서 OB선수 목록에 그가 등장하는데, 직구가 159km이고 노비 4 & 무거운 공 등 직구 관련 특능은 사기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변화구는 좋지 못하다. 현역 선수가 아니지만 등록된 나이로는 20세이기 때문에 페넌트에서 활용할시 좋은 성장세를 보이기도 한다.

[1] 구단 매각으로 팀명이 바뀐 것일 뿐 둘 다 같은 팀이다.[2] 당시 비디오 영상으로 측정해 본 결과 구속이 무려 159km/h 까지 나온 적도 있다. 공이 워낙 빠르다 보니 그가 구사하던 구종은 태반이 직구였다. 변화구는 거의 던지지 않았으며 제구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3] 일본프로야구에서 아주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는 신인에게 붙여주는 별명으로, 1대와 2대였던 나카니시와 오자키에 이어 그 뒤를 호리우치 츠네오,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각각 3,4대 괴동으로 이름을 남겼다.[4] 1958년 거인에 입단한 나가시마 시게오의 계약금이 1천 8백만엔 이었다. 고교를 중퇴한 애송이 소년에겐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고 2016년 6월 현재 환율(100엔=1,090원)로 환산해도 약 2억 7천만원 이란 무시 못할 액수다. 그런데 한술 더떠 2천 5백만엔은 표면적인 금액이고 실제로는 6천만엔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 지금 환율로도 물경 6억 5천만원 이다. 하물며 1960년대 초반이었으니, 설사 2천 5백만엔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선 상상조차도 어려운 거액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도에이가 오자키에 걸었던 기대가 엄청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5] ...라고는 해도 정작 오자키는 1차전에 구원 투수로 등판했다가 연장 10회말 요시다 요시오에게 끝내기 2루타를 두들겨 맞고 패전을 기록한 이후 시리즈 내내 등판하지 못했다(...).[6] 23선발승으로 본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발 20승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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