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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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영근.jpg
성명
오영근(吳永根)
생몰
1889년 3월 9일 ~ 1951년 7월 14일
출생지
경상남도 합천군 상백면 대현리
사망지
경상남도 합천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오영근은 1889년 3월 9일 경상남도 합천군 상백면 대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삼가 장터에서 정연표(鄭演彪) 등과 함께 400명의 군중을 지휘해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일제 경찰의 수사를 피해 은거한 그는 3월 23일 정원규(鄭元圭)·진택현(陳宅賢)·공재규(孔在奎)·정치규(鄭致圭) 등과 함께 4천여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상백면사무소 일대를 행진하고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이후 삼가 장터에서 1만 3천 명의 군중이 집결한 뒤, 그는 오후 3시경 정금당 앞에서 김전의(金典醫), 정방철(鄭邦哲), 김달희(金達熙), 임종봉(林鍾鳳) 등과 함께 조국독립의 필요와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는 강연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마지막 연사인 임종봉이 등단하여 연설을 할 무렵, 강연장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 헌병이 임종봉에게 총격을 가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그들에게 달려들자 일본 관헌들은 경찰주재소로 도망하였다. 오후 5시 30분경 시위군중은 몽둥이와 낫을 들고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이때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제의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주동자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1919년 10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합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1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오영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