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요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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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성 로마 제국 페르디난트 1세의 막내딸이자 토스카나 대공비.
프랑스 왕국 앙리 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어머니이자 페르디난트 2세의 황후 엘레오노라 곤차가의 할머니이다.
2. 생애[편집]
1547년 1월 24일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15명의 자식들 중 하나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며칠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릴 때부터 여러 언니들과 같이 이탈리아 반도의 명문 가문으로 혼처가 정해졌다. 이탈리아에서의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요하나는 메디치 가문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1565년 12월 18일에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아들 프란체스코와 결혼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녀인 요하나는 토스카나에서 환대를 받았지만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요하나는 오만하고 차가운 성격이었으며, 결혼 후에도 계속 고향을 그리워했다. 반면 프란체스코는 활발한 성격에 아내와 공통의 관심사가 없었다. 요하나는 남편의 냉대를 받으면서 향수병에 시달렸다.
1574년 4월 21일에 남편이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의 직위를 받으면서 요하나는 대공비가 되었다. 그러나 요하나의 입지는 위태로웠는데, 그때까지 낳은 6명의 자식들이 모두 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중에서 유아기를 넘긴 아이는 3명 뿐이었다.
프란체스코 1세는 사랑이 없고 후계자도 낳지 못하는 아내를 방치하고 정부 비앙카 카펠로에게 푹 빠져지냈다. 프란체스코 1세는 대놓고 요하나 앞에서 비앙카 카펠로와의 다정한 모습을 보이며 요하나가 분노하게 만들었다. 요하나는 오빠 막시밀리안 2세에게 불평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막시밀리안 2세는 곧장 토스카나에 사절단을 파견해 대공저에서 요하나가 받는 대우에 대한 유감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1576년에 비앙카 카펠로가 아들 안토니오 드 메디치를 낳으면서 요하나는 큰 타격을 입었다.
비앙카 카펠로가 아들을 낳은 다음해인 1577년에 요하나는 드디어 아들 필리포를 낳았다. 그다음해에 요하나는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삭의 몸으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아이를 사산하고 숨을 거두었다. 요하나가 죽고 프란체스코 1세가 곧바로 비앙카 카펠로와 결혼하자 사람들은 프란체스코 1세나 비앙카 카펠로가 요하나를 죽인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그러나 조사 결과 요하나는 아이를 낳다 숨을 거둔 것으로 확인되었다.
3. 가족 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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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브레히트 2세의 차녀이자 지기스문트의 외손녀다.[2] 만토바 공작 프란체스코 4세, 만토바 공작 페르디난도, 만토바 공작 빈첸초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엘레오노라 등[3] 루이 13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비 이사벨, 사보이아 공작부인 크리스티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