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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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파일:오스카 와일드.jpg
본명
오스카 핑걸 오플래허티 윌스 와일드[1]
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국적
[[영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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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2]
출신
[[아일랜드|
아일랜드
display: none; display: 아일랜드"
행정구
]]

출생
1854년 10월 16일
영국 아일랜드 더블린 웨스트랜드 로우
사망
1900년 11월 30일 (향년 46세)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데프레 알자스 호텔[3]
직업
작가, 시인, 극작가
서명
파일:Oscar_Wilde_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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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페르 라셰즈 묘지
신장
183cm[1]
종교
가톨릭
학력
포토라 왕립학교 (졸업) (1864년 – 1871년)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고전문학) (1871년 – 1874년)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2]
(문학 / 학사) (1874년 – 1878년)
사조
유미주의
부모
아버지 윌리엄 와일드 (1815~1876)
어머니 제인 와일드 (1821~1896)
배우자
콘스턴스 로이드 (1884년 결혼)
자녀
장남 시릴 홀랜드 (1885~1915)
차남 비비언 홀랜드 (1886~1967)


1. 개요
2. 인생
2.1. 퀸즈베리 사건
2.2. 수감 생활
2.3. 출옥 후
3. 어록 제조기
4. 작품
4.1. 소설
4.2. 동화
4.3. 시
4.4. 희곡
4.5. 수필
5. 관련 매체
5.1. 영화
5.2. 음악
5.3. 뮤지컬
6. 여담




1. 개요[편집]


"그의 인생은 한 편의 그리스 비극이었고, 그 자신이 그리스 비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친구 프랭크 해리스가 오스카의 인생을 평하면서 남긴 말 中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빅토리아 시대 가장 성공한 극작가로 뽑히는 인물이다. 걸출한 글솜씨에 183cm에 달하는 기럭지, 준수한 외모를 가진 일명 엄친아였으며 자신감에 찬 문학인 이미지의 전형 같은 인물. 그래서인지 자신을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평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인 유미주의를 지향했으며 작품들의 성향도 그러하다. 영화로도 제작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살로메> 등이 그러하며 그가 창작한 유명한 동화 '행복한 왕자'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외에도 시, 희곡도 썼다. 형식과 구조를 중요시하며 특유의 위트있고 날카롭게 비꼬는 언어유희와 비유, 그리고 모순과 쾌락으로 점철된 인생 자체가 그의 매력이다.

2. 인생[편집]


오스카 와일드는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안과의사였고, 어머니는 성공한 작가이자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부친인 윌리엄 와일드는 여왕의 주치의로 임명받은 바 있었으며 센서스 작성에 공헌해 작위도 수여받은 인물이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9살 때까지 가정 교육만 받았다. 그러다가 1864년에 포토라 왕립학교에 진학해 1871년에 졸업했다. 이후 1874년까지는 더블린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평소 성격이 아주 게을렀으나, 고전학 성적만큼은 아주 좋았다. 1874년에 오스카는 옥스퍼드 대학의 모들린 칼리지에 입학해 고대 언어를 배웠다.

한동안 미술평론가로 지내던 와일드는 런던파리 등지에서 유미주의에 중점을 두는 미학 강연을 시작했다. 그의 모피 코트, 네로 스타일의 머리, 문학적인 달변은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상류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성공은 뉴욕 진출로 이어졌다.

1881년에 낸 첫 시집을 통해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성공한 와일드는 1887년에는 소설가로 데뷔해 『캔터빌의 유령』과 『아서 새빌 경의 범죄』를 출판했다. 1890년에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1891년 살로메를 쓰는 등 걸작을 거듭해서 내놓았다. 이즈음에 런던 사교계는 오스카를 모시는 것을 영예로 여겼다.

2.1. 퀸즈베리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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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더글러스(좌), 오스카 와일드(우)
부와 명성을 모두 손에 쥔 잘나가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몰락시킨 스캔들이다. 와일드는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도 둘이 있었지만, 동성애자이기도 했다.[4] 와일드는 1891년 라이어널 존슨[5]의 소개로 퀸즈베리 후작의 막내아들(삼남)인 16세 연하의 앨프리드 더글러스[6]를 만나게 된다.

잘 나가던 작가와 철없는 귀족 대학생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7] 더글러스는 와일드에게 거리의 소년을 돈 주고 사는, 일종의 매춘을 소개하기도 했다. 다혈질에 경박한 더글러스는 둘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표현하고 다녔고, 게다가 아버지인 9대 퀸즈베리 후작 존 숄토 더글라스와 사이가 안 좋았던 더글러스는, 와일드와의 연애를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수단쯤으로 여긴 듯 했다. 이즈음에 둘 사이에 다리를 놔준 라이어널 존슨은 둘에게 절교를 선언하면서, 자기 사촌인 더글러스의 영혼을 부숴버린 자라며 와일드를 디스하는 시를 썼다.

둘의 관계는 평범한 연인 사이라고 보기 힘들다. 일방적인 더글러스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히스테릭한 성격[8]에 와일드는 천천히 지쳐갔다. 더글러스는 와일드에게 수시로 "호텔에 데려가 달라", "친구를 만날 돈이 필요하다", "하인을 고용해달라"는 식의 요청을 하며 와일드의 돈을 소비했다. 오스카가 더글러스로부터 옮은 독감에 시달릴 때, '당신은 그 동안 물론 내 돈으로 지내면서 마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그랜드 호텔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사실상 돈이 필요할 때만 내 방에 나타났지.'라고 더글러스를 힐난한 바 있다. 후술할 그의 편지 '심연으로부터'에 따르면 와일드와 더글러스는 3주에 한번 꼴로 이별하고 더글러스의 애원으로 다시 재결합하는 일을 반복하는 시기도 있었으며, 끝내 와일드는 해외로 도피해 그와 연락을 단절하는 것으로 더글러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와일드는 더글러스의 어머니에게 더글러스를 다시는 마주치지 않도록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금방 무색해졌다. 때마침 더글러스가의 장남이 사고로 죽게 되고, 이에 연민을 느낀 와일드가 다시 더글러스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들의 관계는 이어졌다. 물론 이후로도 더글러스의 속물 근성은 그대로였다.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은 아들과 아들 애인의 이러한 행각에 수치심을 느끼며 펄펄 뛰었고, 길거리에서 자기 아들을 때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퀸즈베리 후작은 오스카 와일드를 수많은 소년들을 추행했다는 혐의로 고발했고 와일드 역시 명예훼손죄로 퀸즈베리 후작을 고소하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특기인 화려한 달변으로 유리하게 재판을 이끌어 나갔으나,[9] 교차신문 등에서의 실수들로 인하여 와일드에게 불리한 상황들이 연출되었다. 일례로, 검사가 와일드에게 "더글러스의 어린 하인에게 키스한 적 있냐"고 묻자 와일드는 거들먹거리며 "그 소년은 너무나 못생겼기에 키스할 생각이 안 들었다"고 말했다. 검사가 이 답변을 듣고 왜 외모를 언급했는지 추궁하자 와일드는 처음으로 법정에서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결국 자신이 신중하게 발언하지 못하였음을 시인하였다. 이후, 검사 측에서 "와일드와 성관계를 하였다는 남성들을 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고 하자, 와일드와 그의 변호사들은 "퀸즈버리에 대한 소송을 취하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여 고소를 취하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와일드가 퀸즈버리의 소송비용까지 모두 부담하게 되었고, 결국 와일드는 이로 인해 파산하게 된다. 참고로 퀸즈베리 후작은 1900년 1월, 와일드가 죽기 10개월 전에 55살로 죽었다.

여담으로 와일드가 죽고 나서 1902년에 알프레드 더글러스는 결혼하는데, 아내인 올리브 쿠스탄스[10] 또한 양성애자 시인이었다. 1902년 외아들[11]이 태어났을 때 아내의 여자친구 나탈리 클리포드 바니(Natalie Clifford Barney)가 대모가 되었다. 1920년대 말엔 부부 관계가 완전히 깨어져 별거 상태였으나 공식적인 이혼은 하지 않은 채로 42년 동안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1944년 올리브가 먼저 죽고, 1년 뒤에 알프레드도 만 74세로 죽었다.

2.2. 수감 생활[편집]


위의 소송 직후 와일드는 동성애를 하였다는 죄로 기소당하게 되고(Regina v. Wilde), 이로 인해 아래에 기술된 형을 선고받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2년 동안 교도소[12]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더글러스는 와일드가 보낸 편지를 잡지사에 기고하고자 시도했다.[13][14]

이러한 절망 속에 와일드는 교도소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귀를 다치게 된 것으로도 모자라, 아내 콘스턴스에게 별거를 선언당하고 아들인 비비언과 시릴도 평생 볼 수 없게 되었다.[15] 와일드는 가정에 대한 애정이 있었으며 특히 자신의 아이들을 '나의 빛나는 보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가정파탄은 와일드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때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은 것이 "옥중기", 혹은 "심연으로부터"란 제목으로 출판된다. "옥중기"와 "심연으로부터"는 와일드가 더글러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는 맥락이 같으나 차이가 있다. 와일드는 재산 관리인인 로버트 로스[16]에게 부탁해 한장의 타이핑 사본을 남긴 후 원본 편지는 더글러스에게 전달해주길 요청했다. 하지만 로버트는 더글러스에게 사본편지를 전달했으며, 동시에 수취인이 더글러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을 모두 삭제해 '옥중기'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다. 이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 출간되었으며, 편지의 전문이 훼손되지 않은 판본이 '심연으로부터'다. 이 책은 앨프리드 더글러스에 대한 원망과 자책, 참회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2.3. 출옥 후[편집]


레딩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는 그날 바로 프랑스로 건너갔는데[17], 이곳에서 그는 아내가 보내오는 1주당 3파운드라는 매우 적은 돈과 유지되던 인맥을 통한 간단한 일을 통한 아주 적은 수입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술을 사는 데 사용하였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피폐해져 폐인같은 삶을 이어갔다. 치통에 시달렸지만 치과에 갈 돈조차 없었고, 결국 빌붙고 구걸을 하며 근근이 연명했다. 한번은 런던에서 알고 지내던 오페라 여가수를 길에서 만났는데 그는 길을 가로막고 서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요. 지금부터 지독히도 끔찍한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들어보오. 돈 좀 주시오"


이후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것은 딱 한번, <레딩 감옥의 노래>를 발표했을 때였다. 와일드는 이 시에서 연인을 살해하고 교수형에 처해진 병사의 이야기를 썼는데,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삶과 연계해서 절실한 글을 남겼다. 1900년, 그를 괴롭혀오던 귓병에 대한 수술을 받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뇌수막염에 걸려 1900년 11월 30일 사망한다.

한 친구가 임종을 앞둔 그에게 마지막 샴페인 잔을 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내가 살아온 과정처럼 분에 넘치게 죽어가네"


아내인 콘스턴스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와일드는 형기를 마치고 아이들을 볼 권리를 얻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무척 우울해 했다고 한다. 와일드가 프랑스로 갔을 때 그를 한 레스토랑에서 본 이의 증언에 따르면, 한 아이가 와일드에게 "아저씨는 왜 혼자인가요?"라고 묻자, "나도 너 같은 아이들이 있는데, 지금은 아주 멀리 있어서 볼 수 없단다" 라며 울먹이며 말했다고 한다.

큰아들인 시릴 홀랜드는 1차 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프랑스 땅에 묻혔다. (물론 지역은 다르다) 작은아들인 비비언 홀랜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BBC 민간 통역가로 활약하였다. 비비언 홀랜드의 외동아들이자 오스카 와일드의 손자인 멀린 홀랜드는 오스카 와일드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하다. 증손자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할 때 증조할아버지가 썼던 방을 배정받았다고 한다.

와일드의 작품은 독일에서 다시 발굴되어 재평가 받았다. 1905년에는 런던에서 <살로메>가 초연되었고, 3년 뒤에는 전집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Policing and Crime Act 2017에 의해 동성애로 처벌된 사람들에 대한 자동사면의 혜택을 받아 사후 사면이 되었다.


3. 어록 제조기[편집]


오스카 와일드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시니컬한 어록 제조기라고 봐도 된다. 더구나 자뻑기질까지 있다보니, 그의 어록엔 외모지상주의, 예술에 대한 그의 심미적 가치[18], 자기모순도 충만하다.

  • 젊을 때는 인생에서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알겠다.[19]

  • 종교에서 진리는 그저 살아남은 견해를 지칭한다.

  • 부유한 독신주의자에게는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 남보다 행복하다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에.

  • 결혼이란 필요에 쫓겨서 서로를 속이는 예술이다.

  • 모든 여자들은 그들의 어머니를 닮아간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어떤 남자들도 그들의 어머니를 닮아가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 결혼생활에서, 셋이면 유지할 수 있지만, 둘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20]

  • 낭만적인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 2가지 있다. 하나는 유머 감각이 부족한 남자이며, 다른 하나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여자이다.

  • 남자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둘 사이에는 열정과 증오 그리고 숭배와 사랑이 있을 뿐, 우정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 사랑보다는 우정이 훨씬 비극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정이 더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 미인을 아내로 둔 남자는 범죄자이다.

  • 청춘은 하나의 예술이다.

  • 여자가 실수조차 매력 있게 보일 수 없다면, 그런 여자는 암컷일 뿐이다.[21]

  • 아름다운 여자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조건 사랑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여자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남자를 소개해주는 것이다.

  •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하느님이 남자를 창조하실 때 너무 능력을 과신하신 것은 아닌지.

  • 앞에서 비판해 주는 친구가 참된 친구이다. (True friends stab you in the front). 브링 미 더 호라이즌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 문학과 언론의 차이는 언론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문학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 문학과 연극을 구분해주는 유일한 기준은 공연 입장권일 뿐이다.

  • 예술을 혐오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예술을 무작정 혐오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술을 합리적으로 좋아하려는 것이다.

  • 세상에서 진지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술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결코 진지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 부화하기도 전에 병아리를 세는 사람은 현명하다. 병아리는 제멋대로 뛰어다녀 정확히 셀 수 없기 때문이다.[22]

  • 누구나 적을 고를 때는 무척 신중해야 한다.

  • 인생에는 2가지 비극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는 것이다.

  • 웃음은 삶을 향한 원초적 반응이다. 이제는 예술가와 범죄자에게만 남아 있는 것이지만.

  • 정말로 매력적인 사람은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완벽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23]

  • 모두가 왕으로 태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왕처럼 유형지에서 죽어간다.

  • 대중은 무엇이나 알고 싶어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 행복한 기분일 때에는 언제라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해서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다.

  • 도덕심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할 태도일 뿐이다.

  • 사회는 종종 범죄자를 용서해 준다. 그러나 꿈꾸는 사람에게는 전혀 용서가 없다.

  • 진정한 예술가는 대중의 주목을 전혀 받지 않는다.

  • 천재는 타고난 것이지 노력의 대가가 아니다.

  • 평범한 사람은 놀랍도록 관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천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용서한다.

  • 그는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적도 없다.

  • 요즘 유명한 사람에게는 여러 제자가 붙어다닌다. 그러나 그의 전기를 쓰게 될 사람은 언제나 유다와 같은 인물이다.

  • 내 삶에 대해 알고 싶은가? 나는 내 천재성을 삶에 투영했으며, 내 글에는 내 재능을 투영했을 뿐이다.

  • 나는 천부적 재능만을 가지고 있다.[24]

  • 나는 유혹 이외의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다.

  •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 남자는 어떤 여자와도 잘 지낼 수 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한.

  • 내 자신의 일은 항상 스스로에게 죽도록 지겨운 것이어서, 남의 일을 더 선호한다.(My own business always bores me to death; I prefer other people's.)

  • 만약 아일랜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국인들은 아일랜드를 만들어냈을 것.[25]


  •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다면, 그들을 웃겨라. 안 그러면 당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If you want to tell people the truth, make them laugh, otherwise they'll kill you.)

  •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보고 있다.

  • 냉소주의자(Cynic)란 무엇인가? 만물의 가치를 알며, 그 가치가 공허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한다, 그게 전부다.

  • 경험이란 우리가 실수에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다.[26]

  • 몽상가는 오로지 달빛으로만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남은 세계를 보기 전에 여명을 보는 것이 그가 가진 형벌이다.(A dreamer is one who can only find his way by moonlight, and his punishment is that he sees the dawn before the rest of the world.)[27]

  •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나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딱 한가지 있다. 그것은 내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There is only one thing in the world worse than being talked about, and that is not being talked about.) 악플보다 비참한 무플

  • 아이들은 부모를 사랑하며 삶을 시작하고, 자라면서 평가하며, 가끔은 용서하기도 한다.[28][29]

  • 블루 차이나(청자기)의 수준에 맞추어 사는 것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진다.[30]

  • 우리는 각자 자신의 악마이며,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31]

4. 작품[편집]



4.1. 소설[편집]


제목
발간년도
W. H. 씨의 초상
The Portrait of Mr. W. H.
1889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32]
The Picture of Dorian Gray
1890년
아서 새빌 경의 범죄와 다른 소설들
Lord Arthur Savile's Crime and Other Stories
1891년
모범적인 백만장자 (The Model Millionaire)
비밀 없는 스핑크스 (The Sphinx Without a Secret)
아서 새빌 경의 범죄 (Lord Arthur Savile's Crime)
캔터빌의 유령 (The Canterville Ghost)


4.2. 동화[편집]


제목
발간년도
행복한 왕자와 다른 이야기들
The Happy Prince and Other Tales.
1888년
나이팅게일과 장미(The Nightingale and the Rose)
유별난 로켓 불꽃(The Remarkable Rocket)
이기적인 거인(The Selfish Giant)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
헌신적인 친구(The Devoted Friend)
석류나무의 집
A House of Pomegranates
1891년
어부와 그의 영혼 (The Fisherman and his Soul)
왕녀의 생일 (The Birthday of the Infanta)
젊은 왕 (The Young King)
별 아이 (The Star-child)


4.3. 시[편집]


제목
발간년도
라벤나
Ravenna
1878년
시집[33]
Poems
1881년
산문시
Poems in Prose
1894년
스핑크스
The Sphinx
레딩 감옥의 노래[34]
The Ballad of Reading Gaol
1898년


4.4. 희곡[편집]


제목
발간년도
베라, 혹은 허무주의자
Vera; or, The Nihilists
1880년
파두아의 공작부인
The Duchess of Padua
1883년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
1892년
보잘것 없는 여인
A Woman of No Importance
1893년
살로메
Salomé
성스러운 매춘부
La Sainte Courtisane
1894년
이상적인 남편
An Ideal Husband
1895년
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4.5. 수필[편집]


제목
발간년도
거짓의 쇠락
The Decay of Lying
1889년
펜, 연필, 그리고 독
Pen, Pencil and Poison
가면의 진실
The Truth of Masks
1891년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
The Soul of Man under Socialism
예술가로서의 비평가
The Critic as Artist
심연으로부터
De Profundis[35]
1905년[36]


5. 관련 매체[편집]



5.1. 영화[편집]


  •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 (The Trials Of Oscar Wilde, 1960)[37]
  • 와일드 (Wilde, 1997)[38]
  • 더 해피 프린스 (The Happy Prince, 2018) [39]

5.2. 음악[편집]



  • U2 - "The Ocean"


5.3. 뮤지컬[편집]



6. 여담[편집]


  • 오랫동안 와일드는 순수한 유미주의를 상징하는 작가로 여겨졌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그의 예술관과 미학에서 도덕성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주목되었다. (스포일러 주의) 이는 그의 대표작이면서 유미주의적 예술관에 대한 강력한 변론으로 간주되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결말부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가 자기중심적이고 탐미적인 예술가로 등장하여 작품 전반에 걸쳐 와일드의 유미주의관을 살포하는 역할을 맡긴 하나, 결말에 들어서는 결국 그 역시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와일드가 다른 가치들과의 상호작용 없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변호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쓴 것치고는 결말이 이중적이라는 것이다.[40]

  • 모리세이가 거의 숭배할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 백괴사전에서는 오스카 와일드를 '백괴사전의 시조'라고 칭한다. 보통 무심한듯 시크함을 숭배한다. 사실 이는 언사이클로피디아 계열 사이트 공통. 하여튼 언사이클로피디아의 시조다. 근데 백괴사전 쪽은 아무래도 미국식 유머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서인지 오스카 와일드의 비중은 적은 편이다. 미국판 언사이클로피디아에 들어가보면 오스카 와일드 인용문(?)을 한가득 볼 수 있다.


  • 와일드가 사회주의자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순히 호감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하에서의 인간의 정신>#>을 저술했을 만큼 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사유재산제가 폐지되면 개인은 맹목적으로 노동하면서 부의 축적에만 골몰할 필요가 없어지므로 창조성을 발휘할 삶의 여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 와일드의 견해였다. 즉, 사회주의를 개인주의를 위한 건널목으로 해석한 것이다. 동시에 사회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다면 암울한 폭정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도 했다. 그의 작품에 나온 "사회주의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도 많은 저녁시간을 앗아간다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잘못된 방향의 사회주의가 가질 한계 역시 인정한 셈이다. 실제로 <행복한 왕자>가 당대 영국의 노동환경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담고 있는 등, 와일드의 작품들은 직접 사회주의를 설파하지는 않더라도 간접적인 영향은 곧잘 드러낸다.

  • 사회적으로도 급진적인 인사였다. 엄숙주의와 성적 억압이 만연하면서도 위선이 팽배해 있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관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동성애 행위를 변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헤이마켓 사건의 판결에 부당함을 느낀 조지 버나드 쇼가 구명운동을 펼칠 때 당대의 문인 중에서 유일하게 서명운동에 응했다.

  • 그의 연인 더글러스의 후일담. 더글러스도 후에 와일드처럼 프랑스로 건너갔으나, 양가의 재정지원을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에 결국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후의 인생 역시 순탄치 못했다. 결혼한 아내도 나중에 아들과 함께 더글러스를 떠났고 하나뿐인 아들 역시 1964년에 죽을 때까지 분열 정동정신병[41]으로 인해 정신병원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다. 또 윈스턴 처칠을 비방한 혐의로 감옥에 6개월간 투옥되었다. 이때 수감하면서 와일드의 '심연속에서'을 연상시키는 '높은곳에서'(In Eexcelsis)라는 시집을 쓴다. 더글러스는 1945년 74세의 나이로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는 1935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한 어머니와 함께 3월 23일 크롤리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 영국에서 동성애 행위가 불법이던 시기 처벌을 받은 다른 유명인사로는 앨런 튜링이 있다. 튜링과 와일드 모두 더 이상 동성애가 범죄로 여겨지지 않게 된 이후에 사후 사면을 받았다.

[1] 중간의 이름들은 큰 의미가 없다. 와일드 자신도 그저 Oscar Wilde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다.[2] 아일랜드 출신이나 19세기 당시 아일랜드는 국가가 아니었고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라 하여 영국의 일부였다.[3] 오스카 와일드는 이곳에서 방을 두 개나 빌려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유는 쉬는 곳과 글 쓰는 곳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 호텔은 현재 L'hotel'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호텔 입구에는 "오스카 와일드가 죽은 장소"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숨을 거두었던 장소로 전해지는 1층 방은 현재 호텔 응접실로 바뀌었으며, 대신 오스카 와일드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여 헌정한 방이 따로 존재한다.[4] 양성애자라는 말도 있는데, "와일드는 아내와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에 동성애자였다는 것은 신빙성이 낮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성애자이건 동성애자이건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어디끼지나 사회적 체면 때문에 위장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았을 가능성이 크다. 인생 후반부에서 와일드는 어느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남자들과만 어울려 지냈었다.[5] 영국시인으로, 이 사람도 동성애자였다. 동성애 성향을 억누르느라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그것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보드게임 워해머 40K다크 엔젤의 프라이마크 라이온 엘 존슨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6] Lord Alfred Bruce Douglas. 일명 보시(Bosie). 1870 - 1945.[7] 애정표현 관련 일화를 하나 꼽자면, 와일드는 1893년 1월, 옥스퍼드생이던 더글라스를 가리켜 '아폴론이 미치도록 사랑했던 히아킨토스가 바로 그리스 시대의 당신이었음을 난 알고 있소'라고 했다고 한다.[8] <심연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옥중편지에서 와일드는 그에 대해 '절대 혼자 있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시간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성격, 지적이고 일관된 집중력의 부족, 불행한 사고로 인해 지적인 문제에서 옥스퍼드적인 기질을 갖추지 못하게 된 사람'이라고 악담을 퍼붓는다.[9] 재판 당시의 와일드는 불리한 답변을 유머로 받아친다거나, 동성애 문화에 대해서도 서양 문화의 토대가 된 고대 그리스의 유산임을 주장하며 상대편을 압박하였다.[10] Olive Custance. 1874 - 1944.[11] Raymond Wilfred Sholto Douglas.[12] 펜튼빌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원즈워스로 이감.[13] "당신이 남아있는 내 편지들 중에서 고른 것들을 출간할 것을 진지하게 제안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어. 그게 어떤 편지들이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내가 처음 들은 당신의 소식이었고, 난 몹시 불쾌했지." -심연으로부터, 108p.[14] "'오스카 와일드씨의 소송에 관하여'라는 기고문을 발표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내 편지 몇 편과 발췌문을 싣는 것을 허락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었지. 어떤 편지들을? 내가 홀러웨이 구치소에서 당신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당신에게는 이 세상 무엇보다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것이었어야 할 그 편지들을!" -심연으로부터, 111p.[15] 아예 아이들 성까지 홀랜드로 갈아 버렸다. 다만 가정이 파탄난 상황에서 법적인 이혼만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이 시기 낙상으로 얻은 척추 질환 때문에, 아내인 콘스턴스가 오스카 와일드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16] 와일드의 첫 동성애인. 더글라스와 연애하기 전에 만났다.[17] 교도소장이 특혜를 주어 출소한 그에게 기자들이 달려들어 괴롭히지 않도록 만기 출소하기 몇 시간 전에 그를 런던으로 빼돌려 친구들의 도움을 받게 했다.[18] 여기서 수험생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19]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대화의 일부를 각색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문[20] 배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원문은 In married life, three is company, and two is none. 그리고 이것은 Two's company, Threes's none이라는 속담의 변형이다. 이는 "둘은 마음에 맞을 수 있어도, 셋이 되면 갈라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아이가 있어야 결혼생활이 유지될 수 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말은 원래 와일드의 희곡 <진지함의 중요성>에 나오는 대사로, 그 실제 내용은 "적당히 외도해서 정부를 두면 결혼생활이 유지되지만, 그런 게 없으면 결혼생활이 깨진다"라는 의미이다.(…) 즉, 결혼생활의 신성함이나 완전성에 대한 비꼼을 담고 있다. 아내와 자식을 두고도 남자 애인을 만들었던 와일드에게 딱 맞는 명언이다. 물론 말년을 생각하면 정말 맞는 말인지는 의문. 본인은 본인의 삶에 만족하였는지, "나는 분에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며 죽긴 했다.[21] '아서 새빌 경의 범죄' 中[22] 영어권 속담, '병아리가 부화하기도 전에 의 수를 세지 마라 (don't count your chickens before they've hatched)'란 격언을 뒤튼 것으로, 원래 속담의 의미는 우리나라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와 정확하게 일치한다.[23]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中[24] 미국을 방문했을 때, 세관원이 신고할 것이 있느냐고 물은 질문에 대해서 답한 것.[25] 영국인은 자신들의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 그에 대한 비교 대상의 타자가 필요했는데, 그 대상으로 아일랜드가 설정됐다는 뜻.[26]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中[27] 이를 번역할 때, 모호한 부분이 존재한다. 'before the rest of the world'를 '남은 세계를 보기 전'으로 번역할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이보다 먼저'로 해석할 지는 흥미로운 논쟁거리이다.[28] (Children begin by loving their parents; after a time they judge them; rarely, if ever, do they forgive them.).[29] 철권 7 TGS 트레일러와 엔딩에 이 문구가 나온다. 본 게임에서는 "아이들은 처음에는 부모를 사랑하지만 자라면서 평가하게 되며 부모를 용서하는 경우는 드물다"로 번역되었다. 카즈야의 행적 상 "가끔"이란 단어와는 멀어서 그런 듯.[30] 옥스퍼드 시절,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와 유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백합을 잔뜩 꽂은 블루 차이나로 자신의 기숙사 방을 장식하고는 한 말.[31] "We are each our own devil, and we make this world our hell." 이 말은 "We create our own demons."로 변형되어 영화 아이언맨 3 도입부에서 토니 스타크가 말하기도 한다.[32] 유일한 장편 소설이다.[33] 오스카 와일드의 첫 출판작.[34] 오스카 와일드의 유작.[35] 시편 130편의 모두(De profundis clamavi ad te, Domine: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이 어구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 <수정 마개>에서도 후반부에 등장한다.[36] 쓰인 연도는 1897년, 최초로 출판된 연도는 1905년이다.[37] 피터 핀치, 제임스 메이슨 등이 출연한다. 퀸즈베리 사건을 다루는 영화이다.[38] 여담으로, 오스카 와일드 역의 스티븐 프라이와 보시 역의 주드 로는 2011년 영화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에서 각각 마이크로프트 홈즈존 왓슨로 다시 만나게 된다.[39]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진지함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에서(2002) 앨저넌 몬클리프와 잭 워딩 역으로 주연했던 두 배우 루퍼트 에버릿(감독/각본/오스카 와일드 역)과 콜린 퍼스(공동 프로듀서/레지 터너 역)가 다시 만났다. 보시 역은 콜린 모건이 맡았으며, 오스카 와일드 삶의 마지막 시간들을 그려낸다. [40] 정정호 and 이종찬. (2009).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 재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타난 미적 ‘감각’과 미의 ‘공적 효용성’의 문제. 세계문학비교연구, 29, 203-227. 참조.[41] 양극성 기분 장애와 정신 분열증이 동시에 드러나는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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