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로버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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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버트슨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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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크라멘토 킹스 영구결번
밀워키 벅스 영구결번
No. 14
No. 1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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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버트슨
헌액 연도
1980년



파일:오스카로버트슨.jpg

새크라멘토 킹스 No. 14
밀워키 벅스 No. 1
오스카 팔머 로버트슨
Oscar Palmer Robertson

출생
1938년 11월 24일 (85세)
테네시주 샬럿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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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신시내티 대학교
신장
196cm (6' 5")
체중
100kg (220 lbs)
포지션
포인트 가드 / 슈팅 가드
드래프트
1960 Territorial 드래프트
신시내티 로열스 지명

소속 팀
신시내티 로열스 (1960~1970)
밀워키 벅스 (1970~1974)
등번호
14번 - 신시내티
1번 - 밀워키

1. 개요
2. 일생
2.1. 선수 시절
2.2. 은퇴 후
3. 플레이 스타일
4. 수상 내역



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으로, 현역 선수 시절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였다. 별명은 포지션 대비 압도적인 피지컬과 어울리는 빅 오(The Big O)[1]. 러셀 웨스트브룩, 매직 존슨과 함께 트리플 더블러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선수이자[2],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모두에 능했던 원조 올라운더 였다.


2. 일생[편집]



2.1. 선수 시절[편집]


로버트슨은 테네시 주 샬럿에서 태어났으며, 18개월 후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사가 어려서부터 야구보다 농구에 흥미를 보였다. 당시 그가 살던 인디애나 주는 '북부의 남부'라 불릴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했던 터라[3] 흑인들만 다니던 크리스퍼스 애틱스 고등학교에 입학 후 농구부에 들어가 레이 크로(1915~2003)[4] 감독에게 농구 수업을 받았는데, 크로 감독은 농구 기술만이 아니라 건전한 인격 형성도 같이 가르쳤다. 1954년 주 대회 준결승 때 백인 학교인 밀란 고등학교[5]에게 65-52로 졌으나, 1955 및 1956년에는 주 대회 연속 우승에 기여하여 1956년 '인디애나 미스터 배스킷볼'에 뽑혔다.(참고 자료) 그가 활동했던 농구부에 관한 얘기는 필립 후즈의 실화소설 <소년은 멈추지 않는다(2018)>[6]에서 다뤄졌다.

이후 신시내티 대학교에 입학해서 조지 스미스(1912~1996) 감독[7]의 가르침을 받으며 활약했는데, 재학 동안 1959 및 1960년 NCAA 전국대회 3위를 연속으로 찍으며 1958~1960년 올 미주리 밸리 컨퍼런스(MVC) 퍼스트 팀 및 올 아메리칸 3년 연속 선출과 <스포팅 뉴스> 및 UPI 올해의 선수상 3년 연속 수상 등의 영예를 안았다. 1959 팬 아메리칸 게임 때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처음 선발되기도 했으며, 1960년 로마 올림픽 때 피트 뉴웰(1915~2008) 감독에 의해 대표팀 주전으로 발탁되어 금메달을 획득했다.

대학 졸업 후 당연히 모든 구단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그 해 드래프트 1라운드 테리토리얼 픽으로 신시내티 로열즈에 입단했다.

로열스에 입단한 그는 무지막지한 경기력을 선보였는데 커리어 초반 5년 평균 자체가 트리플 더블이었다. 이게 대단한 것은, 당시에는 트리플 더블이란 용어 자체가 없었다. 트리플 더블은 1980년대 레이커스의 슈퍼스타 매직 존슨의 다재다능함을 칭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기 때문이며,[8] 이전 선수들의 트리플 더블 기록은 기록을 다시 검토해서 집계한 것이다. 아무래도 트리플 더블에 근접하면 동료나 감독들의 은근한 푸쉬도 있고, 본인도 이를 의식하기 마련인데, 이런 것 없이 자연스럽게 트리플 더블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경기 페이스가 현재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로버트슨이 시즌 평균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던 1961-62 시즌의 리그 평균 페이스가 126.2, 시즌 MVP를 수상했던 1963-64 시즌의 리그 평균 페이스가 116.8이다. 조던의 불스가 72승 10패를 기록했던 1995-96 시즌의 수치가 91.8이고 2015-16 시즌의 페이스가 95.8임을 생각하면, 당시의 경기가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어 비교적 많은 포제션을 가져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로버트슨이 뛰던 시절은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선수 관리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인 데다가 경기 환경 역시 상당히 열악했음에도[9] 거의 전 경기에서 평균 40분 이상씩 출장하며 이와 같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폄하받을 기록은 아니다.

1961-62 시즌에는 평균 30.8득점, 12.5리바운드, 11.4어시스트로 시즌 평균 트리플더블을 기록, 이후 63-64시즌에는 10년간 계속되던 빌 러셀윌트 체임벌린의 독식 구도를 깨고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1970년에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이 때 감독인 밥 쿠지가 오스카를 질투해서 그랬다는 설이 파다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카는 리그를 제소하기도 했을 정도.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오스카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거기서 다름 아닌 루 앨신더를 만나게 된 것. 결국 이 시즌 우승반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벅스에서 1974년까지 뛰었고 1974년 앨신더와 함께 또다시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존 하블리첵이 맹활약한 보스턴 셀틱스에게 4대 3으로 석패하였고, 이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통산 기록은 26,710득점(평균 25.7득점)[10], 7,804리바운드(평균 7.5), 9,887어시스트(평균 9.5)[11] 통산 트리플 더블이 181회로 역대 2위.[12]

밥 쿠지와 톰 하인슨에 이은 3대 선수협회 회장으로서 '오스카 로버트슨 소송'을 내서 승리해서, 1976년 NBA가 FA제도를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2.2. 은퇴 후[편집]


다만, 은퇴 후의 행보는 선수시절에 비해 농구와 멀어진 쪽이었는데, 잠깐 해설을 한 것 외에 지도자 경력이 없다. 이는 이전부터 독선적이고 에고가 강한 성격 때문에 선수들 및 프런트 사이에서 기피인물로 찍혀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의 결과. 그래서 은퇴한 지 수십 년이 지나 2015~16년 스테판 커리의 활약에 대해 감독이 커리를 제대로 못막아서 그런다라는 식의 꼰대성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냥 커리가 잘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요새 젊은 애들은 풀코트 프레스같은 압박수비를 제대로 안 해봐서 수비할 줄 모른다는 식의 발언이었다.

그리고 커리는 이 말을 들은 해에 실력으로 입증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조롱을 들었다. 스티브 커 역시 조롱을 했고 배런 데이비스는 트위터에 리그 패스부터 주문해라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커리가 16 파이널에서 클리블랜드에게 공/수 모두 집중마크를 당하며 털려 준우승의 가장 큰 원인이 된 덕분에 그의 말이 맞는 말이 되어버렸다.

반면 러셀 웨스트브룩에 대해서는 그의 트리플 더블 기록을 평가할 때 "가드가 한경기 리바운드 10개 잡는 건 어려운 일이다. 웨스트브룩의 트리플 더블 기록은 더 높게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란 인터뷰로 극찬을 한 바 있다. 그냥 자기 성향이 커리 같은 슈팅 어빌리티 기반의 스코어러 보다는 웨스트브룩 같은 다재다능한 가드를 더 좋아하는 듯 하다.[13]

로버트슨 시절의 우승 이후 50년 후(마지막 파이널 기준으로는 47년 후) 2021년 벅스가 파이널에 진출하자 벅스를 열렬히 응원했으며, 6차전을 앞두고 벅스 팀과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 2021 NBA 파이널에서 벅스는 6차전을 잡아내며 50년만의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고등학교 시절 농구 인기가 드높은 인디애나에서 흑인 고등학교를 이끌고 2번의 백투백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기록들이 인디애나 지역의 흑백차별 완화를 이끌었다는 일화가 있다. 2020년 한국에 "소년은 멈추지 않는다 : 차별을 부순 무적의 농구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관련 서적이 출판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4.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NBA 챔피언 (1971)
정규시즌 MVP (1964)
올-NBA 퍼스트 팀 9회 (1961-1969)
올-NBA 세컨드 팀 2회 (1970,1971)
NBA 올해의 어시스트왕 6회 (1961,1962,1964–1966,1969)
NBA 올스타 12회 (1961-1972)
올스타전 MVP 3회 (1961,1964,1969)
NBA 신인상 (1961)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80)
파일:오륜기(여백X).svg 1960 로마 올림픽 금메달

[1] 키가 6피트 5인치(196cm)여서 붙여진 별명. 맨발 신장임을 고려했을 때 현대 기준으로도 포인트 가드로썬 상당히 장신이고 슈팅 가드, 스몰 포워드 수준의 체격이다. 그런데 지금보다 평균 신장이 작은 1960년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정도냐면 스몰 포워드임에도 센터들을 제치고 리그 상위권 리바운더였던 엘진 베일러와 같은 키이다. 당시는 203~206cm도 약간 작지만 센터가 소화가능 했고 208cm면 훌륭한 센터 키였다. 대략 현재보다 2~3인치 정도 작다고 보면 되는데, 파워 포워드로 약간 작은 감이 있는 196cm는 지금으로 따지면 203cm 이상의 장신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르브론 제임스 정도 수준의 거구. 심지어 웨이트 역시 어지간한 현대 스윙맨들에 꿇리지 않는 수준이니 포인트 가드으로는 시대를 불문하고 파격적인 피지컬인 셈.[2] 한 시즌 최다 트리플 더블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나 2016-17 시즌 새파란 후배가 한시즌 트리플 더블 42개를 기록하며 2위로 내려앉게 되었다. 웨스트브룩처럼 한 시즌 평균 기록을 트리플 더블로 보낸 적도 있다.[3] 20세기 초 당시 이곳에 살던 백인 중 1/3인 25만명이 KKK단 소속일 정도였다. 게다가 1941년 이전까지는 지역 고교농구 토너먼트에선 흑인 학교들의 참가가 금지됐다.[4] 동생은 고교 시절이던 1939년에 초대 '인디애나 미스터 배스킷볼'로 뽑힌 바 있는 프로 야구선수 조지 크로(1921~2011)이며, 레이 자신은 인디애나 센트럴 칼리지(현 인디애나폴리스 대학교) 재학 시까지 농구, 야구, 육상 등을 했다가 교육학 학위를 따고 청소부 일을 잠깐 했고, 그 뒤 공립학교에서 수학 교사로 처음 교편을 잡으며 농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57년부터 당교의 체육부장으로 승진했다가 1966년부터 9년 간 공화당 소속으로 인디애나 주 하원의원을 지냈다. [5] 1986년작 영화 <후지어스>의 모티브가 된 학교다.[6] 원제는 《Attucks!》. 2020년 돌베개를 통해 정발되어 번역은 김충선, 해제는 인권활동가 류은숙이 각각 맡았다.[7] 신시내티 로열스 시절 팀 선배였던 잭 트와이먼의 스승이기도 한데, 신시내티대 재학 시절 미식축구부에서 선수로 뛰었으며 1948년부터 농구 수습코치 겸 미식축구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이후 농구 코치 하나에 전념하여 1952년 감독으로 승진해 임기 8년 동안 1958-59 및 1959-60 시즌에 NCAA 전국대회 3위를 두 번 달성했고, 1960년부터 감독직을 에드 쥬커(1916~2002) 코치에게 넘기고 13년 동안 체육부장을 역임했다.[8] 실제로 매직 존슨은 웨스트브룩, 로버트슨에 이어 트리플 더블 최다달성 역대 3위이다.[9] 일례로, 당시 선수들은 쿠션이 거의 없어 발목과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갈 수밖에 없는 캔버스화를 신고 뛰었다.[10] 윌트 체임벌린에 이어 두 번째로 25,000점 이상을 득점.[11] 어시스트의 경우 1991년 매직 존슨에 의하여 깨질 때까지 NBA 통산 1위였다.[12] 러셀 웨스트브룩이 2021년 5월 10일에 기록을 경신하였다.[13] 2017년 4월 로버트슨은 오클라호마 홈경기에 방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NBA 단일시즌 최다 트리플더블(41회) 기록을 경신한 웨스트브룩에게 상패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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