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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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전

1. 개요
2. 종류
3. 분포
4. 의미
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오수전은 무게의 단위인 수(銖)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즉 무게가 5수인 동전.

오수전은 원래 중국의 화폐로, 전한 무제(武帝) 시기(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중국 주변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던 화폐이다. 아직 자체 화폐가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사용되어 초기 철기시대 및 가야, 백제 유적(대표적으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다. 고대세계의 글로벌 화폐였던 셈.

무제때부터 평제때 까지 120년간 발행된 오수전은 280억개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의 상업발전이 엄청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종류[편집]


주조 시 표면에 생긴 기호에 따라 천상횡문(穿上橫文), 천하횡문오수, 천상반성(穿上半星)·천하반성오수·사각결문오수(四角決文五銖), 사출문오수(四出文五銖) 등이 있다. 또한 둘레를 갈아버린 마곽오수전(磨郭五銖錢)·전륜오수(剪輪五銖), 네모난 구멍을 원형으로 잘라낸 형태의 정환전(鋌環錢), 오와 수의 위치가 바뀐 반오수(半五銖 또는 傳形) 등이 있다.


3. 분포[편집]


철기문화의 유입, 낙랑문화의 출현과 함께 해 출토지역도 대부분 중국과 가까운 북부 지방에 집중된다. 그리고 북부 지방의 출토량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남부 지방에도 약간 출토된다.[1]


4. 의미[편집]


출현 시기가 명확하여 우리나라의 청동기 후기의 주요 유물로써 이 시기 연대결정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출토량도 소량이고, 또 당시가 화폐경제 사회가 아니었으므로 실용화폐로서 유통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장식품이나 해외로부터 물건을 수입했을때 정도에나 제한적으로 쓰이던 화폐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발굴되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한반도중국의 교류가 활발했던 것을 보여준다.

자매품으로 명도전, 반량전이 있다.

사족으로 삼국지 시대엔 당시 상국이었던 동탁이 천자(天子)의 명을 개무시하면서 자기 맘대로 정치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동탁은 오수전을 지나치게 많이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을 초래해 백성들의 삶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짐바브웨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셈. 이런 사례는 계속 반복되는데 유비의 촉한과 손권의 오나라는 고액전은 발행하면서 민간에 화폐로 재정이익 시뇨리지를 얻었다. 대표적으로 촉한은 16수짜리를 직오백전으로 만들었다.

남북조시대 시기에는 양주(揚州), 형주(荊州), 영주(郢州), 강주(江州), 상주(湘州), 양주(梁州), 익주(益州)만 전을 사용했고 교주(交州)와 광주(廣州)는 금과 은을 사용했으며 나머지 주는 미곡(米穀)과 포백(布帛)을 섞어서 교환했다. 이에 소연은 오수전을 주조했는데 이 때 외변과 윤곽이 없는 전을 여전(女錢)이라 칭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여전을 사사로이 교환했으며 그것을 금지시켰음에도 계속 사용하자 마침내 논의하여 동전을 폐지했다. 후에 마침내 철전(鐵錢)을 새롭게 주조했다.


5.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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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풍납토성에서 오수전 1점, 강릉 초당동에서 오수전 2점, 여수 거문도에서 오수전 980점,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오수점 3점, 창원 성산에서 오수전 1점, 사천 늑도유적에서 오수전 1점, 경산시 임당동에서 오수전 3점, 영천시 용전리 돌널무덤에서 오수점 3점, 제주시 산지항에서 오수전 4점, 이 밖에도 제주도 출토품으로 전하는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의 오수전 11점, 신안 해저침몰선에서 오수전 2점이 나오는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류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