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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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orno
오소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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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
국가
칠레

로스 라고스주
Región de Los Lagos
면적
951.3km²
인구
145,475명
(2002년 기준)
시간대
UTC -4
서머타임: UTC -3
고도
35m


Osorno.







파일:35608856.jpg
파일:Osorno.jpg

1. 개요
2. 역사
2.1. 선사 시대
2.2. 구 오소르노
2.3. 신 오소르노
3. 기후
4. 도시
5. 스포츠
6. 경제
7. 교통
8. 교육
9. 종교
10. 인구 통계
11. 저명한 인물
12. 행정




1. 개요[편집]


오소르노는 칠레 남부의 코뮌이자 로스 라고스 주 오소르노현의 현도이다. 2002년 인구센서스 기준으로 인구는 145,475명이다. 수도인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945km(587마일), 로스 라고스 주의 주도인 푸에르토 몬트에서 북쪽으로 105km(65마일), 아르헨티나 산 카를로스 데 바릴로체에서 서쪽으로 260km(16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국제도로 215번을 통해 샌안토니오 사모레 고개로 연결된다. 그것은 먼 남쪽의 아이센과 마가야네스로 가는 육로 통로이며, 그렇지 않으면 바다나 항공편으로 그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만 접근할 수 있다.

라휴와 다마스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오소르노는 로스라고스 북부의 주요 농업 및 소 사육 서비스 센터다. 이 도시의 문화유산은 휘리체, 스페인, 독일의 영향을 받았다.


2. 역사[편집]




2.1. 선사 시대[편집]


오소르노 시는 지구 지질 시대 말기에 형성된 강 테라스 위에 지어졌다. 13만 년 전 산타 마리아 빙하와 발디비아 간빙하에서 전환되는 동안 오소르노 지역은 안데스 산맥의 크고 폭발적인 화산 폭발에서 파생된 화쇄물 물질로 덮여 있었다. 따라서 오소르노의 기질은 화산재, 라필리, 모래, 자갈의 다양한 조합과 때때로 이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도시에는 필라우코 바호의 고생물학 및 고고학적 유적지가 있으며, 플라이스토세 후기의 인류의 발자국과 석재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자리에 전용 박물관과 공원이 인접해 있다.


2.2. 구 오소르노[편집]


이 도시는 원래 1553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의 통치 하에 그의 정복 동료인 돈 프란시스코 데 빌라그라 중장이 차우라카비라는 이름의 훌리체 마을이 있던 자리에 산타 마리나 데 가에테라는 이름으로 설립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발디비아의 죽음은 이 계획이 실현되기 전에 실현되는 것을 막았다.

1558년 3월 27일, 도시는 그의 조부 오소르노 백작의 이름을 따서 빌라 데 산 마테오 데 오소르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마침내 가르시아 후르타도 데 멘도사에 의해 세워졌다. 오소르노는 스페인 카스티야 레온주 팔렌시아도에 위치한 코무네다. 1567년 여름, 오소르노의 다양한 정착민들이 루이즈 데 감보아의 칠로에 군도 원정에 합류했다. 1575년 12월, 오소르노가 대지진을 겪었고, 이듬해 스페인-마푸체 간의 적대관계가 오소르노에 도달했다. 1602년 10월, 오소르노가 훌리체 원주민들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오소르노의 파괴로 인해 스페인인과 나머지 원주민 동맹국들은 여전히 스페인의 통치가 유지되고 있는 칠로에 군도 근처로 남쪽으로 이주해야 했다. 에스파냐 원주민 동맹국들은 인디오스레이유노스로 선언되었고, 엔코미엔다에서 자유로워졌고 민병대를 구성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인디오스 레유노들은 주로 칼부코와 압타오에 정착했다. 오소르노에서 추방당한 페르난도 데 알바라도는 1643년 네덜란드의 침략에 대항하여 칠로에에서 스페인의 저항을 이끌었다.[9] 리오 부에노 전투 이전 위기 동안, 이그나시오 카레라 위르고옌 대위는 카렐마푸 북쪽에서 오소르노 유적 근처까지 군대를 침투시켜, 산 호세 난파선의 생존자들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세 명의 "카시케"를 넘겨주었다.

오소르노 평원과 발디비아와 칼부코와 칼마푸 사이의 모든 지역은 스페인에 의해 폐쇄된 독립적인 토착 영토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인들은 이 영토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고, 소문에 의존해야 했다. 이 영토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의 부족은 신화적인 시저스에 대한 추측을 부채질했다.


2.3. 신 오소르노[편집]


1792년 11월 22일, 발디비아에서 군사 원정을 지휘하던 토마스 데 피게로가 유적을 점령했다. 1793년에 열린 라스 카노아스 의회는 스페인인과 마푸체-힐리체 사이에 새로운 평화를 구축했다. 이 조약은 라후(라후 데 라스 카노아스로 알려진)와 오소르노 지역을 포함한 다마스 강 사이의 땅을 스페인의 통제하에 두는 것을 허용했다. 오소르노 주변에서 온 지역 수장 카트리후알라, 이닐, 카니우, 그리고 더 먼 곳에서 온 다른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암브로시오 오히긴스의 명령으로, 오소르노는 후안 마켄나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고, 1796년에 공식적으로 다시 인구가 증가했다고 선언되었다. 오히긴스는 차례로 오소르노 후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오소르노의 새로운 정착민들은 곧 카티후알라, 카니우, 콜린의 지역 원주민 가족들로부터 땅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매입은 지방 총독 후안 마켄나에 의해 허용되었는데, 그는 지역 훌리셰가 생계를 위해 필요한 땅을 파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마켄나에 따르면 지역 카시크는 술을 사기 위해 땅을 팔았다.

오소르노의 유산은 19세기 중반 정부가 이 지역의 토착 마푸체족들을 정복하고 곧이어 칠레와 유럽 이민자들에게 땅을 개방한 상당히 최근의 칠레 정착지 덕분이다. 오소르노의 많은 현지인들은 스페인(가축 방목 산업은 바스크족에 의해 설립됨)과 다른 유럽 이민자들의 후손들이다.

1850년경 칠레 정부는 독일인 정착민들을 이 지역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식민지로 초청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계속해서 번창하는 독일 중등학교를 가지고 있다.[13] 그들의 도움으로, 오소르노는 칠레 국립 소 목장의 본거지가 되었고, 지역 경제를 크게 향상시켰다. 오늘날 오소르노에는 19세기 건축물과 도시 구조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림 같은 6채의 집이 국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2006년 국민투표에서 오소르노 주는 새로운 로스 리오스 주(현재의 발디비아 주)로의 편입을 거부하였다.

2019년에 오소르노의 급수 시스템은 1,100리터의 휘발유로 오염되어 위생 및 환경 위기를 초래했다.[15] 이 위기로 인해 오소르노의 급수 시스템은 7월 10일부터 7월 21일까지 폐쇄되었다. 기름 유출은 라후 강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소르노의 급수를 담당하는 민간기업 ESSAL은 1차 코뮈니케에서 폐쇄 이유를 명시하지 않았다. 정부는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오소르노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방문을 취소했다고 발표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의 도시 방문 이후 물 부족이 계속되자 반대파 의원 에밀리아 누야도는 정부를 대표하여 언론 서커스를 비난했다. 도시 주민들은 오소르노 거리로 나와 에살르의 상수도 제공권 취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ESSAL은 영향을 받은 47,519개 고객에게 총 63,250페소(2019)의 칠레 페소를 할인하기로 되어 있었다. 2019년 칠레 반정부 시위 이후 오소르노에서 열린 대중 협의에서 참가자의 90% 이상이 ESSAL의 양보를 끝내기로 투표했다. 그러나 결과는 구속력이 없다.


3. 기후[편집]


오소르노 주는 해양성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Cfb)이며 여름에는 건조 경향이 있다. 겨울은 시원하지만 7월 평균 기온은 7.6 °C이다. 강수량의 대부분은 5월부터 7월까지가 가장 비가 많이 오는 달이며, 평균 강수량은 약 180mm에서 210mm(8인치)이며 습도는 약 85%로 높다. 눈이 오는 일은 드물다. 여름은 1월 평균 17.8 °C (64.0 °F)로 더 건조하고 온화하며, 1월 평균 강수량은 48.9 mm (2 in)이다. 1992년 1월 강수량이 1.1mm(0in)에 불과했던 것과 같이 어떤 해에는 하루의 강수량 없이 갈 수 있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해에는 며칠 연속으로 비가 올 수도 있다. 12월부터 3월까지 기온은 때때로 25 °C(77 °F)를 넘을 수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318mm(52인치)이며, 강수량은 173일이다. 최고 기온은 2019년 2월 36.5 °C (97.7 °F)였고, 최저 기온은 1954년 7월 -8.0 °C (17.6 °F)였다.


4. 도시[편집]


오소르노 화산은 활화산이지만 작은 화산이다. 도시의 가장 두드러진 지리적 특징은 중앙을 남북으로 흐르는 라후 강이다. 더 작은 시냇물도 끊어져 남쪽으로 방향을 틀기 전에 동쪽으로 흐르고 도시에 자연적인 경계를 준다. 동쪽의 강 앞 근처에 위치한 플라자 드 아르마스는 분수, 벤치, 가로수가 있는 큰 한 블록짜리 공원이다. 공원 동쪽에는 현대 건축으로 유명한 도시의 주요 랜드마크 중 하나인 성 마태오의 라 카테드랄이 있다. 대성당은 가톨릭 오소르노 교구의 모교회 역할을 한다. 남쪽을 따라 후안 맥켄나 애비뉴가 있다. 그 밖에 로스 라고스 대학교의 메인 캠퍼스와 오소르노 로데오 경기장이 있다. 최근에 문을 연 카지노 플라자 솔 데 로스 라고스는 관광객들과 현지인들 모두에게 새로운 인기 있는 명소이다.

오소르노에서 매년 열리는 여러 기념행사가 열린다. 축제 de la Carney la Leche(우유와 고기 축제)는 매년 1월 말에 열리는 음악 축제로, 국민 음악 팝 가수와 밴드의 공연이 펼쳐진다. 매년 1월 중순에 열리는 델 민속 캄페시노 축제(시골 민속 축제)에서는 지역 음악 민속 예술인들의 공연이 펼쳐진다.

또 다른 기념행사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목장이 주최하는 페리아 가나데라 사고 피수르(사고-피수르 카울 페어)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칠레 국경일인 9월 18일에 도시 주변에서 불꽃놀이가 열린다.

오소르노는 또한 많은 관광 명소의 관문이다. 푸예휴 국립공원은 깨끗한 호수, 숲, 그리고 사냥감이 있는 주요 명소이다. 이 화산 지역은 현재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온천이 있는 천연 온천을 제공한다. 푸예휴 온천은 공원과 인접해 있다.

로스 라고스 지역은 이 지역에 많은 호수가 있는데, 그 중 많은 호수가 관광객들에게 친절하지만 고립된 해변을 가지고 있다; 오소르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푸예후에와 루팡코이다. 100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안틸랑카 스키장은 칠레의 최고급 리조트 중 하나다. 생태관광은 또한 태평양 연안 지역에 사는 토착 훌리체 공동체들에 의해 장려된다. 관광에 의해 유입된 자금의 대부분은 토착 식물과 나무 종, 특히 멸종위기에 처한 편백나무인 알러스를 보호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우거진 숲은 마이콜푸에, 바이아 만사, 푸카트리후와 같은 많은 해변과 만으로 펼쳐져 있다.


5. 스포츠[편집]


축구와 농구는 이 도시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오소르노 FC는 프로방스 오소르노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이다. 오소르노 현은 1만 석 규모의 에스타디오 루벤 마르코스 페랄타에서 홈경기를 치른다.

오소르노의 프로 농구팀은 오소르노 바스케볼로 불린다. 홈구장은 약 4,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짐나시오 마리아 갈라르도이다.

칠레 로데오는 오소르노에서 인기가 있으며, 칠레의 중남부 지역 대부분에서 인기가 있다. 오소르노의 로데오 경기장인 메디알루나 데 오소르노는 국내 최고의 경기장 중 하나로 여겨지며, 2006년 전국 로데오 남부 지역 예선 경기장이었다.

1972년 하계 올림픽에서 칠레의 복싱 대표 선수 마르틴 바르가스를 배출하였다. 게다가, 오소르노 주변의 산악 지형은 독일 이민자들의 큰 조류에 의해 대중화된 스포츠인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위해 사용된다. 안틸랑카 스키장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로 9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6. 경제[편집]


오소르노 주는 농업의 중심지이며, 농업은 오소르노 주의 경제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밀과 귀리는 풍부하게 자라지만, 이 땅은 칠레 말과 소의 사육에도 적합하다. 칠레의 가장 좋은 쇠고기 제품 중 일부는 오소르노 목장에서 유래한다.

오소르노는 안토니오 사모레 추기경 고개에 인접해 있어 국가 경제의 요충지이다. 오소르노와 아르헨티나 바릴로체를 연결하는 고개이며, 두 나라의 남쪽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동맥 중 하나이다. 이 고개는 매우 낮은 고도에서 안데스 산맥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다른 고개가 눈으로 막혀도 열린 채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오소르노는 지난 수십 년간 약간의 경제 침체를 겪었다. 농업만으로는 칠레 경제가 빠르게 산업화되고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과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오소르노에는 산업과 정보 서비스 부문이 모두 부족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그 도시는 지역 기후가 튤립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몇몇 네덜란드 회사들과 국제적인 사업 관계를 맺었다. 마찬가지로, Osorno는 최근 국제 육류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이 고립된 지역은 고품질의 쇠고기를 제공하는 것 외에도 광우병과 구제역과 같은 최근의 소 전염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칠레산 고기의 안전을 보장한다.

오소르노는 이제 독특한 기회에 직면해 있다: 경작지는 사탕무, 콩, 옥수수의 재배에 적합하며, 최근 생연료의 개발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농작물, 옥수수 유래 에탄올과 같은 농작물에서 파생된 연료다. 칠레 정부가 석유제품과 같은 가파른 세금을 농업용 연료에 적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은 물론 환경친화적 연료에 대한 수요 증가도 오소르노가 다시 주요 경제 중심지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할 것으로 기대된다.

칠레남아메리카의 경제 리더 중 하나이자 이 지역에서 가장 안정적인 주 중 하나로 계속 발전함에 따라, 관광이 증가하고 있으며, 방문객들은 오소르노의 자연 환경과 오래된 유럽 분위기에 매료되고 있다.


7. 교통[편집]


카날 바호 카를로스 호트 시베르트 공항이 있으며, 산티아고까지 2시간 비행이 가능하다. 버스는 또한 매일 수도로 출발한다. 안토니오 사모레 고개는 아르헨티나를 오가는 주요 관문이다.


8. 교육[편집]


국제학교

리세 클로드 게이

알레만 데 오소르노 연구소


9. 종교[편집]


오소르노에 위치한 성 마태오 대성당은 로마 가톨릭 오소르노 교구의 모교회이다.


10. 인구 통계[편집]


2002년 국가 통계 연구소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오소르노는 951.3㎢(367㎢)에 14만 5475명(남성 7만 7433명, 여성 7만 473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중 도시지역에는 1만 2245명(90.9%)이, 농촌지역에는 1만 3230명(9.1%)이 거주하고 있다. 1992~2002년 인구조사 기간 동안 인구는 13.9%(1만 7706명) 증가했다.


11. 저명한 인물[편집]


토마스 부르고스, 자선가

아돌포 매튜이, 농업 엔지니어. 지역 농업 학교를 설립했다.

루이스 "콜린" 라미레스, 가수, 음악가, 배우

페루볼리비아를 상대로 한 태평양 전쟁 당시 칠레 육군 장교 엘레우테리오 라미레스. 타라파카의 영웅이라고도 불린다.

올림픽 권투 선수 마르틴 바르가스

후안 마켄나, 오소르노 주지사, 칠레 독립의 영웅.

파블로 롱게이라, 정치인

에릭 카라스코, 프로 농구 선수

클라우스 폰 스토르치, 칠레 최초의 우주 비행사 훈련생

알렉시스 카이구안, 칠레 제헌 의회 의원


12. 행정[편집]


오소르노는 칠레의 3급 행정 구역으로, 4년마다 직접 선출되는 알칼데가 이끄는 지방 자치체가 관할한다. 2008-2012 알칼데는 하이메 알베르토 베르틴 발렌수엘라이다.

칠레의 선거구 중 피델 에스피노자(PS), 하비에르 에르난데스(UDI), 해리 위르겐센(RN), 에밀리아 누야도(PS)가 25번째 선거구를 구성하고 있다. 라빈드라나트 퀸테로스 라라(PS)와 이반 알레한드로 모레이라 바로스(UDI)가 17대 로스라고스 지역구의 일부로서 상원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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