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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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정계 입문 이전
2.1. 학창시절
2.2. 법조인
3. 제16대 국회의원
5. 서울특별시장 사퇴 이후
5.2. 19대 대선 불출마
5.3. 자유한국당 대표 선거 출마
5.5. 낙선 이후
5.6. 2021년 재보궐선거 서울시장 당선, 10년 만의 복귀
6.1. 서울시장 4선 당선


1. 개요[편집]


오세훈의 생애다.


2. 정계 입문 이전[편집]



2.1. 학창시절[편집]


1961년 1월 4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에서 오범환(吳範煥)[1]과 사문화(史文華)[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에 아버지의 부도를 겪고, 전기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달동네에서 자랐다.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학비를 걱정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집주인이 가족들을 쫓아내는 경우가 잦아 여러 차례 전학을 해야 했다. 해지기 전에 공부하고, 해가 지면 잠에 드는 생활이었다고 한다.# 서울미동국민학교중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중동고등학교를 다니다 대일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대일고등학교(4회)를 졸업하고[3], 1979년 한국외국어대학 법정학부에 입학했다. 이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로 2학년[4] 편입학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사시에 합격한 후 국군기무사령부에서 병역을 마치고 중위로 전역했다.[5]

2.2. 법조인[편집]


그 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상법 전공으로 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미국 예일대학교 로스쿨에 방문 학자(Visiting scholar)로 있다가 귀국하여 민사소송법 전공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원래는 모교의 법대 교수가 되겠다는 목표로 유학을 했으나 당시 법학계의 보수적 분위기로 인해 필드에서 뛰는 변호사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예일대 방문학자 당시 만나게 된 박사과정 유학생들이 서울시정 자문단으로 활동하고도 있다.


지금의 오세훈을 있게 한 일조권 소송 사건 (1993년)



▲로가디스 CF 영상 (1994년)
▲생명보험협회 CF 영상 (1996년)
▲청호나이스 정수기 CF 영상 (2004년)
변호사로서 주목받게 된 것은 이른바 일조권 소송 사건이다. 1993년 인천의 경남아파트 일부 세대에서 대낮에도 전등을 켜야 할 정도로 그림자에 가려 일조권이 침해되었다며 단체 행동에 나선 적이 있다. 그런데 당시 주민들의 대리인으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당시 33세의 오세훈 변호사였다. 오세훈은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13억 원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일조권이 헌법상 환경권으로 인정되는 판례를 이끌어냈다. 이는 오세훈의 이름을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환경 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일조권 소송 사건을 계기로 현 환경운동연합의 대표인 환경운동가 최열 대표와 함께 환경운동연합 창립에 참여하였고, 1992년부터 약 5년간 환경운동연합 시민상담실 실장으로 무료상담을 진행하면서 환경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95년 대한변호사협회 환경문제연구위원회 의원을 지냈고, 1997년 서울시 녹색시민위원회 감사를 지냈으며, 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환경운동연합의 법률위원회 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환경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환경운동가로서 적극 활동하였다.

일조권 소송에서 승소한 후 당시 MBC 아나운서였던 손석희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한 PD가 오세훈 변호사에게 방송 출연을 제의했다. 이렇게 탄생한 프로그램이 《생방송 오변호사 배변호사》였다. 일조권 소송으로 이름을 높였고, 훤칠한 외모로 주부들에게 인기 있는 오세훈 변호사와 김보은 양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활약한 민변 출신 배금자 변호사를 함께 엮어서 월요일 프라임 타임대에 법률 상담 방송을 편성했다. 첫 방송이 나간 후 훤칠한 외모의 젊은 변호사의 등장으로 인해 그동한 변호사에게 박혀 있었던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이미지를 완전히 상쇄하여 큰 호응을 얻게 된다.[6]

그후 방송 능력을 인정받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을 담당하였고, 1996년 SBS 뉴스 따라잡기, 1998년 갑론을박 동서남북, 1999년 오늘과 내일 등 각종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또한 남성복 브랜드 로가디스와 청호나이스 정수기 등의 광고에서 모델을 맡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정장 브랜드와 정수기 브랜드는 당시 최정상급의 연예인[7]을 모델로 광고한다.

1996년 한국 미혼 여성이 가장 사귀고 싶어하는 유부남 설문조사에서 쟁쟁한 연예인들을 제치고 33%로 1위를 한 적이 있다.[8]


3. 제16대 국회의원[편집]



파일:오세훈 16대 국회의원.jpg

▲ 16대 국회의원 재임 시절 대정부질문에 나선 오세훈 의원[9]
방송을 통한 인지도를 바탕으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거대 양당인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양쪽에서 영입 러브콜이 엄청났다고 한다. 결국 이회창 총재의 설득으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10][11]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59.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당선 후에는 4년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였다.[12] 남원정과 함께 소장 개혁파로 주목받았다.

이후 이명박 서울시장 입후보 당시 이명박 캠프 대변인을 지냈다. 이때의 경력과 훗날 서울시장으로서 이명박 시정의 정책을 상당수 계승한 것을 들어 범친이로 분류하기도 한다.

임기 중 오세훈 3법이라 불리는 정치자금법, 공직선거법, 정당법 개정안[13]을 내놓아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선거 공영제, 비례대표제 실시 및 지구당, 정당 후원회 폐지가 주된 내용이었다. 기존에는 후원의 상한액이 사실상 없다시피해 후원자에게 설설 기는 것이 기존의 정치 문화였는데 오세훈 3법으로 후원 상한액을 500만 원으로 설정해 이런 관행을 근절할 수 있었다.[14]

이 중에서도 특히 기업의 정치자금 후원을 금지한 정치자금법 개정안은 여야를 막론하고 반발이 심했다. 하나 의외인 것은 통상적으로 보수인 한나라당보다 진보 성향인 새천년민주당(이후 열린우리당)에서 반발이 심했다는 것. 한겨레 등 진보 성향 언론들은 개혁에 비교적 소극적이던 한나라당이 오히려 파격적인 안을 제시하는데도 진전이 안 된다며 민주당을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선거를 앞두고 똥줄이 탄 열린우리당천정배 간사가 오세훈의 제안을 전격 수용하여 여야 합의로 개정되었다. 이때 열린우리당 정동영 대표는 선거 후 다시 해당 법안을 원상복구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국민 여론의 반발이 커 '오세훈 3법'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이렇듯 강력한 정치개혁 법안 등을 통과시키며 '차떼기당'이라고까지 불렸던 한나라당의 이미지를 쇄신하다, 이후 '5공 용퇴론'을 주장하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게도 다음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 공천을 위해 당론에 따라 상식과 괴리된 발언을 해야만 하고, 후원자 앞에서 을이 되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총선 불출마 선언 후 의정활동 잔여금 2,500만 원 중 1,500만 원은 환경 재단에, 1,000만 원은 서울 문화재단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국회의원 4년 간의 임기 기간 내내 시민단체에서 시상하는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선정되었다.


4. 제33·34대 서울특별시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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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세훈 취임식.jpg

▲ 2006년 7월 3일 제33대 서울특별시장 취임식에서의 오세훈


파일:external/www.epochtimes.co.kr/12731461361208.jpg

▲ 2010년 7월 1일 제34대 서울특별시장 취임식에서의 오세훈

제17대 총선 불출마 후 잠시 정계를 떠나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오자 정계에 복귀, 한나라당 내부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경선에서 따돌리고[15] 2006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상대는 열린우리당강금실민주당박주선. 압도적인 표차로 이명박의 뒤를 이은 서울시장으로 당선되면서 민선 최연소 서울시장이 되었다.[16]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여러 가지 공과가 있었다. 2007년에는 민원 관련 문의전화가 분산되어 있어 복잡하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시 통합 민원 서비스인 다산콜센터(120)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동안 서울시, 인천시, 경기도가 각자 대중교통 환승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인천시, 경기도와 협의하여 수도권 통합 대중교통 환승제를 실시하였다.

서울시 공기를 제주도처럼 만들겠다고 선언하면서 천연가스 버스 교체 사업 및 도로 물청소 등의 환경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2년 후 서울시 미세먼지 농도가 23% 감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17]

결과적으로 종합하자면 오세훈이 서울시장으로 있으면서 중국 사회과학원 도시 경쟁력 지수는 세계 27위에서 9위로, 광역자치단체 청렴도는 15위에서 1위로 상승했다. 또한 UN 공공행정 대상 2회, 우수상 3회를 수상했고, 유네스코 2010 세계 디자인 수도로 선정됐다. 그리고 서울시 관광객이 30% 증가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후 훗날 박원순이 시장이 되며 세워진 박원순 시정에선 거꾸로 중국 사회과학원 도시 경쟁력 지수는 세계 15위로, 광역자치단체 청렴도는 1위에서 16위로 추락하는 등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한 성과라고 볼 만하다.

이러한 치적들과 디자인서울, 다산콜센터, DDP 등등의 성과들을 바탕으로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하였다. 처음 여론조사에선 가볍게 한명숙 전 총리를 제치고 서울시장 재선에 성공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이후 한명숙 전 총리의 강력한 추격 드라이브를 허용하며 박빙의 승부를 이어갔다. 그러나 결국 선거 개표 막판에 강남 3구의 몰표를 받으며 가까스로 승리, 최초의 재선 서울시장이 되었다. 최초의 재선 서울시장으로서 계속하여 좋은 업적을 쌓아간다면 박근혜와도 견줄 수 있거나 한나라당의 포스트 박근혜로 성장할 비박계의 대선주자로 기대를 받았었다.


4.1. 무상급식 주민투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후 사정은 이러했다. 5회 지선에서 한명숙과의 초접전 끝에 재선에 성공한 오세훈은 시장 첫 임기(2006~2010) 때와는 달리[18] 서울시의회 다수당 지위를 민주당이 차지하여[19] 시정 운영에 어려움이 빚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무상급식과 관련해 당시 민주당 서울특별시당 학교급식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초선 서울시의원 강희용이 주축이 되어 무상급식 반대 주민들의 서명 명단이 허위라는 지적을 받게 되었고,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이 조직적으로 선거 참여한 것은 아닌지 집중 추궁을 받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세훈은 민주당이 밀어붙히던 무상급식안에 대해 제동을 걸며 이를 주민투표에 붙여 처리하기로 결정한다. 전체 서명인 수 815,817명 가운데 이의 신청과 무효로 판명된 수치를 제외하고 총 서명인 수의 62.8%인 512,250명의 서명이 유효한 것으로 확인되어 주민투표가 진행되었다. 이에 민주당은 강희용 시의원을 중심으로 예산 및 재판 중인 사안은 주민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을 제기했고 투표 무효화 운동이 활발히 전개하며 저항했다.

결국 이러한 강력한 반대 운동으로 투표 참여율이 저조하여(25.7%) 개표가 이뤄지지 않아 무상급식 투표안은 부결되었다. 사실 여기까지만 읽어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이 주민투표의 결과에 본인의 시장직을 걸어버리는 자충수를 두어버렸다는 것이다. 즉 주민투표를 아예 투표율 미달로 개표조차 못하게 된 오세훈은 시장직에서 사퇴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버렸던 것이다. 이에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에서도 무상급식을 가지고 왜 본인 시장직을 걸었냐며 온갖 비난과 비판이 쏟아졌다.[20] 당시 합천군이 전국 최초 무상 급식을 한다는 것에서 열받을 노릇.

한나라당에선 시장직 사퇴라도 당과 조율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오세훈은 이를 거부, 바로 기자회견을 열고 시장직에서 사퇴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오세훈의 정치 경력 최대의 오점[21]으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오세훈은 10년의 세월을 정치적 야인으로서 황혼기를 보내게 된다.


5. 서울특별시장 사퇴 이후[편집]


시장직에서 사퇴한 이후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공공정책대학원 연구원으로 재직했고, 중국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단기 어학연수를 하고 귀국했다. 그후 로펌의 고문변호사로 있으면서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22], 고려대학교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했다. 미래 사이테크 포럼의 대표를 맡아 각종 미래첨단산업 연구와 세미나 개최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2016년 총선에 나오기 전까지 5년동안은 언론과의 접촉도 거의 하지 않고 철저히 야인생활을 했다.

2014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속으로 페루 리마, 르완다 키갈리에 중장기 자문단[23]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해당 경험을 바탕으로 책도 집필했다.

2015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출마한 오신환 새누리당 후보의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서 1988년 이후 처음으로 관악을 지역구에서 보수 정당 후보가 당선되는 데 기여하였다.

2015년 초 이완구 국무총리의 사임 후 공석이 된 국무총리 자리에 후보자로 거론되었으나 박근혜 대통령이 큰일하실 분에게는 이 자리가 맞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오세훈 본인은 국무총리 후보에 오른 것만 해도 영광이라며 넘어갔다.

2015년 5월과 6월에 시행된 여론조사에는 차기 대권주자 7위와 5위에 들기도 했다. 2015년 9월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 6%로 5위를 기록했으며, 특히 20대에서는 김무성을 제치고 새누리당 계열 후보 중 1위를 기록했다.

2015년 말에는 광주방송 목민자치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5.1. 20대 총선 출마[편집]


당의 이른바 '험지' 출마 요청[24][25]을 거절하고, 2016년 1월 17일 종로구 출마를 선언했다. # 종로구가 노무현, 이명박 등 과거 대통령들의 지역구였기 때문에, 종로구 출마는 사실상 대권을 노린 포석. 당내 경선에서 종로구 3선 출신이자 '지역 기반 탄탄'을 내세운 박진 전 의원과[26] 그 치열한 경쟁을 펼친 끝에 승리하여 새누리당 후보로 종로구에 출마하였다.

3월 24일 KBS 여론조사에서 오세훈 45.8%,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28.5%로 조사되었다. 열흘이 지난 4월 4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는 약 41%로 약 39%인 정세균 후보와 격차가 크게 줄어들어 치열한 접전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신 같은 기관에서 조사한 차기 대권주자 선호도 순위는 처음으로 김무성 대표를 앞지른, 여당 내 1위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후 4월 7일 발표된[27] KBS 여론조사에서는 정세균 후보와의 격차가 채 1%도 안되는 초박빙의 접전으로 나타났다. 불과 2주일 전, 같은 조사기관에서 집계한 여론조사에서 17% 이상 여유있게 앞섰던 것에 비해 격차가 순식간에 좁혀진 것.

4월 13일 출구조사 결과 42.4%로 51%인 정세균 후보에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고, 결국 개표 결과 42.4%에도 못 미치는 39.7%를 획득하면서 낙선했다. 실제로 새누리당 지지자 상당수가 정권 심판론에 맞물려 이탈하기도 했고, 정세균 후보의 노련한 밑바닥 선거 전략이 통한 점이 컸다. 거기에 자기 선거구 유세는 안하고 다른 선거구 가서 지원유세하는 바람에 미운 털이 박혀서 밀착형 유세를 하던 정세균에게 바닥 민심이 기운 것도 크다. 당내 경선 잡음의 영향인지 박진 전 의원의 조직이 오세훈 후보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는 말도 돌고 있다. 서울시장직 중도 사퇴로 인한 비호감이 낙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세균은 떡하니 국회의장이 되었다.

험지 출마를 거부한 3명(오세훈, 김문수, 김무성) 가운데서 서울특별시 종로의 오세훈과 대구 수성 갑의 김문수가 낙선하고, 부산광역시 영도에서 당선된 김무성[28]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게 되면서 정말로 험지를 선택한 것이 맞다는 식의 농담이 돌기도 했다. 3명 모두 대선 행보에는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 반응. 텃밭인 대구 수성 갑에서 25%p 차이로 패배한 김문수는 정계 은퇴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낙선 이후에도 새누리당 내의 대권주자 인물난으로 인하여 여전히 대권주자 지지도 조사 대상에 포함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그래도 오세훈의 대권후보 지지도가 김무성보다 높은 여권 내 1위라는 것이다.[29]

새누리당 혁신위원장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 후 2016년 8월 9일에 진행되는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비박계 단일 후보 주호영 의원을 공개 지지하였는데, 친박이정현이 주호영 의원을 큰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면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비박’ 김무성·오세훈 대권가도 타격 전당대회 직전에 이정현 대표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정현, 오세훈의 비박계 지지에 발끈…"매우 유감"


5.2. 19대 대선 불출마[편집]


2016년 9월 21일 TV조선 강적들에 출연하여 19대 대선 출마를 시사하고, 몇 가지 논란에 대하여 반박했다. 먼저 서울시장 재직 시절 서울시 채무 규모가 부각된 것에 대해 뉴타운 사업으로 인한 투자적 성격의 채무가 많아 뉴타운 사업이 완료되면 자연스럽게 회수될 채무였다고 반박했다. 또한 세빛섬의 별명이 '세빚둥둥섬'이라는 점에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며, 공기업인 서울주택도시공사가 일부 투자를 했을 뿐 서울시 예산은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부당한 비판이라고 언급했다.

11월 15일 비박계의 임시 지도부인 비상시국위원회 12인 공동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분노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다 합쳐서 지지율 10%도 안 되는 대선 주자들이 새누리당의 얼굴에 먹칠한다"고 하며 이를 비판하였다.#

2017년 1월 5일 새누리당에 탈당계를 제출했으나, 개혁보수신당 창당 발기인 대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당 대표 급의 마땅한 당직이 주어지지 않으면 원내 인사인 유승민 의원이나 광역단체장인 남경필·원희룡 지사 등과의 대권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는 우려로 신당 참여 여부를 주저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런데 2017년 1월 13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오세훈이 속한 바른정당에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하는 분위기가 감지되는 상황.

같은 해 1월 21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 선거대책위원장으로의 영입 제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단은 1월 23일 바른정당의 최고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반기문 캠프와 바른정당 사이에서 계속 고민했다. # 그런데 2월 1일 반기문이 전격적으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해버린다.

그 후 1년 정도 조용히 지내다가, 2018년 2월 5일 바른정당과 국민의당통합을 앞두고 바른정당을 탈당하였다.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지는 않고 당분간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도중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5.3. 자유한국당 대표 선거 출마[편집]


2018년 11월 29일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당일 기자 간담회에서 태극기부대도 포함하는 보수통합을 해야 한다고 발언하고,# "국내정치도 외치도 좋은 성적을 주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집권 여당 대표는 입만 열면 '20년 집권'을 얘기하고 있다. 국민 앞에 반성문을 써도 모자랄 판에 오만하게 '20년 집권'을 입에 올리는 이런 현상은 우리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야당이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있기 때문에 가볍게 보고 '20년 장기집권이 가능하다' 얘기를 겸손하지 못하게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2019년 1월 현직 박원순 시장의 광화문광장 계획을 비판하였다. 재구조화안을 둘러싸고 박 시장과 김부겸 행정안전부장관 간 갈등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오 전 시장은 "미리 충분히 논의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발표하니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것"이라며 "서울시장이라는 사람이 광화문광장에 정부 소유 토지가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하지 않는가."라고 비판하였다. 광화문광장은 오 전 시장의 작품으로, 전문가 숙의와 여론조사를 통해 현재의 중앙분리안으로 결정된 것이다.#

2월 7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 출마를 선언했다. 영남의 국회의석을 모두 먹어도 수도권에서 과반을 먹지 못하면 총선은 패한다고 주장하면서 과감히 박근혜를 극복하자는 발언으로 이목을 모았다. 기자회견에서는 친박정당 굴레를 벗고 미래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당의 개혁을 주장했다. 홍준표, 황교안, 김진태 등의 당권주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옹호하거나 침묵하는 반면 오세훈은 박근혜 극복이라는 승부수를 던진 것. 특히 오세훈은 2월 23일 이뤄진 당대표 후보 토론회에서 황교안 후보가 태블릿 조작설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비판하였고, 다음날에는 '지도자로서 결격사유'라고까지 발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변희재 등 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격 끝에 2019년 6월에는 펜앤드마이크와의 인터뷰에서 "자료를 살펴보니 그런 주장을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더라."라고 말하며 변희재에게 사과했다. 다만 조작설을 긍정했다기보다는 일련의 의혹을 주장하고 믿는 개인의 활동에 대해 공격하지 않겠다는 쪽에 더 가깝다.

2월 27일 전당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황교안 후보가 6만 8713표로 당선되었고, 오세훈 후보가 4만 2653표를 얻어 2만5924표를 얻은 김진태 후보를 앞섰다.# 그러나 국민 여론조사에서는 50.2%(2만690표)를 기록해 37.7%(1만5528표)를 얻은 황교안 후보와 12.1%(4969표)를 얻은 김진태 후보를 앞섰다. 비록 당심을 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민심과는 가장 가까운 후보였다는 평이 나오며, 차기 총선에서 확장성 이슈를 이끌면서 당내 중도 및 개혁보수의 대표주자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 결과에 대해서 박지원 의원은 시사저널 판도라에서 본래 전당대회는 당의 지도자를 당원들이 뽑는 대회인 만큼 시대정신이 반영되는 법이라면서 사람들이 바라는 미래와 시대정신을 반영한 오세훈 시장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이 나오는 것은 순리라고 평했다. 그렇지 못하다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 집권여당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 오세훈
2019년 10월 조국 규탄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여 집권여당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5.4. 21대 총선 출마[편집]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광진구 을에 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되었다. 보수진영의 입장에서 서울의 대표적 험지인 광진을에서 여당 당대표를 지낸 거물 추미애를 꺾으면 순식간에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지역구 현역 의원인 추미애는 법무부 장관을 맡으면서 불출마가 확정되었고, 대신 청와대 대변인 출신의 정치 신인 고민정과 맞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2020년 3월 4일 아파트 경비원과 청소원들에게 설·추석마다 5만∼10만원씩 총 120만원을 제공한 혐의로 고발되었다.# 이에 대해 "법률가인 저로서는 매년 명절마다 행해 오던 격려금 지급이 사회상규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고(형법20조 정당행위), 특히 입주민이 내는 관리비로 그분들께 월급이 지급되므로 명절 보너스는 당연히 드릴 수 있는 일이라 여겨왔다.", "치매걸린 어머니가 데이케어 차량으로 귀가할 때 매번 경비원들이 집까지 동행해주는 신세를 지게 돼 늘 고마운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대진연 측의 선거 방해를 겪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선거 결과 47.8% 대 50.4%, 2.6% 차이로 석패했다.[30][31] 선거전 초반만 해도 미래통합당이 지역구 120석 정도에 오세훈은 접전 우위로 점쳤다고 한다. 그러나 차명진, 김대호 등의 잇다른 막말 논란으로 인해 접전 우위는 접전으로, 접전은 접전 열세로 가는 상황이 일어났으며 여의도연구원의 마지막 자체 여론조사에선 지역구 70~90석 정도로 예측되었다고 한다.#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일단 오세훈이 낙선한 이유로는 광진구 을미래통합당 입장에서는 호남 출신이 많은 인구 구조로 인해서 험지[32]이기 때문에 이 험지에서 추미애친문의 지원을 많이 받은 고민정을 상대로 2.5%p 차이로 석패한 것은 상당히 선전한 것이며, 오세훈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 결과가 나왔다고 분석되는 긍정적 평가가 많다. 실제 비례대표 개표 결과 광진 을의 미래한국당 득표율은 31.61%, 범야권은 40.25%의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오세훈은 47.82%를 받았다는 점에서 보수정당의 험지에서 본인의 개인기로 접전 상황까지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중이다.#

하지만 반대로 지역구 성향을 감안하더라도 어찌됐든 상대는 광진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추미애가 아니라 청와대 대변인을 거쳐 처음 선거에 출마한 고민정이었고, 반면 오세훈은 대권주자로도 입에 오르내리는 정치인이었기에 정치 신인을 상대로 패배한 것은 분명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애시당초 오세훈이 종로와 광진 을에 나간 것은 전 서울시장이란 인지도를 이용해 민주당의 거두인 정세균과 추미애의 텃밭에서 상대를 화려하게 잡아먹고 정치적 재기를 해야 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고, 당 또한 수도권의 확보와 점차 장악력을 상실해갔던 황교안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오세훈을 유력주자로 키워야 했던 목표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오세훈으로서는 단순히 선전했다는 것만으로는 당 내외에서 재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민주당은 고민정을 당선시키기 위해 당 지도부가 총출동하면서 홍보에 나섰고, 오세훈은 어떻게든 당선되어서 유력주자로 커야 했기 때문이다. 오세훈이 초선 의원도 아니고 서울시장을 역임한 거물 정치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선전했다는 것만으로는 당 내외에서 재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5.5. 낙선 이후[편집]


본인의 블로그에 밝힌 낙선인사에서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정진하겠다고 말했다.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가장 견제한 미래통합당 후보가 바로 자신이었다면서 은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총선 직후 실시된 4월 말 여론조사에서 오세훈이 범야권 대선주자 중 홍준표, 안철수에 이어 선호도 3위를 차지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에서 압도적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던 황교안의 선호도가 폭락한 것으로 보아 다른 주자들이 조금씩 나눠 가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없음'이 무려 45.9%이다.

7월 10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망 소식에 차기 서울시장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서울시장을 이미 두 번씩이나 하신 분이 큰 관심이 있겠나.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때) 자기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온 사람"라고 언급했다.#

10월 22일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를 천명했다. 그러면서 야당의 대선후보들에게 경쟁도 경쟁이지만 잠룡들이 힘을 합치는 5인 원탁회의체를 열고 대권후보자들이 정기적으로 회동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정리된 입장을 밝힐 판을 만들자고 제안했다.[33] 서울시정 운영 경험과 낮은 비호감도를 장점으로 내세웠으며, 주요 정책으론 서민 감세와 사교육 퇴치, 부동산 안정, 4대 보험 동결 등을 내세웠다.


5.6. 2021년 재보궐선거 서울시장 당선, 10년 만의 복귀[편집]


시간이 흐르며 야당에서 필승 카드가 보이지 않자 소위 대선주자급 인물이 보궐선거에 출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당 안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사실 지속적으로 대선 출마 의지를 천명하던 오세훈이었지만 대권주자로서의 존재감과 지지율은 미미한 반면, 서울시장 범야권 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는 17.6% 지지율로 15.9%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앞질러 1위를 기록하기도 하거나[34] 예전 서울시장 중도사퇴로 인한 이미지 악화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지역 기반은 확실한 것으로 보여 차차기 대선을 노리고 서울시장에 도전할 가능성이 어느정도 생긴 상황이었다.

이후 안철수가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에 뛰어들며 국민의힘에서도 안철수에 대항할 카드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오세훈에 대한 출마 압박은 더욱 거세지게 되었다. 결국 2021년 1월 7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미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던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계속해서 단일화 방식의 경선 방식을 고집할 경우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단순한 출마 선언이 아니라 조건부 출마 선언이라는점이 특이한데 현재 안철수가 단일화 방식의 경선을 포기하고 국민의힘에 입당 혹은 합당을 하는 것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어 조건의 지켜질 가능성이 낮은 것을 이용, 사실상 출마 명분을 만들기 위한 조건이라는 평가가 있다.

혹은 오세훈이 당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나가는 선거라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예측이 있다. 출마 선언 이후 김종인 비대위원장을 만났는데 "'안 대표가 들어오면 불출마'로 표현하거나 '안 대표가 들어오지 않으면 출마'로 요약이 될 텐데 가급적 '들어오지 않으면 출마' 쪽으로 전달이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정리해달라"라고 밝히며 출마쪽에 더 큰 마음이 있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후에 자꾸만 안철수와의 단일화를 독단적으로 진행하려는 의사를 보이자,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무슨 권한으로 그러느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당의 요청이라기보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 조건부 출마 선언은 평이 좋지 않았다.



▲ 출마 선언을 하는 오세훈
2021년 1월 7일 안철수가 사실상 오세훈의 합당 및 입당 제안을 거절하자 서울 강북구 북서울꿈의숲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조건부를 떼고 공식적으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였다. 이 날 출마 선언에선 오세훈은 과거 무상급식 건으로 인해 서울시장직을 사퇴하였던 것에 대한 반성하며 사과했다. 또한 오세훈은 이 날 이번에 1년 보선 시장으로 당선되면 앞으로 내놓게 될 공약은 전부 5년짜리라며 "그 5년 동안은 정말 대통령직 도전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버리겠다."고 당선될 경우 대선에 불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만약 오세훈이 서울시장에 당선되는데 성공한다면 적어도 2027년의 제21대 대선에선 국민의힘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경선에서 떨어지거나 본선에서 낙선하기라도 한다면 총선에서 패해 내상이 큰 오세훈에게 있어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었다.

본인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트위터 계정까지 만들었다. 본인 계정에서 '안심소득'을 홍보하고 있다. 안심소득은 소득 하위 50% 가구에게 중위소득에서 가구소득을 뺀 값의 절반을 기존 복지 재원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이를 기본소득과 비교하며 투표까지 올렸지만 기본소득 득표율이 약 90%, 본인의 안심소득 득표율이 약 10%가 나왔다. 또 한 트위터 유저의 바람대로 한자까지 동명이인인 오세훈이 소속된 보이그룹 EXO으르렁 파트를 추기도 했다.

국민의힘 경선 과정에서 속칭 'V 논란'이 있었는데, 이를 오히려 인지도 상승의 기회로 삼아 V가 붙은 각종 정책 등을 홍보하고 있다. 특히 V-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시티즈 스카이라인을 활용한 정책 홍보를 선보였는데 반응이 좋았다. 해당 게임에서 서울을 제작하여 공약 사업을 가시화한 것인데 비디오 게임을 최초로 활용한 선거운동이라는 점이 공약을 알아보기도 쉽고 상당히 참신했던 듯. 여담으로 여기서 오세훈 본인도 V는 V.I.P가 아니고 Virtual이라며 셀프디스를 한다.#


파일:Oh_SeHoon.jpg

▲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 오세훈
3월 4일 국민의힘 서울특별시장 후보 경선에서 최종 득표율 41.64%로 36.31%를 얻은 나경원 전 의원을 제치고 2021 재보궐선거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나경원이 예비 경선을 1위로 뚫고, 이후 지지율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장 출마 선언 자체가 승부수였으나 경선레이스 초반에는 기대와 달리 고전하는 모양새였고 결국 승부수가 또다시 실패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최종 후보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하며 초반 승부수는 성공 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 ##

이제 남은 것은 안철수와의 야권 단일화인데 이 또한 양쪽 모두 대선주자로서의 욕심이 있는데다[35] 오세훈이 선거 초반 분위기와 달리 박영선과 1 대 1 경쟁을 했을 때 승산이 있다는 여론조사들이 속속 나오면서 점점 알 수 없게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3자 구도에서도 오세훈이 1위를 탈환한 조사까지 나오기도 했다.#

게다가 이 둘은 같은 당의 경선을 치른 후보가 아닌지라 소위 '이인제 방지법'으로 인한 위반사항 없어서 단일화를 깨도 출마에 문제가 없기도 하다.[36]

3월 22일 로봇 드립 커피머신을 만드는 청년들을 찾아가 벤처기업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청년들과 프리토킹 방식으로 대화를 나눴다.#

2021년 3월 23일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경선 결과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누르고 보수야권 단일 후보로 확정되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접전으로 나타났던 것과는 다르게 예상을 깨고 안철수 후보를 오차범위 밖으로 따돌리며 낙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오세훈은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인 박영선을 상대하는 보수 야권의 단일 후보로 결정됨으로서 지난 10년간의 정치적 방황기를 마무리하고 반등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남은 것은 민주당 박영선 후보와의 맞대결이다. 사실상 해당 재보선은 국민의힘의 운명이 걸린 선거이기에 국민의힘의 대표 선수로 나선 오세훈의 어깨에 당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볼 수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당선시 안철수에게 공동운영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를 공공연히 발언한 것을 보면 단일화 과정에서 안철수와 합의가 된 사안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렇게 후보 단일화가 마무리된 다음 날[37]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공개된 재보선 슬로건도 공개했다.

첫날부터 능숙하게
서울부터 공정·상생

2021년 재보궐선거 슬로건



▲ 나무위키의 본인 문서를 읽는 오세훈
3월 26일에는 비디오머그에 출연했다. 이때 나무위키의 본인 문서와 본인에 대한 비판 및 논란 문서를 읽었다. 오세훈은 해당 비판 및 논란 문서를 읽어보며 하나 하나 차근차근 반박하였다.[38]

내곡동 투기 의혹 등 출마 선언 이후 제기된 여러 논란들 속에서도 재보궐선거 일주일 전까지의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보면 정부여당에 실망한 사람들이 오세훈 쪽으로 급격하게 쏠리면서 최근 실시되고 있는 모든 여론조사에서 박영선 후보를 20% 이상 앞서고 있고, 당선 가능성을 묻는 여론조사에서는 더블스코어 이상의 격차를 보이면서 확실한 우세를 점하고 있다.#

다만 한명숙 전 총리와의 대결 당시 낙승이 예상되었음에도 0.6% 차이로 간신히 승리한 경험이 있고, 재보궐선거는 보통 투표율이 총선이나 대선에 비해 낮게 나와서 조직력이 더 강한 민주당이 더 많은 고정표를 확보할 수 있는 데다가[39] 20대 총선 당시 여론조사에서 앞섰음에도 패배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는 탓에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40][41]

4월 1일 사실상 마지막 여론조사에서는 50.5%의 지지율로 조사 되었다. 박영선 후보의 28.2%를 22.3%p 앞섰으며, 당선 가능성을 묻는 조사에서는 박영선 후보의 24.6%를 37.7%p 앞서는 62.3%로 나타났다. 또한 선거의 판세로도 오세훈 측이 내세우고 있는 '정권심판론'이 박영선 측의 '국정안정론'보다 20%p 넘게 앞서는 54.5%로 나타났다.#

선거를 앞두고 오세훈 후보의 지원유세에 2030 세대의 신청이 몰리고 있다. 지원유세를 신청한 2030 세대가 무려 24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에 따라 국민의힘 측은 이들에게 이번 주말 유세차를 내주기로 했다. 일반인 청년들이 지원유세에 나서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이번처럼 지원이 몰려 유세차를 통째로 내주고 자유발언 기회를 주는 것은 국내 보수정당에서는 처음 있는 시도라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내곡동 생태탕 등으로 오세훈 후보를 향해 네거티브를 하고 있지만[42] 오 후보는 이에 동요하는 기색 없이 무대응, 무관심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43] 대신 정책 차별화로 대세 굳히기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과거 버스·지하철 환승할인 시스템 완비를 거론하고, 세빛섬을 방문하는 등 과거 서울시정에 대한 유권자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또한 토론에서의 모습 역시 좋은 모습을 보였는데 현실성 있는 정책들을 일관적으로 주장하는 한편 박영선 후보의 네거티브에 휘말리지 않고 박영선의 공약에 대해서도 차분하게 비판하는 등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44][45]

4월 7일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57.50%를 득표하며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39.18%)를 18.32%포인트 격차로 압도했다. 역대 서울시장 당선자 중 최고 득표수 또한 경신한 건 덤. 결국 오세훈의 정치인생을 건 사실상 마지막 승부수는 권토중래를 거두며 대성공으로 끝이 났다. 이 때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서 지난 고생길이 스쳐지나갔는지 한동안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 화려한 복귀 한 방으로 차차기 대권주자와 보수정당 암흑기 탈출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차기 대선 정국에서도 보수 야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거대한건 문재인의 레임덕이 바로 이 선거에서 드러났는데, 민주당 지지가 높아졌다는 서울시가 180석으로 무능을 보여주는 민주당에 분노하여 결국 민심이 180도 돌아서, 모든 구에서 오세훈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어버렸다. 거기다가 20대~30대 같은 청년들이 노인들보다도 많은 지지를 보내주었으며, 최종적으로 40대만 근소하게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냈다.

이렇게 해서 10년만에 화려하게 서울시에 복귀했으며, 그 과정에서 본인도 당에서 이준석하태경, 유승민, 정병국의 도움을 받아, 청년 남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상대인 더불어민주당박영선40대에 의존하며 청년들에게 오만가지 막말을 쏟아낸 것과는 다른 부분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을 유도하는 설문에 선을 긋는 기염까지 토하며[46],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특히 출구조사에서 20대 남성 중 72.5%가 오세훈에게 투표하였는데, 보수정당이 청년 세대에게 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상당한 쾌거라 할 수 있다. 오세훈 역시 청년들에게 계속 감사 인사를 표하며 지지에 답변을 보냈다.

결국 돌이켜보면 오세훈21대 총선 낙선은 국민의힘이나 오세훈 본인에게나 엄청난 전화위복이 되었다. 21대 총선 추이를 보자면 당시 미래통합당은 다수당이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세훈이 당선되고 야당 대표, 원내대표[47]가 된다고 하더라도 180석 거대 여당의 힘에 밀려 무언가를 하기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다.[48]


6. 제38·39대 서울특별시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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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장 당선이 확정된 오세훈


파일:오세훈 온라인 취임식.jpg

▲ 2021년 4월 22일 제38대 서울특별시장 취임식에서의 오세훈
2021년 4월 8일 경쟁자였던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를 18.3%p의 격차로 꺾으며 압승, 서울시장을 사퇴하고 나서 박원순에게 넘겨주었던 본인의 자리를, 박원순 본인이 저지른 자신의 여비서 성폭행 사건에 대한 책임회피로 인한 자살로 세상을 떠나고 자신의 원래 자리에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10년 간의 야인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서 오세훈은 '전' 서울시장이란 꼬릿말을 떼고 서울시장으로서 불리게 되었으며 21대 대선 국민의힘의 가장 강력한 후보로 재부상하였다. 오세훈 시장의 공약을 보면 재건축 재개발 규제 완화, 고층 규제 해제, 안심소득제 실험, 젠더뉴스 폐지 등등 다양한 정책을 펴나가며 시정을 운영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취임 첫 날 SBS 뉴스에 출연해 "이번 선거에 내세운 공약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최소 5년은 필요하다."라고 하면서 자신은 2022년 지방선거에도 출마할 것이라고 밝혔다.#

6층 집무실에 있던 침대와 대형 디지털 현황판을 없앤 것으로 확인되었다.[49]# 박원순이 보여주기식으로 쌓아두었던 서류더미들도 전부 정리했다.

4월 13일 취임 후 처음으로 국무회의에 출석했다.#

4월 15일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비서실장인 김도식을 임명하였다. 당선 이전부터 안철수 대표와 서울시 공동운영을 약속한 만큼 안 대표의 최측근을 서울시정에 참여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후 행정1부시장엔 조인동 기획조정실장, 행정2부시장엔 류훈 도시재생실장을 기획조정실장엔 황보연 도시교통실장을 임명하였고 박원순 장례식을 주도하였던 김태균 행정국장을 상수도본부장으로 좌천성 전보를 실시하며 오 시정의 첫 고위직 인사를 끝내게 되었다. 하지만 김태균 상수도본부장은 2022년 1월 서울시 대변인으로 영전하며 오세훈의 능력주의 인사를 실감하게 했다.

4월 20일 박원순 전 시장 성추행 피해자에게 서울특별시장으로서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5월 25일 당초 기획조정실장으로 밀었던 황보연 도시교통실장이 투기의혹으로 청와대 인사검증에서 낙마하게 되며 김의승 경제정책실장을 대타로 기획조정실장에 내정하였다.

6월 24일 김학배 전 울산지방경찰청장(치안감)을 서울특별시 자치경찰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김학배 위원장은 오세훈 시장과 사법시험 합격 동기로서 사법연수원에서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으며, 오 시장이 사법연수원을 유급하지 않았다면 16기로 나란히 수료하고 나왔을 인물이었다.

7월 5일 정치권 내의 부동산 전문가인 김현아 전 국회의원을 서울주택도시공사(SH) 사장직에 내정하였으나 서울특별시의회 청문회에서 다주택자로 공격받아 자진사퇴하여 낙마하였다.#

이후 후임으로 김헌동 전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장을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직에 내정하였으나 역시 서울특별시의회의 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하였다. 그러나 오 시장이 다시 김헌동 카드를 살리며 서울시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 전 본부장을 SH 사장으로 임명하였다.

2022년 3월 10일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대한민국 제 20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서울시정에 날개를 다는 것과, 헌정 사상 첫 4선 서울시장[50] 도전에 청신호가 켜졌다.

3월 10일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당선인과 오찬을 하였다. 이 대표가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으면서 오 시장도 양성 판정을 받았다.#

4월 14일 전 서울시의원인 송주범 서대문구 을 당협위원장을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내정하였다.

6월 17일 양 행정부시장을 김의승 기획조정실장, 한제현 안전총괄실장으로 교체하였다.

8월 9일 송주범 정무부시장이 개인적인 사유로 부시장 사임의사를 밝히자 오신환 전 국회의원을 후임 정무부시장으로 임명하였다.

2023년 2월 6일 같은 해 1월 한제현 행정2부시장의 퇴임으로 공석이 된 2부시장직에 유창수 주택정책실장을 임명하였다.

2023년 5월, 정무부시장 오신환 전 의원이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 시장의 당협위원장을 맡았던 광진구 을 출마를 선언하며 사임 의사를 밝히자 민생특보인 강철원 특보를 정무부시장으로 내정하였다.

2023년 6월, 일본 출장 중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를 만나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 서울시장과 도쿄도지사가 만난 것은 2015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이 마스조에 요이치 당시 도쿄도지사를 만난 후 8년 만이다. #

2023년 11월 15일, 한동훈 법무장관과 만나 '범죄피해자 원스톱 솔루션센터의 설치·운영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업무협약은 윤석열 정부가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범죄피해자 원스톱 지원체계 중 하나로 마련됐다. #


6.1. 서울시장 4선 당선[편집]



파일:후보등록하는 오세훈.jpg

▲ 후보 등록하는 오세훈


파일:출마선언하는 오세훈.jpg

▲ 출마 선언을 하는 오세훈

준비된 미래!
서울전문가 오세훈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슬로건

2022년 4월 1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단수 공천되었다.#[51]

4월 29일 송영길이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면서 송영길과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5월 12일 8회 지선을 앞두고 공식 후보 등록을 하였다. 후보 등록과 함께 시장 직무가 정지되어 서울시는 조인동 행정1부시장 체제로 약 3주간 운영될 전망이다.

5월 13일 진행된 서울시장 후보 토론회에 불참하여 20일에 첫 토론회를 가졌다.

5월 14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선거캠프 개소식을 가졌다.

출구조사에서 58.7%를 얻는 것으로 나오며 지난 재보궐 선거때보다 더 높은 득표율로 이길 것이라는 조사가 나왔다. 특히 20대 및 30대 남성에서 70%에 가까운 지지를 얻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후 치뤄진 8회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후보가 59.05%의 득표율을 얻어 39.23%를 득표한 송영길 후보에게 19.82%p의 격차로 승리하면서 최초의 4선 서울시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놀라운 점은 서울 425개의 행정동에서 모두 승리를 하여 진정한 완승을 거두었다는 점이다.[52] 또한 국민의힘 구청장 후보는 민주당의 2배를 넘는 17명이 당선되었으며, 지난 임기에서 사사건건 태클을 걸어왔던 시의회 역시 국민의힘이 정원의 2/3가 넘는 76석을 차지하면서 오 시장의 시정운영에 큰 힘이 되어줄 예정이다.

출구조사 결과 오세훈이 50대 남성, 20대 여성, 40대 여성을 제외한 모든 계층에서 승리하면서 본인의 후보로서의 경쟁력을 입증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53], 또한 헌정 사상 최초의 4선 서울특별시장이자 민선 4선 광역단체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면서 차기 대권주자로서 더욱 주목받게 될 전망이다.

다만 오세훈 본인은 "99% 서울시장을 다시 하고 싶다"며 향후 행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 1935년생으로 2019년 별세했다.[2] 1938년 10월 5일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청주 사씨 사수학(史琇學)의 5녀로 태어났다.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건강 악화로 인해 상주로 귀향했다.[3] 강성태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고등학교 시절 영양실조로 인해 허약했고, 이로 인해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도 한 번 앉으면 엉덩이가 짓무를 때까지 공부했다고 한다.[4] 1학년 수료하고 2학년으로 편입. 현재는 3학년 편입학 전형만 존재.[5] 선관위에 제출한 병역사항 신고서에 따르면 88년 5월 28일 입영, 91년 2월 28일 전역으로 사유는 '원에 의한 전역', 계급은 중위로 찍혀 있다.[6] 배금자 변호사는 이후 법무법인 해인의 대표변호사로 재직했고, '이의 있습니다'라는 책을 저술했다.[7] 로가디스의 경우 차인표, 정우성, 장동건, 현빈 등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이후 모델이었고, 청호나이스의 2020년 광고 모델은 가수 임영웅이다.[8] 2위는 영화배우 한석규(28%), 3위는 아나운서 손석희(25%), 4위는 영화배우 안성기(20%), 5위는 영화배우 최민수(17%), 6위는 국회의원 정몽준(12%), 7위는 전 국회의원 박찬종(9%), 8위는 전 연세대 교수 마광수(5%)였다.#[9] 참고로 뒤에 있는 사람은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다.[10] 1년 전인 1999년 재보궐선거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에 공천을 요청했다는 기사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남아 있고, 김정길 당시 정무수석이 증언했으나 오세훈 시장은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내가 타진한 게 아니라 국민회의 측에서 제안했다"고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당시 국민회의는 오세훈 시장을 비롯해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 고승덕 전 의원 등 현재 보수정당에 있는 '젊은 변호사'들을 당에 끌여들이려고 노력했으며, 창당 발기인 예비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려 했으나 당사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1] 이외에도 오세훈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강남구 을에 출마한 인권변호사 출신 통합민주당 홍성우 후보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적이 있다.[12] 환노위는 지역구 사업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아 예나 지금이나 비인기 상임위로 유명한데, 회상하기로는 환경 변호사 역할을 하며 쌓은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후술하듯 금권정치 문화에 학을 떼는 본인의 성격도 한 몫 한 듯.[13] 당시 오세훈 3법을 같이 추진한 정치인이 정병국문체부장관이었다. 한나라당의 개혁의 상징이 오세훈 3법이었고, 이 때부터 오세훈남원정이 주목받기 시작했다.[14] 미국의 경우는 로비가 합법화되어있으며, 특히 대선 기간에는 슈퍼팩이라는 거대 후원자 집단이 더욱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는 금권 정치가 일상이다. 국회의원이 온갖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지만 의외로 선진적인 정치 문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15] 당시 경선 후보는 홍준표맹형규. 여담이지만 홍준표는 이 당시 경선에서 오세훈에게 밀려 본선 진출이 좌절되자 "이미지 정치만 한다"며 오세훈을 비판했다.[16] 여담으로 이것이 오세훈으로써는 강금실, 박주선과의 마지막 대결이였는데, 선거가 끝나고 강금실은 집권여당 소속임에도 30%도 안되는 득표율로 인해 정계 은퇴로 내몰렸고, 박주선은 광주광역시로 도망갔기(…) 때문이다.[17] 하지만 천연가스 버스 교체 사업은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가스 충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잘 나가던 노선 하나가 공중분해되거나, 밥줄 노선들이 박살난 업체도 있었다.[18] 이 때는 한나라당 102석, 열린우리당 2석, 민주당 1석, 민주노동당 1석으로 한나라당이 압도적으로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어서 매우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19] 민주당 79석, 한나라당 27석[20] 이때 회의에서 오세훈을 가장 강하게 비판했던 사람이 바로 당시 최고위원이었던 유승민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에서 오세훈이 추진한 무상급식 투표안에 찬성한다는 당론을 정하자 유승민이 "16개 광역단체 중에 일개 단체장이 당과 상의도 없이 정한 방침이 무슨 당론이냐."며 비판한 것이다. 회의에 동석했던 홍준표 당시 대표가 그만하라고 만류했으나 유승민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판을 이어 나갔다.[21] 서울시민은 4년간 열심히 일하겠다는 후보를 시장으로 뽑았는데, 4년을 채우지 않고 떠난것이 되므로 피해를 볼수 밖에 없는것이다. 행정의 공백, 재선거 비용과 시민들이 다시 투표하러 가야하는 시간소모까지 생각하면 비판 받을 수 밖에 없다. 특히 무상급식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 의견들은 애초에 오세훈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본인이 스스로 시장직 사퇴를 걸로 투표를 하자고 했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퇴를 하게 된것이다.[22] #[23] 은퇴한 5~60대의 사람들을 주로 모집한다.[24] 주로 언급되던 지역은 박영선 의원이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던 구로구 을.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구로구 을 지역구는 수도권 내에서도 진보세가 가장 강한 지역구 중 하나이며 4년 후 새누리당의 후신 미래통합당에서도 구로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했던 김용태가 거의 20%p의 큰 격차로 패배한 걸 생각하면 이 당시 오세훈이 구로구 을에 출마했어도 낙선했을 가능성이 컸다. 더불어 이 때 구로구 을에 출마해 박영선과 맞붙었다면 5년 후의 빅매치와 전면적으로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25] 이외에도 노원구 병에 출마해 안철수와 맞붙을 수 있다는 예측도 나왔으나 본인이 직접 노원구 병에는 출마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고, 더불어 한때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강남 지역구에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26] 여담이지만 박진은 지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출마를 검토했으나 오세훈에게 밀리는 바람에 그를 지지하고 출마를 포기했던 바 있다. 본의 아니게 오세훈에게 두 번이나 밀려난 셈. 아이러니하게도 박진은 4년 뒤인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과거 오세훈의 지역구였던 강남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해 당선되어 국회에 재입성한다.[27] 4월 3~5일을 대상으로 집계된 것이며, 선거법상 4월 8일까지는 4월 7일 이전에 집계된 여론조사에 한하여 공표가 가능하다.[28] 이쪽도 자기 본진임을 감안하면 55대40 정도의 싸움이었으니 고전한 것이다.[29] 반기문 정도를 제외한 주요 대선후보를 모두 넣은 여론 조사를 하면, 문재인안철수가 1, 2위를 엎치락뒤치락하고, 오세훈이 비교적 큰 차이로 3위, 4위에 박원순, 5위를 김무성과 유승민이 오락가락하는 순으로 나온다.[30] 오세훈과 같은 귀중한 카드를 무의미하게 소모했다고 미래통합당 지도부의 허술한 정치 전략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의 선거전략을 담당한 이근형이 가장 고민한 상대였다고 말할 정도로 오세훈이 만만치 않았고 광진구를 따냈다면 미래통합당의 입장에서 큰 의미를 주는 승리였을 것이므로 다른 공천과 달리 오세훈 공천은 날카로운 한 수로 볼 여지가 있다. 미래통합당의 공천 실패 중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부가 반드시 오세훈의 원내 입성을 목표로 했다면 차라리 오세훈의 원래 지역구였던 강남으로 공천한 게 더 안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세훈의 자택이나 가족들이 모두 광진구에 거주하고 있어서 공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세훈 본인도 미래통합당의 재건을 위해서 안전한 강남3구서울특별시 내 부촌 지역에 공천받는 것 대신 험지라는 광진구 을에 공천을 받겠다면서 미래통합당 당협위원장을 담당하겠다고 했다. 이미 딸네 식구들이 여기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31] 결과론적으로 낙선하면서 아쉬운 부분은 만약 본인의 고향인 성수동이 있는 중구·성동구 갑에 출마했다면 당선되어 복귀에 성공해 보수 인력풀을 채우고 의석도 하나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성동구 갑은 후임 시장인 박원순이 오세훈 본인이 공들인 성동구 GBC를 엎어버리고 삼표레미콘을 그대로 냅둬버려 반감도 커서 여기서 당선된다면 박원순과 전면전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32] 광진구 을은 더불어민주당 추미애가 탄핵 역풍이 발생했던 17대 총선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 20년 동안 계속 국회의원을 했을 정도로 민주당에게 유리한 지역이다. 더군다나 추미애가 낙선했던 그 17대 총선에서도 한나라당 후보였던 유준상이 아닌 열린우리당 후보였던 김형주가 당선되었다. 당시 추미애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다.[33] 만약 향후 이 제안이 성사될 경우 야당 대권주자들의 지지율을 반전시킬 모멘텀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34] 다만 그 이후 안철수가 갑작스럽게 서울시장 출마 선언을 하며 지지율이 크게 올라 약 10% 격차로 뒤쳐지기도 했다.[35] 차기 대선을 노린다면 1년밖에 할 수 없는 서울시장은 서울시장으로 뭔가를 하기보단 당적도 없는 윤석열을 보수측 대선주자로 기대해야 되는 현 상황에서 확고한 보수정당의 대선주자임을 어필을 하기 위해 나오는 자리인 셈이다. 극단적으론 3자구도에서 밀린다 한들 2등, 3등으로 진 뒤 패배의 책임을 단일화를 하지 않은 3등에게 넘겨 대선 경쟁 상대를 떨어트리는 것도 고려할 수 있는 구도다.[36] 이인제가 단일화를 깨고 별도 후보로 출마해서 생겼던 법이지만 이 법은 같은 당의 후보에만 적용된다. 이 경우엔 단일화를 해도 둘은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이란 서로 다른 당의 소속이라 지지 선언을 했다가 마감일 전에 단일화를 깨고 따로 등록해도 법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37] 이날은 공식 선거운동 시작 전날이기도 하다.[38] 참고로 비디오머그에서 박영선 편은 1주일 후에 업로드 됩니다라고 댓글에 적어놓았었으나 박영선 측은 선거일 전날인 4월 6일에 갑자기 일정상 인터뷰가 어렵다며 인터뷰를 취소했다.[39] 시의회와 구의회 모두 민주당 소속 의원이 더 많으며 구청장의 경우 24 대 1로 민주당이 절대적으로 많다. 조직력을 동원한다면 민주당이 훨씬 더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40] 오세훈 본인도 이를 의식한 듯 자만하지 않고 의혹 해명과 선거 유세에 집중하고 있다.[41] 다만 여론조사 결과가 엉뚱하게 나왔던 그 당시와는 다르게 현재는 안심번호나 유무선 비율의 변화 등 여론조사의 기법이 완전히 달라졌고 정확도가 높아져 단순 비교하기에는 힘들다는 반론도 있다. 그리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였던 것과는 달리 이번엔 야당 후보라는 큰 차이도 있다.[42] 이는 더불어민주당에게 역효과만 불러왔다. 오히려 오세훈의 지지율만 올랐다.[43] 제보자의 기자회견이 예상되었으나 5일 돌연 취소되었는데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제보자를 의식해 "전부 사법적으로 걸러질 텐데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돕다가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길 바란다."고 경고했다.#[44] 박영선이 교통섬에다가 아파트를 짓자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자 직접 교통섬을 찍은 사진을 들고와서 "교통섬은 이런곳 아닌가요?"라고 미소를 지으며 반박하며 박영선을 데꿀멍 시키는가 하면, 박영선이 토론주제를 무시하며 내곡동 땅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자 "도데체 내곡동 땅이 민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거죠? 혹시 생태탕 때문인가요? 생태탕 매출하고?"라고 말해 박영선이 어버버거리게 만드는 등 토론에서 승기를 확실히 잡았다. 토론내내 오세훈 후보에게 거짓말프레임 공격을 일삼던 박영선에게 역공으로 박영선 후보의 존재 자체가 거짓말 아닙니까? 라고 팩폭을 시전하며 박영선 을 멘붕 시키며 K.O패 시킨것은 덤.[45] 특히 박영선과의 토론에선 주옥같은 명대사를 줄줄이 쏟아냈는데, 정부의 백신 확보 문제에 대한 주제로 토론 중 "현재 우리나라가 전세계에서 105 번째로 접종을 시작했죠?늦었죠?"부터 시작해서 청년세대들에게 라임에 비유하는 평가를 들으며 청년세대들의 칭찬을 듣는가 하면, 박영선이 그에 대해 K백신 주사기에 대한 답변을 내놓자 "총알이 없는데 총만 있으면 뭐하나요?"라는 막타를 날려버려서 박영선을 어버버하게 만들어서 이것 역시 청년들에게 큰 칭찬을 들었다. 이어서 보궐선거의 계기에 대해 토론 중, 본인이 사퇴하는 계기가 됐던 무상급식에 대해 박영선이 공격하며 보궐선거라는 의미에선 똑같다는 주장을 하자 비웃는 미소와 함께 "아..성추행에 의한 보궐선거와 똑같군요?"라고 극딜을 넣어버림으로서 박영선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보여줬다.[46] 후에 이준석이 일요서울 TV에 서민 교수, 최국과 함께 출연하여 밝힌 바로는 당시 설문에 대한 답변을 자신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설문에 "답정너에게 답변하지 않겠다. 제발 시대착오적인 페미니즘 강요하지 마라."라고 정면으로 페이스북을 통해 반박했고, 이에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오세훈 후보의 답변거부를 박제할 목적으로 자료를 만들어서 인터넷으로 광범위하게 배포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세훈 후보가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거냐고 묻자 걱정 마시라고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며 오세훈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박제할 목적으로 만든 배포자료는 오히려 페미니즘에 신물이 나버린 청년들에게 입소문을 타며 특히 청년남성들의 압도적인 몰표를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47] 21대 총선에서 당선되면 말이 재선 의원이지 실제로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기 때문에 3~4선 중진들과 동급이다. 그래서 대표나 원내대표에 도전하더라도 절대로 체급이 낮지 않다.[48] 당장 그 노련한 주호영 원내대표조차 김태년에게 상임위를 다 내줄 수밖에 없었다.[49] 현황판만 제거한 것이라 서울시 홈페이지의 디지털 서울시장실은 열람이 가능하다.[50] 오세훈은 민선 4기, 민선 5기에서 연임이 끊겼고, 민선 7기 보궐 서울시장이라서 3연임 제한에 걸리지 않는다.[51] 당내 경쟁자가 될수 있었던 박진은 외교부장관, 박주선은 대통령취임식준비위원장에, 지상욱여의도연구원장 자리에 붙들어 놓아서 나름 교통 정리를 한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측에서 '좋은 자리 줄 테니까 오세훈이 4선 하도록 양보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한 것으로 보인다.[52] 오세훈이 다시 서울시청으로 돌아온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압승하기는 했지만 5개 행정동에서 패해서 서울 전체 행정동 승리는 실패했다.[53] 심지어 그 민주당 지지세가 가장 강하다는 40대 남성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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