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르 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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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가봉의 제2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알리 봉고 온딤바의 아버지이며 무려 42년이라는 엄청난 기간[2] 동안 아프리카에 독재자로 군림한 인물로 가장 오래 집권한 독재자 Top 10 안에 반드시 꼽힌다.[3]
2. 생애[편집]
1935년 12월 30일에 프랑스 적도 아프리카의 레와이(Lewai)[4] 에서 바타케(Batake)라는 소수민족 혈통의 농부 가족에서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알베르 베르나르 봉고(Albert-Bernard Bongo)였으나 1973년 9월에 이슬람교로 개종하며 이름을 '오마르'로 바꿨고, 2004년에는 아버지 이름을 뒤에 붙여 오마르 봉고 온딤바(Omar Bongo Ondimba)로 이름을 바꿨다.
봉고는 12살에 부모를 모두 잃었으며, 브라자빌에서 초등과 중등교육을 마친 후 1958년에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여 중위에까지 올랐다. 1960년 8월에 가봉이 독립하자 외무성에서 일하는 것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고 여러 직책을 거치다가 정보관광부 장관이 된 1966년 8월에 가봉의 초대 대통령인 레옹 음바(Léon M'ba, 1902~1967)가 중병에 걸려 파리의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봉고는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음바는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1966년 11월 12일에 가봉의 부통령에 오른다.
레옹 음바가 1967년 11월 28일에 사망하자 그 4일 뒤인 1967년 12월 2일에 봉고는 정식으로 대통령직에 올랐고, 초반에는 음바의 반대파들을 석방하고 복권시키면서도 음바가 이미 일당제를 구축한 기반을 이어받아 1968년 3월부터 1990년 5월 22일에 개헌할 때까지 가봉독립당(PDG)라는 여당만 허용되는 일당독재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집권 직후에 봉고는 국방부, 정보부, 기획부, 내무부의 장관과 가봉 총리까지 겸임했고, 1973년에는 첫 대통령 선거에 유일한 대통령 후보로 나가 99.56%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같은 해에 있던 오일쇼크로 원유 가격이 폭등하자 봉고는 이를 바탕으로 엄청난 경제성장도 이루고[5] 이 돈을 바탕으로 도로, 철도, 항구, 항공사, 발전소 등의 인프라도 구축해가며 해외에서 '가봉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79년에 있던 선거에서도 봉고는 다시 99.96%로 당선되었으며, 1986년에도 99.97%로 또다시 당선되었다.
1970년대 말에 경제가 악화되자 조직된 야당 모레나(MORENA)가 대학생들의 봉고의 독재와 부패를 비판하며 반독재 시위를 후원하고 다당제 복원을 요구하자, 봉고는 1982년 11월에 이들 중 37명을 재판에 회부해 이들 중 13명에게 20년 노동교화형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들은 1986년 중반까지 모두 석방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가봉에서 불경기가 돌았던 데다가 1990년 5월 23일에 주요 야당이던 PGP의 지도자였던 요제프 렌잠베(Joseph Rendjambe)가 호텔에서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하자 이 여파로 봉고 집권 이래 최대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리브르빌의 대통령궁이 불에 타고 프랑스 총영사와 석유 회사 직원 10명이 인질로 잡히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프랑스군은 군대를 파견해 외국인들을 대피시키고 랑잠베의 고향이자 전략적 석유 생산지인 장틸 항구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사태를 진정시켰다.
1990년 9월 16일에 최초의 다당제 국회의원 선거 1차 튜표가 실시되었으나, 야당 지지자들은 선거 결과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며 투표함을 부수기까지 했고, 결국 이 사태의 여파로 전체 투표가 동년 10~11월로 연기되어 가봉민주당이 120석 중 63석을 얻는 것으로 끝났다.
1993년 12월에 봉고는 다당제에서 치러진 최초의 대통령 선거에서 51.4%의 지지율로 당선되었고,[6] 1998년에도 66%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최초의 다당제 선거 이후 봉고는 야당 정치인들을 배려했으며, 2003년에 당시 헌법에 정해진 '5년 임기 2번만 허용'이 끝나가자 또 개헌을 해 대통령 임기를 '7년 임기 무제한'으로 바꾸고 2005년 11월 27일에 79.2%의 득표율로 당선된 후 2006년 1월 29일에 마지막 대통령 취임식을 올렸고, 2009년 6월 8일에 요양차 머무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대장암으로 사망했다.[7] 봉고가 죽자 가봉은 30일간의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고[8] 봉고의 시신은 6월 11일에 리브르빌로 옮겨진 후 6월 16일에 수십만 명이 참여한 성대한 국장을 거치고는 고향에 안장되었다.
장기집권과 일당독재에 부패혐의도 상당히 받았지만, 그래도 봉고는 인권탄압과 반대파 탄압에 있어서는 로버트 무가베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이디 아민, 장 베델 보카사, 시아드 바레 같은 흔한(?) 아프리카 나라들의 독재자들과는 달리 굉장히 온건한 편에 속하는 독재자였다. 물론 덜 했다는 거지, 안 했다는 건 아니다. 실제로 1972년부터 1988년까지 가봉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PR 6+CL 6로 평균 자유 지수가 6등급으로, '부자유'로 분류되었으며, 1980년대 일당독재 시절에는 반체제 인사들을 가두는 것은 일상이었다. 덤으로 봉고는 다소 특이하게도 정적들을 처형하거나 암살하는 것 대신 반대파들에게 뇌물을 주어 정부에 포섭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부족이나 정파 간 내전이 끊이지 않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상당히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왔고, 원유와 삼림 개발을 통해 국부를 축적하면서도 외국 업체의 과도한 개발은 제한하는 나름 개념 있는 경제계획으로 가봉이 아프리카 최고의 부자 나라 중 하나가 된 덕분에[9] 다른 아프리카 독재자들에 비해서는 국내외로 평가가 좋은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가봉 역시 부의 재분배가 안된 탓에 실업률이 20%대에 빈곤율은 30%대에 달하기 때문에 갈등억제에는 성공했지만 석유로 인한 부를 재분배하는데에 실패해서 자원을 낭비했다는 평도 듣고있으며, 가봉에서 평이 엇갈린다.
물론 산유국의 대통령으로 오랫동안 집권한 만큼 아주 돈이 많아서 그와 그의 아들은 프랑스에 최소 45개의 저택을 보유하고 있으며, 2700만 달러의 별장, 150만 달러의 부가티 스포츠카 및 수십 대의 기타 명품 자동차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봉고 가족은 보잉 747을 전세낸 후 파리로 쇼핑을 하러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1975년 발행된 봉고 대통령 방한 기념우표. 이때 대접이 굉장히 좋아서 뒷날 KBS 역사스페셜 제작진이 북한과의 체제 경쟁의 연장선에서 진행된 박정희 정권의 아프리카 외교를 조사하며 가봉을 찾았을때 매우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며 호감을 표했다. 봉고는 1975년, 1984년, 1996년, 2007년에 4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는데, 거의 10년 주기로 온 셈이었으며,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 중에서 가장 많은 방한 횟수를 기록했다.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한국의 입장을 꽤 열렬히 지지하는 편이었으며 1975년 비동맹회의 리마 외상회담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한국의 입장을 가장 강력히 지지해줬다.
3. 기타[편집]
- 한국인 박상철이 1984년부터 25년간 그의 경호를 담당했다.# 또 오마르 봉고가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아들 알리 봉고 온딤바도 그를 경호실장으로 임명하여 35년간 부자의 경호를 하고 있다.# 현재도 자신의 두 아들을 포함한 10여명의 한국인과 함께 대통령실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특집에 출연하기도 했다.
- 공식적으로 인정된 아내는 2명뿐이나, 실질적인 아내의 수는 33명에 자녀는 53~54명에 달한다. 첫째 자식인 파스칼린 봉고(Pascaline Mferri Bongo Ondimba, 1956~)과 마지막 자식인 아가테(Agathe, 2009~)[10] 의 나이 차이는 무려 53년이다.[11] 즉, 봉고는 만으로 73세, 그것도 사망 약 반년 전에도 자식을 가졌다는 말이 되며, 첫째 자식과의 나이차를 고려하면 그야말로 증손녀뻘(...)의 자식을 가진 셈이다.
이러한 여성 편력 때문인지 1975년에 방한한 뒤 한국에서는 당시 유명 영화배우인 정소녀가 봉고에게 성상납을 받고 아이까지 임신했다는 악성 루머가 돌았다. 물론 이는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며 그녀가 이 때문에 심하게 마음고생을 했다가 나중에 가봉에서 취재한 기자 덕분에 이런 누명이 벗겨졌다.
- 키가 151cm에 불과한 엄청난 단신이라 쐐기로 만든 높은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 봉고차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설이 있다. 오마르 봉고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이 1975년이고 기아 봉고가 출시된 건 1980년이라 이때부터 기아 봉고가 오마르 봉고의 이름을 딴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기아 봉고는 기술제휴를 했던 마쓰다 봉고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고 한다. 다만 오마르 봉고는 봉고차가 정말로 자신의 이름을 딴 것으로 알았고 마지막 방한이었던 2007년에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이름을 딴 한국차가 있다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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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現 가봉 봉고빌[2] 한동안 아프리카에서 이보다 오래 집권한 인물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밖에 없었다. 2021년 적도 기니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의 집권기간이 봉고와 카다피의 기간을 넘어섰다.[3] 물론 사망 당시 시점에서는 피델 카스트로, 장제스, 김일성에 이어 세계 4위였다.[4] 봉고의 집권 초창기인 1969년에 봉고빌(Bongoville)로 개칭되었다.[5] 1972년에 4.3억 달러에 불과했던 가봉의 GDP가 1976년에는 30.1억 달러로, 단 4년 만에 GDP가 7배나 뛰어올랐다.[6] 이때에도 가봉의 야당은 선거 결과가 조작이라고 주장했다.[7] 사실 2009년 5월 7일에 봉고는 아내와 사별한 이후 아내를 추도한다는 이유로 공무 중단을 선언하고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떠났으나 가봉 정부는 건강검진일 뿐이라고 계속 부인해왔다. 죽기 직전에 외신에서 그가 죽었다는 보도가 계속 나오자 가봉 정부는 프랑스가 앙겔라 메르켈이 죽었다고 발표하면 기분 어떻겠냐면서 꽤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8] 봉고의 아들이자 당시 국방장관이던 알리 봉고 온딤바는 국민들에게 침착하라고 하며 국영 방송에서 종교 예배와 노래를 방송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모든 국경과 인터넷 접속을 차단과도 병행된 것이었다. 또한 리브르빌의 시민들은 통행금지의 도입을 두려워해 마트에서 물건들을 사재기하기까지 했다.[9] 석유 덕분에 부자가 된 아프리카 나라는 바로 이웃인 적도 기니도 있지만 이 나라는 부의 분배가 전혀 안돼서 가봉의 상황이 좀 더 낫다.[10] 정확히는 2009년 1월 6일에 태어났다.[11] 거의 조부모와 손녀 정도의 나이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