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올로 페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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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2, 4대 국왕
오르세올로 페테르
Orseolo Péter

출생
1010년 ~ 1011년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사망
1046년?[1]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재위
헝가리 왕국의 왕
1038년 8월 15일 ~ 1041년
헝가리 왕국의 왕(복위)
1044년 7월 5일 ~ 1046년 8월 30일
배우자
불명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
(1046년 결혼)
아버지
오토 오르세올로
어머니
그리말다
형제
프로자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헝가리 왕국의 제2, 4대 국왕.


2. 생애[편집]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와 헝가리 대공 게저의 딸이자 헝가리 초대 왕 이슈트반 1세의 누이인 그리말다의 아들이다. 생년은 1010년 또는 1011년으로 전해지며, 형제로 프로자가 있었다. 1026년 아버지가 독일왕 콘라트 2세에 의해 도제 직위에서 축출된 뒤, 그는 어머니와 함께 헝가리로 피신했다. 이슈트반 1세는 조카를 매우 총애하여 군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삼았다.

1031년 9월 2일 유일한 후계자였던 임레 왕자가 헤기쾨츠첸티엠레(현재 루마니아 산팀레우)에서 사냥하던 중 멧돼지의 뿔에 찔려 죽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차기 후계자로는 이슈트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니트러 공작이었던 바줄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슈트반 1세는 바줄이 경박하고 어리석으며 가톨릭 신앙도 두텁지 못하니 왕위를 이을 그릇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일타이크 연대기에 따르면, 이에 반감을 품은 바줄은 네 명의 귀족을 꼬드겨 왕을 암살하게 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했고, 이슈트반은 네 귀족들의 팔을 자르게 한 뒤 바줄의 두 눈을 멀게 했다. 여기에 바줄의 세 아들 레벤테, 언드라시, 벨러를 체포하려 했지만, 이들 모두 국외로 달아났다. 반면 바줄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들의 치하에서 쓰여진 후기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이슈트반은 바줄을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지만 그의 아내 기젤라를 포함한 바줄의 적들이 왕의 사절이 도착하기 전에 바줄의 눈을 멀게 하고 귀구멍을 납으로 채워버렸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가 헝가리 차기 국왕으로 지명되었지만, 많은 귀족들은 베네치아 사람이 헝가리 국왕이 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특히 이슈트반 1세의 아내이자 바에이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딸 기젤라가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슈트반 1세는 기젤라와 페테르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에 가슴아파하며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애썼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임종을 눈앞에 두었을 때, 이슈트반 1세는 페테르에게 자신이 죽고 나서도 기젤라를 존중해주고 그녀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했다.

1038년 8월 15일 이슈트반 1세가 붕어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선왕이 추진한 가톨릭 진흥 정책을 지속했고, 화폐를 대량 주조해 화폐경제를 촉진하게 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벌였다. 1039년과 1040년 겨울에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오스트리아 변경백이자 자신의 처남인 아달베르트의 영토를 파괴했다. 또한 독일왕 하인리히 3세에 대적하는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를 지원해 보헤미아군이 브루테크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불가리아인의 독립을 꾀한 페테르 데얀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렇듯 왕으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했지만, 대다수 헝가리 귀족들은 외국인 왕을 받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페테르는 이를 경계해 각 주의 주요 성에 이탈리아와 독일 출신 병사를 배치하고 헝가리인 영주의 정치 참여를 일절 틀어막았다. 시몬 케자이의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그가 데려온 외국인 병사들이 민가에서 추악한 행동을 일삼아서 원성을 사자, "나는 모든 판사, 존경할 만한 신사, 장교, 영주, 고위 인사들을 독일인이탈리아인으로 채우고, 헝가리 땅을 외국인으로 채움으로써, 독일인에게 왕국을 바칠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후대에 그를 비난하기 위해 지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그는 이슈트반 1세 앞에서 기젤라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무효로 처리하고 기젤라의 재산 대부분을 몰수하고 베스프렘의 별궁에 연금했다. 이에 분노한 기젤라는 유력한 헝가리 귀족인 어버 샤무엘과 손을 잡고 반란을 꾀했다. 1041년, 어버 샤무엘과 헝가리 귀족들은 수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독일 출신으로 왕 옆에서 난정을 일삼는 부도(Budo)를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페테르가 거부하자, 그들은 곧바로 부도를 죽이고 부도의 두 아들을 실명시켰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페테르는 1041년 9월 헝가리에서 도주했고, 영주들은 어버 샤무엘을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페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하인리히 3세에게 도주했다. 어버 샤무엘은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돌아올 것을 우려했기에 선제 공격을 하기로 마음먹고 1042년 신성 로마 제국 산하의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헝가리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 3년간 전쟁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그해 가을 헝가리를 향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고, 헝가리군은 이들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해 대다수 영토가 파괴되었다. 1044년 7월 5일, 어버 샤무엘은 멘포 전투를 치르던 중 부하들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기젤라는 페테르의 보복을 피하고자 고향인 바이에른으로 도주했다.

그 후 페테르는 하인리히 3세에 의해 헝가리 왕위에 복위했다. 그는 하인리히 3세의 지시에 따라 이슈트반 1세가 반포한 헝가리 법을 폐지하고 독일법을 따랐고, 1045년 오순절에 헝가리를 방문한 황제에게 금박을 입힌 창과 왕관을 바쳤다. 하인리히 3세는 페테르가 바친 창과 왕관을 로마로 가져와서 헝가리가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었음을 널리 알렸다. 또한 페테르는 또다시 외국인들을 최상위 관직에 앉히고 헝가리 귀족들을 억압했다. 이에 헝가리 귀족들은 반감을 품고 그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한편, 1046년 여름 바타에서 이교도 반란이 발발하여 코로스 일대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1046년 9월, 반란군은 아바우이바르에서 헝가리에 비밀리에 잠입한 레벤테, 언드라시를 접견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배제하고 마자르 고유의 신앙으로 돌아간다면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동의했다. 이후 반란군이 수도를 향해 진격하자, 페테르는 헝가리를 탈출해 아우크스부르크에 집결하고 있는 독일군과 합세하려 했다. 그러나 국경 인근의 자몰리 마을에서 언드라시를 추종하는 이들에게 포위되었다. 페테르와 소수의 추종자들이 한 저택에서 사흘간 항전했지만 끝내 제압당했고, 그는 1046년 10월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끌려간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상충한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눈이 먼 직후인 1046년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의 미망인인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와 결혼했고 1059년 8월 30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페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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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59년에 사망했을 것 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둘 다 확실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