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니타 아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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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니타아츠시사진.jpg
邪道(
大仁田厚( / Atsushi Onita


1. 프로필
2. 개요
3. 커리어
3.2. FMW 활동 시절
3.3. 프리랜서 시기
3.3.1. 신일본 프로레슬링 참전
3.3.2. 정치인 커리어
3.3.3. 이후
4. 은퇴의 아이콘
5. 기타
6. 둘러보기


1. 프로필[편집]


파일:오니타아츠시사진2.jpg
본명
오니타 아츠시 (大仁田厚)
닉네임
오니타 아츠시
그레이트 니타
생년월일
1957년 10월 25일 (66세)
출생지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신장
181cm[1]
체중
100kg
피니시 무브
썬더 파이어 파워밤
별명
사도(邪道)
눈물의 카리스마

입장곡
Wild Thing


2. 개요[편집]


일본의 프로레슬러, 정치인, 연예인.

일본 프로레슬링 주류에 맞서 인디 프로레슬링과 데스매치 붐을 이끌어 낸 이단아. 이른바 전류폭파 데스매치를 고안해 냄으로써 세계적으로도 데스매치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일본 레슬링계를 뒤흔든 선구자이자 반란자라고 불리며 이런 인기에 힘입어 일본 참의원에 당선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2017년일곱번째 은퇴를 선언한 시점에서는 팬들의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2018년 10월, 1년도 되지 않아 또 복귀한다.


3. 커리어[편집]


나가사키 출신. 오니타의 회고에 따르면 본래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집안 사정으로 인하여 궁핍하게 자랐다. 이때 당시 자이언트 바바를 소재로 한 만화인 자이언트 태풍을 읽고[2] 고등학교를 중퇴하여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하며 프로레슬링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3.1. 전일본 프로레슬링 활동 시절[편집]


1972년 전일본 프로레슬링이 성립된 시점에서 최초의 입문생 중 하나. 창립자인 자이언트 바바의 심부름꾼으로 오랫동안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미국 등에서 활동한 뒤 전일본으로 복귀하여 주니어 헤비급의 대표 간판 스타로 활약했다. 하지만 오니타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맹활약하던 초대 타이거 마스크의 활약에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1985년 무릎 부상으로 인해 27세라는 젊은 나이로 첫 번째 은퇴를 맞게 된다. 이렇게 오니타는 전일본을 떠났지만 자이언트 바바에게 전해받은 프로레슬러로서의 자세와 인간적인 교류는 이후로도 줄곧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한다.


3.2. FMW 활동 시절[편집]


이후 1988년에 프로레슬러로 복귀하여 활동하던 가운데 인디 단체인 프론티어 마셜아츠 레슬링(Frontier Martial-Arts Wrestling; FMW)를 창설한다. FMW의 두 축 중 하나는 당시 일본에서 인기를 끌던 이종격투기였지만, FMW의 또다른 축이자 오니타의 이름을 널리 떨치게 한 계기는 데스매치의 본격적인 도입이었다.

그중에서도 FMW와 오니타의 결정적인 상징이 된 것은 가시철선 전류폭파 데스매치. 링 로프 대신 전류가 흐르는 가시철선을 설치하고, 거기에 더해 플라스틱 폭탄들을 걸어놓는 데스매치는 첫 선을 보였을 때 "알았으니 이제 그만둬!"라는 관객들의 절규를 낳을 정도로 큰 파급력을 낳았다. UWF 등 당시 일본에서 인기를 끌던 종합격투기 지향의 프로레슬링과는 정반대 방향을 향해 치닫는 이러한 데스매치는 많은 매니아들을 낳았으며, FMW와 오니타는 신일본 프로레슬링 등 메이저 프로레슬링 단체를 위협할 정도로 큰 화제를 낳는다. 전류폭파 데스매치의 탄생 비화를 다룬 기사 전성기에는 가와사키 구장에서 6만명에 가까운 관객 등을 동원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1995년 2번째 은퇴 선언을 했지만 1996년 복귀.[3] 하지만 로스터 내부 불화로 인하여 1998년 결국 FMW에서 방출되어 프리랜서로 전직하게 된다. 그리고 3년 뒤 FMW는 여러 사고들로 인하여 결국 문을 닫고 만다.


3.3. 프리랜서 시기[편집]



3.3.1. 신일본 프로레슬링 참전[편집]


프리랜서가 된 오니타가 눈을 돌린 곳은 바로 일본 최대의 메이저 프로레슬링 단체인 신일본 프로레슬링. 투혼삼총사가 맹활약하고 종합격투기 기조의 이노키즘이 꿈틀거리던 와중에 오니타는 당시엔 이미 은퇴한 상태이던 현장감독 초슈 리키에게 막무가내로 도전을 걸었다. 이후 사사키 켄스케, 쵸노 마사히로, 그레이트 무타 등과의 승부를 펼친 끝에 초슈 리키와 승부를 펼치기에 이른다.

당시 메이저이자 정통 프로레슬링을 자부하던 신일본 프로레슬링 팬들에게 있어 "데스매치나 일삼는" 오니타 아츠시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이자 사도(邪道) 그 자체. 오니타가 출전할 때는 각종 쓰레기와 오물들이 날아들기 일쑤였으며, 오니타는 희대의 악역 언더독으로서 유례가 없는 족적을 남긴다.[4]

초슈에게 패배한 이후 오니타는 신일본에 더이상은 출전하지 않았다.[5]


3.3.2. 정치인 커리어[편집]


신일본 커리어 뒤 오니타가 눈을 새로이 돌린 곳은 다름아닌 정치권. 2001년 일본 자민당 소속 일본 참의원으로 당선되어 2007년까지 국회의원직을 맡았다. 파벌은 "고이즈미 칠드런"으로 불렸던 83회 소속이었다. 하지만 결국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하여 그리 성공적인 과정을 밟지는 못했다.


3.3.3. 이후[편집]


참의원 임기가 끝난 이후 나가사키 지사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 프로레슬링에서도 여러 단체를 만들고 은퇴와 번복을 반복하는 등 팬들의 신망을 점점 잃었다. 결국 2017년 10월 31일에 7번째로 은퇴를 한 상태. 2018년 1월엔 또 갑자기 사가현 칸자키 시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선언했다고. 그러나 4월 15일 개표 결과 낙선했다. 그래도 4년 뒤 재출마 의사를 밝혔다. 낙선 후 인터뷰
조용히 지내나 싶었는데 뜬금없이 레슬러 복귀를 선언했다. 은퇴한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복귀한다는 것에 팬들은 다들 어이없어 하는 상황. 본인 말로는 '봉사' 레슬러로 복귀한다고 하는데 은퇴투어에 돈을 쓴 팬들은 죄다 뒷통수를 맞게 되었다.,복귀 트윗 복귀 심정 인터뷰

2019년 초에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 수술을 했다. 그리고 그후에 살만해지니 바로 가시철선 데스매치로 복귀 선언(...). 역시나 은퇴의 아이콘.


4. 은퇴의 아이콘[편집]


문서 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은퇴를 꽤나 많이 한 편이다. 문제는 이러한 은퇴 행보가 지나칠 정도로 잦아서 문제인 사람. 첫 은퇴야 부상에 의한 은퇴였다지만 이후에는 거의 돈 벌이용 복귀와 은퇴 투어를 다닌다고 봐야할 정도로 반응이 안좋은 사람이다.

특히 2018년 복귀 선언의 경우 1년 전 은퇴 때 노모와 동생까지 불러서 링 위에서 감동의 은퇴식까지 열어놓고, 복귀하는 거라 반응이 최악이다.

물론 다른 프로레슬러들 중에서도 은퇴를 번복하기 다시 선수로 복귀한 경우가 존재한다. 릭 플레어[6], 테리 펑크[7], 저스틴 크레더블[8] 등의 인물이 있지만 오니타처럼 속이 뻔히 보이는 은퇴 복귀의 경우는 없기에 오니타가 괜히 욕 먹는게 아니다. 이런 비슷한 인물이 종합격투기에도 있는데 전 UFC의 챔피언이자 레전드였던 BJ 펜. 그러고 보면 막장스런 성격에 적이 많고 매번 은퇴한다고 눈물쇼 했다가 귀신같이 복귀하는걸 밥먹듯이 하는게 똑같다.(...)


5. 기타[편집]


  • 크리스 제리코가 자서전인 <라이언스 테일>에서 그를 깠다. 레슬링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도 FMW 활동 당시 제리코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오니타에 대해서 치를 떠는 것이다.[9] 링크 그래도 나중에 말하기를 레슬링 실력이나 인성은 별로지만 마이크 하나로 관객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대단했다고 인정은 했다.
  • 하드코어 전문 레슬러라 경기력보다는 하드코어 경기에 특화된 모습을 보여주기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오니타의 프로레슬러로써 기량은 농담으로라도 좋게 봐주기는 힘들 정도. 크리스 제리코는 키도 작은 주제에 허접한 파워 밤을 자기는 존나 잘쓰는줄 안다고 깔 정도. 신일본 침공 각본때도 사사키 켄스케를 상대로 파일 드라이버를 몆번이고 자세를 잘못 잡기도 했다. 물론 1985년부터 오니타를 괴롭힌 양쪽 무릎 상태가 엉망인것도 한몫했다. 케빈 내시가 대학 시절에 당한 무릎 십자인대 부상으로 힘 쓰는 기술이 어설펐던 것과 스캇 스타이너가 뺑소니 교통사고 이후 경추 손상으로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는 증상이 생겨 자신의 시그니처 기술들을 봉인해야 했던것과 같은 이치. 이러니 하체힘이 필요한 기술들을 쓸때마다 어설프고 위태위태했던게 당연했다. 결국 2019년에 양쪽 무릎 모두 인공관절 수술을 했을 정도. 애초에 레슬링적 기량보다 하드코어란 분야를 개척하면서 하드코어적 연출에 비중을 두다 보니 레슬링 기량은 기본만 하면 되었어서 기량 향상이 되지 않은것도 있다. 덕분에 그 엉망인 무릎 상태에서도 하드코어 레슬러로써 방향전환을 한게 겉으로는 무지막지하고 잔인해보이지만 힘쓰는 기술이나 무리한 착지 등을 할일이 없으니 역설적으로 선수생활을 오래할수 있었던거지만.
  • 한국 미디어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비정상회담에서 오오기 히토시가 은퇴의 아이콘으로 소개하였다. 링크
  • 이왕표의 데뷔 상대이다. 데뷔전이다 보니 결과는 당연히 오니타 아츠시가 승리하였다.
  • 2020년 5월 경, 자신은 한국 음식과 같은 문화를 좋아하지만 위안부는 강제 동원이 아니라며 지속적인 한국의 배상 요구는 그릇된 것이라는 트윗을 썼다. 링크 또한 2020년 6월 24일. 일본의 군함도 유네스코 등재를 하지 말아달라는 한국의 요구를 비판했다.# 그런데 한국 선수인 시호와 사진을 찍는다던가 한국 만화를 좋아한다고 한 것을 보아, 한국 자체를 싫어하는게 아니라 생각이 없는 듯 하다(...).

  • 1993년 포니 캐니온에서 오니타를 주연으로 한 sfc 대전격투게임을 낸 적이 있으나 쿠소게로 취급되고 있다.

  • 프로레슬링 만화인 근육맨의 애니판에서 그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인 아나운서 "코니타"로 등장한다.


6. 둘러보기[편집]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선정 최고의 선역
스팅
(1992)


오니타 아츠시
(1993, 1994)


페로 아과요
(1995)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선정 가장 카리스마 있는 선수
릭 플레어
(1993)


오니타 아츠시
(1994)


숀 마이클스
(1995)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최우수 태그팀 상
탄환(弾丸() 양키즈
(다나카 마사토 & 스기우라 타카시)
(2014)

동향전류폭파(同郷電流爆破()태그
(나가요 치구사 & 오니타 아츠시)
(2015)

스트롱 BJ
(세키모토 다이스케 & 오카바야시 유지)
(2016)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노력상
소노다 카즈하루
코바야시 쿠니아키
스네이크 아사미
이시카와 타카시
(1978)

아라카와 마코토[10]
타카스기 마사히코

오니타 아츠시
(1979)


프린스 통가
죠지 타카노
마하 하야토
(1980)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03:58:41에 나무위키 오니타 아츠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프로필상. 크리스 제리코의 언급으로 미루어보면 실제키는 170cm대 중반으로 추정되며(제리코의 프로필상 신장도 180cm) 노년기에다 갖은 부상이 쌓인 뒤로 수차례 수술을 해서 2023년 기준으로는 키가 더 줄어들었을것이다.[2] 1968년에서 71년사이 연재된 만화였다.[3] 관계자들의 말이 엇갈리는 부분. 오니타 측에서는 회사 측의 복귀 요청에 응했다고 주장하지만, FMW 측에서는 새로운 단체의 에이스인 하야부사에 대한 질투 등으로 인하여 당시 최대 주주였던 오니타가 억지로 복귀했다고 주장한다.[4] 이 당시 경기장 입장하면서 입고 있는 가죽자켓과 입에 꼬나문 담배가 정말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보여줬었다.[5] 당시 행적을 기록한 글 1 2 3 4 5[6] WWE 은퇴 이후 전 부인들에게 지급해야 할 위자료 때문에 복귀.[7] 부상으로 처음 은퇴한 뒤 이후 복귀해 활동하다가 다시 은퇴했지만 노년의 나이에 ECW로 복귀해 하드코어의 전설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오니타와 비슷한 모습.[8] 이쪽도 은퇴 투어라 거창하게 홍보해놓고 몇 달만에 다시 복귀했다.[9] 사실 제리코 뿐만이 아니라 인성에서는 좋은 얘기가 안 나오는 사람이다. 잠깐 사사한 큐티 스즈키조차도 인터뷰에서 대놓고 싫다고 깠을 정도.[10] '마에자의 역도산' 돈 아라카와라는 링네임으로 더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