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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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오능조(吳能祚)
생몰
1889년 6월 9일 ~ ?
출생지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광석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오능조는 1889년 6월 9일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광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숭실학교 교사, 중화 해압면장 겸 장로교회의 조사(助事)를 맡았고, 고향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1919년 9월 1일에는 숭실학교 내에 고진한(高鎭漢)·황포덕삼(黃浦德三)·허영진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사회에 진출해서도 계속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 등 각지를 전전하다가 상해로 가서 동년 10월 31일에는 박은식·박환(朴桓)·박세충(朴世忠)·안정근·안종술(安宗述) 등 민족대표 30명의 한사람으로서 서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의 제2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일본 정부에 대하여 국내에서의 철수 퇴거를 요구하였다.

1919년 11월 1일에는 김시점(金時漸)·김승만(金承萬) 등 17명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취지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발기인으로서 참가하였다. 그리고 동년 11월 2일에는 김승만(金承萬)·오순근(吳淳根)·김두만(金斗萬)·이영식(李英植)·박춘근·김시점(金時漸)·오학수·장재순(張裁淳)·신기갑·김찬성(金燦星)·최지화(崔志化) 등과 함께 안동현임시의사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 26일에는 김승만·김시점 등과 함께 20개 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대한청년단연합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그는 유건혁(柳健赫)과 함께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총재인 김승만, 부총재인 박춘근을 보필하여 조직 확대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교통부 관서지부를 평양에 설치하고 활동중 지부장 김동환(金東煥)이 1919년 11월 27일 체포됨에 따라 도피하였다.

1920년 4월 19일에는 다시 “대한청년단연합회” 제2회 정기총회가 59개단체 108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어 안병찬을 총재로 선출하였으며, 그는 다시 서기로 임명되어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5월 3일 유하현 홍통구(弘通溝)에서 안병찬(安秉瓚)·박도명(朴道明)·김인홍(金仁弘)·양원모(梁元模) 등 간부 5명이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중국관헌의 적극적인 반대로 구출되었으며, 1925년 9월에는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오능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