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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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비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로마노바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Еле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России


파일:Elena Vladimirovna of Russia.Princess Nicholas of Greece.jpg

이름
러시아어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로마노바
(Еле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Романова)
그리스어
엘레니 블라디미로브나 로마노바
(Ελένη Βλαντιμίροβνα Ρομανόβα)
출생
1882년 1월 29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957년 3월 13일 (향년 75세)
그리스 왕국 아테네
배우자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
(1902년 결혼 / 1938년 사망)
자녀
올가, 엘리사벳, 마리나
아버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1]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
형제
알렉산드르, 키릴[2], 보리스, 안드레이
종교
러시아 정교회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결혼
2.3. 계속되는 망명
2.5. 말년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의 황족이자 그리스 왕국의 니콜라오스 왕자의 아내.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의 고명딸이자 막내이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파일:Vladimir_Alexandrovich_of_Russia_with_family_by_S.Levitskiy_(c.1883).jpg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일가, 1883년

1882년에 러시아의 블리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보통 미헨 대공비라고 불리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애칭은 엘렌.

어릴 때부터 신경질적이고 거만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불과 4살 때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포즈를 잡던 중 짜증난다는 이유로 종이칼로 보모를 위협했다고 한다. 또한 대부분의 러시아 여대공이 그러하듯 자신의 신분에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2.2. 결혼[편집]


사교계 명사이자 야망가였던 미헨 대공비는 하나밖에 없는 딸의 혼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옐레나를 미래의 통치 군주의 아내로 만들고 싶어했다. 1898년에 옐레나는 바덴의 막시밀리안과 약혼했다. 막스라고 불리던 바덴의 막시밀리안은 러시아 황실의 친척이자 바덴 대공국의 후계자로, 당시 유럽 왕실에서 누구나 탐내던 신랑감이었다. 그런데 막스는 특별한 이유 없이 옐레나와 파혼을 해버렸다.[3] 이 파혼으로 옐레나의 체면은 크게 손상되었다. 그리고 유럽 통치 가문 내에서 옐레나한테 어떤 하자가 있어서 파혼당한 게 아니냐는 말이 돌면서 옐레나의 혼삿길이 막힐 위험에 처했다. 대노한 미헨 대공비는 다른 신랑감을 물색했지만 혼담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옐레나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1894년에 리비디아에서 열린 파티에서 처음 만난 옐레나와 그리스의 니콜라오스 왕자는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이였다. 1900년에 니콜라오스 왕자는 정식으로 옐레나에게 청혼했다. 미헨 대공비는 가난하고 왕위 계승 가능성이 없는 셋째 왕자인 니콜라오스를 못마땅하게 여겨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나 마땅한 사위 후보를 찾지 못하자 미헨 대공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둘의 결혼을 허락했다.


파일:Grand Duchess Elena Vladimirovna of Russia and Prince Nicholas of Greece and Denmark.jpg

러시아의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과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 1902년.

1902년 8월, 옐레나와 니콜라오스는 러시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4] 그리스로 떠나는 옐레나를 보면서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콧대 높은 성격의 옐레나가 그리스 왕가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러나 서로 진심으로 사랑한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부부는 니콜라이 2세가 선물한 아테네의 니콜라오스 궁전(현재 그리스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 건물)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출중한 미모로 유명한 세 명의 딸을 낳았는데, 막내 마리나를 낳을 때 옐레나가 난산으로 죽을 뻔하자 부부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특유의 거만한 성격이 어디 간 게 아니라서 그리스에서 지내면서도 다른 동서들을 무시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특히 신분이 떨어지는 마리 보나파르트[5][6]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7][8]를 업신여기곤 했다.[9]

그만큼 옐레나는 자신이 러시아 황제의 손녀이자 러시아의 여대공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딸이자 옐레나의 시조카인 소피아 공주는 그런 옐레나를 "하느님이 최우선이며 그 다음이 러시아 대공,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모두"였다고 회상했다.

2.3. 계속되는 망명[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옐레나의 삶은 급격한 혼란과 마주했다. 1917년에 니콜라오스의 형 콘스탄티노스 1세가 총리대신의 압박으로 왕위를 양도하고 망명하게 되면서 옐레나와 가족들 또한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던 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면서 옐레나의 자산이 몰수당하고 수많은 친척들이 살해당했다. 자신의 자부심의 근간이 무너지자 옐레나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처음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20년에 콘스탄티노스 1세가 재즉위하게 되면서 그리스로 돌아갔다. 그러나 1922년에 콘스탄티노스 1세가 튀르키예 독립전쟁 패전의 책임을 지고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다시 망명을 하게 되었다. 유럽 전역을 떠돌던 옐레나와 니콜라오스 부부는 동서 마리 보나파르트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 살았다. 부부는 니콜라오스의 수입[10]과 옐레나가 상속받은 보석으로 생계를 꾸렸으며, 옐레나는 프랑스에 망명 중인 백계 러시아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1935년에 그리스 왕정이 복고되고 부부는 그리스로 돌아갔다. 1938년에 급격하게 건강이 안 좋아진 니콜라오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11] 옐레나는 과부가 되었다.


2.4.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41년에 그리스가 침공을 당하면서 대부분의 그리스 왕족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옐레나와 앨리스 왕자비는 그리스에 머물렀다. 본래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사람이었지만[12] 같이 지내면서 점점 가까워지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같이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6년에 그리스 왕정이 다시 회복되면서 옐레나는 다른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었다.


2.5. 말년[편집]


전쟁이 끝나고 여생을 그리스에서 보냈다. 왕실의 어른으로써 다른 왕족들과 긴밀한 사이[13]를 유지하고 여러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1957년에 가족들 사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 타토이 궁 왕실 묘지에 남편과 함께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 제국 여대공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Grand Duchess Elena Vladimirovna
of Russia)

러시아 제국의 대공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Grand Duke Vladimir Alexandrovich
of Russia)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of Russia)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헤센의 공녀 마리
(Princess Marie of Hesse)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Ludwig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바덴의 공녀 빌헬미네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Duchess Marie
of Mecklenburg-Schwerin)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Friedrich Franz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파울 프리드리히

(Paul Frederick,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프로이센의 알렉산드리네 공주
(Princess Alexandrine of Prussia)
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타
(Augusta of Royce-Kösstreets)
로이스-쾨스트리츠의 하인리히 63세
(Heinrich LXIII, Prince Reuss of Köstritz)
슈톨베르크-베르니게로데의 엘레오노레 여백작
(Countess Eleonore of Stolberg-Wernigerode)


3.2. 자녀[편집]



파일:AE09DB8F-16F6-46B4-9FD3-B76F59D4BB82.jpg

왼쪽부터 올가, 엘리사벳, 마리나 공주, 1910년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유고슬라비아의 올가 왕자비
(Princess Olga of Yugoslavia)
1903년 6월 11일
1997년 10월 16일
유고슬라비아의 파블레 왕자
슬하 2남 1녀
2녀
퇴링-예텐바흐 백작부인 엘리사벳
(Elizabeth, Countess of Törring-Jettenbach)
1904년 5월 24일
1955년 1월 11일
퇴링-예텐바흐 백작 카를 테오도르
슬하 1남 1녀
3녀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왕자비
(Princess Marina, Duchess of Kent)
1906년 12월 13일
1968년 8월 27일
켄트 공작 조지 왕자
슬하 2남 1녀[14]


4. 여담[편집]


  •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러시아 여대공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자부심이 매우 높았고, 이로 인해 동서들을 무시하고 다녀서 그들과의 사이가 꽤 안 좋았다. 막내딸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공주의 결혼식 때 자신이 HIH & HRH이라는 경칭을 써야 한다고 주장해 사돈인 조지 5세를 매우 골치 아프게 하기도 했다.[15] 이 때문인지 막내딸 마리나도 자신이 통치 가문의 공주라는 걸 매우 자랑스러워해서 윗동서인 엘리자베스 왕비를 귀족이라고 노골적으로 무시해 사이가 안 좋았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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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렉산드르 2세의 3남.[2] 빅토리아 멜리타의 두번째 남편.[3] 파혼의 주 이유가 막스의 동성애 성향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파혼으로부터 2년 뒤인 1900년에 막스는 하노버의 마리 루이제와 결혼했다.[4] 니콜라오스 왕자의 어머니 올가 왕비가 옐레나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친사촌이기에 옐레나와 니콜라오스는 육촌.[5]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남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6] 당시 그리스의 영국 대사는 그녀들의 갈등을 에드워드 7세에게 보고했다. 마리 보나파르트가 지나가자 옐레나는 더럽다는 듯이 몸을 뒤로 빼고 옷도 스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 7세는 마리는 돈이 많으니 금방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7] 요르요스 1세의 4남 안드레아스 왕자의 부인. 필립 마운트배튼의 어머니다.[8] 앨리스 왕자비는 동생 루이즈 마운트배튼스웨덴왕세자비가 되었을 때, 아들 필리포스 왕자가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했을 때 옐레나의 마음 속 자신의 지위가 조금이나마 높아졌다고 말했다.[9] 심지어 큰 윗동서인 프로이센의 조피도 옐레나를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10]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림이 꽤 잘 팔렸다고 한다.[11] 자신의 나라인 그리스에서 죽을 수 있어 행복하다는게 마지막 말이었다.[12] 당시 앨리스 왕자비의 편지를 보면 옐레나에 대해 굉장히 좋게 말하지만 옐레나는 계속 앨리스를 뒷담화했다.[13] 당시 왕세자였던 콘스탄티노스 2세가 가장 좋아하는 친척 어른이었다고 한다.[14] 켄트 공작 에드워드, 켄트의 알렉산드라 공녀, 켄트의 마이클 공자[15] HIH(Your/His(Her) Imperial Highness)는 황족에 대한 경칭이고 HRH(Your/His(Her) Royal Highness)는 왕족에 대한 경칭이다. 자신이 단순히 그리스 왕국의 왕자비가 아니라, 황족이기도 하다는 걸 강조하려는 허영심 가득한 요구였던 것.[16] 엘리자베스 왕비도 가만히 있지 않고 켄트 공작가의 재정 지원을 줄여버리거나 마리나의 딸 켄트의 알렉산드라 공녀에게 본인의 들이 입던 헌 옷을 물려주는 식으로 보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