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자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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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임총통(부총통이 승계)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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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5대 총통
옌자간
(ㄧㄢˊ( ㄐㄧㄚ(ㄍㄢˋ(엄가감)[1] | Yen Chia-kan


파일:엄가감.jpg

출생
1905년 10월 23일
장쑤성 오현
사망
1993년 12월 24일 (향년 88세)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재임기간
제4대 부총통
1966년 5월 20일 ~ 1972년 5월 20일
제5대 부총통
1972년 5월 20일 ~ 1975년 4월 5일
제5대 총통(계임)
1975년 4월 6일 ~ 1978년 5월 20일
학력
상하이 성 요한 대학교 화학과 학사
최종 당적


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중화민국정치인 겸 경제관료.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자 부총통으로서 총통직을 계임해 3년간 재임하였다가 1978년 국민대회에서 진짜 후계자격인 장징궈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름자 淦은 '물 이름 감'인데, 에 이끌려 엄가'금'으로 잘못 읽는 경우도 있다.


2. 생애[편집]


청나라 강소성 오현[2] 출신이며, 푸젠성 정부주석 천이의 밑에서 푸젠성 정부 직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 ~ 1939년 푸젠성 정부 건설청장으로 있었으며, 1941년에는 전국의 토지세를 확보하는데 노력했다. 이후 1945년, 그의 상관이었던 천이가 타이완성 행정장관에 임명됨에 따라 그의 부름을 받고 타이완 섬으로 건너갔다. 1950년 1월 26일, 옌시산 내각에서 경제부장 유항침이 사퇴하자 후임 경제부장에 임명되었다. 우궈전 사건 이후 1954년 ~ 1957년 타이완성 주석을 역임했으며 경제통으로 1957년 미국원조자금운용위원회 주임을 맡은 뒤 1958년부터 재정장관으로 취임,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3년 12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천청이 행정원장을 사직함에 따라 후임 행정원장으로 취임했으며, 장징궈를 자신의 내각 국방부 부부장으로 임명하여 그의 성장을 도왔다. 1965년 1월에는 장징궈를 국방부장에 임명하여 군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1966년 3월 1기 4차 국민대표대회에서 새로운 총통과 부총통을 선출할 시기가 왔는데 장제스의 후계자가 중화혈통? 장징궈라는 것은 웬만하면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장징궈를 대놓고 부총통에 임명하는 것은 눈총을 사는 일이었기 때문에 관료로서는 유능해도 정치적으로는 큰 영향력이 없는 옌자간이 부총통 후보에 선정되었다. 옌자간은 당연히 부총통에 당선되어 행정원장을 겸임하였다. 1969년 3월 29일부터 4월 9일까지 개최된 중국 국민당 1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4월 10일에 개최된 10기 1중 전회에서 중앙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71년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의 개최, 상하이 코뮈니케 발표, 1972년 닉슨-마오쩌둥 회담이 개최되는 등 중공과 미국의 관계가 급진전되자 1972년 3월 3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파견한 미합중국 태평양담당 국무차관 마샬 그린 특사를 만나 미국의 공동방어조약 의무 수행에 대한 확언을 받아내고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 과정에 관한 브리핑을 받았다. 허나 장제스는 미국에 화가 나서 그린을 만나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있었다.

1972년 국민대회가 개최되자 5대 부총통에 선출되었는데 TTV에서 방영한 취임식 중 장제스와 옌자간이 마주 보는 장면에서 "형님, 큰일났습니다! 서량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大哥, 不好了! 西涼兵來了!)"라는 자막이 등장하는 대형 방송사고가 터지는 일이 있었다. 이는 당시 방영되고 있던 대만의 TV 드라마에 나온 대사였고, 당연히 방송사고였지만, 생방송 중에 나온 것이어서 불길한 장면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형 사고를 친 방송 관계자들은 15분 뒤 TTV에 들이닥친 헌병들에 의해 끌려갔다.

5대 부총통 당선 6일 만에 그간 겸임하고 있던 행정원장 직에서 사임하고 장징궈를 행정원장에 임명하여 국가의 전권을 행사하게 했다. 1975년 장제스의 죽음이 다가오자 3월 29일 장제스의 호출을 받고 장제스의 유언장에 서명하여 삼민주의 실천, 대륙광복 달성에 대해 다짐했다. 4월 5일 장제스가 사망하자 4월 6일 중국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임시회의를 통해 총통에 취임했다. 4월 26일, 중국 국민당 중앙위원회가 장제스를 영원한 국민당 총재로 추서하는 한편, 장징궈를 중국 국민당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추대함에 따라 장징궈가 완전히 국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장징궈를 대신하는 얼굴마담으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자신에게 재선을 예의상으로 권하는 당시 행정원장였던 장징궈의 제안을 거부하고 1978년 1월 9일, 총통 명의로 1기 6차 국민대표대회를 2월 19일 타이베이에서 소집한다고 공고했다. 2월 19일부터 3월 25일까지 소집된 국민대회에서 장징궈가 6대 총통에 당선됨에 따라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1981년 소집된 국민당 12기 1중전회에서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1991년까지 중화문화부흥운동추진위원회 위원장과 국립고궁박물원 위원을 지냈다. 1988년 장징궈가 사망했을때 국민당 주석 서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1993년 12월 24일, 심장질환으로 사망했으며 1994년 1월 22일에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총통부 근처에 있는 그의 사택은 대만에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3. 참고문헌[편집]


  • 중국당대40년사, 신승하, 고려원.
  • 대만현대정치사 1,2권, 장성구, 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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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어병음 : Yán Jiāgàn[2] 현재의 쑤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