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실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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芮悉弗

(? ~ ?)

고구려 문자명왕 때의 인물

504년,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동당(東堂)에서 선무제[1]와 만나서 나눈 대화가 남아있다.

정시 연간[2]

에 세종[3]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4]

는 섭라[5]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

《위서》 열전 고구려


얼핏 보면 '백제랑 물길이 설쳐서 공물 못 바치겠습니다.'라는 고구려를 북위가 '니 구역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타이르는 모습이지만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대해서 몇가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화이기도 하다.

우선 섭라와 부여가 백제, 물길에 의해 위협을 받거나 혹은 점거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구려의 남진은 교착 상태에 이르렀으며 백제는 탐라국을 이 즈음에 복속시킨 기록이 있다(백제 동성왕, 탐라국 지운왕). 또한 이 시기 말갈이 북방의 주요 세력으로 대두된다.

두번째는 그러한 위협이 있음에도 백제말갈, 남해와 부여를 포함한 동방의 세계에는 고구려가 군림한다는 북위의 은유이다. 천하가 중화질서 하나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너도 나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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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몰년 483~515. 북위의 8대 황제로 북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2] 正始, 북위의 연호, 서기 504~507년, 문자왕 13~16년[3] 북위 선무제의 묘호.[4] 마노 혹은 옥[5] 탐라국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