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총대주교구(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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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대주교청 위치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아르메니아인 쿼터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총대주교구청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총대주교구이다. 레반트 지역의 남부에 해당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요르단 일대를 관할하고 있다. 레반트 북부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를 관할한 총대주교구는 시스와 킬리키아의 카톨리코스-총대주교라고 해서 오늘날에는 레바논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1. 역사[편집]


총대주교 관련한 내용은 예루살렘 총대주교(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문서 참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서기 506년부로 교리 차이로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와 분리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예루살렘 근교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따로 예루살렘에 독자적인 교구를 세우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예루살렘은 서기 637년 정통 칼리파 시대 2대 칼리파 우마르 치하의 아랍 무슬림들에게 정복당했고, 이듬해 638년 예루살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브라함 1세를 총대주교로 삼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는 성지 예루살렘에 총대주교구를 설치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관하의 신자는 7천여 명 정도이다.

아이유브 왕조 살라딘 시기에도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대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 시절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의 구시가지는 무슬림 구역, 기독교인 구역, 유대인 구역 그리고 다른 기독교인들과 별개의 아르메니아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른바 아르메니아 쿼터는 예루살렘 구시가지 면적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신민들을 밀레트 제도라고 하여 종교에 따라 분류했기 때문이다.

근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결과 킬리키아 총대주교구가 일시적으로 유명무실화되면서[1] 일시적으로 레반트 지역 전체를 관할하기도 했다.

1920년대 영국령 팔레스타인 통치 시기에는 약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내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2만여명 가량으로 증가하기도 했었다. 다만 제1차 중동전쟁과 이스라엘 독립 전쟁 이후 아르메니아인과 사이가 나쁜 유대인들이 실세가 되면서 아르메니아인 상당수가 추방되면서 관할 교구 내 신자 수가 감소하였다.

파일: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청 내부.jpg
  •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청 내부

해당 총대주교청은 비교하자면 이슬람의 알 아크사 모스크 수준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는 건물이다보니,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런저런 차별상에도 불구하고 구시가지 아르메니아 쿼터 내 체류를 고집하였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국제 사회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고 나서야, 동예루살렘 및 서안지구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이스라엘로부터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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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에는 레바논으로 이전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