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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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영락교회
永樂敎會 | Youngnak Presbyterian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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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1945년 12월 2일[1]
소속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노회
서울노회
초대목사
한경직
원로목사
이철신
위임목사
김운성
연도표어
말씀따라 행진하라 (민수기 9장 23절)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로 33 (저동1가)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역사
3. 역대 담임목사
4. 건물
5. 여담



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중구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교회이다.

대한민국 최초 대형교회라 할 수 있다. 현재 예장통합 교단을 대표하는 교회 중 하나이다.


2. 역사[편집]


1945년 12월 2일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성도들이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모여 설립예배를 드렸다. 처음 교회 이름은 '베다니 전도교회'이다. 적산가옥인 천리교 경성분소를 불하받았다. 이를 개조하여 예배장소로 사용했다. 창립 직후에 주일학교 유년부와 성가대, 청년부, 부인전도회가 조직되었다.

1946년 교회 이름을 '영락교회'로 하였다. 직후 인천광역시 첫 장로교회인 인천제일교회를 개척하였다.[2]

당시 월남한 사람들은 영락교회 또는 충현교회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이 사람들은 한두달 영락교회에 천막을 치고 살며 일자리를 구했는데 이런 천막이 영락교회 주변에 빼곡했다. 한경직 목사의 뛰어난 설교와 북쪽에서 온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합쳐지면서 교세가 급성장했다.

1940년대에 당시 보기 드물게 주일 예배를 2부에 나누어 드렸다. 2년 간 천막을 치고 교회당으로 개조해 사용하던 중 1947년 폭우로 교회가 물에 잠기자 교인 3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다. 1950년 완공되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여 정상적으로 예배를 치르지 못하다가 휴전 후 1954년에 헌당 예배를 드렸다.

한국전쟁 발발 당일까지 낮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부터 실시하지 못했다. 당시 영락교회 교인들의 엄청난 신앙심을 볼 수 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예배당을 인민군이 점령하려 하자 이를 막던 김응락 장로와 김창화 집사가 순교한 일이 있다. 1951년 1.4 후퇴 후 각 피난지의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하였는데 그것이 지금의 부산영락교회[3], 대구영락교회[4], 제주영락교회[5]로 이어진다.

1955년 첫 해외 선교사로 최찬영 선교사를 태국으로 파송하였다. 1957년에는 영락중학교, 영락고등학교, 영락유치원, 영락여자신학교 [6]를 개교하였다. 1969년 꾸준히 교회가 성장하자 성도들의 체계적인 양육을 위해 교구제를 실시해 3개 교구를 두었고, 현재 18개 교구가 있다.

영락교회는 월남한 신자들이 많았으므로 신탁통치반대운동, 반공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문제는 이게 정도가 지나쳐서, 한국 근현대사의 명백한 과오인 서북청년단을 조직하여 백색테러를 일으키고 수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는 것이다.

피난민구제와 전도사업, 개척교회 설립, 농아전도, 해외선교사파송, 교육사업 및 사회복지사업에 힘써 왔다.


3. 역대 담임목사[편집]


No.
성명
재임기간
주요경력
제1대
한경직
1945년 - 1973년
1973년 1월 2일 정년퇴임 및 원로목사 추대, 2000년 4월 19일 소천
동사목사[7]
강신명
1947년 - 1955년
새문안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
제2대
박조준
1973년 - 1984년
갈보리교회 원로목사
제3대
김윤국
1985년 - 1987년
전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장
제4대
임영수
1988년 - 1997년
전 모새골 공동체 이사장[8]
제5대
이철신
1997년 - 2018년
영락교회 원로목사
제6대
김운성
2018년 -



4. 건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영락교회/건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여담[편집]


  • 일제 때 폐교됐던 숭실전문학교가 1954년 숭실대학교란 이름으로 남한에서 다시 개교할 때 영락교회 내 가건물들을 학교로 이용했다. 이러면서 한경직 목사가 숭실대 1대 총장을 맡았다. 숭실대는 1957년에 현 위치인 상도동으로 이전하였다. 용산구에 있는 보성여자중학교보성여자고등학교도 1950년대에 영락교회 건물을 임시로 사용했다.


  • 예배 분위기가 매우 조용하다. 경건한 분위기의 예배를 이야기할 때 한경직 목사 시절의 영락교회와 곽선희 목사 시절의 소망교회가 모범적인 예시로 자주 거론된다.

  • 영락교회 역사를 알 수 있는 책이 있다. 『영락교회50년사』(1998), 『영락교회부흥사』(1974), 『영락교회 요람』(2017).

  • 시라소니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이성순이 출석했던 교회이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 영락교회 예배당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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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경직 목사가 베다니 전도 교회(영락교회의 옛 이름)를 세운 것이 시초다.[2] 자유공원 바로 밑에 있는 교회로 산하 재단에서 인성여자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3]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대청로 8[4] 대구광역시 동구 장등로 36-10 (신천동)[5]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2동 동광로23길 15[6] 2012년 폐교[7] 담임목사의 일을 도와 같은 업무를 맡는 것. 급격히 성장했던 당시 교회의 과중한 업무를 분담하기 위해 청빙했다. 1951년 1.4 후퇴로 각자의 피난지에서 영락교회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인 부산영락교회, 대구영락교회, 제주영락교회의 설립을 도왔다.[8] 임영수 목사는 당시 보기 드문 '협동목회'를 추진했다. 현재 유튜브 '날마다 기막힌 새벽'#을 운영하는 김동호 목사를 교육 목사로, 현재 연동교회 원로목사인 이성희 목사를 행정 목사로 청빙한 후 자신은 목사 본연의 임무인 설교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려 했다. 하지만 신자 입장에서는 담임목사가 세 명인 느낌이라 이 제도에 반대가 많았다. 결국 협동목회제는 각 부서마다 전담목사가 배치되는 '전담목회제'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