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순커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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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기.svg 랴오닝성 다롄시시할구
旅顺口区(Lǚshùnkǒu Qū

뤼순커우구 | Lüshunkou District




구정부 소재지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구 신청다지에 1
辽宁省大连市旅顺口区新城大街1号
면적
508.26km²
하위 행정구역
9가도(街道)
시간대
UTC+8 (한국과 1시간 차이)
인구
21.3만명
구장
후이카이(惠凯)
홈페이지

旅順 / 여순(한국어) / 려순(중국조선어) / Lüshun

1. 개요
2. 역사
2.1. 청일전쟁
2.2. 러일전쟁
2.3. 관동군의 시작
2.4. 태평양 전쟁 후
3. 기타
4. 교통



1. 개요[편집]


다롄시시할구 중 하나이며, 1960년 초에 뤼순시에서 뤼순커우구로 명칭이 바뀌었다.

뤼순을 영어로는 Port Arthur(포트 아서), 러시아어로는 Порт-Артур(포르트-아르투르)라고도 하는데, 19세기 이 곳에 정박한 영국군함 함장 윌리엄 아서 대위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만주랴오둥 반도(요동반도) 끄트머리에 자리잡았다. 주변에 있는 고지가 보호하는 후미진 만(灣)이 있어 천연의 항구 입지를 갖추었으며, 황해와 보하이만을 감시,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일찌기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가치를 주목받았다. 따라서 지금도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북해함대 예하 구축함지대가 이곳에 주둔해있다.

대항해시대2에서 나온 보급항인 루이슐항이 이곳이다.


2. 역사[편집]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지배하던 삼국시대에는 이곳에 비사성이 위치하였다.

그리고 요동반도의 끝자락이라는 그 지정학적 가치와 전략적 가치 때문에 대부분 이 지역은 전쟁에 휘말려왔다.


2.1. 청일전쟁[편집]


19세기 말 청나라 북양함대의 기지가 설치되었다가,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점령된다. 이 때 현장을 점령한 일본군 여단장이 훗날 같은 장소에서 곤욕을 치르게 되는 노기 마레스케.

이 때 뤼순에서는 훗날의 난징 대학살 사건을 연상케 하는 대학살이 진행되었는데,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으나 그 발단 및 전개과정이 너무나도 비슷하다. 항복 후 민간인으로 변장한 청군 병사들이 저항했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 이것이 도시 전체에서 수일에 걸쳐 진행된 것을 상부에서 무시하거나 반쯤 조장한 것. 이때 현장에서 학살을 목격한 미국인 특파원에게 일본 외교관이 정말로 학살(Massacre)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 특파원은 학살이 아니라 도살(Butchery)이었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참혹했다. 최대 희생자는 3만까지 추정할 수 있으나, 일단은 5천 명 내외가 정설이다.

청일전쟁 종전 후 뤼순, 다롄을 포함한 요동반도 남단을 일본이 조차(租借)하려 했으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압력으로 포기하니, 이것이 삼국간섭이다. 러시아가 일본에 압력을 가한 건 남하정책에 몰두하던 러시아 또한 부동항인 이 곳을 탐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1898년에 러시아와 청나라의 비밀 협정에 의거하여 뤼순은 다롄과 함께 러시아의 조차지가 되어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실질적인 모항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뤼순이야말로 러시아가 태평양에서 얻은 최초의 부동항이었기 때문이다.

2.2. 러일전쟁[편집]


이후 뤼순에는 군항과 항만방어용 요새가 건설, 확장되니 머잖아 시신으로 산을 이루고 피로 강을 이루는 참극의 현장이 된다. 10년 뒤 일본군에게는 이 곳을 다시 노렸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른바 사망 플래그 성립(…).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엔 러시아 함대를 봉쇄할 목적에서 뤼순은 그저 포위의 대상이 되었지만, 발트 함대가 다가오면서 통수부에서 뤼순을 함락시키라고 독촉하기 시작하고, 결국 일본군뤼순 공방전을 시도한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으로. 참고로 참호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접근하는 보병에게 난사하는 전술은 이로부터 10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의 유럽전선에서 대규모로 재연된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은 최초로 상정한 수준의 요새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 요새였다. 애초에 요새화의 계획된 완료시기부터 1909년이었으니 사실상 이제 막 요새 건설의 주춧돌을 놓은 데 불과했던 것.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뤼순이 공격받는 6개월 동안 러시아 공병대는 정말 미친듯이 시설들을 보강하여 강력한 요새로 변모시켰다. 3년 동안 건축한 것보다 6개월 동안 지은 게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노가다였다고.

본디 항구로서 더 적합한 곳은 뤼순이 아니라 다롄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측은 다롄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자재를 쌓아놨지만 방어시설은 고려하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군은 뤼순 항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공격한 후 바로 다롄을 점령, 일본군의 보급항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뤼순과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육상통로인 진저우(金州)[1]는 청나라 시절부터 쌓은 성곽과 참호, 요새시설들이 있었고 러시아 측의 전후분석에서도 '소수병력으로도 한달은 버틸 수 있는 요충지' 로 여겨지던 곳이였으나 금세 점령당했다.

다만 일본군 역시 뤼순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지리적인 점이야 이전에 이미 한번 공격한 적이 있으니 정보가 있었지만 러시아군이 어떤식으료 요새화를 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 또한 뤼순은 초기 공격 대상이 아니었고 해군에 의한 함대 무력화와 봉쇄작전만 행하려다 나중에서야 급하게 공략대상이 되다보니 준비도 소홀했다. 결국 일본군은 시설에 대한 정보도 없고 준비도 미흡한 채로 급하게 뤼순 공략에 나섰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2.3. 관동군의 시작[편집]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뤼순을 비롯한 주변지역 - 요동반도의 끄트머리 부분을 조차했다. 10년 전 삼국간섭으로 포기해야 했던 곳을 차지한 일본은 현지를 관동주(關東州)라 일컫고 관동도독부(이후 관동주청으로 개편)를 설치하여 만주 진출의 발판으로 삼는다. 이곳에 주둔한 군대를 "관동군"이라 한다.

관동주는 홍콩처럼 조차지로서, 99년 기한으로 청나라[2]로부터 빌린 땅으로 2004년에는 돌려 주기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영국이 홍콩이 영원히 자기 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처럼[3] 일본도 관동주를 영원히 자기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말아먹은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 따라 40년 만에 관동주를 토해내야 했다.


2.4. 태평양 전쟁 후[편집]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소련만주국을 기습 침공한다. 과거 러일전쟁에서 수개월간 격전을 치른 끝에 빼앗긴 뤼순을 이미 정예사단이 다 빠져 잡병이 된 관동군을 몰아내고 소련이 접수하여 예전처럼 해군기지로 이용하려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소련이 가지고 있을 명분이 떨어져 1955년 중국에 반환했고[4] 중국의 항구도시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 뤼순과 다롄을 합쳐 뤼다(旅大 = 順 + 連)라 하였으나, 1981년 뤼다를 다롄으로 변경하면서 다롄시의 (區)가 되었다. 현재 행정구역명은 다롄시 뤼순커우(旅順口) .


3. 기타[편집]


안중근이 순국한 뤼순감옥이 이곳에 있다. 더불어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든지 묘청의 서경 천도가 천년간 우리 역사상 중대 사건이었다는 등의 역사관으로 알려진 사학자이자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도 이곳에서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있으며, 효창공원에 그의 가묘가 위치한다.

4. 교통[편집]


다롄 지하철 12호선 중 뤼순신강(旅顺新港站)역, 뤼순역(旅顺站) 등 6개 역이 뤼순커우구에 위치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05:04:03에 나무위키 뤼순커우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현재 다롄시 내의 진저우구이다.[2] 신해혁명 후에는 중화민국, 만주국 성립 이후에는 만주국.[3] 사실 홍콩 섬구룡반도는 영구할양이었다.[4] 중국과 소련이 사이가 본격적으로 나빠지는 것은 1950년대 후반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