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진 베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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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진 베일러의 수상 이력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준영구결번
엘진 베일러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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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진 베일러
헌액 연도
1977년

2006년 NBA 올해의 경영자상
브라이언 콜란젤로

엘진 베일러

브라이언 콜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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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 22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준영구결번
엘진 게이 베일러
Elgin Gay Baylor

생년월일
1934년 9월 16일
사망
2021년 3월 22일 (향년 86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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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지
워싱턴 D.C.
신체조건
196cm, 102kg
포지션
스몰포워드
출신대학
시애틀 대학교
프로입단
1958년 전체 1순위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선수경력
미니애폴리스-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58~1971)
지도자 경력
뉴올리언스 재즈 코치 (1974~1976)
뉴올리언스 재즈 감독 (1974(대행)/1976~1979)
프런트 경력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1986~2008, 운영부사장 겸 단장)

1. 개요
2. 생애
2.1. 선수 시절
2.2. 은퇴 후
3. 플레이 스타일
4. 수상 내역
5. 참고/관련 자료



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으로, NBA에선 선수 생활 내내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서만 뛰었던 레이커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 그리고 콩라인의 전설이기도 하다. 별명은 'Rabbit'.


2. 생애[편집]



2.1. 선수 시절[편집]


1934년 워싱턴 D.C.에서 아버지 존 웨슬리 베일러(1903~1974)와 어머니 우지엘 루이스(1910~2000)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인종차별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브라운 중학교에 재학하던 14세 때 농구에 눈을 떴고, '사우스웨스턴 보이즈 클럽'이란 농구 레크리에이션 클럽에서 뛰기도 했는데,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농구하는 법을 터득했다. 이후 흑인 학교인 펠프스 실업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52년까지 평균 18.5, 27.6점을 각각 찍어 탁월한 실력을 뽐냈으나, 학업 성적이 안 좋아 중퇴한 뒤 가구점에서 일하며 지역 레크리에이션 농구팀에서도 뛰었다. 1953년에는 개교된 지 1년여 된 존 엘리아스 스핑건 고등학교로 편입하여 데이브 브라운 감독의 지도 하에 천재적인 실력으로 1954년 워싱턴 올 메트로폴리탄 퍼스트 팀, SSA 리빙스톤 트로피도 받았다.

1954년 칼리지 오브 아이다호에 입학했으나 학업 성적 등의 문제 때문에 친구가 장학금을 주선할 때에야 입학이 됐고, 농구부 입단 후 샘 보크스 감독의 지도 하에 1954-55 시즌엔 NAIA 5구역 토너먼트 결승에 나섰지만 몬태나 주립대학교에게 78-76으로 졌다. 이후 감독이 해임되고 학교로부터 장학금이 제한되자, 1955년에는 시애틀 대학교로 편입됐으나 입학 자격을 얻고자 아마추어 리그인 AAU 팀 웨스트사이드 포드에서 뛰었고, 1956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90번으로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에 지명됐으나 그는 대학 재학을 택했다.

1956-57 시즌부터 농구부에 합류 후 존 카스텔라니(1926~2021)[1]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1958년 NCAA 전국대회 결승까지 올리는 데 공헌했고, 이 공으로 헬름스 재단 올해의 선수상, 올 아메리칸 퍼스트 팀 등에 선정됐다. 이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해 전체 1번으로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에 뽑혀 입단 첫 시즌에 평균 24.9 득점, 15.0 리바운드, 4.1 어시스트로 탁월한 실적을 보였고, 특히 뉴욕 닉스전에서 71득점, 포스트시즌에선 38.1득점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1959년에는 올스타에 처음 뽑혀 밥 페팃과 함께 MVP를 땄다.

오히려 커리어 내내 LA 레이커스를 8번이나 결승에 올렸지만 결과는 모두 준우승.[2] 더 황당한 것은 시즌 중에 은퇴했는데, 그 해 소속팀이 우승했다. 그리고 홍진호 역시 이 위업을 달성했다!

은퇴에 대해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의 은퇴는 그가 내린 결정이란 것이다. 구단도 감독도 엘진 베일러에게 은퇴를 강요하진 않았다. "늙은이가 더 머물렀다간 창창한 후배들의 발전이 뒤처질 것이다. 내 전성기는 이미 끝났고 난 물러날 때가 되었다." 이게 그의 은퇴 이유였다. 그리고 레이커즈가 닉스를 꺾고 그 해 우승하자 누구보다 기뻐하며 자기의 은퇴 결정이 옳았다는게 증명되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레이커즈 극렬 안티인 빌 시몬스 도 '우승을 누구보다 염원했던 선수가 본인이 팀의 우승에 장애물이 될 것 같다며 스스로 물러났다. 도대체 역사상 이런 선수를 어느 스포츠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라며 극찬했다.

베일러의 팀을 위한 희생 덕분이었는지 레이커스는 드디어 1972년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다.[3] 그리고 베일러는 그 공로로 반지를 받기는 받았다. 비록 은퇴는 했지만 팀의 공로가 컸던 베일러를 위해서 레이커스에서 반지를 선물한 것.[4]


2.2. 은퇴 후[편집]


선수 은퇴 후 1974년 뉴올리언스 재즈의 창단과 더불어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1974-75 시즌 도중 스카티 로버트슨 감독이 잘리자 감독대행을 맡았고, 1976년에 정식 감독으로 승격됐으나 성적이 부진하여 1978-79 시즌 후 경질됐다.

1986년부터 로스앤젤레스의 2인자 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운영부사장 겸 단장 자리에 앉아 대니 매닝, 게리 그랜트, 로이 보트, 라몬드 머레이, 브렌트 배리, 에릭 피아코스키, 라마 오돔, 코리 마게티, 크리스 카먼 등 수많은 신인을 발굴하거나 마크 잭슨, 론 하퍼, 안드레 밀러, 엘튼 브랜드 등 외부 선수들을 영입했지만, 임기 22년 동안 포스트시즌 진출은 고작 4번에 그쳤으며 마이크 올로워칸디와 같은 잘못된 선수 영입이나 트레이드, 선수 구성에 대한 월권 행위 등을 빈번히 저질러 도널드 스털링 당시 구단주와 함께 비난을 받았다.

그래도 2003년에는 엘튼과 코리 등의 대어급 선수들의 FA 영입까지 이뤄서 2005-06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시킴으로써 올해의 경영자상을 받았다. 그러나 임기 내내 스털링 구단주의 인색한 투자와 인종차별 등에 시달리다가 2008년에 경질당했고, 이에 베일러는 스털링 구단주와 앤디 뢰저 사장을 상대로 고소했다가 결국 패소했다.

콩라인의 거장이긴 한데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정보는 다소 부정확하며 과장된 부분이 있다. 실제 베일러의 성적은 배스킷볼 레퍼런스를 봐야 알 수 있다.

1977년에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1983년에는 LA 레이커스로부터 등번호 22번이 영구결번됐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는 미네소타 시절의 엘진 베일러의 활약을 기억하는 의미로 그와 조지 마이칸을 비롯 7명의 미네소타 레이커스 선수들의 그의 이름을 구장 천장에 영구결번들과 함께 달고 있다.[5]

2018년에는 레이커스 홈구장인 스테이플스 센터 앞에 동상이 제막됐고, 2020년 2ESPN 선정 올타임 순위에서 22위를 하였다(...). 2021년 3월 22일에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6세.


3. 플레이 스타일[편집]


NBA 농구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낸 장본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현란한 드리블로 상대를 제치고, 슬램덩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프리스타일. 마이클 조던같은 슈퍼스타 스윙맨으로서 플레이의 원조가 바로 엘진 베일러다. 커리어 평균 득점이 27.4점일 만큼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했다.

또한 결승전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61점) 보유자다. 2위는 마이클 조던이 1993년 결승전 때 기록한 55득점, 릭 배리 역시 1967년 파이널에서 55득점을 했다. 참고로 베일러의 기록은 한동안 포스트시즌 전체로 따져도 한 경기 최다 득점이었는데 마이클 조던이 86년에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63점을 때려박으며 2위로 내려앉았다.

거기에 센터도 아닌 스몰포워드였음에도 커리어 평균 리바운드가 13개일 정도로 리바운드 능력도 엄청난 선수였다. [6]

그리고 특이한 사실은, 그가 27세인 1961-62시즌에는 군복무 중이었음에도 NBA에 참가했다. 90년대 중반까지 프로야구에 있었던 방위병 주말 or 홈경기 출전 가능과 유사한 리그 규정덕에 평일에는 군복무를 하고 주말에 시즌을 뛰면서 그해 자신의 커리어 최고인 평균득점 38.3을 기록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런 득점머신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득점 1위는 한 번도 못해봤는데, 그 앞에 다름 아닌 윌트 체임벌린이 있었기 때문. 개인 기록마저도 2등이다.

그래도 플레이오프에서는 4번이나 평균 득점 1위를 차지했다. 물론 플옵의 경우 경기수가 훨씬 적긴 하지만 그가 얼마나 큰 경기에서 강한 선수였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라이벌이자 스탯 괴물인 윌트 체임벌린의 경우 의외로 플옵에서 평균 득점 1위에 오른 적이 단 한 번에 불과한데 전문가들이 그가 큰 경기에서 약했다고 지적한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 근데 윌트는 우승해봤잖아[7]


4.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All-NBA First Team 10회 (1959-1965, 1967-1970)
NBA Rookie of the Year (1959)
NBA All-Star 11회 (1959-1965, 1967-1970)
NBA All-Star Game MVP[8] (1959)


5. 참고/관련 자료[편집]



[1] 코네티컷 주 뉴브리튼 출신으로, 노터데임 대학교 졸업 후 모교에서 코치로 시작하여 1956년 시애틀 대학교 감독으로 데뷔한 후 1957-58 시즌 때 NCAA 전국대회 결승 진출을 일궈냈고, 1959년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감독이 되어 엘진 베일러와 감독-선수 관계로 다시 만났다. 1960년 경질된 후 마케트 대학교 법학대학을 졸업하여 변호사로 줄곧 일했다.[2] 엘진 베일러 개인으로서는 총 7회 준우승으로 역대 최다 준우승 2위. 왜 준우승이 8번이 아니고 7번이냐 하면, 그의 커리어 내내 소속팀 레이커스는 8번 파이널에 올라가 모두 고배를 마셨지만 그중 1965년 파이널의 경우 베일러가 무릎 부상으로 인해 파이널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기 때문이다. 1위는 그의 팀동료이자 준우승 8회의 제리 웨스트. 그나마 제리 웨스트는 1972년 파이널 우승으로 한을 풀기는 했다. 참고로 역대 NBA팀 중 3연속 준우승을 기록한 팀은 이 시기 레이커스와 1950년대 뉴욕 닉스 둘 뿐이다.[3] 미니애폴리스에서의 연고이전 이후 최초의 우승. 무려 여덟 번의 준우승 끝에 이뤄낸 우승이다.[4] 하지만 규정상 시즌의 절반 이상도 뛰지 못하고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NBA 챔피언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사실상 구단 차원에서 그 동안 수고했다는 의미로 프랜차이즈 선수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해 준 것. 굳이 비유하자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으로 오래 활약한 프랜차이즈 유격수인 노마 가르시아파라와 유사한데, 이쪽도 2004년 시즌 중에 트레이드가 되는 바람에 공식적으로는 월드 시리즈 챔피언 명단에 포함되어있지 않지만 선수단의 강력한 요청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와 함께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포함된 선수가 받은 배당금의 3/4 가량의 금액에 해당되는 수준의 우승 배당금을 구단으로부터 선물받았다고 한다.[5] 레이커스가 LA 연고이전 후에 미네소타 시절의 선수들의 영구결번을 모두 해제했다.[6] 다만 당시 농구와 현대 농구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http://cafe.daum.net/ilovenba/7i/26944. 베일러가 뛰던 60년대는 현대와 비교해 페이스가 엄청나게 빠른 반면, 슈팅 성공률은 훨씬 낮았다. 윌트 체임벌린의 전설적인 평균 50점이 나온 62년을 예로 들면 팀당 평균적으로 107.7개의 필드골을 시도했는데, 오늘날 평균인 84.2과 비교도 안되는 수치이다. 현재 NBA에서 가장 빠른 페이스로 농구하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조차 올 시즌 107개의 필드골을 한 번, 그것도 두 번의 연장을 거치면서 넘겼을 뿐이었다. 2016시즌 현재 리바운드 1위는 안드레 드러먼드로 14.9개, 2위는 13.9개의 디안드레 조던, 3위는 11.9개의 드와이트 하워드이다. 그렇다면 62시즌에는? 윌트 체임벌린 25.6개, 빌 러셀 23.6개, 월트 벨라미 19개, 밥 페팃 18.7개, 레드 커 14.7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베일러의 위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당시 군복무중이던 베일러는 48경기 출장으로 최소 기준에 미달해 랭킹에서 빠졌지만 18.6개를 기록했으며, 그 전 시즌에는 73경기를 뛰며 무려 19.8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때 베일러의 리바운드는 리그 4위였다. 스몰 포워드였으면서 리그 최고의 센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베일러의 리바운드 능력은 사기적인게 맞다. 요점은 베일러의 커리어 리바운드 13개가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엄청난 페이스로 인해 현대로서는 상식 밖의 수치들이 나오던 시기였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7] 윌트는 득점기계 시절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다. 그가 우승한 건 팀플레이어로 변신한 이후. 게다가 윌트는 플옵 평균득점이 정규시즌보다 확 떨어지던 선수 중 하나다. 자세한 건 윌트 체임벌린 항목 참고.[8] 공동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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