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니오 에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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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니오 에레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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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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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




엘레니오 에레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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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前 축구감독


파일:엘레니오 에레라 감독.jpg

이름
엘레니오 에레라
Helenio Herrera
본명
엘레니오 에레라 가빌란
Helenio Herrera Gavilán
출생
1910년 4월 10일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망
1997년 11월 9일 (향년 87세) /
이탈리아 베네치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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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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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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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축구선수 (수비수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RC 카사블랑카 (1931~1932)
CASG 파리 (1932~1933)
스타드 프랑쎄 파리 (1933~1935)
OFC 샤르빌 (1935~1937)
엑세시오 AC 루베 (1937~1939)
레드 스타 FC 93 (1940~1942)
스타드 프랑쎄 파리 (1942~1943)
EF 파리-카피탈 (1943~1944)
퓌토 CSM (1944~1945)
감독
퓌토 CSM (1944~1945)
스타드 프랑쎄 파리 (1945~1948)
레알 바야돌리드 CF (1948~1949)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49~1952)
말라가 CF (1952)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53)
세비야 FC (1953~1957)
CF 우스 벨레넨스스 (1956~1958)
FC 바르셀로나 (1958~1960)
스페인 대표팀 (1960~1962)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60~1968)
이탈리아 대표팀 (1966~1967)
AS 로마 (1968~1970)
AS 로마 (1971~1972)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73~1974)
AC 리미니 1912 (1978~1979)
FC 바르셀로나 (1980)
FC 바르셀로나 (1980~1981)
기타
프랑스 축구 연맹 (1946~1948 / 기술팀장)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 (1962 / 기술팀장)[1]
이탈리아 축구 연맹 (1966~1967 / 기술위원장)

1. 개요
2. 선수 경력
3. 감독 경력
3.1. 프랑스 시절
3.2. 스페인 시절
3.3. 인테르 시절
3.4. AS 로마 시절
3.4.1. 줄리아노 타콜라 사망사건
4. 말년
5. 평가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카테나치오의 왕
the king of catenaccio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프랑스, 아르헨티나 이중국적의 전 축구인.

리누스 미헬스, 아리고 사키, 펩 과르디올라와 함께 전술의 틀을 깨부순 역대 최고의 감독 중 1인. 카테나치오라는 축구사에 길이 남을 전술을 본인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1960년대에 축구판에 큰 변혁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당시 축구계에 유행처럼 번져가던 4-2-4 포메이션을 과감히 거부하고 그만의 수비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그는 리베로로 대표되는 5백 시스템을 구축하여 4-2-4 전술로 밀어붙이는 당대의 강호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인테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그의 전술은 4-2-4 전술로 일관되던 축구계를 변화시켜서 궁극적으로 축구 전술이 한단계 진보하는 데 기여했다.


2. 선수 경력[편집]


에레라는 공식적으로는 1910년 4월 10일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그의 출생기록부가 현존하지 않고 그의 부모가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스페인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그의 고향 말라가에서부터 무정부주의자로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해 사방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에레라는 4살 때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이주했고 이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이때 그의 부모는 카사블랑카 이민국에 아들이 1916년에 태어났다고 속였다. 그래서 그는 1931년에 실제로는 21세의 나이에 축구선수로 데뷔했지만 사람들은 훗날 그가 밝히기 전까지 15살의 나이로 축구 인생을 시작한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1931년 RC 카사블랑카에 수비수로 데뷔한 뒤 이듬해에 CASG 파리로 이적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 리그에서 활동했는데 그렇게 뛰어난 수비수는 아니었다. 다만 1935~1937년 OFC 샤르빌에서 뛰었을 때 국가대표로서 2번 출장한 기록은 있다. 이후 에레라는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프랑스 리그에서 뛰다가 1944-45 시즌에 퓌토로 이적하고 그 곳에서 선수 겸 감독 생활을 한뒤 정식을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3. 감독 경력[편집]



3.1. 프랑스 시절[편집]


퓌토에서 1944-45 시즌을 보낸 뒤, 그는 스타드 프랑쎄 파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세 시즌 동안 단 한 개의 트로피도 획득하지 못했고 이후 구단주는 팀을 팔아버리기로 했다. 스타드 프랑쎄 파리 인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에레라는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3.2. 스페인 시절[편집]


스타드 프랑수아에서 무관의 세월을 보낸 그는 1948년에 1부 리그로 막 승격된 레알 바야돌리드 감독을 맡아 팀을 승점 1점차로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1948/49 시즌 당시의 라리가는 유독 치열했는데, 22점으로 12위로 시즌을 마무리한 바야돌리드는 그해 6위를 기록했던 아틀레틱 클루브와 승점 차가 2점에 불과했다.

이어 1949년 8월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으로 이적한 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가를 보여줬다. 그는 1949-50 시즌과 1950-51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했고 코파 델레이에서도 1950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52-53 시즌 중반 선수 영입 관련해서 이사진과 마찰을 빚은 에레라는 홧김에 팀을 이탈하고 말라가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말라가에서도 얼마 있지 않고 1953년 1월 데포르티보 라코루냐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잔여 시즌을 치른 에레라는 1953년 여름에 세비야 감독으로 부임하여 1956년까지 팀을 맡았다.

1957년 여름, 그는 이번에는 포르투갈의 CF 벨레넨세스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그곳에서 한 시즌을 치렀고 1958년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1960년까지 2년간 있는 동안 1958-59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보다 승점 10점을 더 얻어 6년만에 우승을 달성하여 레알 마드리드의 연속 우승을 저지했고, 그해 코파 델 레이 준결승전에서도 치러진 엘 클라시코에서 마드리드 원정에서 4-2 완승, 캄 노우 안방에서 3-1로 이겨서 결승에 올라 그라나다를 꺾어 우승컵을 들었고, 1959-60 시즌에도 엘 클라시코에서 마드리드 원정 0-2 패배와 캄 노우 홈경기 3-1 완승을 거두어 우승을 달성했다.

또 에레라호는 당시 유럽을 제패하기도 했는데, 1958~1960년까지 치러진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바르사는 스위스의 FC 바젤에 합계 6-3, 이탈리아의 인테르에 합계 8-2, 유고슬라비아의 츠르베나 즈베즈다에 합계 4-2 대승을 거두었고, 잉글랜드의 버밍엄 시티와의 결승전에서도 4-1의 압승을 거두었다.

엘 클라시코에서도 막강했다. 에레라가 오기 전 바르사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3연패를 당해왔었다. 지난 3차례 동안 바르사는 엘 클라시코마다 3번 다 한 골도 못 넣고 깨져왔던 것이다. 에레라는 1958년 10월 26일에 자신이 첫 경험한 엘 클라시코에서 첫 4-0 완승을 거둬 기대에 부응했다. 완벽한 수비로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을 꽁꽁 묶었고, 에바리스투가 해트트릭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뒤를 공략했다. 1959년 2월 15일 후반기 원정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경기 종료 11분 전 터진 결승골로 1-0 완승을 거두었는데, 재미있게도 당시 득점한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 이름도 에레라이다. 이 경기는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TV로 생중계된 경기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2년 동안 이와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잘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에레라는 당시 회장인 프란세스크 미로-산스(1918~1989)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어느 날 에레라는 미로-산스 회장에게 선수들을 함께 독려하자며 라커룸에 선수들을 불러다놓고 "회장님께서 내게 여러분이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보너스를 주겠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장은 보너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팀 재정 상태도 보너스를 줄 만한 상황이 아니어서 회장 입장에선 곤란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팬들과 선수단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에레라는 경기마다 선수들보다 30분 전에 경기장에 도착하고 난 뒤 그라운드에 나가 상대방 팬들을 도발해 경기장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이는 선수들이 경기 도중 보다 강한 투쟁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선수들은 매번 공공의 적이 되어 경기를 하는 것에 피로를 느꼈다. 바르사 팬들과 이사진들은 보다 간결하고 공격적인 축구를 바랐다. 즉, 에레라의 축구는 바르사의 방향과 매치가 안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선수들과 사이가 벌어진 것이 바로 '암페타민 파동'이다. 에레라는 경기 하루 전에 언제나 팀 선수들과 '티 타임'을 가졌다. 그러나 차를 마시고 부작용을 겪는 선수가 나타났다. 당시 선수인 엔릭 겐사나는 어느 날 집에서 어머니의 부름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이를 이상히 여겨 자신의 친구인 의사에게 성분 분석을 하면서 해당 차에 암페타민이 검출되었고, 겐사나가 이 사실을 선수들에게 알리자 에레라가 사실을 알고는 굉장히 분노했다.[2] 이중 가장 반발한 이는 바로 라슬로 쿠발라였는데, 당시 쿠발라는 차 마시기를 거부하자 에레라 감독이 원정 경기에 쿠발라를 제외시키면서 이사진의 제재가 들어왔다. 이 와중에 1959-60 시즌 유러피언 컵 준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가 펼쳐졌다. 이때 레알 마드리드의 페렌츠 푸스카스가 홈과 원정에서 혼자 4골을 몰아치는 바람에 바르사는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이 패배가 명분이 되어 에레라는 1960년 6월 바르셀로나를 떠나야 했다.

어쨌건 간에 에레라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라리가 2연패와 페어스컵 2연패, 그리고 코파델레이 우승을 일궈냈고, 60경기에서 46승 5무 9패를 기록, 76.67%라는 높은 승률을 찍었다. 1980년에 그가 바르사에 돌아와 치른 총 2시즌의 기록이 없었다면 그는 바르사 역사상 최고 승률의 감독이 되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무려 182골을 몰아치고 54골을 방어하여 공수 양면에서 강한 팀을 만들어냈다.

스페인 시절의 에레라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그는 능력이 있는 감독이긴 하지만 지나친 자의식, 구단 이사진 및 스타 선수들과의 충돌로 오랜 기간 한 팀에 머물지 못했다. 그는 탁월한 전술적 혜안으로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동시에 그가 상대팀 감독과 선수, 팬은 물론이고 자신이 속한 팀의 회장과 선수들에 대한 심리전으로 인해 '심리학자' 내지는 '도발자'라는 수식어가 뒤따라다녔다.


3.3. 인테르 시절[편집]


파일:external/25.media.tumblr.com/tumblr_mba1u2YWMR1qc3g7lo1_500.jpg

에레라는 팀을 떠난 즉시 이탈리아로 향했고 1960년 6월 인테르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인테르에서 1968년까지 8년간 감독 생활을 하면서 인테르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에레라는 당시 1960년 월드컵 이래 전 유럽에 불어닥친 4-2-4 전술에 대항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사실 이탈리아는 일찍부터 '이기는 축구'를 표방하여 수비적인 전술을 추구했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공격적인 4-2-4를 받아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그 파해법을 연구했다. 에레라는 이러한 노력을 집대성하여 카테나치오를 개발해냈다.

파일:external/b641831c67a0ecb513bf730dafc0d72774f184ba473473d1286657a148276503.jpg
일반적으로 알려진 카테나치오 포메이션.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에레라가 처음부터 이 전술을 도입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실 스페인 시절엔 화려한 공격 축구를 구사했다. 그래서 인테르에서도 처음엔 공격 축구를 실시했다. 그러나 인테르는 세리에 A에서 2년간 3위, 2위를 기록하며 우승을 거두지 못했고 안젤로 모라티 구단주는 세번째 시즌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면 경질하겠다고 선언했다.

경질 위기에 직면한 에레라는 미들필더 한 명을 수비진 뒤로 돌려 스위퍼 역할을 하고 왼쪽 윙백은 공격을 자유롭게 하도록 했다. 그는 훗날 자신의 전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든 선수들은 내가 어떤 공격을 원하는 지 알고 있었다. 수직적인 빠른 패스의 축구와 단 3번의 패스로 상대편 골에리어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만약 수직적으로 전개하다 공을 빼앗기면 문제가 안 되지만 횡으로 가다가 공을 놓치면 바로 실점하게 된다.


상단의 그림에는 5-3-2 포메이션으로 되어있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대칭 포메이션이었다.

파일:external/thefalse9.com/abIjJs4ank.png

그림에서 보듯이, 양쪽 윙백은 중미 두명 보다 더욱 앞으로 치고 나가서 공격을 수행하고 그들이 치고나가서 생긴 공백은 2명의 중미가 각각 커버한다. 그리고 수비 시엔 두 윙백이 수비 진영까지 복귀하여 수비한다. 이때 최후방에 자리잡은 선수는 리베로로서 상대의 역습으로부터 아군의 골 에어리어를 지키기 위해 항시 대기한다. 리베로를 맡은 선수는 아르만도 피키로, 당시 주장을 맡기도 했다. 피키와 함께 타르키시오 부르니치, 아리스티데 과르네리 등이 버티던 수비진 앞에서 중원을 진두지휘한 선수들은 인테르의 레전드 마리오 코르소와 발롱도르 수상자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였다.

또한 에레라는 오른쪽 윙어(주로 자이르 다 코스타가 맡았다)를 이른바 '토르난테(tornante : 귀환자)'로 두었다. 공격시에는 높은 위치에서 공격에 가담하고 수비시에는 상대 윙어를 대인 마크하며 수비 진영까지 복귀하는 역할이었다 . 이 선수는 왼쪽 윙어보다 훨씬 높은 위치까지 올라와서 공격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왼쪽 윙어가 만만하냐하면 바로 자친토 파케티, 추후 자신의 3번을 영구결번 받을 정도로 전설적인 선수였다. 그와 함께 왼쪽 공격을 담당한 공격수는 인테르의 또 다른 전설이자 유러피안 컵 득점왕 출신의 산드로 마촐라였다.

이러한 그의 전술은 효력을 발휘했다. 그는 1962-63 시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64-65 시즌과 1965-66 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1963-64 시즌에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듬해에도 우승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 또한 인테르는 1964년과 1965년에 2년 연속으로 인터컨테셔널 컵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1964-65 시즌은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유벤투스에게 져 아쉽게 트레블을 놓치기도 했다. 그러나 1966-67 시즌에 자신의 비겁한 수작에도 불구하고[3] 카테나치오의 약점을 꿰뚫고 컨디션과 기강을 유지한 조크 스타인 감독의 셀틱 FC에게 패해 우승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간의 업적을 바탕으로 에레라는 인테르의 신으로 추앙받기에 이른다.


3.4. AS 로마 시절[편집]


1968년, 에레라는 인테르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던 중 로마의 구애를 수락하고 전격 이적했다. 그는 연봉 15만 파운드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급료였다. 그는 1968-69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1969년 3월, 에레라는 로마의 주전 공격수 줄리아노 타촐라의 갑작스런 사망에 연관, 팀 닥터와 감독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구단과 감독의 관계가 틀어졌고, 이어 다음 시즌에 성적이 10위권 내에도 들지 못하자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


3.4.1. 줄리아노 타콜라 사망사건[편집]


파일:external/www.storiedicalcio.altervista.org/taccola-giuliano-roma-1.jpg
줄리아노 타콜라(Giuliano Taccola, 1944.6.28 ~ 1969.3.16)

이 문서는 기존의 글에 더해서 이탈리아 축구 전문 기자인 펠리페 포르테 기자의 조사에 근거해서 수정되었습니다.출처#[4]

줄리아노 타콜라는 1961년 제노아에서 데뷔한 이래 1967년까지 여러 팀을 전전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스트라이커였다. 본디 그는 6년간 6개 팀에서 한 시즌씩 치르는 전형적인 저니맨이었으나, 1967년 로마에 입단한 뒤 타콜라는 마침내 포텐을 터트려 팀내 주전 공격수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69년 경기 중 부상이 아닌 임상상태에 대해 문제가 일어났고 편도선 염증을 포함한 문제가 발생해서 그는 외과 수술을 받으면서 일부 게임에 결장하게 된다. 에레라는 육체적인 부상이 아닌 내부적인 임상 상태 문제에 대한 이해도는 낮은 편이었기에 에레라는 이 선수를 까다로운 선수로 여겼으며 그에 따라 휴식을 길게 주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이 당시 축구계에 도핑이 어느정도 만연해 있었다는 것. 펠리페 포르테 기자의 기사를 보면, 기사 내용에 언급되어 있듯이 당시 수비수였던 자코모 로시(Giacomo Losi)는 오히려 타콜라가 고통을 호소했음에도 의사측에서 심각한 문제가 없다면서 타콜라에게 주사를 놓았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팀 닥터 측에서 이런 신체 이상 징후에 대해서 딱히 언질을 주지 않고 계속 무시한 결과, 1969년 2월 타콜라는 필드에서 기절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1969년 3월 16일, 칼리아리 전을 앞두고 타콜라는 37.4도 정도의 미열이 있던 상황이었다. 에레라는 타콜라에게 경기를 뛰던 뛰지않던 일단 해열제 겸 진통제인 아스피린을 복용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 이후 의사들은 재진찰 없이 페니실린을 놓았다. 출처에는 여기까지만 서술되었으나, 아마 의사들은 에레라의 지시를 모르고 최초의 진단 후 페니실린을 투여한 것으로 보인다.

타콜라는 라커룸에서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칼리아리 스탭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경기 중 스탠드에서부터 앞뒤로 흔들거리고 있었고 몹시 추워보인다고 언급했다.[5] 심장 발작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먹은 것은 오렌지 주스 한잔 이었다고. 거기에 당시 로마의 팀 닥터들은 상황을 잘못 읽고 비타민 제를 주사했다고 한다. 의식을 잃은 타콜라는 급하게 심장 마사지와 구강호흡을 받았으나 그대로 사망하고 만다. 당시 칼리아리의 팀 닥터였던 아우구스토 프롱지아(Augusto Frongia)는 라커룸에 들어가자마자 타콜라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iuliano_Taccola_-_Funerale.jpg
타콜라의 시신이 담긴 관을 운구하는 팀 동료들

위에도 나와 있는 자코모 로시는 당시 에레라가 카페인에 어떤 약을 넣었다고 주장했다. 더해서 타콜라는 상술된 편도선 염증 수술 이후 건강이 좋지 못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고서에 따르면 어떤 특정한 약물이 심장마비에 결정적인 역할은 한 것은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 정황상 원래 몸이 좋지 않아서 요양이 필요했던 타콜라가, 주사도 자주 맞았을 뿐 더러, 직전에 아스피린과 페니실린을 한꺼번에 투약했고,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심장 문제 까지 겹쳐진 복합적 부작용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타콜라는 제노아에 입단할 때 이미 심장질환에 관한 진단을 받은 몸이었으며, 편도선 절제 수술 이후 1개월간 회복기를 거쳤지만 그 기간동안 별다른 케어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에레라는 타콜라의 죽음에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바로 에레라가 팀 닥터들과 상의 없이 아스피린 복용을 지시한 것과 충분한 휴식기를 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에레라는 타촐라가 열이 오르고 몸이 아프니 진통/해열제인 아스피린 복용을 지시한 것이었겠으나, 당시 타촐라는 이미 수술 이후 먹어야 할 항염증제와 다른 약, 거기에 비타민과 그외 보충제들을 다수 복용하고 있었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복약을 지시하기엔 좀 위험한 상황이었다. 한편, 이탈리아 당국에 따르면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기관지 폐렴에 의한 심장마비.

타콜라의 아내인 마르지아 타콜라는 남편의 죽음은 감독과 팀 닥터의 잘못된 조치로 인해 야기된 것이 분명하다며 언론에게 남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줄 것을 호소했다. 에레라와 로마의 팀 닥터들은 조사를 받았으나 건강 문제와 수술 이후 투여된 약물, 주사의 관계는 밝히기 어려웠고 무혐의로 결론지어졌다. 최종적인 조사 결과는 우발적인 죽음이 있었다는 것. 정황상 팀 닥터의 오진과 엘레라의 의학적 지식의 부족이 겹친 것이 유력했기에 유족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고 그에따라 재조사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산드로 마촐라의 동생이기도 한 페루치오 마촐라(Ferruccio Mazzola)는 2004년에 L'espresso과의 인터뷰에서 60년대 당시 이탈리아 축구계에는 도핑이 만연했으며, 코치들이 선수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커피에 약을 집어넣는 관행이 있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게 상술된 자코모 로시의 증언과 맞물려 당시 이탈리아 축구계에 퍼져 있었던 도핑 문제의 희생자가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4. 말년[편집]


로마에서 경질된 에레라는 1973년에 다시 인테르로 돌아왔다. 그러나 1974년 2월 8일,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축구계를 떠나 치료에 전념했다. 이후 4년간 치료를 받은 에레라는 1978년에 세리에B 클럽인 AC 리미니 1912 감독을 맡았다. 그곳에서 한 시즌 동안 팀을 지휘한 에레라는 바르셀로나의 부름을 받고 곧바로 스페인으로 향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2시즌 동안 팀을 지휘했고 1980-81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그는 71세의 나이에 마침내 은퇴를 선언했다.

감독 인생을 마감한 에레라는 TV 축구 프로그램에 종종 게스트로 출연했고 곧 축구를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인자한 할아버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이 인기를 바탕으로 선데이 스포츠의 아나운서로서 1985년부터 86년까지 활약했다. 그후 그는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가 1997년 11월 9일 베니스에서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 평가[편집]


엘레니오 에레라는 축구 역사에 길이남을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단순히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기 때문이 아니라, 축구 전술에 한 획을 그을 페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식 축구전술인 카테나치오를 완성시켜 당시 전 유럽에 유행하던 4-2-4 공격 전술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축구 전술은 한 단계 진보할 수 있었고 이탈리아는 축구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감독 하에 활동했던 파케티, 부르니치, 마쫄라, 코르소, 자이르와 같은 선수들도 그의 뛰어난 전술력을 칭찬한다. 그러나 타촐라 건같이 승리를 위해서라면 선수들을 가혹하게 굴리는 성향도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엄청난 지도력과 안목에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축구뿐만 아니라 세계 축구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리고 그 전술을 바탕으로 단기간 내에 역사에 남을만한 뛰어난 성적으로 거둔 감독으로 평가된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49~1952)
    • 라리가: 1949-50, 1950-51
    • 코파 에바 두아르테[6]: 1950





6.2. 개인 수상[편집]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5
  • UEFA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인: 2017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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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기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기술팀장이 명목상 감독 역할을 대신했다.[2] 사실 경기전에 암페타민 먹고 뛴 사례는 베른의 기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약먹고 뛰었던 독일 대표팀부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긴 하는데, 중요한 점은 당시 독일 선수들도 알고 먹었는데 이 경우는 정말 언급도 없었다는 것이다.[3] 당시 에레라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글라스고에서 밀라노로 오는 비행기 티켓과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 초대권을 보냈다가 비행기가 뜨는 당일에 비행기표를 취소하는 비겁한 짓까지 벌였다.[4] 기존 문서가 영문 위키를 기반으로 작성된 듯 보이는데 살펴보면 알겠지만 영문위키 자체가 상당히 많이 틀려있다.[5] 경기에 뛰었는지는 기사에 나와있지 않으나 스탠드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기에 뛰지 않았거나 빠르게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6]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