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케 가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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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nrique García.jpg
이름
엔리케 가르시아
(Enrique García)
생년월일
1912년 11월 20일
사망년월일
1969년 8월 23일 (향년 56세)
국적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아르헨티나
출신지
산타페
포지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신체조건
불명
소속팀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데산타페 (1931-1932)
CA 로사리오 센트랄 (1932-1936)
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 (1936-1944)
국가대표
35경기 / 9골 (1935-1943)



1. 개요
2. 생애[1]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3.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관련 어록
6. 수상
6.1. 국가대표



1. 개요[편집]


El chueco(비뚤이)
El Poeta de la Zurda(왼발의 시인)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2][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가르시아는 1912년 11월 20일에 산타페에서 태어났고 고향의 지역 클럽인 라스 로사스(Las Rosas)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그의 형 살바도르는 우니온 데산타페의 리저브 팀에서 뛰면서 엔리케를 클럽에 추천해줬지만 클럽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클루브 브라운을 거쳐 1931년부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데산타페에서 뛰게 되었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당시 힘나시아에는 높은 득점력으로 los pistoleros라 불리던 포워드진이 있었는데 가르시아는 그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지역 신문 엘리토랄(El Litoral)의 한 기자는 그에게 El chueco(비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고 이것은 가르시아의 가장 유명한 별명이 되었다.

가르시아는 얼마 안 가 CA 로사리오 센트랄로 팀을 옮겼고 실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이런 가르시아를 아르헨티나의 빅팀들이 서로 영입하려고 노력했다. CA 인데펜디엔테가 계속 가르시아를 자신의 선수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로사리오가 내민 이적 조건을 맞추지 못해 철수했고 가르시아 영입전의 최종 승자는 인데펜디엔테의 아베아네다 클라시코 라이벌 라싱 클루브였다. 그는 로사리오 센트랄에서 98경기를 뛰면서 33골을 넣었다.

가르시아는 1936년부터 라싱 클루브의 선수가 되었고 라싱 클루브는 같은 시기에 가르시아 외에도 이탈리아에서 온 야반도주 트리오 엔리케 구아이타, 알레한드로 스코펠리, 앙헬 카푸아노를 모두 영입하며 1910년대 오아코, 올라사르가 이끌던 전성기를 재현하고자 했다.

가르시아는 1936년부터 라싱 클루브에서 뛰면서 1938년에는 32경기에 출전, 20골을 넣어 개인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3] 232경기 연속 출전을 기록할 정도로 성실하게 라싱 클루브를 위해 뛰던 가르시아는 하지만 1943년 9월, CA 보카 주니어스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무릎에 심각한 반월판 부상을 입고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이후 그는 필드에 복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완전한 회복에 이르지 못했고 결국 1945년에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가르시아는 라싱 클루브에서 234경기에 출전, 78골을 넣었다.


2.2.2. 국가대표[편집]


가르시아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1937년, 1941년, 1942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3번 참가해 우승 2회, 준우승 1회를 차지했다.

이 중 가르시아가 최고의 활약을 펼친 대회는 1937년 대회였다. 풀리그로 펼쳐진 대회에서 마지막 상대는 브라질. 당시 브라질은 4전 전승, 아르헨티나는 3승 1패로 브라질은 비겨도 우승이라는 유리한 조건으로 시합에 들어갔다. 하지만 가르시아는 후반 3분 선제 결승골을 넣었고 아르헨티나는 이 골을 경기 끝까지 지켜내 대회 우승의 향방을 최종전으로 끌고 갔다.[4] 가르시아의 이 골로 열린 최종전에서 아르헨티나는 비센테 데라마타의 2골로 결국 브라질을 2대0으로 꺾고 대회 최종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는 국가대표팀에서 35경기 출전, 9득점을 기록했다.


2.3. 은퇴 이후[편집]


선수 은퇴 이후 가르시아는 1960년까지 사탕 가게를 운영하다 라싱 클루브스카우트와 유소년팀 코치로 일했다.

하지만 말년의 가르시아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1969년 8월 23일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드리블 기술이 특히 뛰어난 레프트 윙. 라싱 클루브 시절 넣은 78골 중 2골만이 오른발 득점일 정도로 왼발 극편향에 가까웠다.

그는 비록 아르헨티나 1부 리그 우승 기록은 없지만 라 마키나펠릭스 루스토에 견줄 만한 아르헨티나 역대 최고급 레프트 윙어로 꼽힌다.


4. 뒷이야기[편집]


  •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가 어렸을 때 그의 팬이었다. 게바라는 가르시아의 플레이에 매료되어 고향 축구팀 CA 로사리오 센트랄을 응원했다. 그리고 유명 작가 오스발도 바이어(Osvaldo Bayer)도 그의 팬이었다.
  • 은퇴 후에도 자신의 선수 시절에 자부심이 있었다. 단골 술집에서 종종 스스로를 역대 최고의 레프트 윙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5. 관련 어록[편집]


El fenómeno(가르시아)는 혼자서 윙어로써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그는 다르다. 그는 모든 최고의 요소를 갖고 있다. 코너를 따라 이동해서 인사이드로 들어가서는 그는 슛을 하고 플레이 하고 춤을 추고 혼합하고 공을 수축시킨다. 이 모든 것을 왼발로만 한다. 그의 반대발은 막대기에 지나지 않고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오른쪽의 목발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왼발, 그는 그 다리로 뜨개질하고 바느질하고 시를 쓴다.

엘 그라피코 1940년 5월호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프트 윙어였다. 팀에는 펠릭스 루스토가 나았을지 모르지만 chueco가 포지션에서는 더 나았다.

다니엘 판세리(아르헨티나의 스포츠 기자)


그는 축구계의 카를로스 가르델인 비범하고 영광스러운 선수였다. 달리면서 중앙으로 패스를 하는 플레이를 개발한 선수였고 골키퍼와 골대 사이에 공을 놓는 특이한 방법으로 득점했다.

에스라 수에드(가르시아의 라싱 클루브 후임 레프트 윙어)


축구의 더러운 얼굴이 누가 자신을 대표하냐고 주장한다면 왼발의 시인 엔리케 가르시아가 그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장난꾸러기이고, 상대를 조롱하고, 아이러니하고, 비열하고, 경쟁자들에게 잔인하고, 농담을 하는 천사와 악마였으며 누군가에게는 존경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았다. 그의 플레이는 모두 천재적이었고 태도는 순수히 반항적이었다.

디에고 루세로(우루과이의 스포츠 기자. 가르시아의 플레이에 대한 평)


대인 마킹은 코치들에 의해 개발되었고 저는 모든 전술 시스템의 적입니다. 그들은 축구의 아름다움에 맞서 싸우고 아름다움과 즉흥성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규율과 명령에 따라지고 최고의 선수들조차 그 의무를 가진 채 게임에서 사라지곤 하죠. 그래서 저는 시스템은 천부적인 재능을 갖지 못한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라이벌이 자신들의 플레이를 펼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필드에 나가지만 그 자신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엔리케 가르시아(생전에 당시 축구의 전술 시스템에 대한 평을 남기면서)


만약 내가 두 다리를 모두 사용하는 법을 배우려고 했다면 왼쪽 다리로 그리 능숙하게 기술을 쓸 수 있었을까?

엔리케 가르시아



6. 수상[편집]



6.1. 국가대표[편집]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하지만 이 시즌에 43골을 넣은 아르세니오 에리코가 있어서 득점왕과는 거리가 멀었다.[4] 만약 골득실제도가 있었다면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위해선 가르시아의 골 하나만으론 부족한 상황이었고 한골이 더 필요했다.

[분류:아르헨티나의 코파 아메리카 참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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