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 뉴질랜드 901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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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3개월 전, 시드니 국제공항에서 촬영된 사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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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기체의 잔해.

Air New Zealand Flight 901 (TE-901)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1979년 11월 28일
유형
CFIT, 조종사 과실, 악천후
발생 위치
남극 로스 섬 에레부스 화산
탑승인원
승객: 237명
승무원: 20명
사망자
탑승객 257명 전원 사망
기종
맥도넬 더글라스 DC-10-30
항공사
에어 뉴질랜드
기체 등록번호
ZK-NZP
출발지
오클랜드 국제공항
경유지
크라이스트처치 국제공항
도착지
오클랜드 국제공항
1. 개요
2. 사고 개요
3. 사고 진행
4. 사고 경위
5. 탑승 인원 및 국적
6. 기타



1. 개요[편집]


1979년 11월 28일 남극에서 에어 뉴질랜드 소속 DC-10이 남극 에레부스 화산에 추락한 사건.


2. 사고 개요[편집]


승객 237명, 승무원 20명이 사망했다. 화이트아웃과 조종사들이 바뀐 경로를 알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생긴 사고였다.

이 사고는 뉴질랜드 역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가져온 사건 2위에 오를 정도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왔으며[1], 덤으로 에어 뉴질랜드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승객' 사망자가 발생한 사고이기도 하다[2].


3. 사고 진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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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여객기는 좌표가 계획에서 27마일(43km) 동쪽으로 변경되어 에레부스 산 위로 지나갔다. 그리고 화이트아웃(말 그대로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는 현상)이 발생해 조종사들은 산을 확인하지 못했다. 결국 에레부스 산에 충돌해 257명 전원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 44명은 신원확인이 되지 않았으나, 설령 사고 현장에서 즉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할지라도, 영하 20도에서 50도까지 떨어지는 남극의 추위를 평상복으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3]


4. 사고 경위[편집]


비행 얼마 전, 비행 계획이 갑작스럽게 변경되었는데 조종사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비행하다가 고도가 너무 낮아 산 중턱즈음에 부딪힌 것이 사고의 주요 원인이었다.

당시 에어 뉴질랜드와 콴타스는 1977년 2월 13일부터 남극 코스를 비정기적으로 배정하였는데, 에어 뉴질랜드의 경우 오클랜드 국제공항에서 출발해 남극을 한바퀴 돈 뒤, 크라이스트처치 국제공항에 착륙해 보급을 받고 승무원을 교체한 뒤 다시 오클랜드 국제공항으로 들어오는 방식으로 남극을 관광시켜주는 코스였다. 해당 항공편은 아침 8시에 오클랜드에서 출발해 남극관광이후 (약 8,630km 비행) 크라이스트처치에 오후 7시 도착, 약 45분간 재급유 및 승무원 교체 이후 이륙해 약 747km를 다시 날아 목적지인 오클랜드에 오후 9시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1979년 당시 남극코스 비행 가격은 한 사람당 359달러였는데, 이는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1,468달러, 한화 약 176만 1천원정도 된다.

에어 뉴질랜드는 이 항공편을 운항하기 위해 85%의 좌석만 채웠는데, 그 이유는 중간 좌석을 비워 승객들이 남극을 관광할때 객실을 보다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비정기 항공편의 비행기가 승객들에게 더 넓은 가시성을 제공하기 위해 남극을 저공 비행하는 동안 경험이 풍부한 남극 가이드가 항공기 전관 방송 시스템을 통해 남극 풍경의 특징을 설명했고, 승객들은 남극의 풍경을 봐가며 안에서 각종 음식과 술, 영화 등을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901편의 코스는 맥머도 만을 통해 가는 경로였지만, 이 경로를 급하게 에레부스 화산을 지나도록 변경하여 컴퓨터에는 이 변경된 코스가 입력되었지만, 조종사들은 이 변경점을 전달받지 못하고 그대로 비행했다. 이 때문에 원래 바다를 통과할 경우라면 정상적이었을 고도 1,500 피트(457.2m)로 비행하게 됐고, 실제로는 고도 13,000 피트(3962.4m)나 되는 에레부스 산을 앞에 두고 터무니없이 낮게 비행을 하게 된 것. 거기에다 화이트아웃까지 함께 발생하는 바람에 조종사들은 지형지물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결국 현지 시각으로 오후 12시 49분 경, 에레부스 화산에 비행기를 들이받아버리고 말았다.

오후 2시에 미 해군이 비행기의 신호가 끊겼단 소식을 듣고 정찰기 3대를 보내 주변을 살피게 했다. 오후 9시, 원래대로면 비행기의 연료가 다 떨어졌을 시간이 되자, 에어 뉴질랜드는 비행기가 실종됐다 발표한다. 같은 시각, 미 해군 비행기가 에레부스 화산에서 비행기 잔해를 발견했다. 다음날 9시, 헬기가 에레부스 화산에서 잔해들을 발견했다.

이 사고로 인해 남극을 관광할 수 있는 합법적인 루트는 전부 끊기게 되고 만다. 오세아니아 ~ 남미/남아프리카 노선 등 남극에 가까이 가는 노선들은 비상시 남극 상륙을 하지 않기 위해 전부 4발기로 다녔으나, LATAM 항공 (산티아고 데 칠레 ~ 오클랜드 ~ 시드니 노선)과 콴타스 (시드니 ~ 요하네스버그)를 중심으로 ETOPS를 딴 4발기가 등장하고[4] 보잉 787이 개발되면서 소리소문없이 다시 남극 비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로 남극으로 비행하려면 남극 기지에 비상착륙을 할 수는 없으므로 ETOPS-330 이상은 따야 갈 수 있다. 애초 문제가 생겨도 남극에 착륙이 불가능하고, 착륙한다 해도 남극에서 일반 여객기를 정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의 비행 코스와 비슷한 개념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여러 도시에서 콴타스를 이용하여 남극 상공을 비행 관광하는 코스는 있다. 다만 정규항로는 아니고, 여행사를 통한 전세기 개념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무래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에 대한 책임 문제 때문인 듯하다.

사고 후 2주 동안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작전이 실행되었는데, 조사관들은 대부분의 시신을 수습 후 신원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지만, 수습한 257구 중 16명의 시신은 손상 정도가 심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으며, 28명은 아예 시신을 찾지도 못했다.[5] 그 외에도 남극이라는 지역 특성상 잔해 수습이 어려웠기 때문에 꼭 필요한 부분만을 선별해 잔해를 수습했다. 따라서 사고 후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얼음이 녹는 여름에 사고기의 잔해가 발견된다.


5. 탑승 인원 및 국적[편집]


  • 뉴질랜드인 승객 180명, 승무원 20명
  • 일본인 승객 24명
  • 미국인 승객 22명
  • 영국인 승객 6명
  • 캐나다인 승객 2명
  • 오스트레일리아인 승객 1명
  • 프랑스인 1명
  • 스위스인 1명


6. 기타[편집]


  • 901편의 항공기관사 고든 브룩스는 1978년 12월 22일 에어 뉴질랜드 103편을 운항하던 중, 태평양에서 탁송비행 중 항로를 잃어버린 세스나 188을 기적적으로 구조한 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고든 브룩스는 이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세스나 188 구조 당시 103편의 기장이었던 고든 베테가 901편 추락 사고의 사고조사를 맡았다.#

  • 에어 뉴질랜드의 조종사이자 비행교관이었던 고든 베테는 이 사고를 조사한 이후 에어 뉴질랜드를 그만뒀다.#

  • 아메리칸 항공 191편 추락 사고가 일어난 지 반년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또다시 발생한 DC-10의 인명 사고라 DC-10의 평판은 또다시 추락했고[6], 이 사고 이전부터 DC-10 퇴역을 준비하던 에어 뉴질랜드는 이 사고가 결정타가 되어 5년후인 1982년 12월까지 모든 DC-10을 퇴역시켰다.

  • 사고기의 테일넘버인 ZK-NZP는 영구결번이 되었다.

  • 관광 비행을 하다가 사고가 난 경우이기 때문에 한 탑승객이 캠코더로 사고가 난 비행 당시 기내 모습영상으로 찍은 것이 남아있다.[7] 기내에 탑승한 모두가 사망할 것도 상상도 못한 채 한가하게 기내를 거니며 카메라로 남극풍경을 담는 승객들의 모습이 참으로 비통하기 그지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E-901의 마지막 순간. 그리고 충돌 당시에 객실 창문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남아있다.[8]

  •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등반한 전설적인 산악가 에드먼드 힐러리도 가이드로서 이 비행기에 탈 뻔했다. 이 날은 다른 일정 때문에 절친이었던 피터 멀그루가 대신 탑승했다가 변을 당했다. 이후 힐러리는 1989년에 홀로 남겨진 멀그루의 아내와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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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3위는 1931년 2월 3일에 발생하여 256명의 목숨을 앗아간 혹스베이 지진이고, 1위는 1874년 11월 18일에 화재로 침몰하여 탑승객 472명 중 469명의 목숨을 앗아간 코스패트릭호 침몰 사고이다.[2] 사실 에어 뉴질랜드는 이 사고 이전에 2건, 이후에 1건의 사망 사고를 겪었지만, 이 사고의 사망자들은 모두 승무원들이었다.[3] 더군다나 출발지인 11월의 뉴질랜드는 초여름 이였으며, 해당 여객기는 남극에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남극 상공을 비행하고 다시 뉴질랜드로 복귀하는 것이였기 때문에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과 승무원들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4] 4발기의 경우 예전에는 ETOPS를 딸 필요가 없었으나, 2010년대 이후 ETOPS 적용 대상이 확대되면서 3발기 이상도 무조건 ETOPS를 따도록 변경되었다. 4발기의 경우 ETOPS-180이 기본 인증이며, 이걸로는 남극으로 갈 수 없다. 그래서 콴타스의 보잉 747-400이 ETOPS-330 인증을 받고 남극 쪽으로 경유하는 노선을 운항하고 있는 것.[5] 그 이유중 하나가 갈매기들이 몰려들어서, 그것도 조사관들 앞에서 시신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라고 한다.[6] 실제로 1979년까지 발생한 최악의 인명피해를 가져온 항공 사고 4개 중 보잉 747 2대가 연루된 테네리페 참사(1위)를 제외한 3개가 전부 DC-10과 연관되었다(터키항공 981편, 아메리칸 항공 191편, 에어 뉴질랜드 901편)[7] 참고로 사고 당일의 기체 내부를 담은 시각 자료가 남아 있는 항공 사고는 이 사고 에 발생한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말레이시아항공 17편 격추 사건, 라미아항공 2933편 추락 사고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극히 드물다.[8] 창문에 항공유가 묻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