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칸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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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칸토나의 역임 직책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장피에르 파팽
(1992~1993)

에릭 칸토나
(1993~1995)


디디에 데샹
(1995~200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주장

스티브 브루스
(1992~1996)

에릭 칸토나
(1996~1997)


로이 킨
(1997~2005)


에릭 칸토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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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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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3 · 19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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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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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6 ESM 올해의 팀



1993 Ballond'or
수상
로베르토 바조
2위
데니스 베르캄프
3위
에릭 칸토나


에릭 칸토나의 기타 정보






프랑스의 배우


에릭 칸토나
Éric Cantona
본명
에리크 다니엘 피에르 캉토나
Éric Daniel Pierre Cantona
출생
1966년 5월 24일 (57세)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지방 부슈뒤론주 마르세유
국적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신체
188cm, 88kg
직업
축구 선수 (중앙 공격수, 세컨드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경영인
배우
소속
선수
AJ 오세르 (1983~1988)
→ FC 마르티그 (1985~1986 / 임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8~1991)
FC 지롱댕 드 보르도 (1989 / 임대)
몽펠리에 HSC (1989~1990 / 임대)
님 올랭피크 (1991)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2~1997)
경영
뉴욕 코스모스 (2011~2012 / 단장)
국가대표
45경기 20골 (프랑스 / 1987~1995)
활동
축구 선수(1983~1997)
배우(1995~ )

1. 개요
3. 플레이 스타일
4. 평가
5. 은퇴 후 행보
5.2. 배우 경력
5.2.1. 필모그래피
5.3. 기타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클럽 기록
6.4. 국가대표 기록
7. 여담



1. 개요[편집]


"미친 사람이 이성적인 사람보다 세상을 더 많이 변화시킨다."


프랑스축구 선수 출신 경영인, 배우.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

현역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5년 동안 네번의 PL 우승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발롱도르 3위, PFA 올해의 선수, PL 도움왕 2회를 차지한 선수이자 맨유 7번의 계승자였다.

당시까지 견원지간이었던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에서 '영국인이 사랑한 프랑스인'이라는 칭호까지 받았으며,[1] 맨유팬들은 그를 일컬어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라고 부른다.[2][3]


2. 선수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에릭 칸토나/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처음 보는 사람들은, 척 보기에 둔중한 몸집과 떡대로 인해 타겟형 스트라이커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그러나 칸토나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테크니션이었고 그 플레이 스타일은 센터 포워드보다는 오히려 세컨드 스트라이커에 더 가까웠다. 웨인 루니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칸토나의 플레이 스타일은 쿵푸 킥 사건 이전과 이후로 구분이 되는데, 쿵푸 킥 사건 이전의 칸토나는 190cm에 가까운 신장과 매우 우수한 피지컬에 결코 느리지 않은 스피드에 당대 최고 수준의 볼 컨트롤과 테크닉을 무기로 전방에 위치해서 전방에 투입된 볼 키핑을 하면서 동료들의 전방 침투 타이밍을 벌고, 침투 시 적절하게 패스를 넣은 뒤 다시 상대 진영에 침투하여 득점 및 파이널 패스를 노리는, 플레이메이커형 포워드였다. 지금의 폴스 나인과 유사한 점이 있는 플레이를 했으며, 차이점이 있다면 전방에서 포스트플레이를 매우 잘했고, 헤더로 인한 득점도 상당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쿵푸 킥 사건 이후 복귀한 이후로는 전방에 앤디 콜, 올레 군나르 솔샤르같은 득점만을 주로 노리는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사실상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롤을 맡았다. 실제로 상당히 내려와서 플레이했으며, 득점도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었다. 칸토나가 붉은 유니폼을 입고 찍은 스탯이 185경기 82골 62어시스트였음을 생각해보면 득점은 물론이고 어시스트까지 완벽한 선수였다. 이렇듯 전통적인 최전방 공격수와 플레이메이커 포지션에서의 플레이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물론 명성에 비해 동시대 비슷한 클래스의 스트라이커들에 골 수가 밀려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롱도르 3위를 할 정도였던 이유는 그의 해결사 능력 덕분이다.

칸토나가 맨유에 입단한 이후 100경기에서 84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는데, 이후 85경기에서 60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맨유에 머무는 동안 계속 꾸준히 활약한 것 역시 고평가 받는 부분이다.

리즈 유나이티드 첫 시즌에 리즈를 17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한 것[4]과 맨유에서의 리그 5시즌 중 4시즌을 우승시킨 것이 그 증거. 그 중 두번이 더블이고, 챔피언스리그 4강도 올려보냈다. 당시 칸토나는 3골을 넣으며 챔피언스리그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했고, 포르투와의 8강전 홈경기에서는 1골 포함 3골에 관여하며 4:0 승리를 이끌며 4강 진출에 1등공신으로 활약했다.[5] 당시 긱스를 제외한 퍼기의 아이들이 모두 불완전한 상태인 걸 감안하면 더욱 대단하다. 경기력에서도 해결사 기질이 빛을 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쿵푸 킥 사건 이후 복귀전인 리버풀전 동점골과 FA컵 리버풀전 결승골 등 더비나 빅매치에서의 중요한 골을 넣었다. 당시 맨유팬들은 결승골이나 역전골이 터지면 누군지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칸토나일 테니까"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PL 출범과 동시에 호흡을 맞춘 라이언 긱스와 완벽한 짝짜꿍을 선보였으며, 긱스가 왼쪽을 초토화시킨 후 칸토나에게 어떻게든 공을 넘겨주면 칸토나는 다시 최전방을 초토화시키고 골을 때려넣었다. 그 외의 능력으론 칩슛도 장난아니게 잘 찼다. 그의 인생골이자 PL 역대 최고의 골 중 하나로 사각지대로 빨려들어가는 유명한 칩슛골이 있다.


4. 평가[편집]


은퇴한 후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칸토나는 맨유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최고의 주장 반열에 들고 있으며, 그 짧지 않은 커리어 속에서도 빛을 발한 건 맨유에서의 5년 남짓한 시간이었음에도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로 손꼽히고 있다. 2006년 당시 감독으로도, 코치로도 아닌 "선수"로서 복귀를 바라는 클럽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는 투표(유나이티드 매거진 실시)에서 보란듯이 1위에 뽑히는 기염을 토하는 것을 보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이 에릭 칸토나라는 선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2011년 유나이티드 매거진에 게재된 역대 최고 선수 투표에서도 라이언 긱스에 이은 2위에 올랐다.[6]

게다가 단순히 실력과 성깔만 있는게 아니고 나름의 축구관이 확고한 선수였으며 그만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 때문에 천하의 퍼거슨 감독도 칸토나가 자기 식으로 훈련하면서 행동하는 것을 어느 정도 묵인해주었고 둘이서 축구에 관해 토론을 할 정도였다. 어쨌든 둘은 서로를 아주 높이 평가해서 서로를 높이 띄워주는 인터뷰를 많이 한다. 칸토나 왈, "퍼거슨은 일종의 천재."[7]


5. 은퇴 후 행보[편집]



5.1. 비치사커[편집]


축구에서 은퇴한 1997년 이후에는 비치사커에 입문하여 프랑스 대표팀의 감독 겸 주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선수로는 2005년까지 플레이하여 FIFA 비치사커 월드컵 첫 대회에서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이후에도 2011년까지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5.2. 배우 경력[편집]


파일: 000a711a.jpg
2014년작 서부 영화, 웨스턴 리벤지에서의 모습[8]
1995년 서포터 쿵푸킥 사건으로 인해 9개월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아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된 칸토나는 Happiness Is in the Field(행복은 초원에)에서 라이오넬 역으로 출연하게 되면서 영화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1998년 축구 선수를 은퇴한 뒤 영화 배우로 완전히 전업하여 영화계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30년동안 크고 작은 영화에 주,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현시점에서는 어느덧 프랑스 영화계의 중견 배우가 되었다. 또한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거의 매년 영화를 찍는 다작 배우이기도 하다.


5.2.1. 필모그래피[편집]


공개 연도
타이틀
배역명
비고
1995
행복은 초원에
라이오넬

일레븐 맨 어겐스트 일레븐
축구 선수
[9]
1998
엘리자베스
무슈 드 프와

무키
안토인 카펠라

1999
와인이 흐르는 강
조 사디

2001
하이 라이프
페탕크 플레이어

2003
루트르망제
셀레나 교육감

마비
코메디언

2005
잇츠 아워 라이프
피에르

우네 벨 히스토리


2006
Lisa et le pilote d'avion
판도

2007
두번째 숨결
알반

2008
잭 세이즈
바 안의 남성

블랙 버터 플라이

[10]
프렌치 필름
티에리 그리망디

2009
룩킹 포 에릭
본인
[11]
라 리스트
마이클 롬바르디
[12]
2010
투게더 이즈 투 머치
제라드

2011
스위치
데미안 포르깃

위험한 공범
마누엘 마카로프

에트레인떼
에릭

2012
우리동네 포르노스타
축구 감독

힙 무브스
미셸

풋볼 레벨스
본인

2013
유 앤 더 나잇
르탈롱

클래스 오브 92
본인

2014
웨스턴 리벤지
코르시칸

2015
더 매드 킹스
자키 시시네

2016
마리 앤 더 미스핏츠
앙투안

2017
앙카
브라질리자낙

2018
율리시스 앤 모나
율리시스

2019
더 트레블러
토마스 바레스키

르 보야쥬 시즌 1
톰 바레스키

2020
신은 나에게 직장을 주어야 했다
알랭 들랑브르
[13]
2021
알렉스 퍼거슨: 좌절은 없다
본인

더 유나이티드 웨이
본인
[14]
2022
르 콜로세 오 피에 다르질
세바스티앙

2023
AKA
빅토르 파스토레

베컴
본인
[15]


5.3. 기타[편집]


에릭 칸토나는 축구 선수에서 은퇴한 후 비치사커 선수와 지도자로 이후에는 전업 배우로 활동하면서 더 이상 축구계에서 일을 하지 않고 있다가 미국 NASL 뉴욕 코스모스의 단장직에 취임해 2012년까지 축구 행정가로 활동했고 지금은 다시 축구계에서 손을 뗐다.

한국 시간 기준, 2021년 11월 25일 오후 10시 쯤에 갑자기 자신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새로운 감독이 될 것이고 새로운 코치진을 조만간 소개할 것이라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발표했으나 일종의 장난이었고 실제로는 에릭 텐하흐가 선임되었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 프랑스 비치사커 국가대표팀 (1997~2006)[16]


6.2. 개인 수상[편집]




6.3. 클럽 기록[편집]


시즌
클럽
리그
국내 컵[17]
대륙 대회
기타 대회
총계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1983-84
오세르
디비지옹 1
2
0
0
-
-
-
-
-
-
-
-
-
2
0
0
1984-85
5
2
0
0
0
0
0
0
0
-
-
-
5
2
0
1985-86
마르티그
디비지옹 2
15
4
0
0
0
0
-
-
-
-
-
-
15
4
0
오세르
디비지옹 1
7
0
0
0
0
0
1
0
-
-
-
-
8
0
0
1986-87
36
13
0
4
4
0
-
-
-
-
-
-
40
17
0
1987-88
32
8
0
5
1
0
2
1
-
-
-
-
39
10
0
1988-89
마르세유
22
5
1
0
0
0
-
-
-
-
-
-
22
5
1
보르도
11
6
0
1
0
0
0
0
0
-
-
-
12
6
0
1989-90
몽펠리에
33
10
0
6
4
0
-
-
-
-
-
-
39
14
0
1990-91
마르세유
18
8
2
0
0
0
3
1
0
-
-
-
21
9
2
1991-92

16
2
0
0
0
0
-
-
-
-
-
-
12
6
0
리즈
디비전 1
15
3
1
0
0
0
-
-
-
-
-
-
15
3
1
1992-93
프리미어 리그
13
6
4
0
0
0
5
2
0
1
3
0
20
11
4
맨유
22
9
11
1
0
0
0
0
0
-
-
-
23
9
11
1993-94
34
18
12
5
6
0
4
2
0
1
0
1
49
25
13
1994-95
21
12
5
1
1
0
2
0
2
1
1
1
25
14
8
1995-96
30
14
11
8
5
3
0
0
0
-
-
-
38
19
14
1996-97
36
11
12
3
0
1
10
3
2
1
1
1
50
15
16
14시즌
통산
-
-
-
-
-
-
-
-
-
-
-
-
-
-
-


6.4. 국가대표 기록[편집]


소속 대표팀
연도
경기
득점
프랑스
1987
3
1
1988
2
0
1989
4
3
1990
7
6
1991
4
2
1992
9
2
1993
7
5
1994
8
1
1995
1
0
통산
45
20


7. 여담[편집]


  • 프리미어 리그 최초 해트트릭 기록의 보유자다.[18]

  • 골을 넣은 후 기뻐서 방방 뛰는 여타 선수와는 달리 칸토나의 골 세레모니는 그야말로 특별했다. 옷깃을 칼같이 잡아 세운 뒤 무표정한 얼굴로 관중들을 한번 슥 훓어보는데[19] 칸토나의 그 작렬하는 카리스마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켜 '칸토나=옷깃'이라는 공식마저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 세레머니에 감명을 받은 박건하도 골을 넣은 후에는 옷깃 세레머니를 했다.


1996년 나이키의 CF 중 하나인 Good vs. Evil 에서는 슛을 차기 전 옷깃을 세운 후 불꽃슛을 날리는데,(이때의 불어 대사는 작별인사인 'au revoir.') 당시 해외축구 방송이 드물어 잘 모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저 CF로 그의 폭풍간지만큼은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 소싯적은 물론이고 나이를 먹고서도 여전한 다혈질적인 성격이, 맨유에서는 팀 전체를 규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PL 출범 때 이미 데뷔하여 EPL 짬밥은 칸토나와 동급이었던 긱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갓 유스에서 올라왔던 "퍼기의 아이들"이 함부로 기어오르지 못한 것은 그야말로 칸토나의 카리스마가 지대했다는 분석이다.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등이 멋모르고 나대지 못하도록 했다고. 또다른 개차반으로 유명한 로이 킨도 칸토나에겐 찍소리 못했다고 한다.[20]

  • 불같은 성질로 유명한 칸토나지만 팬들에게는 매우 친절했다. 솔샤르가 말하길 후배들한테 팬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조언을 한 게 칸토나였다고 한다. 요약하면 "팬들과 직접 만날 기회가 있다면 이걸 명심해라. 대부분의 팬들은 앞으로 평생 너희와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마주 볼 일은 없을거다. 아마 본다고 해봐야 30초 정도가 고작이겠지. 그 30초동안 너희가 그 사람들에게 평생 남을 인상을 심어주는거다. 매번 우리를 응원해주러 와주는 그 고마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냥 우리가 가볍게 웃으며 싸인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잊지못할 추억이 될 수 있다. 그게 싫다고 그냥 평생 개새끼로 남고 싶으면 그 판단은 네 몫이다." 라는 말인데 솔샤르는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 은퇴 후에도 계속 축구계에 몸담고 있었는데, 각종 미디어의 인터뷰는 물론이요 각종 광고, 축구 영화에도 출연했다.

  • 전술했던 것처럼 배우로써 경력도 은근 있는 편이다. 사실 은근 있는 편이 아니라 선수 경력 말년과 배우 경력 초반이 살짝 겹치고, 1997년에 14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배우 경력을 이어오고 있으니 오히려 배우 경력이 선수 경력보다 길다. 1995년 프랑스 영화 Happiness Is in the Field로 데뷔해 작은 역들을 맡다가 2009년 좌파 영화로 유명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에릭을 찾아서>의 타이틀 롤을 맡았다. 이 영화는 그 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상당히 괜찮은 코메디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 덕택에 에릭 칸토나는 그 힘들다는 칸 영화제 레드 카펫도 밟았다. 이후로도 프랑스 영화나 영국 영화에 소소하게 출연하고 있는 중. 2015년 하반기에는 디즈니-픽사의 장편 애니메이션 굿 다이노의 프랑스어 더빙판에서 포레스트 우드부시 역의 목소리를 맡기도 했다. 이외 얀 곤잘레스의 유 앤 더 나잇에도 출연하는등 프랑스 영화 출연 비율이 높은 편. 리암 갤러거의 once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에 주연 배우로 등장하였다. 2020년에는 에릭 칸토나를 주연으로 한 프랑스 드라마 <신은 나에게 직장을 주어야 했다>가 넷플릭스에 나오기도 했다.

  • 상기한 바와 같이 2010년 재창설한 뉴욕 코스모스에서 초기 단장직을 맡았다.[21] 2011년 프리시즌 기간에 폴 스콜스의 은퇴 기념을 위해 마련된 맨유 vs 뉴욕 코스모스 간의 친선전 때 10여 년 만에 올드 트래포드를 방문했다. 참고로 스콜스 은퇴 경기에 칸토나가 초청된 것은 원래 스콜스가 칸토나를 잘 따랐던 것도 있지만, 남에게 주목받기 싫어하는 스콜스가 '칸토나가 오면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될 테니 나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겠지.'라는 노림수를 편 것이었다고 직접 인터뷰에서 밝혔다.

  • 2012년 프랑스 대선에 출마한다는 기사가 떴다.

  • 박지성, 로이 킨,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퍼거슨의 헤어드라이어를 맞지 않은 몇 안 되는 선수였다.# 칸토나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으며, 그 철학에서 어긋나는 순간 바로 그 성질머리가 튀어 나오는 사람이라, 퍼거슨이 헤어드라이어를 시전했다면 칸토나는 점점 비뚤어져 둘의 관계는 나빠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선수들의 증언을 봐도 칸토나는 퍼거슨에게 아예 다른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번은 긱스가 양복 맨윗단추를 잠그지 않고 오자 퍼거슨한테 '단추 잠가라. 너네는 맨유를 대표해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꾸중을 듣고 구석에서 궁시렁 거리다가 칸토나가 흰색 수트에 흰빨 나이키 운동화 차림으로 와서 감독이 뭐라 한소리 할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퍼거슨은 칸토나와 악수를 하고 선수들에게 '얘들아 스타일이란 이런거다'라 했다고 한다. 로이 킨도 만약에 우리가 복장 제대로 안갖춰 입고오면 크게 혼났을 텐데 칸토나는 양복에 운동화 신고 편하게 와도 퍼거슨이 '쟨 내버려 둬라. 프랑스인이잖냐'며 터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수 간에 저렇게 차별을 뒀다면 나중에 문제가 터졌겠지만 감독이 선수단을 워낙 제대로 통제한 데다가 칸토나는 카리스마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실력으로 잠재웠다.

  • 맨시티가 44년 만의 우승을 확정지은 순간에 칸토나의 쿵푸 킥이 그의 거실에 있던 커피 테이블에 작렬했고, 아들은 그걸 보며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

  • 전성기를 PL에서 보내서 그런지는 몰라도 PL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축구계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유로 2016 때는 공공연하게 "유로에서 나는 잉글랜드를 응원한다. 축구인으로서는 나에게 잉글랜드의 피가 흐른다" 라고 인터뷰에서 얘기했으며 # 잉글랜드가 아이슬랜드에게 패배했을때는 완전 빡돌아서 내가 감독하면 저딴 일은 절대 없을거다 라고 하며 자기 잉글랜드 국대 감독 시켜달라는 비디오를 올리기도 했다. #

  • 은퇴 이후에도 종종 맨유 지지 발언을 하며 맨유 라이벌들을 조롱하는 발언을 하는데 루이스 엔리케가 휴식을 위해 바르셀로나 감독직에서 나간다고 하자 "쉬고 싶으면 아스날 감독하면 되는거 아니냐? 거긴 딱 쉬긴 좋다" 라는 발언으로 구너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

  • 취미가 시 쓰기와 읽기라고 한다. 실제로 축구황제 펠레에 대한 평가를 '어두운 방을 밝게 밝힐 수 있는 예술가. 1970 월드컵 결승전에서 펠레로부터 카를로스 아우베르투에게로 이어진 패스는 랭보의 시와 같았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보는 이들에게 영원함을 느끼게 한다.'로 했을 정도로 시적인 표현을 즐긴다.

  • 맨체스터 테러가 났을 때 유명인사 중 제일 먼저 영상 메시지를 보낸 사람 중 한명이다. 진심으로 슬퍼하며 유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평소에 불같은 성격인 칸토나의 부드러운 면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상이다.#


  • 똥군기로 인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경기가 끝날 때마다 담배를 물고 라이언 긱스를 상습적으로 폭행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며, 라커룸에서도 후배 선수들에게 군기를 과시했다는 증언도 많이 나왔다.[22] 똥군기가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은 2000년대 후반에서야 생겨났고, 칸토나에 수시로 당했었던 라이언 긱스는 자신이 고참 선수가 되면서 권력이 생기자 라커룸에서의 똥군기를 없애 놓았다.


  • 2018-19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에서 맨유PSG를 꺾은 후 8강에 진출한 이후 네이마르가 경기장으로 내려가 주심을 비난하는 등 화를 참지 못하고 난동을 부리자 맨유 라커룸으로 가던 칸토나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비판했다. 칸토나의 행동을 본 네이마르의 아버지는 화가 났고, 양 측은 한동안 신경전을 벌였다. 그는 경기 후 자신의 SNS에 네이마르의 사진을 게재한 뒤 “바비큐처럼, 너는 햇빛이 내리비치는 봄이 와야 나오지”라고 조롱했다. 이는 네이마르가 겨울에 자주 부상을 당하고 봄에 돌아오는 것을 바비큐 파티가 많은 봄에 빗대어 비꼰 것이다.


  • 리암 갤러거의 노래 Once 뮤비에 왕의 역할로 등장한다. 링크 헌데 참고로, 리암은 공교롭게도 열렬한 맨시티의 팬이다.[23] 칸토나가 인스타그램에 이 노래(Once)를 부르는 것을 보고 리암 갤러거 측에서 그를 섭외하여 뮤직 비디오 촬영을 했는데, 섭외 과정에서 출연료로 얼마를 받고 싶냐는 문의에 칸토나가 "돈은 필요 없다"고 해서 도리어 당황했다고. 그 외에도 비행기는 어떻게 예매해줬으면 좋겠냐는 질문에도 "내가 알아서 비행기 타고 가겠다", 호텔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는 질문에도 "호텔 예약해 줄 필요 없다", 공항에서 픽업해 주겠다는 얘기에도 "내 차는 내가 알아서 타고 가겠다", 케이터링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는 질문에도 "내 음식은 내가 싸가겠다", 어떤 와인을 원하냐는 질문에도 "내 와인은 내가 챙겨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로 출연료도 없이 자기가 알아서 비행기랑 차 타고 와서 호텔이랑 끼니도 자기가 알아서 하고 자기가 가져온 와인 마시면서 뮤직 비디오 촬영하고 그냥 갔다고 한다.


  • 피파 21 트레일러에 등장하며 신규 아이콘 출시가 확정되었다.

파일:골닷컴 선정 시대별 공격수 5인.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공격수들 중 5위에 이름을 올렸다.

  • 선수의 기량과 출신 국가의 전력에 비해 국가대표로서의 커리어는 최악이다. 하필 프랑스가 두 번 연속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1990년과 1994년 대회에서만 국가대표 선수였다. 다시 말하자면 우승 두 번에 빛나는 프랑스가 가장 축구를 못하던 시기에만 활동했던 선수였던 것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개최된 다음해에 국가대표 데뷔를 해서 1994년 미국 월드컵이 개최된 다음해에 은퇴했다. 기간 상으로는 월드컵 예선에 단 두 대회만 출전했는데 그 두번 모두가 지역예선 탈락이었으니 월드컵의 '월'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다. 당장 이 항목에서도 프랑스 정도의 월드컵 강자에 해당되는 국가의 이 정도 스타플레이어가 국가대표 경력이 기재되지 않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24] 그래도 국가대표 활약 자체는 45경기 20골로 우수했던 편이다.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쿵푸 킥 사건 전후로 국가대표에서 반 강제 반 자의 은퇴를 하여서 활약 시기도 매우 짧은 편이다. 이미지가 그래서 그렇지 사실 31살에 은퇴한, 당시를 기준으로 생각해도 매우 이른 시기에 은퇴한 선수다. 그 이른 은퇴로 이미지가 확실한 반 바스텐과 똑같은 나이에 은퇴를 했다.

  • 그가 뛸 당시만 해도 프랑스는 징병제였기 때문에 프로 데뷔 후 1984년에 12개월간 군복무를 수행했다. 몰론 복무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김천 상무와 같은 군경팀에서 뛰면서 경기 감각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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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후에 다비드 지놀라, 티에리 앙리가 계승한다. 감독도 있다.[2] 이후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선수는 뤼트 판니스텔로이웨인 루니로 이어진다.[3] 칸토나는 은퇴한 후로도 현재까지도 맨유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를 응원하고 있다.[4] PL까지 통틀어 마지막 리그 우승이다. 다만 맨유 시절에 비해 기여도는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5] 2010~20년대 축구를 본 세대들은 챔스 우승도 아니고 챔스 4강에 간걸 왜 이렇게 찬양하는가 생각할수도 있다. 이때 챔스 4강 진출이 왜 중요한 것이냐면, 90년대 중반 PL은 헤이젤 참사로 받은 징계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로 출범해서 모든 PL 팀들의 유럽대항전 성적이 낮았다. 그런 상황에서 맨유가, 나아가 PL이 챔스에서 재기하는데의 큰 역할을 한 것. 헤이젤 참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1985년 사건 이후 PL은 말그대로 유럽 내에서 나락까지 추락했었다. 사건의 중심인 리버풀은 7년, 그 외 PL 클럽들도 5년간 UEFA 대회 출전권을 박탈당했기에 91-92 시즌에 겨우 복귀하였고, 맨유가 4강에 진출한건 그로부터 5년 뒤인 96-97 시즌이다. 그 사이 출전한 아스날, 리즈 등은 현대로 치면 16강에서 탈락했고 맨유 역시도 2년 연속 16강에 그치며 잉글랜드 리그들의 경쟁력에 대한 말이 많이 나왔다. 그럼에도 맨유는 칸토나를 위시로하며 결국 자신들의 부진을 스스로 극복해내 PL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4강, 8강에 진출하며 위상을 유지했고 결국 98-99 트레블로 완벽하게 복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칸토나와 맨유가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한 것이 이후 PL의 위상을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것이다.[6] 일반적으로 맨유의 역사를 대표하는 선수로 인식되는 바비 찰튼(동 투표에서 4위)이나 라이언 긱스가 맨유에 평생을 바친 플레이어임을 고려하면 그와 함께 거론되는 칸토나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짧지만 얼마나 강한 임팩트를 남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맨유 역대 최고의 주장은 최장기간 재임한 브라이언 롭슨 쪽을 좀 더 쳐준다.[7] 퍼거슨이 아팠던 당시 인터뷰에서는 "지금은 퍼기 타임, 언젠가 꼭 일어나실 거라 믿는다."라며 쾌유를 빌기도 하였다.[8] 오른쪽은 존 역의 매즈 미켈슨.[9] TV 영화[10] TV 영화[11] 제작도 맡았다.[12] TV 영화[13] 넷플릭스 드라마[14] 각본도 맡았다.[15]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인터뷰로 참여.[16] 둘 다 선수 겸 감독으로 우승했다.[17] FA컵, 리그컵[18] 1992년 8월 25일, 리즈 유나이티드 vs 토트넘 홋스퍼. 최종 점수 5-0[19] 세 번째 항목에 기술된 두번째 동영상 마지막 장면 참조. 매번 그랬던 건 아니고 FA컵 결승골을 리버풀 상대로 성공시켰을 때나 중요한 경기에서 극적인 골을 성공시켰을 때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기뻐날뛰는 세레모니를 했다.[20] 다만, 로이 킨의 자서전에 쓰인 스티브 브루스의 15,000 파운드짜리 수표와 관련 된 일화에서는 어떠한 결과가 나올 지 모른 채 내기에 참여한 스콜스와 니키 버트의 용기를 칭찬했다. 그리고 본인이 내기에서 승리해 받은 12,000파운드 짜리 수표를 집에서 두 장으로 나눠 스콜스와 버트의 이름을 적고 그 둘에게 준 것으로 보아 강한 성격만큼이나 선수들에게 감동을 주는 법 또한 잘 알고 있던 선수였던 걸로 보인다. 한 팬이 기억하기로는 칸토나와 로이 킨 모두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하지만 로이 킨은 단순하게 다혈질스러운 성격이었다면 칸토나는 다혈질 적이지만 사람의 심리 상태또한 잘 파악하고 잘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21] 참고로 이 팀의 명예 회장은 구 코스모스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펠레. 구단 관계자들을 축구계의 전설들로 하나하나 채워가며 팀 리빌딩을 시도했으나, 칸토나에게도 실질적인 권한은 주어지지 않아 코스모스가 첫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클럽을 떠났다.[22] 데이비드 베컴도 자신이 칸토나에게 자주 맞았었다고 밝혔다.[23] 맨유맨시티서로가 지역 라이벌이다.[24] 이게 어떤 거냐 하면 화려한 클럽 경력 대비 월드컵 경력이 1회에 불과한 차범근보다도 훨씬 심한 것이다. 물론 차범근 역시 월드컵 무대에 나설때는 이미 노장이었기에 팀의 탈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본선에 진출이나마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