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호네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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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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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R1220-401,_Erich_Honecker.jpg

본명
에리히 에른스트 파울 호네커
Erich Ernst Paul Honecker
출생
1912년 8월 25일[1]
[[독일 제국|

독일 제국
display: none; display: 독일 제국"
행정구
]]
자를란트 노인키르헨
사망
1994년 5월 29일 (향년 81세)
[[칠레|
칠레
display: none; display: 칠레"
행정구
]]
산티아고
재임기간
제3대 국가평의회 의장
1976년 10월 29일 ~ 1989년 10월 18일
서명
파일:에리히 호네커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2.2. 제3제국 시절의 행보
2.3. 전후 장기 집권
2.4. 몰락
2.5. 말년
3. 평가
4. 매체에서
5. 이야깃거리
6. 소속 정당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독일공산주의자이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전 서기장. 동독의 최고권력자였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정치인으로, 동독의 서기장 중 가장 장기 집권[2]하였으며, 동독 역사상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


2. 생애[편집]



2.1. 출생과 성장[편집]


1912년 8월 25일, 독일 자를란트노인키르헨에서 광부이자 공산주의자인 빌헬름 호네커(Wilhelm Honecker, 1881–1969)와 카롤리네 카타리나 바이덴호프(Caroline Catharina Weidenhof, 1883–1963) 부부의 4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6남매 중 첫째인 카타리나(Katharina, 1906–1925), 둘째인 빌헬름(Wilhelm, 1907–1944), 막내인 카를로베르트(Karl-Robert, 1923–1947)는 다들 요절했고, 셋째인 프리다(Frieda, 1909–1974)와 다섯째 게르트루트(Gertrud, 1917–2010)만이 에리히와 함께 오래 살아남았다.

공산주의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네커는 10살 생일 직후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비벨스키르헨(Wiebelskirchen) 지구 소년단에 들어갔다. 14살 때는 독일공산당(KPD)의 청소년 단체에 가입했으며, 1929년에 정식 공산당원이 되었다. 당시 그의 정식 직업은 슬레이트공이었다고 한다. 그가 공산주의에 경도된 또 하나의 이유가,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거주하던 자르 지방이 프랑스군정 지구가 되어 프랑스군의 주둔을 경험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2.2. 제3제국 시절의 행보[편집]


1933년,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은 정권을 장악한 뒤 공산당 등 다른 정당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불법화된 공산당 활동을 호네커는 이 시기에 도리어 열성적으로 시작했고, 곧 독일 나치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 1933년에는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금방 풀려나기도 했다. 1935년, 결국 게슈타포에 의해 다시 체포된 뒤, 반란 모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10년 간의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공산당원 중에는 제법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독일 정부로부터 호네커는 수 차례의 전향 요구를 제의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수감되어 있던 수용소가 연합군폭격으로 파괴되던 찰나에 아슬아슬하게 이감되어 살아남는 등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전쟁 말기의 혼란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1945년 4월 27일에, 수용소를 점령 후 해방시킨 소련군의 도움으로 베를린으로 빠져나왔다.


2.3. 전후 장기 집권[편집]


석방된 그는 곧 소련군에 소속된 독일 공산주의자들과 합류했는데, 당시 소련군에 소속된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그들의 점령 지역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 소련 국내에서 훈련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는 자유독일청년단(Freie Deutsche Jugend; FDJ)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 되어,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단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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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DJ 시절의 호네커. 1946년에 찍힌 사진이다.

1946년,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동독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소련의 압력으로 통합, 신 정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을 결성하도록 막후에서 힘썼다. SED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급속히 성장했고, 1967년에는 동독의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계자로서 주목받았다. 1971년 SED 당수와 국가평의회 의장을 겸임하게 됨으로써 그는 당과 정부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57000-0512%2C_V._Parteitag_der_SED%2C_Honecker_spricht.jpg
▲ 1958년, 제5회 SED 전당대회 당시 호네커의 모습. 뒤에 있는 사람이 그의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다.

1970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에게 울브리히트 축출을 건의했고 결국 이듬해에 정치국원 13명과의 연명을 통해서 이를 관철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울브리히트의 뒤를 이어 사회주의 통일당의 제1서기로 선출되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1976년 10월 29일,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임자였던 퇴역 육군대장 빌리 슈토프 장군이 집권 3년만에 물러나면서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하면서 당수와 국가원수를 모두 독점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다.[3]

호네커의 통치 기간 동독상대적으로 억압적인 국가 중 하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유럽소련 위성국들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누렸다. 그는 서독과의 무역 및 관광 교류를 증진시켰고[4], 그 대가로 서독의 대대적인 경제 원조를 받았고, 이를 통해 1980년대에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이 잇따라 외채문제에 허덕이며 경기침체에 시달렸을 동안 동독만큼은 외채에서 자유로울수 있었다. 호네커 시절 동독이 공산권 국가 중에 가장 잘 살았던 것은 서독에서 엄청난 규모의 원조를 퍼주었던 부분도 컸다.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소련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었다. 의외로 공산권 국가 지도자들끼리는 관계가 삐거덕 거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호네커는 소련 지도자는 물론이고 다른 공산권 국가 지도자들과 두루 원만한 편이었다. 일단 동독이 공산권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는 인식이 있어서 공산권에서도 제법 목에 힘주고 다닐 수 있었다.

독일의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 사생활 영역은 복잡한 편인데, 그래도 라이벌인 독일연방공화국의 총리를 지낸 사회민주당 출신 빌리 브란트게르하르트 슈뢰더보다 난잡하지는 않았다. 그는 총 세번 결혼을 했고, 세번의 결혼 생활 이외에도 다른 여자와 외도하여 낳은 사생아 자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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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의 김일성과 호네커. 둘은 1912년 생 동갑내기였고, 1994년 같은 해에 죽었다.

김일성과 상당히 돈독한 사이로, 자신이 직접 북한에 2번 다녀왔으며, 김일성도 동독에 다녀와서 3차례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서로를 각각 유럽과 아시아의 공산주의 전초기지라고 추켜세우면서 경제, 과학, 교육 분야 협력을 확대했으며 김일성은 호네커는 자신과 동갑내기 친구라고 특별한 우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호네커는 남한의 위상이 올라가자 북한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 김영남이 직접 방문해서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지 말아달라고 읍소함에도 정치국 회의에서 결정할 일이지 서기장의 권한 밖이라고 둘러 거절하고 끝내 참석했으며, 남한과의 수교까지 모색하였으나 그전에 동독이 붕괴되면서 무산되었다.[5]

2.4. 몰락[편집]


이후 1980년대 말, 유럽 공산 국가들이 차례로 몰락하자 호네커는 나름대로 위기 의식을 갖기 시작했으나, 공산주의 체제를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9년, 호네커는 매년 10월 7일에 이뤄지던 독일민주공화국 수립 기념 행사(당시에는 40주년)를 역대 가장 성대한 행사로 개최하여, 공산주의 체제가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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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 40주년 기념 행사 당시 국가인민군을 사열하는 호네커. 국방부장관 겸 동독 육군 장군 하인츠 케슬러(Heinz Keßler, 1920.01.26 - 2017.05.02)의 왼쪽에서 경례 중인 중절모 쓴 사람이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소련의 서기장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이다. 사진에선 짤렸으나 당시 북한 대표로 정무원총리 연형묵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정권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은 데다, 퍼레이드 참석차 방문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호네커와 회동한 자리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대열에 동참을 호소했으나 호네커는 거부 의사를 밝혔으며 고르바초프는 거부당한 데에 대한 반격으로 호네커 축출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10월 18일 호네커는 에곤 크렌츠에게 당 서기장 및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했다.


2.5. 말년[편집]


통일 후 일단 베를린의 소련 육군 주둔군 기지로 도피했는데, 독일은 호네커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소련 정부는 이를 거부, 호네커를 자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소련이 붕괴된 후, 이듬해 구 공산권에 대해 부정적이던 러시아 연방옐친 정부의 영향으로 더는 보호받지 못하고 1992년 독일로 송환되었다. 이후 호네커는 1961년 에리히 밀케, 빌리 슈토프와 함께 베를린 장벽 건설에 동의한 혐의, 1974년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동독 시민들에게 화기를 사용하여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려 서독으로 탈출하려던 동독 시민 192명을 즉결처분 사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이 재판 자체가 국제법적으로 동서독이 서로 다른 나라였던 시절 최고지도자의 통치행위를 흡수통일 이후 책임을 물어 재판하는 것이라서 큰 논란이 되었다. 게다가 암투병으로 인해 당장 사망해도 이상치 않은 중환자를 심리적으로 옥죄는 가혹한 행위였기에, 호네커의 평판이 최악이었던 당시에도 재판 지속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위를 점했다고 한다.[6] 이때 호네커는 1991년에 북한 망명을 타진하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즉각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네커를 북한에 데려와 편한 여생을 보내게 하라고 지시했고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고려항공 특별기까지 대기시켰다. 하지만 독일 측에선 만약 호네커가 북한이나 칠레로 망명하면 이를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한다고 엄중 경고를 했고, 이미 소련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러시아 측에서 망한 독재자인 호네커나 위성국 격인 김일성의 체면 따위를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 결국 호네커의 망명이 실패하자 김일성은 크게 안타까움을 표했으며 러시아가 독일의 돈에 눈이 멀어서 옛 동지를 팔아넘겼다고 비난했다. 호네커를 태우지 못한 고려항공 특별기는 12월 17일, 쓸쓸하게 평양으로 철수했다.

1992년, 서독 안에서도 엄청난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연방재판소의 허가 속에서 호네커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서독 검찰총장 측은 무려 800쪽에 달하는 기소내용을 제시하였고 호네커는 나치 시절 자신이 투옥되었던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92년 12월 3일, 법정에 선 호네커는 "나와 내 동지들을 비롯한 범죄적 개인들"이라는 말을 거듭하면서 빈정댔고 재판부에게 "이번 재판이 패자들에 대한 승자들의 정치적 재판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이번 재판이 정치적으로 그릇된 동기가 부추긴 역사적 허위진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위해서는 장님이거나 아니면 과거에 사건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외면해야 가능할 것."이라고 훈계하고는 더 이상의 진술을 거부했다. 구 동구권 지역에서는 반나치 투사였던 호네커를 석방하라는 호네커 지지 시위가 일부 벌어지기도 하였다.

호네커의 변호인은 독일 연방의 기본법에 따라 중병에 시달리는 호네커에 대한 법적으로 보장된 보호를 요청하였다. 서독 여론은 호네커를 동독 정권 범죄의 알파요 오메가로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변호인의 주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이었으나 연방 사법부는 변호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호네커의 종양과 간의 상태에 대한 검진에 들어갔다. 호네커가 죽어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재판장 한스게오르크 브로이티감(Hansgeorg Bräutigam)은 아주 유명한 반공주의자로 호네커의 건강 상태와 관계없이 그를 재판에 회부하고 싶어했으나 베를린 헌법고등법원은 1993년 1월 12일, 재판을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재판부는 호네커의 건강상 그에게 어떠한 실질적 처벌을 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약 호네커를 계속 재판하는 것은 동독 정권이 자국 시민들을 탄압한 것과 같은 행위가 된다고 해석하여 독일 법률에 따라서 재판을 폐기하기로 하였다.

재판을 받으며 수감 생활을 하던 1993년, 으로 인한 병 보석 처리된 뒤 반년 후에 딸이 살고 있던 칠레로 망명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다가 이듬해 5월 29일 수도 산티아고에서 사망했다. 호네커의 사망에 북한에선 유족에게 "조선의 통일 정책을 적극 지지 성원해 주었는데 말년에 불행하게도 타국에서 서거한 데 대해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라는 내용의 조전을 보냈다. 사후에 그 회고록은 통일독일의 기성 출판사들이 출간을 거절해서 어느 듣보잡 출판사가 출판하게 되었는데, 한창 통일 후유증이 흉흉했을 때라 구 동독 지역에선 꽤 팔려 출판사 입장에서 대박을 냈다고 한다.

실각 이후 그는 민주사회당(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에서 제명되었고, 그와 그의 부인은 1990년에 새로 결성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여 94년 죽을 때 까지 당원으로 머물렀다.


3. 평가[편집]



차라리 호네커 때가 좋았다. 그 시절에는 적어도 일자리가 있었고 가족들이 살 집이 있었다.

구 동독출신 노숙인[7]


비록 호네커 개인의 실책 탓만은 아니지만, 일단 인지도에서 밀리는 발터 울브리히트 대신 동독을 망하게 만든 원흉 1호로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래도 호네커는 나치 체제에서 목숨걸고 반나치 투쟁한 공로가 크고 동독을 공산 국가 중 가장 잘 살게 만들었다. 물론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공산주의 특유의 좋지 않은 억압은 당연히 있었으나 이때의 동독은 그나마 아시아 공산 국가들에 비해선 숨이라도 돌릴 수 있던 시기였다. 일단 공산당 지도자 중엔 성군은 아닐지언정 악평이 적은 편에 속하는 것은 확실하다.

호네커 일가의 생활 수준은 당시 서독의 중산층 정도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많다.[8] 물론 살 돈이 있어도 소비할 물품이 부족해서 오랫동안 대기만 타고 있던 대다수 동독 시민들에겐 이 정도도 엄청난 특권으로 보였겠지만, 동독 시민들의 생활 수준이 의식주 걱정할 일은 없었다는 점을 보면 상대적인 차이로도 호네커는 타 독재자들보다 검소하게 살았다. 오히려 국가원수라는 직책을 생각하면 되려 그 정도의 생활도 못 누리는 게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실각 이후 그간 배정받았던 주택, 가구, 일상용품 등이 압류당했고, 아예 개인 계좌도 사용 정지되면서 사실상 전재산을 몰수당하였다. 업무 관련 서류나 사진, 편지 같은 사적인 물품 정도가 망명지인 칠레에 가져갈 수 있었던 전부였다고 한다.[9]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제외하면 동구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억압적이긴 했어도 호화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고슬라비아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1980년 사망 직후에 남겨진 개인 재산이라곤 오래된 양복 한벌이 전부였다.

북한에서는 '호네케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사회주의 신념이 강했던 지도자라고 고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호네커의 망명을 받아주려 한 김일성, 김정일이 국제주의적 의리에 충만한 위대한 지도자라고 결국에는 김씨네 숭배에 활용하고 있다.

4. 매체에서[편집]


독일 통일이나 동독의 말기 모습을 다룬 영화에서 자주 보이거나 언급되는 편이다.[10]

  • 영화 굿바이 레닌에서 호네커가 하야하면서 호네커 초상화가 즉각 비내리는 길거리로 버려지는 모습이 나온다.
  • 타인의 삶에서는 호네커와 태양 농담을 눈치 없이 그루비츠 중령 앞에서 지껄이다가 좌천당하는 불쌍한 소위가 나온다.
  •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 등장하는데 시대착오적인 악랄한 독재자로 묘사된다.
  • 2022년 독일 ZDF 방송국에서 몰락한 호네커와 그의 아내 마르고트가 사회주의통일당 정권 붕괴 후 통일 직전의 과도기 동안 기독교 목사 집에 지낸 일을 소재로 호네커와 목사(Honecker und der Pastor)라는 TV 영화를 제작하였다. 에드가 젤게가 호네커 역으로 분했다.
  • 아포크리파의 동독 파견 에피소드에서 언급된다. 작중 악마에 씌인 아이의 아버지가 동독인인데, 호네커의 최측근이라 사상적 적국인 바티칸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5. 이야깃거리[편집]


  • 그의 아내 마르고트 호네커(Margot Honecker)[11]는 동독의 교육부 장관이었고, 2016년 5월 6일 사망했다. 죽을 때까지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동독 체제를 옹호하다 칠레에서 사망하였다. 기사
  • 1987년 서독 방문시 고향 노인키르헨을 방문해 40년 만에 여동생 게르트루트 홉슈테터(Gertrud Hoppstädter)와 상봉하기도 했다. 노인키르헨은 그 이전에도 동독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 가운데 하나로, 이 곳에 한해서는 서기장 고향의 견학 명목으로 서독 방문 허가가 상대적으로 쉽게 나온 편이다. 물론 이 자체가 서독 여행을 하거나 서독에 남겨둔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동독 사람들의 뻥카임은 동독 당국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호네커 본인이 고향에 여동생을 두고 온 실향민이라서 일부러 모른 체 했고, 당국에서도 그의 뜻에 따라 여행객으로 위장한 탈동자가 아닌 이상, 웬만하면 여행 허가를 내주었다.
  • 그의 경호원이자 집사였던 로타어 헤어초크(Lothar Herzog)의 회고에 따르면, 정치국원 시절에는 술과 담배를 매우 즐겼지만 서기장으로 선출되고 나서 즉시 술담배를 모두 끊었다고 한다.
  • 호네커가 호평을 듣는 근거 중 하나가 그의 상대적인 문화적 비억압성이다. 실제로 성문화는 오히려 동독이 서독보다 자유로웠다고 한다! 공산주의 성진국, 사회주의 락원 남녀의 성기모자이크 없이 드러내놓고 있거나, 해수욕장누드 비치로 운영한 게 적절한 예시다. 서유럽은 제한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매춘이 창궐하고 성산업이 늘어난 반면, 동독에서는 1960년대 당시 한 여자가 3~4명의 파트너를 가지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한다. 단순히 성문화 뿐만 아니라 낙태이나 피임약 등의 문제에서도 그랬다. 이 때문에 통일 당시 정작 가장 적극적인 통일 반대론자들은 바로 여성들이었다고 한다.
유명한 영상이 1987년 베를린 성립 750주년 퍼레이드 행사이다. # 다른 영상으로 대체 영상에는 생략되었으나, 나체주의자들이 행진하는데 호네커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동양에서는 특유의 엄숙주의와 유교적 문화 때문에 성에 대한 공식적 언급이 금기시된 반면, 서양에서는 어디까지나 이것을 사적인 영역으로 취급하여 "국가가 건드려서는 안 될 어떤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독의 이러한 성적, 문화적 개방성은 종주국인 소련보다 분명했던 것으로 소련은 흐루쇼프의 해동기 이후에도 공적인 성문화는 꽤 보수적인 편이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포르노물이나 성인잡지 같은 게 창간되는 일은 없었으며 서구의 성인잡지나 포로노물의 수입도 공식적으로는 금지였다. 슈타지에서 포르노 비디오를 용돈벌이 목적으로 불법 제작하는 경우는 있었다. 물론 반입했을 때는 압수하였으며 섹스용품 가게의 개업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
호네커가 모스크바에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일치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호네커와 함께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한 뒤 고르바초프는 옆에 있던 어린 공산당원에게 물었다.

"너의 어머니가 누구지?"
"조국입니다."

"너의 아버지는 누구고?"
"바로 고르바초프 서기장 동지시죠."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니?"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고 싶습니다!"

이러한 소련의 모습에 호네커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더불어 동독에서도 그러한 단결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고르바초프가 동독에 방문한 것이다.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와 함께하는 공식 행사를 마친 뒤 옆에 있던 어린 공산당원에게 질문을 했다.

"너의 어머니가 누구지?"
"조국입니다."

"너의 아버지는 누구고?"
"바로 호네커 서기장 동지시죠."

호네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질문을 이었다.

"그럼 너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니?"
"고아가 되고 싶습니다!"[12]
호네커가 아침 일찍 집무실로 출근하였다.
창문을 열며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좋은 아침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러자 태양이 대답하길
"좋은 아침이에요, 친애하는 에리히!"

점심때 호네커가 다시 창문을 열고 태양에게 말하길,
"좋은 오후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러자 태양도
" 좋은 오후에요, 친애하는 에리히!"

일과 후 저녁에 호네커가 다시 창문쪽으로 가서 말하길,
"좋은 저녁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런데 태양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좋은 저녁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도대체 뭐가 문제니?"
그러자 태양이 대답하길
"날 좀 내버려 둬! 난 지금 서쪽에 있다고!"[13]
호네커가 의전용 자동차[14] 타고 LPG[15]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길에서 돼지가 한 마리 튀어나왔고, 운전수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해 돼지를 치어 죽이고 말았다. 화가 난 호네커는 돼지 주인에게 사과하라고 운전수를 농장으로 보냈다.

한 시간 뒤, 운전수는 잔뜩 취해 술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호네커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운전수의 대답.

"저는 그냥 가서 '나 호네커 서기장 운전수인데, 아까 그 돼지 쳐 죽였소!'라고 했어요."
호네커가 슈타지 국장인 에리히 밀케(Erich Mielke)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호네커가 말했다.

"밀케 동무. 요즘 유행하는 유머를 들어보셨소? 나에 관한 유머들인데, 요즘은 그걸 모으는 게 취미라오."

밀케가 답했다.

"그렇습니까, 서기장 동지. 저와 취미가 비슷하시군요. 저는 그 유머를 퍼트리고 다니는 사람을 모으는 게 취미입니다."
  • 유난히 인지도가 없는 편인 동독 사람들 중 한국인들에게는 그나마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동독을 배경으로 하는 여러 영화들에서도 단골로 등장하고,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등장하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던 독일의 통일 직전까지 집권했던 사람인 만큼 적어도 동독의 지도자 중에서는 가장 인지도 높은 사람이다.
  • 브레즈네프와 입맞춤한 사진이 유명하다. 자세한 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서 참고.

  • 김일성과 돈독했다는 것과는 별개로, 김일성의 막장스러운 발언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김일성이 호네커에게,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고 하자, 호네커는 "당신이 내 부하였다면, 난 당신을 출당시켜버렸을 것이다." 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19 - 1933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33 - 1945
강제 해산


1945 - 1946
재창당


1946 - 1989
합당


1989 - 1990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1990 - 1994
제명
작고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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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일성과 동갑인데다, 사망 연도도 똑같고, 공산주의자이자 독재자이자 안경을 쓰고 있다.[2] 2대 정부 수반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의 집권 기간(1960년 9월 12일 ~ 1973년 8월 1일)보다 불과 40일 정도 더 집권일수가 길다. 호네커의 집권 기간은 국가평의회 의장 겸임을 기준으로 한다면 (1976년 10월 29일 ~ 1989년 10월 18일이다.). 둘 다 13년에서 며칠 못 미치는 기간 동안 집권했다. 하지만 울브리히트는 제1서기에서 1971년에 이미 퇴출당했으며 호네커가 1971년에 그 자리를 승계했으므로 호네커의 실질 집권기간은 18년이다.[3] 스탈린 사후 소련이 세계 각국에 요구했던 것이 당수와 국가원수 혹은 정부수반의 분리 운영이었다. 이에 따라 불가리아는 벌코 체르벤코프가 제1서기와 수상을 독점하다가 제1서기에서 축출되었고 헝가리에서도 마차시 라코시가 수상과 서기장을 겸임하다가 수상에서 해임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도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죽은 후에 서기장과 대통령을 분리하여 안토닌 노보트니가 서기장을, 안토닌 자포토츠키가 나누어서 승계해야 했다. 그 중국조차도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만 맡았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 스탈린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이런 규제는 완화되었다.[4] 아래에서 보듯 호네커도 이산가족이었던 게 컸다.[5] 호네커는 1985년 서울 올림픽 경기에 참석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이때부터 남한과의 수교를 검토했던 걸로 보인다.[6] MDR의 2019년도 다큐멘터리 Honeckers letzte Reise.[7] 비록 통일이 되었으나 서독에 비해 압도적으로 빈약했던 동독인들은 2등시민 취급을 받게 되었고 공산국가 특유의 복지제도도 사라지면서 구 동독지역에서는 인구유출과 실업 그리고 알콜과 마약중독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해당 노숙인도 동독시절 잘 나가던 엘리트였으나 동독 붕괴 후 자본주의 체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였다. 한때 외교대사였던 사람은 작은 빵집으로 근근히 먹고 살고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대학교수도 공산당원이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쫒겨나 자살하는 등 동독의 엘리트들도 몰락하였는데 당시 일반 근로자들이었던 동독시민들은 독일 빈민층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특이한 사례에다가 한국에서는 남북통일이라는 이권이 걸린 문제라 주목받는 것이지 통일은 동독 출신이 더 지지한다. # 동독 출신은 '성공적인' 통일은 아닐 수도 있지만 통일 자체가 안 하는 것보다 이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서독 출신이 세금 등의 이유로 불만이 많고, 너무 동독 출신이 투덜대는 것처럼 보이며, 동독 출신은 통일이 없으면 동구권 이상으로는 잘 살고 한국 수준에 비견할 수 있는 현재 정도의 경제적 풍요도 누리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8] NDR의 2009년도 다큐멘터리 Erich Honecker. Ein deutscher Politiker; ZDF의 2014년도 다큐멘터리 Geheimakte Honecker[9] MDR의 2019년도 다큐멘터리 Honeckers letzte Reise[10] 보통 슈타지같은 관공서에 빌헬름 피크, 발터 울브리히트의 초상화와 함께 걸려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초상화를 클로즈업하면서 우리는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이런 연출로 종종 쓰인다.[11] 혼전성은 '파이스트(Feist)'.[12] 다만 이 유머 같은 경우에는 온갖 바리에이션이 존재해서 뭐가 원조인지를 알 수가 없다. 1차 대전 작품인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언급되는걸 보면 호네커는 원조가 아니다.[13] 구 동독 시절 슈타지의 반체제 인사 감시를 다루었던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도 이 유머가 등장한다.[14] 호네커 시절에는 국가원수용 승용차가 시트로엥 CX와 볼보 760을 개조한 리무진이었다고 한다. 이 차들은 현재 독일 통일 후 드레스덴의 교통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5] 동독의 국영 농업 기업인 '농업생산협동조합(Landwirtschaftliche Produktionsgenossenscha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