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하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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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하펠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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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감독
파일:escudo-holanda.png

31대
파일: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8대


클럽 감독
파일:세비야 FC 로고.svg

44대




-

오스트리아의 前 축구감독


파일:에른스트 하펠.jpg

이름
에른스트 하펠
Ernst Happel
본명
에른스트 프란츠 헤르만 하펠
Ernst Franz Hermann Happel
출생
1925년 11월 29일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사망
1992년 11월 14일 (향년 66세) /
오스트리아 티롤주 인스브루크
국적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display: none; display: 오스트리아"
행정구
]]

신체
178cm
직업
축구선수 (수비수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SK 라피트 빈 (1942~1954)
라싱 클뢰브 드 파리 (1954~1956)
SK 라피트 빈 (1956~1959)
감독
SK 라피트 빈 (1959~1962 / 수석 코치)
ADO 덴 하흐 (1962~1969)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게일스 (1967)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69~1973)
세비야 FC (1973~1974)
클뤼프 브뤼허 KV (1974~1978)
네덜란드 대표팀 (1977~1978)
KRC 하럴버커 (1979)
스탕다르 리에주 (1979~1981)
함부르크 SV (1981~1987)
FC 티롤 인스브루크 (1987~1991)
오스트리아 대표팀 (1992)
국가대표
파일: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51경기 5골 (오스트리아 / 1947~1958)

1. 개요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2.2. 감독
2.3. 리누스 미헬스와의 라이벌리
3. 기록
3.1. 선수
3.1.1. 대회 기록
3.2. 감독
3.2.1. 대회 기록
3.2.2. 개인 수상 기록
4. 여담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축구선수 출신 감독.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오스트리아 축구 역사상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위대했던 감독. 여러 클럽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려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중에 하나에 속한다. 최초로 4개국에서 우승을 경험한 감독이었으며[1] 1970년1983년에 각각 페예노르트함부르크 SV에서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하여 최초로 두 개 이상의 클럽에서 빅 이어를 들어올린 감독이 되었다.[2]


2. 축구인 생활[편집]



에른스트 하펠의 타계 2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2012년, ORF 방영.)


2.1. 선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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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드 빈 시절의 모습.

1938년에 라피드 빈의 유소년팀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시작하여 1942년에 선수로 데뷔, 이후 1959년까지 RC 파리 등을 거치며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다. 그리고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오스트리아를 3위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했다.


2.2. 감독[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rnst_Happel_1965.jpg
1965년 ADO 감독시절의 모습.

파일:external/www.wien.gv.at/happel4-gr.jpg
1970년 유러피언컵 우승 당시의 모습.

1962년에 네덜란드 ADO 덴 하흐의 감독으로 데뷔한 뒤 1968년에 팀을 네덜란드 컵에서 우승시킨 것을 시작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1969년에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팀을 옮겼다.

하펠도 미헬스처럼 유동적이고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 토탈풋볼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었다. 이때까지의 미헬스는 포메이션에서 많은 공격 숫자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시했지만 페예노르트에 온 하펠은 달랐다.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지배하길 원했다.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축구가 실현된다면 꼭 스타팅 라인업에 공격수의 수가 많지 않더라도 높은 위치에서 여러 명의 선수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공격수의 수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중앙 공격수를 한 명으로 줄이고 미드필더의 수를 늘렸다. 두 명의 미드필더로는 필드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안정적으로 경기를 지배하기 위해 미드필더를 세 명으로 늘린 새로운 포메이션을 개발했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쓰이는 4-3-3 포메이션의 탄생이었다.

그 후 4-3-3 포메이션으로 첫 시즌인 1970년 유러피언컵인터컨티넨탈컵에서 우승하며 미헬스가 이끌던 AFC 아약스보다 먼저 유럽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고 1971년에는 에레디비시에서 우승하면서 아약스의 트레블을 막으며 명성을 떨쳤다.

파일:external/clubbrugge.be/50a34f32de6b1.jpg
1977년 벨기에 리그 우승 당시의 모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rnst_Happel_1978.jpg
1978년 네덜란드 국대 감독 시절의 모습.

이후 1973년 페예노르트를 떠나 잠시 세비야[3] 지휘봉을 잡다가, 1974년에 클럽 브뤼헤로 감독직을 옮겨 벨기에 리그 3연패(1976~78) 달성과 1977년 벨기에컵 우승을 이룬 뒤 1978년에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당대 최강팀 리버풀 FC의 유러피언컵 2연패 달성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으나, 벨기에 축구 역사상 유일한 유러피언컵 결승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룬 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맡아 네덜란드를 결승전을 다시 결승에 진출시켰으나,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4][5] 그래도 그는 역대 월드컵을 통틀어 월드컵에서 타국의 국가대표팀을 지휘하여 월드컵 결승까지 올라본 단 둘 뿐인 외국인 감독이기도 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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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V 감독 시절의 모습.


1990년 방송 인터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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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말년인 1992년 대표팀 감독시절 모습. 폐암을 앓았던 탓인지 너무 수척해져 있다.

이후 벨기에로 돌아가 팀을 2개나 거치다가 1981년에 독일 함부르크 SV의 감독을 맡아 펠릭스 마가트, 만프레드 칼츠 등을 축으로 1982년과 1983년에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하여 1983년 유러피안 컵 우승, 1987년 DFB-포칼을 우승한 뒤에 고국인 오스트리아의 클럽팀 FC 슈와로프스키 티롤(현 FC 바커 인스브루크)을 맡아 1988년과 1989년에 오스트리아 리그 우승과 1989년 오스트리아 컵 우승을 이끌어냈고, 1992년에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수장으로 부임해서 불철주야 활동하다 그해 11월 14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평소에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는 골초였던 탓에 그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다.

사후에 그의 업적을 기려 오스트리아의 최대 경기장인 빈 프라터슈타디온 (Praterstadion)을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으로 개칭하였다.[7]


2.3. 리누스 미헬스와의 라이벌리[편집]


미헬스는 강력한 권위와 리더십, 뛰어난 언변을 갖추고 있어 ‘장군’이라는 말로 수식되고는 했다. 선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표현했으며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다. 또한 "프로축구는 전쟁과 같다. 너무 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패배한다"라는 명언을 남기는 등 세상과의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알렸다. 간혹 선수들과 함께 장난을 치는 유명한 일화들도 있지만, 이것들 역시 선수들과의 세밀한 소통과 팀 케미스트리 상승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는 권위를 사용하고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에 반해 하펠은 말로 표현하는 것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다. 그가 독일어밖에 할 줄 몰라 선수들과 네덜란드어로 소통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다. 그러나 독일어로도 소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그가 선수들에게 한 가장 유명한 말이 “말 그만하고 축구나 해!”였을까? 대신 하펠은 현장에서 더욱 선수들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다. 훈련에 더 많은 것을 쏟아부었으며, 과거에 기술적으로 높은 클래스의 선수였던만큼 선수들 개개인을 직접 지도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할애했다. 첫 훈련에서, 골대 크로스바 위에 병 몇 개를 올려놓고 축구공을 차서 병들을 모두 맞추어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말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권위를 만들어냈던 셈이다.

리더십 외에 전술적 접근법에서도 미헬스와 하펠의 성향은 차이를 보였다. 미헬스는 경기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는 유형이라면 하펠은 거기에 더해 경기 도중의 변화를 잘 체크하고 유연하게 계획을 수정할 줄 아는 유형이라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미헬스의 아약스와 하펠의 페예노르트에서 모두 뛰어본 테오 판 다위펜보데는 이 두 거장에 대해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며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에서는 하펠을 훨씬 더 높게 평가했다.

“미헬스는 게임 시작 시 전술적 계획을 개발하는 데 탁월했으며 이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펠은 달랐습니다. 하펠은 경기에서 작동하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었고 우리가 플레이하는 동안 그것을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펠이 미헬스보다 게임을 훨씬 더 잘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미헬스와 하펠은 두 가지 다른 형태의 토탈풋볼을 선보였다. 보통 토탈풋볼이라고 하면 전자의 것을 의미하지만, 하펠의 전술 또한 토탈풋볼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하는데, 이 시대에 미헬스의 아약스와 네덜란드가 구사한 토탈풋볼은 오늘날 많은 팀들이 구사한다고 생각하는 토탈풋볼과는 형태가 달랐다. 어느 정도 포지션의 틀 안에서 토탈 플레이를 요구하는 현대 축구와 다르게, 이 당시 처음 등장한 토탈풋볼의 개념은 필요하다면 포지션의 틀도 자주 부수며 진정한 의미의 토탈 플레이를 추구했다. 말 그대로 선수들을 임의의 위치에 갖다놓아도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시대에 따라, 감독에 따라 토탈풋볼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토탈풋볼은 특정 감독이 사용하는 특정 형태를 갖춘 개념이 아니다. 전술의 형태부터 아이디어, 기조까지 폭넓게 포괄하는 개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토탈풋볼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그 형태만큼 많이 바뀌어왔지만, 최대한 많은 시대를 아우르는 의미는 아마 ‘포지션 등의 제한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위치, 모든 역할, 모든 상황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하는 행위 또는 사상’이 아닐까 한다. 여러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플레이한다는 의미처럼, 여러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맞춰서 쓰일 수 있다.

그 중에서 미헬스가 구사한 전술로서의 토탈풋볼을 살펴보면, 이 토탈풋볼은 시스템 자체가 함유하고있는 근본적인 한계(극한으로 훈련되어있는 선수단이 필요하다는 높은 제한 조건, 체력적인 한계, 역습 허용 시 드러날 수 있는 큰 불안감, 선수의 주 포지션이 아닌 곳에서 뛰게 하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한 비판 등), 그리고 당시의 토탈풋볼을 파훼하기 위해 등장한 몇 가지 수단으로 인해 그 형태 그대로 보편화되기는 어려웠다. 대신 토탈풋볼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전 세계 축구에 뿌려졌으며 이후 전술의 현대화의 밑바탕이 되었다. 현대의 축구 전술도 토탈풋볼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넓은 의미로 이 철학적인 근간 자체를 토탈풋볼이라고 부른다.

전술로서의 토탈풋볼을 보면, 오히려 현대 축구 전술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것은 하펠의 페예노르트였다. 미헬스의 팀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과한 스위칭으로 인해 팀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포지션의 틀을 부수는 것이 불필요해보이기도 한다. 하펠의 팀은 현대의 기준에서 선수의 포지션을 과하게 벗어나지 않고 적절한 토탈 플레이를 구사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4-3-3 시스템에서 각 포지션의 선수들이 수행하는 역할이나, 3명의 미드필더로 수월하게 진행하는 빌드업, 양 풀백의 오버래핑, 윙어의 컷-인 플레이, 전방에서부터 시작되는 압박 등은 현대의 전술 트렌드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미헬스와 하펠이 만들어낸 토탈풋볼. 그 당시의 토탈풋볼은 하펠이 핵심 아이디어의 일부를 제공했을지라도 분명 미헬스가 완성한 결과다. 그런데, 이 토탈풋볼의 가치가 단순히 그 시대의 지배력만이 아닌, 그 이후의 축구까지 이어지는 영향력에서 더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 시대의 토탈풋볼은 어떠한가? 우리 시대에서 토탈풋볼이 지니는 가치는 좁은 의미로서 특정 전술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우리는 한 시대를 지배한 토탈풋볼 전술이 아닌, 축구 자체를 재정립한 토탈풋볼 철학이 가진 영향력으로 토탈풋볼의 의미를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펠도 토탈풋볼의 주인공으로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영향력의 결과로 발전한 현대 축구의 형태는 둘 중 누구와 더 가깝나? 오늘날 미헬스의 전술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은 없지만 하펠과 유사한 전술은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미헬스의 아약스보다 하펠의 페예노르트가 남긴 유산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제한 없이 더 광범위하게 통한 것, 시대를 앞서나간 것은 하펠의 토탈풋볼이다. 대신 그 당시의 토탈풋볼의 주인은 미헬스다. 앞서 말했듯이 전술로 한정지어서 보면 미헬스가 토탈풋볼의 대명사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미헬스가 그걸 완성하고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3. 기록[편집]



3.1. 선수[편집]



3.1.1. 대회 기록[편집]





3.2. 감독[편집]



3.2.1. 대회 기록[편집]










3.2.2. 개인 수상 기록[편집]


  •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8]: 1978, 1983
  •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82-83


4. 여담[편집]


리누스 미헬스와는 묘한 라이벌 관계이기도 하다. 둘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준우승을 하였고, 각각 페예노르트 로테르담AFC 아약스를 이끌며 팀에게 첫 빅 이어를 안겨주면서 명성을 높이기 시작했다는 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토탈 풋볼을 발전시켰고 둘 다 같은 해에 축구인생을 마무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9]

후고 마이슬오스트리아 축구감독 순위를 메길 때 1, 2위를 다투는 감독이다.


5. 둘러보기[편집]




[1]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2] 지금까지 이 기록을 가진 감독은 하펠 감독 포함해 6명뿐인데 나머지 5명은 오트마어 히츠펠트(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바이에른 뮌헨), 주제 무리뉴(포르투, 인테르나치오날레), 유프 하인케스(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카를로 안첼로티(AC 밀란, 레알 마드리드), 펩 과르디올라(FC 바르셀로나, 맨체스터 시티)다.[3] 이때 세비야는 지금과 달리 세군다 디비시온에 있었다.[4] 그런데 재미난점은 8강 2라운드 첫경기서 자신이 선수시절 마지막으로 월드컵에 참가한 오스트리아가 20년만에 월드컵에 진출했고 8강 2라운드 첫경기서 만났는데 자신의 조국을 무려 5-1로 대파했다.[5] 그러나 해당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와 함깨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월드컵으로 평가되었다. 당시 주최국을 우승시키기 위해 당국이 유럽강호들을 한조에 묶여 죽음의 조를 만드는 등 만행을 저질렀으며, 승부조작 의혹이 있다.[6] 다른 한 사람은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에서 스웨덴 대표팀을 이끌어 준우승을 기록한 잉글랜드 출신의 조지 레이너 감독.[7] 최대 53,808 수용가능하며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홈구장이다. 유로 2008 결승전이 여기서 진행됐다.[8] 제프 헤르베르거 어워드[9] 정확히 말하자면 미헬스는 은퇴, 하펠은 재임중 지병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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