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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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출생
1880년 5월 6일
바이에른주 아샤펜부르크 출생
사망
1938년 6월 15일 (향년 58세)
스위스 다보스
국적
[[독일|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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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미술가, 조각가 등
분야
회화, 그림, 조각, 판화
학력
Königliche Technische Hochschule (드레스덴에 위치한 왕립 공과 대학교)
파트너
도리스 그로세, 에르나 실링
1. 개요
2. 생애
3. 외모
4. 이성 관계
5. 건강
6. 작품 세계
6.1. 드레스덴 시기
6.2. 베를린 시기
6.3. 다보스 시기
6.4. 여담



1. 개요[편집]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다리파를 결성한 중심 인물. 드로잉 만 2천점, 파스텔과 수채화 1만점, 유화 천5백점, 판화 2천여점, 조각과 직물등 다 합해 3만여점에 이른다. 35년동안평균 잡아 하루에 석점씩 작품을 남겼다.

2. 생애[편집]


-1880년 독일 아샤펜부르크 출생
-1901년 드레스덴의 왕립 공과 대학에 입학해 건축학을 배웠다.
틈틈히 뮌헨의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는데 아르누보(유겐트슈틸)운동의 중심인물인 헤르만 오브리스트의 아래서 지도를 받았다.
뮌헨에서 후기인상주의화가들에게 큰 인상을 받았다.
-1905년 다리파를 설립했다.
-1906년 다리파의 첫 전시가 열렸다.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 했다.
-1913년 다리파가 해산 되었다.키르히너의 자기 중심적이고 독단적인 행보는 회원들 간의 연합과 그룹의 존속에 크게 해를 끼쳤음이 틀림없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입대하지만 2개월만에 재대한다. 그는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해졌다.
-1917년 스위스 다보스로 이주한다.
-1924년 적청파를 결성한다. 적청파는 키르히너를 따르는 젊은 청년 작가들로 이루어졌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해채되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가로 규정되었고 1936년에 그의 모든 작품이 전시 및 거래 금지 당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나치와 합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3. 외모[편집]


키르히너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키가 크고 몸매는 호리호리 했으며 열정으로 빛나는 눈빛, 날렵한 코, 크고 시원한 입매가 매력적이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그의 외모에 세련됨을 더해 주었다.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의 생전의 사진 들을 보면 패션 센스도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4. 이성 관계[편집]


다른 화가들에 비해서 화려한 여성 편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수려한 용모와 예술가 다운 열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주변에 여성들이 많았다. 키르히너의 작품 세계에서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수 없이 많은 것을 보면 그가 여성들과 많은 교류를 했으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첫번째 애인은 도리스 그로세로 그녀는 키르히너의 드레스덴 시기의 애인이었다.
그가 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새롭게 만난 여성은 에르나 실링이었다. 에르나는 키르히너가 58세의 나이로 자살 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다만 키르히너는 에르나와 예술적, 정신적 교감을 하지 못한 다는 점에 한탄했고 본인과 에르나의 우울증으로 그들은 얼마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특히 다보스 시기에 키르히너는 무용가 여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었고 그 것은 그의 작품 들에 드러난다.

5. 건강[편집]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로도 알 수 있듯이 키르히너는 생애 전반에 우울증과 정신병을 앓았다. 그는 자신의 손이 잘려 그림을 더이상 그리지 못할 것이라는 환각에 빠지곤 했다. 그는 술과 마약에 빠졌고 전쟁을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당시의 예술가 치고는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매우 빠르게 드러냈는데 결국 나치오스트리아와 합병하는 소식을 듣고 전쟁의 공포에 휩싸여 자살을 선택할 만큼 그러했다.

6. 작품 세계[편집]


그의 작품 세계는 총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드레스덴 시기, 베를린 시기, 다보스 시기

6.1. 드레스덴 시기[편집]


여성의 누드와 움직임, 자연을 묘사하던 드레스덴 시기.
이 시기에 그는 다리파 회원들과 많은 교류를 하며 서로의 그림을 따라하고 배워갔다.그들은 "15분 누드 스케치" 라는 방식을 통해 사람의 몸을 보고 느껴지는 첫인상을 포착해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했다. 강렬한 원색조의 색채, 원시적이고 과장된 형태의 작품들은 그들이 오세아니아 지역의 조각상들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6.2. 베를린 시기[편집]


베를린에서 그는 이제 도시 풍경으로 작품의 주제를 옮겼다.
대도시 삶의 긴장감과 비자연성, 방탕성, 갈등, 병든 사회의 위기감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키르히너의 <거리> 시리즈 연작들은 그의 작품 들 중 가장 위대한 작품 들로 손꼽힌다.뾰족하고 날카롭고 각진 형태의 조형들과 다소 톤 다운된 중성적 색채들은 화려한 도시 속에 감추어진 비틀어지고 우울한 도시인 들의 내면을 포착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이후 키르히너는 또 다른 변화를 겪는다. 전쟁의 공포가 그의 정신을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다. 그의 두려움은 고통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자화상들을 탄생 시켰다.

6.3. 다보스 시기[편집]


전쟁의 공포와 도시의 불안정에서 벗어나 키르히너는 스위스로 떠났다.
거기에서 그는 초기에는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경 들을 화폭에 담았다.
또한 현대 무용에 빠져들어 춤과 움직임에 대한 연구를 이어 나갔고 그의 작품들은 더욱 추상적이고 문자화 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키르히너는 자신을 표현주의 화가로 지칭하는 것을 몹시 꺼렸으며 다리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키르히너"로서의 도약을 꿈꾸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종종 평가 절하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 전성기에 자신의 명성을 날렸던 화가가 자신의 화풍을 바꾸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그가 다보스에서 보여준 새로운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그림들은 높이 평가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6.4. 여담[편집]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 이라는 소식을 듣고 자살한 거 보면 자신의 조국인 독일이 정말 이러는 것에 매우 충격받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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