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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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
楊德昌 | Edward Yang


파일:edward-yang.jpg

이름
양더창(楊德昌, Yáng Déchāng, Edward Yang)[1]
출생
1947년 11월 6일
중화민국 상하이시
사망
2007년 6월 29일 (향년 59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학력
국립 차오퉁 대학 (B.A.)
플로리다 대학교 (M.A.)
데뷔
1982년 단편영화 <광음적고사(光陰的故事)>
배우자
차이친(蔡琴) (1985-1995)
펑카이리(彭鎧立) (1995-2007)
자녀
양샹언(楊尚恩) (2000년)

1. 개요
2. 생애
3. 작품
4. 기타
5. 필모그래피



1. 개요[편집]


대만영화 감독.

허우샤오셴 감독, 차이밍량 감독과 더불어 대만 영화뉴웨이브를 이끌었던 감독이다.


2. 생애[편집]


1947년 중국 상하이 출생. 1949년 가족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 타이베이에서 성장한다. 한마디로 외성인. 동료였던 허우샤오셴 감독처럼 객가 출신이다. 허우샤오셴, 차이밍량과 함께 대만 3대 거장으로 불리기도 하다. 특히 허우샤오셴 감독 스스로가 에드워드 양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거장이다.

영화부터 시작해 데즈카 오사무, 음악을 좋아하는 등 예술가 지망생이었지만, 의외로 영화계에 입성한 건 꽤 늦었다. 당시 대만엔 영화를 배운다는 개념이 미약했으며, 에드워드 양 감독은 대만을 떠나 미국에서 USC 영화학과에 다니긴 했으나 퇴학했다. 결국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컴퓨터 공학을 배워 졸업. 7년 동안 컴퓨터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아귀레, 신의 분노를 보고 영화를 하기로 다시 마음먹고 1981년 대만으로 돌아와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각본 작업을 한다.

1982년 옴니버스 영화 광음적고사에 감독으로 참여함으로써 대만 뉴웨이브의 시작을 알렸다.

1983년 이후 한 여인의 일상을 다룬 해탄적일천을 통해 장편 영화에 데뷔해 좋은 평가를 받는다.

1985년 허우샤오셴을 캐스팅해 대만 청춘들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타이페이 스토리가 호평을 받았다.

1986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욕망에 영감을 받은 모더니즘 영화 공포분자를 내놓으면서 친구였던 허우샤오셴과 더불어 대만 뉴웨이브를 이끄는 기수가 된다. 동시에 타이베이 스토리의 주연을 맡았던 가수 차이친과 결혼한다.

파일:abrightersummerday.jpg

1991년 그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감독으로 만들어준 것은 5년 간의 침묵을 거친 뒤 내놓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었다. 1961년 대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최초의 미성년자(중학생) 살인 사건을 소재로 만든 이 영화는 3시간 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독재와 폭력으로 얼룩진 굴곡의 대만사와 쓰라린 성장기를 겹쳐 놓으면서, 봉준호를 비롯해 많은 이에게 세계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이 영화는 장첸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감독판이 재개봉하기도 했으며, 영상미와 음악이 워낙 뛰어나서 마니아도 상당하다. 1980년대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 속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위대한 감독 에드워드 양의 최고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또한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84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에 선정될 만큼 걸작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 감독은 비평적 성취와 무관하게 힘들게 영화를 만들었다. 1990년대 들어서 대만 뉴웨이브는 자국 관객들에게 냉대받기 시작했다.

1994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이색적 풍자 코미디 <독립시대>는 평단의 호평에도 무관에 그쳤다.

1996년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비공식 특별상을 수상한 마작은 호평을 받았음에도 별다른 홍보도 받지 못하고 대만에서 흥행에 실패했다. 이 시기는 점유율로만 따진다면 대만 영화의 암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대만이 민주화하면서 검열이 풀리고 세계적 호평을 받는 영화 작품도 많이 나왔지만, 홍콩 영화계가 쇠락하기 시작한데다 스크린 쿼터제의 폐지까지 겹치면서 그 자리를 할리우드 등 수입 영화가 차지했고, 이에 따라 대만 영화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차이친과의 이혼이 겹쳐지면서 대만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에드워드 양 감독은 대만을 떠나버린다. 피아니스트랑 재혼도 하고 아예 거처도 미국으로 옮겼다.

파일:하나 그리고 둘 재개봉 메인 포스터.jpg

2000년 일본 자본의 투자를 받아 대만에서 만든 하나 그리고 둘칸 영화제에서 발표된다. 현대 타이베이의 중산층 가족의 일상과 희노애락을 다룬 이 영화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급으로 평단의 격찬을 받으며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게 된다. 21세기에 나온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는 찬사,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100편'중 8위,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93위, 더불어 에드워드 양 영화 중에서도 박스오피스 최고치를 기록한 이 영화였지만 정작 대만에서는 한동안 제대로 상영하지 못했다. 금마장 시상식에도 오지 않고 2년 뒤에야 영화제에서 몇 번 틀었을 정도였다. 이 영화가 대만에서 제대로 개봉한 때는 그의 타계 10주년이 되던 2017년 7월 28일이었다. 한국에서는 단관 개봉.

참고로 당시 대만 영화의 점유율은 2001년 기준으로 0,2%까지 떨어지던 시절인지라 대만 영화 감독들에게 그야말로 비참한 시절이었다. 대만 영화 감독들이 그나마 기지개를 켤 수 있었던 것은 2006년에 영원한 여름, 연습곡, 말할 수 없는 비밀 등 흥행작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부터이다.

하지만 2000년부터 발병한 폐암 때문에 투병 생활을 하다가 생애 첫 애니메이션 제작 계획도 착수하지 못한 채 2007년 6월 29일 타계했다.


3. 작품[편집]


보통 동료로 묶이는 허우샤오셴 감독과 유사하게 대만 사회와 대만사에 대한 사색적이고 관조적인 시선이 강하다고 평가 받지만, 타이베이 출신인지라 훨씬 동시대적이고 도회적인 색채가 강했다. 허우 감독은 이에 대해 양 감독은 도시인이고 나는 농촌 출신이라 논리적이지 못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하지만 과거 회고적인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이 감독 영화에서도 다소 튀는 쪽에 가깝다. 오즈 야스지로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같은 일본 고전 영화들부터 시작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같은 이탈리아 모더니즘 영화, 로버트 알트만의 영향력을 자주 거론한다.


4. 기타[편집]


대만 영화 감독 중에서는 특이하게 영어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영어 이름을 쓰는 중화권 인사들은 홍콩 쪽이 대다수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부분. 로마자권 외 러시아나 일본에서도 똑같이 에드워드 양으로 알려져 있다. 직장을 다녔을 정도로 미국 생활에 익숙했던 편이라서 해외 활동명을 영어 이름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덩치가 크다. 185cm인 존 워터스와 섰을 때 키가 더 큰 것으로 보아# 180cm 후반대로 보인다.


5. 필모그래피[편집]



에드워드 양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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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영화팬들에게 처음 소개되던 90년대에는 한국식 한자 발음인 '양덕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참고로 출생 지역 언어인 상하이어로는 'hhian teq tsha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