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도 레예스 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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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에두아르도 레예스 오르티스 벨라스코
Eduardo Reyes Ortíz Velasco
생년월일
1895년[1]
사망년월일
불명
국적
볼리비아
출신지
라파스
포지션
공격수
신체조건
160cm / 65kg
등번호
-[2]
소속팀
트리니티 대학 (1910)
트레이즈맨 레인저스 FC (1911)
사우스햄튼 FC (1911-1913)
풋볼 칠레노 (1913-1916)
더 스트롱기스트 (1917-1937)
국가대표
1경기 0골 (1930)

1. 개요
2. 생애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1. 개요[편집]


El Chato[3]

볼리비아의 전 축구선수.

2. 생애[편집]


오티스는 1910년까지 영국에서 살았고 트리니티 대학교[4] 부속학교에서 축구를 접했다. 그리고 이 당시 사우스햄튼 FC에서 잠시 뛰기도 했다. 정확하게 경기를 뛴 기록까지는 없지만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오티스는 유럽 축구팀에 입단한 최초의 남미 출신 축구 선수가 된다. 1913년, 오티스는 칠레에 건너갔고 이곳에서 더 효율적인 축구를 배웠다.

1917년, 오티스는 볼리비아로 돌아가서 더 스트롱기스트라는 클럽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20년을 활동했으며 10년 넘는 세월 동안 팀의 주장을 맡기도 하였다. 한편 커리어 중 차코 전쟁[5]에 참전하기도 한 관계로 2년의 공백기가 있다. 오티스는 1937년에 은퇴하였다.

국가대표팀으로는 단 한경기에 출전했는데, 초대 월드컵의 두 번째 경기인 브라질전이 바로 그것이다. 볼리비아는 브라질에게 4대0으로 대패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키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소유자로 외국에서 배워온 그의 선진 축구는 볼리비아 축구팬들을 매료시켰다. 볼리비아 초기 축구계 최고의 스타로 소속팀 스트롱기스트의 전성기를 이끌며 이름값을 하도록 했다. 또한 최초의 A매치 참가자, 1930년 1월 16일에는 라파스의 구장 최초의 프리킥 골을 넣기도 하는 등 볼리비아 내에서 많은 기념비적 업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국제무대에서는 다른 선수들의 뒷받침이 없어 그다지 신통한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


4. 뒷이야기[편집]


  • 오티스는 차코 전쟁 중 캐나다 스트롱기스트 전투의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5. 수상[편집]



5.1. 클럽[편집]


  • 라파스 아마추어 리그 우승 8회: 1917, 1922, 1923, 1924, 1925, 1930, 1936(더 스트롱기스트)
  • 라파스 아마추어 리그 준우승 2회: 1929, 1932(더 스트롱기스트)

[1]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06년과 1907년 설이 대세이다. 하지만 가장 자세하게 나온 스페인어 위키를 참고하면 이 다수설은 말이 되지 않는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오티스의 별명인데 번역기를 돌려보면 아무 뜻이 안 나온다. 어번 사전에 따르면 작고 땅딸막하다는 뜻의 속어라 한다.[4] 영국에만 해도 트리니티 대학교는 무지하게 많이 나온다. 정확히 어떤 트리니티 대학교인지는 알 수 없다.[5] 1932년부터 1935년까지 파라과이와의 영토 분쟁. 승전국은 파라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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