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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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m 14좌 완등자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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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
2001년, 세계 7번째
엄홍길
2001년, 세계 8번째
한왕용
2003년, 세계 11번째
김재수
2011년, 세계 27번째
김창호
2013년, 세계 31번째
김미곤
2018년, 세계 41번째
김홍빈
2021년, 세계 44번째



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 완등자
엄홍길
嚴弘吉 | Um Hong-Gil


파일:엄홍길.jpg

출생
1960년 9월 14일 (63세)
경상남도 고성군 영현면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네팔|

네팔
display: none; display: 네팔"
행정구
]]
(명예시민권)[1]
본관
영월 엄씨 (寧越 嚴氏)
신체
167cm, 66kg
가족
배우자 임순래, 슬하 1남 1녀
학력
호암초등학교 (졸업)
의정부중학교 (졸업)
양주고등학교 (졸업)[2]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학대학 (중국어학 / 학사)[3]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체육교육학 / 석사)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원 (체육학 / 석사)
한양대학교 (최고엔터테인먼트 과정 수료)
병역
해군(224기) 갑판병 퇴역
대한민국 해군 특수전전단(UDT) 하사 전역
종교
불교
직업
산악인, 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
소속
엄홍길휴먼재단
현재 활동
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 (2008~ )
강북구 청소년 희망원정대 원정대장
(2012~ )
블랙야크 기술고문 (2019~ )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위원장 (2023년~ )
경상남도 고성군 홍보대사 (2023~ )
대한산악연맹 산악인 (1998~ )
수식어
히말라야 탱크, 불패의 사나이, 바다의 사나이, 산 사나이, 기록의 사나이[4]
좌우명
자승최강
1. 개요
2. 생애
2.1. 등반 기록
2.2. 서훈
2.3. 홍보대사
2.4. 등정
2.4.1. 14좌 완등
2.4.2. 16좌 완등
2.4.3. 로체샤르
2.5. 얄룽캉 산상음악회
2.6. 엄홍길휴먼재단
2.7. 우이동 산악문화 H.U.B
3. 네팔과의 인연
4.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산악인. 세계 최초 해발 8,000m 이상 산악 16좌를 완등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한 후술하듯이 네팔에서 학교를 세우기 때문에 네팔에서도 유명하다.

파일:엄홍길 에베레스트.jpg


2. 생애[편집]


파일:파일:엄홍길집터.jpg.jpg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으며[5] 3살 때 의정부시에 속해있는 원도봉산(호원동)으로 이사가 원도봉산에서 성장했다. 고등학생 시절 양주고등학교를 2~3시간 걸처 다녔다고 한다.

넓은 바다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1981년 대한민국 해군 신병 224기 수병으로 입대했으며, 갑판병이 되어 함정 근무를 하다가, 타던 경비정이 화재로 퇴역 처리된 뒤 퇴역함 관리병이 되자 이를 지루하게 느껴 해군 특수전전단(UDT)에 지원하여 근무하였고, 하사로 만기전역했다.[6]


2.1. 등반 기록[편집]


봉우리
높이/거리
산위치
등반일자
아콩카과
6,960m
아르헨티나

빈슨 매시프
4,892m
남극

엘브루스
5,642m
러시아

에베레스트
8,850 m(1)
중국/네팔
1988년 9월 26일
초오유
8,201m(6)
중국/네팔
1993년 9월 10일
마칼루
8,463m(5)
네팔
1995년 5월 8일
브로드피크
8,047m(12)
파키스탄
1995년 7월 12일
로체
8,516m(4)
중국/네팔
1995년 10월 2일
다울라기리
8,167m(7)
네팔
1996년 5월 1일
마나슬루
8,163m(8)
네팔
1996년 9월 27일
가셔브룸 1봉
8,068m(11)
중국/파키스탄
1997년 7월 9일
가셔브룸 2봉
8,035m(13)
파키스탄
1997년 7월 16일
안나푸르나
8,091m(10)
네팔
1999년 4월 29일
낭가파르밧
8,126m(9)
파키스탄
1999년 7월 12일
칸첸중가
8,586m(3)
인도/네팔
2000년 5월 19일
K2
8,611m(2)
중국/파키스탄
2000년 7월 31일
시샤팡마
8,027m(14)
중국
2001년 9월 21일
에베레스트
8,850m
중국/네팔
2002년
에베레스트
8,850m
중국/네팔
2003년
얄룽캉
8,505m
인도/네팔
2004년 5월 5일
임자체
6,189m
네팔
2005년
휴먼원정대
에베레스트
8,850m
중국/네팔
2005년
휴먼원정대
로체샤르
8,382m
중국/네팔
2007년 5월 31일
안데스 트레킹
8,000km
남아메리카 대륙
2014년 3월 22일


2.2. 서훈[편집]


  • 1989.9.8 체육훈장 거상장
  • 1996.4.25 체육훈장 맹호장
  • 1998.12 한국대학 산악연맹 올해의 산악인상
  • 2000.12.7 유네스코 서울협회 올해의 인물 선정상
  • 2001.9.15 대한민국 산악대상
  • 2001.10.25 체육훈장 청룡장
  • 2002.9.17 해군을 빛낸 예비역 선정상
  • 2003.8.11 로얄 살루트 50년 탄생기념 장인상
  • 2005.9.15 한국산악회 창립 69주년 기념 황금 피켈상
  • 2005.12 환경재단 2005 세상을 밝게만든 100인선정상
  • 2007.11.13 2007 파라다이스 특별공로상
  • 2007.12.5 아레나-아우디 공동제정 2007 A-어워드 카리스마상
  • 2008.2.21 2008 한국외국어대학교 CHALLENGE상
  • 2010.4.13 제10회 4·19 문화상
  • 2010.11.24 제2회 대한민국 휴먼대상 행복나눔상
  • 2011.12.19 지식경영인 대상
  • 2012.4.2 대한산악연맹을 빛낸 50인 선정
  • 2012.4.17 2012 동아일보 10년뒤 한국을 빛낼 100인 선정
  • 2012.11.12 제12회 산악상 특별공헌상 수상
  • 2013.3.26 한국재능기부협회 자랑스런 재능기부인
  • 2013.4.5 2013 동아일보 10년뒤 한국을 빛낼 100인 선정
  • 2013.8.1 자랑스런 대한국민 대상(문화체육대상 국위선양부문)
  • 2017.12 제17회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최고대상·체육발전)
  • 2018.5 올해의 불자대상
  • 2019.11 대한체육회 선정 2019 스포츠영웅 헌액
  • 2020.8 제24회 만해대상-실천대상
  • 2021.11 도산인상 봉사상
  • 2021.12 적십자박애장 금장


2.3. 홍보대사[편집]


  • 2001~ 플랜인터네셔날 한국위원회 홍보대사
  • 2002~ 한국청소년문화원 홍보대사
  • 2003~ (사)한국올림픽 참피온클럽 홍보대사
  • 2006~ 한국외국어대학교 홍보대사
  • 2006~ 의정부시 홍보대사
  • 2007~2009 기상청 홍보대사
  • 2007~2009 부산교육청 홍보대사
  • 2007~2008 함평세계나비. 곤충엑스포 홍보대사
  • 2007~2017 오클리 엄홍길 시그니처 홍보대사
  • 2008~ 아시아기자협회 홍보대사
  • 2009~2011 한국토지공사 홍보대사
  • 2009~2012 춘천월드레저총회 및 경기대회 홍보대사
  • 2010~ KOICA(한국국제협력단) 홍보대사
  • 2010~2012 로터스월드 홍보대사
  • 2010~2014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 홍보대사
  • 2011~2012 광주비엔날레 홍보대사
  • 2011~ 경남 고성 공룡세계엑스포 홍보대사
  • 2012~2014 여수세계박람회 홍보대사
  • 2012~ 소방방재청 안전 홍보대사
  • 2012~2013 세계자연보전총회 홍보대사
  • 2012~2013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 홍보대사
  • 2012~2014 국토해양부 극지 홍보대사
  • 2012~2015 연세사랑병원 홍보대사
  • 2012~ 대한적십자사 홍보대사
  • 2012~ 육군사관학교 홍보대사
  • 2013~2014 2014 인천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홍보대사
  • 2013~ 안전행정부 안전문화 홍보대사
  • 2013~ 사단법인 스포츠봉사단 고문
  • 2014~2015 산림청 정책자문위원
  • 2014~2015 한국자유총연맹 홍보대사
  • 2014~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보대사
  • 2016~ 문체부 스포츠 안전 홍보대사
  • 2016~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홍보대사
  • 2016~2017 헤이그 프로젝트 홍보대사
  • 2017~ 환경부 국립공원 5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
  • 2017~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지도자홍보대사
  • 2017~ 한국장학재단 명예홍보대사
  • 2018~ 울주세계산악영화제 홍보대사
  • 2019~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홍보대사
  • 2019~ 2·28민주운동 홍보대사
  • 2019~ 주한 네팔대사관 홍보대사
  • 2021~ 강원세계산림엑스포 홍보대사
  • 2022~ 이리지스 엄홍길 시그너쳐 선글라스 홍보대사
  • 2023~ 경상남도 고성 홍보대사


2.4. 등정[편집]


1988년부터 2007년까지 38번의 실패와 16번의 성공 끝에, 히말라야 8,000m급 16좌 완등에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2.4.1. 14좌 완등[편집]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2001년한국에서 두번째[7]이자 세계 8번째로 히말라야 8,000m급 14개 봉우리를 완등했다.


2.4.2. 16좌 완등[편집]


파일:엄홍길 8000M 16좌.jpg

파일:8000M 16좌.jpg

그리고 다른 8,000m급 위성봉인 얄룽캉로체샤르를 등정하여 16좌 등정에 성공한 대한민국과 세계 산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다만 엄홍길의 시샤팡마 등정은 1993년에 이루어졌으나 등정 실패 의혹으로 인정 받지 못한 탓에 논란을 불러왔으나,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의 국제 공인 기록인 2001년의 재등정을 인정받으면서 마무리되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데, 지구 상에 8,000m가 넘는 봉우리는 14개도, 16개도 아닌 20여개 쯤 있는데 이 중 우뚝 솟은 핵심봉 14개를 산악인들이 8,000m 14좌라 불러왔고 이는 세계적으로도 공인된 봉우리이다. 그러나 위성봉인 얄룽캉, 로체샤르는 독립성이 강할 뿐 14좌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히말라야 14좌 최초 등반가인 라인홀트 메스너를 비롯해 예지 쿠쿠츠카, 에르하르트 로레탄까지 이미 전설이 된 그 어느 누구에게도 16좌 완등은 시도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15좌 등반했을 때도 당연히 세계 최초였다.관련기사


2.4.3. 로체샤르[편집]


로체샤르히말라야산맥 중에서도 등정이 가장 어려운 산맥으로 엄홍길은 2001년 첫 도전에 실패했으며 2003년 도전에서 정상을 150m 앞두고 판상 눈사태가 일어나 동료 두 명을 잃었다. 2006년에 3번째 시도도 실패했다. 2007년 5월 31일에 4번째 도전에서 로체샤르 남벽을 통해 등정했다. 평균 각도가 70에서 90도에 이르는 남벽 높이만 3,500m나 된다.[8]

8,000m의 산에서는 산소가 해수면의 1/3가량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세발 움직이고나서 3~5분간 숨을 거칠게 쉬어야 다음 한 발을 내딛을 수 있고 체력도 금방 고갈된다. 평균 기온이 영하 30~50도 가량 되어 손끝과 발끝은 감각이 사라진다. 거기에 환각 증세가 일어나 옆에 동료가 말을 시키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리며 꿈을 꾸기도 하며 이 상황에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엄홍길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자주 느끼지만 정신력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로체샤르 정상에 오르는 순간 38번의 히말라야 등정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 숨진 동료들이 생각났다. 정상에 태극기를 꽂고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변성호 대원의 눈에 빛이 반사되어 설맹이 걸려 앞이 안보이는 현상이 발생했다. 대원들은 당황했으나 엄홍길은 앞이 안보이는 대원을 데리고 하산을 결정했고 서로의 몸을 묶은 상태에서 내려가는 도중에 발을 헛디뎌 죽을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다행히 무사히 하산했다. 5시간이면 내려오는 것을 12시간 동안이나 통신이 두절되어 베이스캠프 기자들이 실종기사를 내보내려는 순간 엄홍길이 눈 앞에 나타났고, 떠난 동료들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힘을 달라며 기도했다고 한다.


2.4.4. 휴먼 원정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계명대학교/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5년, 지난 해인 2004년에 에베레스트에서 숨진 박무택, 백준호, 장민 대원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엄홍길과 대원들이 '휴먼 원정대'라는 팀을 꾸려 등정하기도 했다. 세 명의 대원들은 엄홍길과 함께 한국에서 준비한 후 네팔에서 헤어져 에베레스트로 갔었고 엄홍길은 15좌 얄룽캉에 등정하기 위해 흩어졌었다. 얄룽캉 등정 후 하산길에 엄홍길은 후배들이 하산 중 설맹에 걸려 결국 주저앉아버렸다는 비보를 들었다. 이 중 시신 한 구는 실종된 것도 아니고 암벽에 로프 째로 매달려 있어 다른 산악인들이 등정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지나치고 있다는 전언들이 들려왔다. 엄홍길은 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 휴먼원정대를 꾸려 시신 수습에 나서기로 했다. 이 과정은 당시 방송에 보도되기도 했고, 엄홍길도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아서 고생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8,750m에서 박무택의 시신을 발견하였으나 눈과 얼음으로 인해 몸이 단단해져서 무려 100kg이 넘었고, 결국 원정대는 시신을 데리고 하산하는 것을 포기하고 해가 잘 비치는 동쪽에 돌무덤을 만들어주고 하산했다. 이 사건은 2015년 12월 16일에 개봉한 영화 히말라야로 영화화되었고, 박무택과 함께 실명으로 나온다.







2.5. 얄룽캉 산상음악회[편집]


가수 이문세는 2004년 3월 15일 히말라야산맥의 얄룽캉 8,505m 원정을 떠난 엄홍길 단장 일행과 현지 베이스 캠프에서 만나기 위해 연극배우, 대한산악연맹 전무 등 9명과 함께 2004년 4월 17일에 출국했다. 이문세는 엄홍길을 위해 평지 대비 산소가 30%인 얄룽캉 5,500m에서 산성음악회를 열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고산에서의 음악회였다.
파일:산상음악회.jpg


2.6. 엄홍길휴먼재단[편집]


16좌 등정을 마친 후 8,000m 고산에는 오르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인생의 17좌인 엄홍길휴먼재단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 안나푸르나 등정 당시 모든 것을 베풀며 살 것을 다짐했다고 하며, 네팔에 학교를 지으면서 이 맹세를 지키고 있다. 2022년 기준으로 19개의 학교를 세웠다. 1986년에 사망한 셰르파 동료의 사망 후 유족들을 찾아갔더니 너무나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후손들이 아버지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도록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재단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학교의 보건 교사가 되거나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 건설현장의 현장 소장이 되기도 했다.기사

그의 책을 보면 요즘 기후 변화(지구 온난화)가 에베레스트히말라야에서도 뼈 저리게 알 수 있을 정도라는 걱정이 나온다. 1980년대만 해도 히말라야의 산들은 날씨가 나빠도 사흘 정도만 마을에서 쉬면 날씨가 좋아졌지만, 2000년대에 와선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산 곳곳에 눈이 많이 녹은 게 갈수록 늘고 있다면서, 산마을에서도 차와 첨단장비로 편하게 지내고, 갈수록 자연이 오염되고 있는데 머지않아 히말라야 산들에 눈이 남아있긴 할까 걱정이 된다고 회고했다.


2.7. 우이동 산악문화 H.U.B[편집]


우이동 산악문화 H.U.B[9]는 더 많은 청소년들이 산악문화를 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북한산 입구 근처인 강북구 우이동에 건립했다. 우이동 산악문화 H.U.B에서는 산악 체험관과 엄홍길 전시관과 더불어 산악 매듭법, 산행시 복장 등 산행에 관한 여러가지 체험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3. 네팔과의 인연[편집]


2015년 네팔 대지진 때, 지인들과 함께 네팔에 구호 활동을 위한 자원 봉사를 하러 갔다. 엄홍길은 네팔에 대하여 애정이 각별하다고 밝혔는데, 네팔에 초등학교를 세우기도 했고 현지인 친구들[10]도 많다고 했다. 후배 산악인들에게 네팔 사람들을 무시하면 내가 가만 안 둔다고 엄격히 충고를 할 정도로 네팔은 제 2의 조국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11]



3.1. 무릎팍도사 출연[편집]


대한민국에서 산악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로서, 16좌 등정 이후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16좌의 마지막 고비였던 로체샤르 등정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산악인으로서의 삶과 도전 정신 등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다. 평소에 무릎팍도사를 보지 않던 사람들도 '엄홍길이 나오니까 한 번 볼까'해서 본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간 수많은 강연과 방송 출연을 해왔지만 무릎팍도사라는 예능 프로에 나오게 된 이유는, 산에 관련된 에피소드나 인생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예능 프로그램이라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산은 보면 볼수록 익숙해지고 정이 가는데, 로체샤르만큼은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한다. 엄홍길이 오른 루트는 3,500m 수직 빙벽이라고 한다.

산에 오르다보니 언제라도 죽을 각오를 해서 2013년 3월 4일 TV에 나와 미리 쓴 유서를 보여주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박무택,[12] 박영석(1963~2011), 지현옥 등 후배 등산가들이나 친하게 지내던 셰르파들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걸 많이 봤으며, 자신도 죽을 고비를 많이 겪다보니 이런 유서 작성은 당연했을 것이다.

나중에 청소년들에게 청소년들이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길 원하여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 등산 교실을 만들 것이라고 했으며, 현재 청소년들을 위해 강북구 청소년 희망원정대를 만들어 원정대장을 맡고 있다.


4. 기타[편집]


  • 산악인으로서 그의 마인드는, 산을 오를 때에 산이 잠시 정상을 빌려주는 것일 뿐 산을 정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산이 허락해 주지 않으면 자기가 아무리 경험이 많은 산악인이라도 정상에 오르는 건 불가능하다고. 흔히들 신의 영역이라 부르는 8,000m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자연의 섭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레 자신을 낮추고 겸허한 자세로 산을 오르게 된다고 한다.




  • 2016년, "바둑기사 조훈현 9()단과 엄홍길에게 새누리당에서 비례대표를 제안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처음 보도된 당시에는 엄홍길이 입당을 고려하는 중이라는 기사가 났었으나, 이후 엄홍길이 지인에게 입당제의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완곡한 거절의 의사로 생각해보겠다고 말을 했는데 이를 언론에 보도해서 당황스럽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또한 "지금은 정치에 생각이 없다. 히말라야와의 약속을 먼저 지켜야 한다."[13]며 입당을 확실하게 거절한다는 내용으로 다시 인터뷰한 기사가 올라오면서 정계 진출 소란은 일단락되었다. 그리고는 더불어민주당 강남 을 지역구에 출마한 전현희 후보의 지원유세에 참여했다. 또한 더민주 박광온 의원과 친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엄홍길이 민주당 지지자인 것은 아니고, 인맥 따라 지지를 해 주는 것으로 보면 될 듯하다. 당장 같은 총선에서 새누리당 정종섭 예비후보 지지의사를 밝히기도 했고, 2012년에는 총선에서 박민식 후보 지원유세를 하기도 했다. 또 이명박, 김문수와 등산을 함께하기도 했다.

파일:엄홍길 나경원.jpg
[1] 기사[2] 현재는 동두천중앙고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양주시에 소재한 양주고등학교와는 다른 학교이다.[3] 02학번으로 입학한 만학도다.[4] 세계 최초로 16좌를 달성했기에 붙여진 수식어[5] 현 위치 경상남도 고성 영현면[6] 군 시절 경주시 감포에서 독도까지 5박 6일동안 수영해서 가기도 했다고 한다. UDT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경험한 군생활이 훗날 히말라야산맥을 오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2000년에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해군 UDT 편에 출연하였고 2010년 KBS 병영체험 프로그램 병영체험 진짜사나이에서 모군인 UDT를 다시 찾기도 했다. 참고로 동기들에 따르면 그 UDT 중에서도 독보적인 기량을 뽐냈다고 한다.[7] 첫번째는 박영석[8] 오르다보면 눈이 쌓인 부분이 있는데 절벽의 눈을 깎아낸 후 두평 정도 되는 작은 텐트를 설치해 휴식을 취한다. 낙석, 낙빙 위험도 있으며 실제로 돌이 텐트를 뚫고 들어와 동료가 다친 적도 있으며 드물게 텐트 전체가 쓸려가는 경우도 있다. 빙벽은 발 전체가 닿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앞발로만 디디고 25시간씩 올라가야 한다. 대소변도 그 상태에서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고 봐야한다.[9] Himalaya Umhong-gil Bukhansan의 약자이다.[10] 단짝이던 네팔인 셰르파가 사고로 죽은 뒤 유족들에게 지금까지도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어 미망인과 아이들도 엄홍길을 친척 아저씨라고 친근하게 부를 정도이다. 아들은 이젠 고교생이 되었는데 학비도 엄홍길이 맡고 있다고 한다.[11] 명예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12] 로체샤르 에피소드에서 엄홍길과 함께 했던 후배로, 2004년 에베레스트 정상등정 직후 하산길에 눈사태로 추정되는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이후 에베레스트를 등정중이던 오은선에 의해 시체가 처음으로 발견되었다.[13] 히말라야 지역에 학교를 짓는 자선 사업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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