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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厳幹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한미한 가문의 출신으로 동현의 이의와 친했고 성격은 점잖으면서 마음씨가 너그러웠으며, 중평 말에 20여 세 때 엄간은 검술을 좋아했다.

사례 빙익군의 명문인 환씨, 전씨, 길씨, 곽씨, 이전의 시중이었던 정문신 등이 이의와 함께 엄간의 점잖고 너그러운 인품을 인정했으며, 삼보의 난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피난했지만 엄간은 이의와 함께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해 장작을 구하면서 스스로 생활했다.

건안 초에 관중의 길이 열리고 조칙으로 인해 빙익군 서부의 여러 현들이 분할되어 좌내사군이 군의 치소가 되고 동부의 여러 현들은 임진이 군의 치소가 되었는데, 소속으로 보면 엄간은 서부를 섬기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의의 주장에 따라 엄간은 동부를 섬겼다.

엄간은 사례교위가 불렀지만 가지 않았고 어느 때에 한 해가 끝날 무렵에 군에서 엄간을 효렴으로 천거했으며, 포판령에 임명되었다가 병으로 인해 관직을 떠났다. 다시 효렴으로 천거되어 공거사마령이 되었고 주의 요청으로 조칙에 따라 의랑에 임명되자 귀향하고 주의 정치에 참여했으며, 202년에 곽원을 토벌했을 때와 206년에 고간을 잡을 방법을 마련한 공적으로 인해 엄간은 무향후에 봉해졌고 홍농태수로 승진했다.

211년에 마초가 관중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그 세력권에 가까워 홍농군의 주민들이 흩어져 달아났는데, 마초가 패한 후에는 엄간은 한양태수로 옮겨졌다. 후에 익주자사로 승진했지만 길이 통하지 않았기에 황초 연간에는 오관중랑장으로 옮겼으며, 조예 때 영안태복으로 승진했다가 몇 년 후에 사망했다.

배송지에 따르면 위략장기, 서서, 이의, 유초, 양습, 조엄, 배잠, 한선, 황랑과 같은 열전에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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