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빈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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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상세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정조가 후궁 의빈 성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손수 쓴 묘지명. 의빈 성씨가 사망한 1786년(정조 10년)에 작성했다.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2번이나 차인 흑역사와 끝내 맺어진 러브 스토리를 직접 기록했다.


2. 내용[편집]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서 9월 14일 갑신에 빈 또한 죽고 말았다. 석 달 뒤 11월 20일 경인에 율목동 문효의 묘 왼쪽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냈다. 빈은 자신을 잃고 문효를 따라 죽기를 늘 소원하더니 비로소 이제 문효의 무덤 곁으로 떠나가 버렸다.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열 살(1762)에 궁중에 들어왔는데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이 모두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뛰어나 능히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용 했다. 심지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도회지에서 똑똑하게 분별하고 확고하게 지키니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거절했다. 이에 빈의 노비를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1]

했다. 그 달에 임신함으로써 임인(1782) 9월에 세자를 낳았다. 이해 소용으로 봉해졌고 귀한 아들로 하여금 빠르게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다. 빈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여기는 바를 더욱 스스로 억눌렀다. 내전(효의왕후)을 대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를 갖추고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섬겼다. 시침(侍寢)[2]할 때는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 내전이 있고 또 후궁이 있습니다."라며 또 번번이 당석이 잘못 되었다며 사양하고 거절하며 피했다.

내전(효의왕후)은 그 자식을 이미 받아들였고, 양육할 때는 반드시 생모에게 맡겼는데 조정에서 예부터 전해오는 규칙과 정례였다. 빈은 감히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고 내전을 따랐고 내전은 빈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고 점차 자라기를 기다렸다. 빈은 세자를 어루만질 때는 생각하여 몸과 마음가짐을 조심했고, 밤에는 반드시 아침이 밝을 때까지 밝은 촛불을 두었고, 잘 때는 옷을 벗은 적이 없었는데 5년 동안 한결같았다.

또 나날이 천한 일을 몸소 했고, 말을 할 때는 극진히 존중히 여기고 공경했다.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면 빈은 "왕세자는 내전의 아들입니다. 내가 낳았다고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라고 했다. 빈의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리어 막고,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얼마 되지 않아 변변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지금 지체가 높고 귀한 신분은 이미 나에게는 과분합니다. 도리어 스스로를 자랑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면 어찌 더욱이 몸에만 재앙이 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이 복을 오래 누릴 수 있도록 생활을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처음 (1786) 5월에 변고가 일어나고 떠나보낼 때 말과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이 혹 괴이하게 여겨 어찌 개의치 아니하냐고 물어보니 "내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 지금 보는 나라는 위태함이 위엄이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다행히 내가 임신했지만 늘어놓고 슬퍼하고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내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과 같아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헌데 어찌하여 병이 들었단 말인가?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고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았는데 매일 세수할 때 내가 가서 보고 살폈다.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어도 나를 대할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기운을 내서 메아리처럼 응답했다. 임종하기 전날 저녁에 내가 가자 갑자기 슬퍼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청했다.

이에 내가 꾸짖으며 "평상시 나를 볼 때는 근심 어린 얼굴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라고 물었다. 빈이 말하기를 "앞서서 내전(효의왕후)께 아들이 생긴 경사는 축복이었습니다. 천신(賤臣)[3]

이 다시 자식을 가져서 종사는 매우 다행이지만, 사심을 마음 속으로 억눌러 견뎌내지 못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복이 지나치게 과분해서 끝내 병이 중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오직 오래도록 지닌 소원은 죽을 고비에 임하여도 아직 얻지 못하여 근심입니다. 그러니 정전에 자주 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경사가 있을 것이니, 장차 땅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감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거짓됨이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건대 어찌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죽음을 잊지 아니하고 맛보는 일과 언행을 조심했는데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성껏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매우 친밀하여 자매를 잃은 마음이었다. 온 궁 안 사람이 모두 빈의 죽음을 한탄하여 한숨 쉬고 슬퍼하며 애처로워했고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빈이 작위를 받고 나서 나는 더 엄하게 단단히 단속하여 이따금 사람이 견디지 못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빈은 한 뜻을 기쁘고 좋게 웃어른의 명령을 좇았다. 일이 혹 더욱 은혜에 해당 되면 위축되어 더욱 멀리하고 견지했으니 자못 겸손했다. 빈의 선산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의논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하여 말하기를 "천한 집안의 일에 감히 마음대로 안배하여 번잡하게 관청의 돈을 쓰는 것은 사사로운 개인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중한 바인데 네가 불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 비용에 보태라." 하고 일렀다.

동궁의 외가 사친은 규정에 따라 증 찬성에 추증하지만 나는 이전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문효세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교지를 내렸는데 빈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한 집안 사람으로서 분황(焚黃)[4]

을 예로서 중지해달라 청하며 말하기를 "벼슬을 더 높여서 내려주는 것은 곧 국가의 법전이 있는 바인데 감히 전하께서 내려주는 물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뜻밖에도 어찌 감히 장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빈이 매양 애석해서 따뜻한 밥과 비단, 모시를 내렸으나 도리어 궁의 희빈(姬嬪)만 못하였다. 비록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검소함을 따랐으나 오히려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며 궁중 사람에게 늘 너그러이 빌려줬다. 결국에 가서는 세상을 떠나자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왔고, 살아 생전에는 은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飯含)[5]

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궁인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하기를 "빈이 그 청빈함을 잘 알고 지키니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빈의 두 오라버니는 곤궁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사심으로 관여한 적이 없었다. 내가 "조정의 관작은 진실로 부당하게 남수(濫授)[6]

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남는 녹봉으로 저 배고픔과 추위를 구원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빈이 걱정하는 모양으로 대답하길 "궁방이 세워진 이후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사가의 천인에게 재물의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빈의 장례 때 그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옷과 신발을 빌렸다.

궁빈의 사친은 관직명이 없는 사람은 궁중 출입을 허락을 받을 수 없으나 오래 전부터 본궁에서 접견하라고 허락했었다. 그러나 빈이 본궁에 나가 기거 하면서 사친과 여러 해 동안 격조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문 앞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 말하기를 "올 때 임금에게 여쭈고 아뢰어 뜻을 받들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불러내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릇 형제가 몹시 가난하여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의탁하고자 하면 가족과 떨어지고자 했다. 단란함은 사람이 항상 품고 있는 심정인데 빈은 어찌 오직 다른 사람과 다르단 말인가.

내가 내린 명령은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조심히 정성껏 지켰는데, 이는 실제로 사실을 경험했다. 궁에서 산 지 20여 년인데 일찍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좋지 않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혹여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거나 의심을 접하면 반드시 자세하고 소상하게 하여 스스로 완전히 타당함에 이르게 했다.

나는 보통 때 집안 밖의 일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빈도 역시 상황을 따르며 술잔을 주고받는데 익숙하고 내명부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내가 혹 처소에 도착할 때면 궁중의 계집종들은 모두 황급히 숨어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함에 힘썼고 아랫사람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았다.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궁액(宮掖, 각 궁에 있는 하인)을 엄히 다스리고 가까운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데 일을 주면 헤아려서 명령을 받드는 일이 적었다. 을 후궁 반열에 둔 지 20년인데 단단히 타일러서 잘못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게 했다. 이에 곧 명심하고 작은 실수도 하지 않고 조심하며 응대하였는데 법도가 저절로 있었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마땅히 출중했다. 이것은 뛰어난 현인도 분명히 어렵다.

본분을 각별히 정성껏 지키며 신분의 엄격함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였다. 사사로이 윗사람을 찾아가서 청탁하는 일을 경계하고 엄히 끊어내고 가득 이루어놓음에 있어서 염려하였는데 이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에 이른 것이 크고 옳고 그름이 매우 분명하지만 감히 입을 열 수 없고, 일이 되어가는 형세는 손을 댈 수 없으면 능히 오랫동안 정성을 쌓고 있는 힘을 다해 곧바로 나아가 물러서지 않았다. 가진 것의 의리로 하여금 끝내 마땅히 바른 곳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는 책을 읽은 사대부가 쉽게 갖추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일에 능하고 절개와 지조가 있다고 여기고 전하여져서 당대의 미담이 될 것이다.

후일 빈의 상론(尙論)[7]

은 이와 같다. 빈의 출신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하여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지만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내전(효의왕후)을 위해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마땅히 알고 금석(金石)도 가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빈은 높음과 귀함,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을 즐거움으로 삼기에 거듭 부족하다고 했다. 마음에 잊히지 않는 정성으로 매우 간절히 청하며 반드시 내전에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하며 더구나 장차 상심하고 슬피 울면서 평생 동안 내전을 따르겠다고 지극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충정이지만 배에 칼을 꽂은 정성도 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이에 대략 찬차(撰次)[8]

하였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 글이 길어졌다.

그대 빈은 계유년(1753)생이고 향년 34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해를 못 넘기고 죽었다. 빈의 본관은 창녕이고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成仁輔)가 시조이다. 인보의 아들은 문하시중으로 지낸 송국(松國)이다. 그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문정의 큰 아들은 석린(石璘)이고, 둘째 아들은 석용(石瑢)이며, 셋째 아들은 석인(石因)이다. 성석인은 예조판서와 대제학 직위에 올랐었고 시호는 정평(靖平)인데 이 사람이 빈의 선조다. 그러나 이후 집안이 중간에 계보를 잃어버렸다. 7대조 만종(萬種)은 제릉(齊陵)[9]

의 참봉이고, 고조 경(景)은 군자감 정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윤우(胤祐)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인데 통례원[10] 인의(引儀) 임종주(林宗胄)의 딸이다.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하면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몸은 정중하게 행동하고 입은 극진한 말을 했으나 복록이 은덕에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운명인가보다. 저 고요한 율곡의 언덕은 문효세자가 잠든 곳이니 영원토록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멀고 오랜 세월 동안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



3. 상세[편집]


의빈의 아버지 성윤우는 본래 홍봉한(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였다. 홍봉한 가문과의 연으로 인해 1762년 이후에 혜경궁 홍씨 처소 궁녀로 입궁했다. 혜경궁 홍씨는 어린 의빈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의빈을 거두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고 한다. 어머니가 친히 기르는 궁녀였으니, 정조와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을 것이다.

1766년, 15살 정조는 14살 의빈에게 승은[11]을 내리려 한다. 이해 8월 효의왕후(당시 세손빈)가 관례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정조와 효의왕후도 이 해에 초야를 치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빈은 아직 효의왕후가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맹세하고 정조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장차 왕이 될 세손과 일개 궁녀라는 신분 차이 때문에 원하면 얼마든지 강압적으로 후궁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정조는 의빈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3년이 지나 1768년, 정조는 여동생 청선공주의 남편 흥은위 정재화, 그리고 별감들과 기생집을 드나드는 등 방황의 시간들을 보낸다. 이 일은 일명 '기축별감사건'으로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정조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모습과 대조적인데, 이 때 정조의 나이가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18세였던데다, 세손빈(효의왕후)과 금슬이 친밀치 못했고, 마음에 둔 궁녀(의빈 성씨)에게는 거절당했으니 일종의 사춘기의 반항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의빈 성씨는 정조를 차고 나서도 궁녀 생활을 잘 했던 것 같다. 1773년,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함께 10책에 달하는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했는데, 정조는 의빈의 붓글씨가 범상함을 넘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마침내 1776년, 25살 정조가 드디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살이 가깝도록 아들은커녕 딸도 얻지 못했다. 결국 계조모 정순왕후(당시 왕대비)가 간택령을 내려 후궁을 간택한다. 정순왕후는 간택령에서 '정조가 궁녀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순왕후는 정조가 의빈에게 거절당한 흑역사를 몰랐거나 정조가 의빈 말고는 다른 궁녀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듯 하다.

아무튼 이때 간택된 첫 후궁이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다. 그러나 원빈 홍씨는 입궁한 지 1년도 안 되어 후사 없이 죽고, 2번째로 간택된 후궁 화빈 윤씨 역시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게다가 화빈 윤씨는 투기가 심해 따로 방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정조는 후궁을 둘이나 간택하고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무려 15년 만에 다시 의빈 성씨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으나, 또 거절당한다. 결국 의빈 성씨의 하인을 벌하고 나서야 명을 따랐다고 한다.

이후 의빈 성씨는 두 번 유산하고 아들 문효세자와 딸 옹주를 낳으나 모두 앞세워 보낸다. 그리고 자신 역시 다섯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조는 의빈의 죽음을 애도하며 묘지명, 묘표, 치제제문, 비문 등을 썼는데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그 절절한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은 약 200년 뒤인 2005년 로맨스 소설 《비단속옷》,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2007년 드라마 《이산》, 2016년 뮤지컬 《정조-만천명월주인옹》, 2017년 로맨스 소설 《우아한 환생》, 《옷소매 붉은 끝동》 등에서 각색되어 그려졌다. 또한 2021년 하반기 동명의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MBC에서 방영 되었다. 원작소설이 이러한 추가 사료가 밝혀지기 전에 쓰여졌으므로 원작소설에 어제의빈묘지명등에서 나온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를 추가시켜 방영할 것으로 보였으나 묘지명을 짓는 것도 현재 효창공원의 이름을 짓게 된 경위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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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 차례가 돌아온 날 밤에 잠자리를 같이 함.[2] 후궁이 임금을 모시고 잠자리에 드는 것[3] 신하가 임금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천한 신하'란 뜻으로 칭하는 것.[4] 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 앞에서 (누런 종이에 적은) 사령장의 복사본을 태우는 의식.[5] 염습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이나 씻은 쌀을 물리는 의식[6]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게 벼슬이나 물품 따위를 함부로 마구 줌.[7] 고인의 언행, 인격을 평가함[8] 시문 등 글을 가려 뽑아서 순서를 매김[9]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의 무덤[10] 조선에서 국가의례를 관장한 관서[11] 왕이 궁녀와 합방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