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 샤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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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3대 국왕
어버 샤무엘
Aba Sámuel

파일:Samuel_(Chronica_Hungarorum).jpg

출생
990년 또는 1009년
미상
사망
1044년 7월 5일
헝가리 왕국 멘포
재위
헝가리 왕국의 왕
1041년 ~ 1044년 7월 5일
배우자
이슈트반 1세의 누이
아버지
불명
어머니
불명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헝가리 왕국의 제3대 국왕.


2. 생애[편집]


동시대의 기록에는 그를 "Obó", "Ovo" 또는 "Aba"라고 명시했으며, 이 시대에 주조된 헝가리 동전에서는 "Sámuel rex"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오직 13세기의 연대기 작가 아노니무스 노타리우스 만이 아바와 샤무엘이 동일 인물이라고 기술했다. 만약 아노니무스의 기로기 없었다면, "Sámuel rex"라는 글자가 새겨진 주화의 출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노니무스는 그가 900년경 헝가리 대공 아르파드로부터 "마트라 숲의 대지"를 받은 쿠만 족장 에드와 에데멘의 후손이라고 서술했다. 반면 14세기의 연대기 작가 시몬 케자이는 그를 아틸라의 후손이며 하자르인이라고 밝혔다.[1]

일부 학자들은 그가 히브리어 이름인 사무엘을 쓴 것을 볼 때 유대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며[2], 또다른 학자들은 유대교를 신봉한 하자르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그가 네스토리우스파 신자였다고 추정한다. 이것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자는 헝가리 왕이 될 수 없다는 이슈트반 1세의 법에 위배되지만, 당시 헝가리가 완전한 가톨릭 국가가 아니었고 이교도들이 아직도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점을 볼 때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기 힘들다.

그의 출생년도는 연대기마다 990년 또는 1009년으로 기술되었다. 그는 일찍이 이슈트반 1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이와 결혼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헝가리 왕국에 편입되었고, 그 대가로 궁정백 직책을 하사하고 중책을 맡았다. 이슈트반 1세는 그가 다스리던 마트라 일대에 에게르 주교령을 설립하고 우이바르 카운티를 설립했다. 이후 코파니가 이슈트반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슈트반 1세의 편에 서서 이슈트반 1세의 승리에 기여했다.

1038년 8월 15일 이슈트반 1세가 사망하고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를 맡았던 오토 오르세올로의 아들이자 이슈트반 1세의 조카인 오르세올로 페테르가 왕위에 올랐다. 페테르는 각 주의 주요 성에 이탈리아와 독일 출신 병사를 배치하고 헝가리인 영주의 정치 참여를 일절 틀어막았다. 이슈트반 1세 앞에서 기젤라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무효로 처리하고 기젤라의 재산 대부분을 몰수하고 베스프렘의 별궁에 연금했다.

이에 분노한 기젤라는 유력한 헝가리 귀족인 그와 손잡고 반란을 꾀했다. 1041년, 그는 헝가리 귀족들과 함께 수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독일 출신으로 왕 옆에서 난정을 일삼는 부도(Budo)를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페테르가 거부하자, 그들은 곧바로 부도를 죽이고 부도의 두 아들을 실명시켰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페테르는 1041년 9월 헝가리에서 도주했고, 영주들은 그를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페테르를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1042년 2월 15일 군대를 이끌고 트라이젠 강을 건너 신성 로마 제국의 산하의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을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는 군대를 3개로 나누었다. 그 자신이 이끄는 남쪽 군단은 툴른 시까지 진격하면서 각지를 약탈했고 다른 부대도 승리했지만, 북쪽으로 보낸 한 개 부대는 오스트리아 변경백 아달베르트에게 패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이 헝가리로 철수하는 헝가리군을 향해 반격을 개시하자, 포로로 끌려가고 있던 오스트리아인들이 봉기했다. 헝가리군은 추격을 피해 달아났지만 다수가 모르바 강을 건너던 중 익사했다.

1042년 가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는 헝가리로 쳐들어가 도나우 강 북쪽 영토를 점거했다. 그러나 점령지를 지키기에 충분한 병력을 끌고 오지 못했기에 곧 철수했고, 샤무엘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했다. 1043년, 하인리히 3세는 다시 공세를 개시해 라바 강까지 이르며 헝가리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는 하인리히 3세에게 사절을 다섯 번이나 보내 평화 협정을 맺어달라고 요청했지만, 하인리히 3세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신성 로마 제국에 패하기만 하자, 그를 따라 페테르를 축출했던 귀족들이 그마저 제거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모조리 숙청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1044년 부활절에 공모자들을 회의에 소집한 뒤 단검을 품에 숨긴 시종들에게 그들 곁에 접근했댜가 모조리 찔러 죽이게 했다고 한다.

1044년, 하인리히 3세는 페테르와 함께 헝가리로 다시 진군했다. 어버 샤무엘은 군대를 끌어모아 멘포에서 적과 맞붙었다. 그러나 전투 도중에 부하들이 그를 배신하여 독일군에 가담해 버리면서 참패했고, 그곳에서 전사했다. 그 후 하인리히 3세는 페테르를 헝가리 왕위에 복위시키고 헝가리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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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하자르인이나 마자르인이나 아틸라와는 그닥 연관이 없다. 헝가리인이 아틸라의 후손을 자처한 것의 표상이라 보면 될듯. [2] 다만 후대의 셜러몬 왕도 유대교식 이름을 그대로 쓴지라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