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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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国家足球队

파일:양천과 함께하는 프랑크푸르트.jpg

이름
양천
杨晨 | Yang Chen

출생
1974년 1월 17일 (50세) /
중국 베이징시
국적
[[중국|

중국
display: none; display: 중국"
행정구
]]

신체 조건
185cm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베이징 궈안 (1993~1998)
SV 발트호프 만하임 (1998 / 임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98~2002)
FC 장크트파울리 (2002~2003)
선전 지안리바오 (2003~2005)
샤먼 란스 (2006~2007)
감독
장쑤 쑤닝 (2009~2010 / 수석코치)
장쑤 쑤닝 (2011~2013 / 수석코치)
구이저우 런허 (2014 / 수석코치)
베이징 베이티다 (2015~2018 / 수석코치 )
중국 U-23 대표팀 (2020~2021 / 수석코치 )
중국 U-16 대표팀 (2021~)
국가대표
35경기 11골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은퇴 이후



1. 개요[편집]


중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현재 중국 16세 이하 대표팀 감독직을 맡고 있다.

현역 시절 독일에서 오래 활동했던 몇 안되는 중국의 유럽파 출신 공격수였다. 또한 중국 최초의 분데스리가 선수 기록도 가지고 있다.

2. 클럽 경력[편집]


1993년 베이징 궈안에서 성인 무대 경력을 시작했고, 6시즌 동안 55경기 7골에 그친 유망주에 불과했다. 그러나 잠재력이 눈에 띄었는지, 당시 2. 분데스리가 소속 팀이었던 SV 발트호프 만하임에서 그를 임대로 영입해갔고, 경기 출전은 하지 못했으나, 분데스리가 전통의 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그를 1백만 마르크[1]의 이적료로 양천을 영입해 그는 중국 최초의 분데스리가 진출 선수가 되었다.

중국 리그에서도 별 활약이 없었고, 만하임에서도 한 경기도 못 뛴 선수였는데, 이 선수의 포텐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터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 첫 시즌인 1998-99 시즌, 그는 시즌 23경기 8골이라는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로 팀의 강등 탈출을 이끄는 대활약을 했다. 이 활약으로 소속팀에서의 입지를 다진 그는 1999-00 시즌 27경기 4골, 2000-01 시즌 15경기 4골의 다소 아쉬운 활약을 보였지만, 당시 팀의 전력을 생각하면 좋은 활약을 했다. 2000-01 시즌 출전수가 적은 이유는 당시 팀에 시즌 도중 취임한 펠릭스 마가트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2]

하지만 프랑크푸르트가 2000-01 시즌 2부리그로 강등당했고, 그는 2002년 월드컵을 위해 이적 대신 팀에 잔류해 출전기회를 얻는 방향을 택했다. 2001-02 시즌 2. 분데스리가에서 29경기 5골로 다시 폼을 찾았고, 2002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들며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월드컵 이후에는 FC 장크트파울리로 이적해 20경기 2골을 기록했다.

장크트파울리에서의 짧은 1시즌을 소화한 뒤 양천은 자국리그로 복귀한다. 당시 자금력을 등에 업고 신흥 강호로 올라온 선전 지안리바오에 영입된 그는 2003 시즌 중반 합류했고, 2004시즌 팀의 사상 첫 리그 우승 멤버가 되었다. 당시 우승을 이끈 감독 주광후는 이후 중국 대표팀 감독으로 영전한다.

문제는 주광후 감독 이후 취임한 치상빈 감독과 불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2005시즌 내내 선전은 핵심 선수들과 감독과의 트러블에 시달리며 정상적인 팀이 아닌 상황이었고, 시즌을 12위로 끝내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구단은 감독에게 힘을 더 실어주기 위해 트러블을 일으킨 핵심 선수들을 팔아버리기로 했고, 16경기에 나와 2골을 기록했던 양천도 구단의 정리 대상이 되면서 샤먼 란시로 이적했다. 샤먼에서 2시즌을 더 보낸 뒤 양천은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A매치 35경기 11골을 기록했다. 선수 경력에 비해선 많지 않은 출전 기록인데, 그가 오랜 기간 독일에 있으면서 원활한 소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종목에서 중국 대표팀으로 출전했으며, 이후 독일로 진출한 후엔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대회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대회에 출전했다. 아시안컵에선 3골을 넣으며 분전했고, 월드컵에서도 조별리그 터키전 인상적인 발리슛으로 골을 기록할 뻔했으나 포스트를 살짝 넘기는 아쉬운 장면을 연출했다.

파일:을용타.jpg

2003년 일본에서 열린 첫 동아시안컵 대회에도 중국 대표로 참가했는데, 이 대회 한국전에서 그 유명한 을용타 사건이 벌어졌을 때 쓰러진 동료 선수 리이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그의 표정이 같이 잡혔고, 이 모습이 한동안 한국 인터넷에서 합성 소스로 활용되기도 했다. 보통 을용타를 시전하는 이을용을 말리는 구도이지만 가끔 페이스앱 등으로 동료가 당한 것에 기뻐하거나 아니면 같이 담가버리려고(...) 달려오는 것처럼 더 막장으로 합성한 작품들도 존재.

2004년 마지막으로 소집된 뒤 더 이상 대표팀에 소집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4. 은퇴 이후[편집]


2009년 장쑤 세인티의 수석코치로 임명되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2010년 독일 연수를 떠나 2011년 귀국해 다시 3년간 장쑤의 코치직을 맡았다.

2014년 구이저우 런허,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베이징 BIG의 코치직을 거쳐 2020년 중국 올림픽 대표팀 코치진에 합류했고, 2021년부턴 중국 U-16 대표팀 감독직을 맡아 커리어 첫 감독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2018년 1월 17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구단을 다시 방문했다.[3] 이정도면 프랑크푸르트 구단 내에서도 레전드 대우를 받는듯 하다.
아시아 삼대장 차범근, 하세베 마코토, 양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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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한국 돈으로 약 7억원[2] 마가트 감독은 자신의 눈 밖에 난 선수에게 철저히 기회를 주지 않고 외면하는 스타일로 유명해 독재자라고도 불리는 감독이다.[3] 유튜브[4] 물론 차범근과 하세베는 프랑크푸르트 구단을 넘어 분데스리가에서 레전드로 대우받기에 비교하는건 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