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논란 및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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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푸른 피의 사나이?
2.1. 삼성과의 사전 접촉 의혹과 신인 지명 회피 및 "양준혁 규정"
2.2. 해태로의 트레이드 거부
2.2.1. 트레이드 거부 사태의 다른 시각
2.3. FA자격 취득 후 삼성으로의 복귀 과정
2.4. 은퇴 갈등과 은퇴경기
3. 기록원실 난입 사건
4. 메츠의 입단 제안?
5. 선동열과의 갈등
6. 선수협과 양준혁
6.1. 강병규의 트윗과 양준혁의 대응
6.2. 강병규 선수협 관련 발언의 허구성
6.3. 2009년 선수노조 결성 투표 거부 루머
8. 성명권 논란
9. 트위터와 구설수
10. 10억 사기 사건
11. 섹스 스캔들 논란
12. 명품백 발언
13. 안우진 옹호 관련
14. 기타
15. 항변




1. 개요[편집]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전직 야구선수 양준혁의 논란과 사건 사고를 정리한 문서.


2. 푸른 피의 사나이?[편집]



2.1. 삼성과의 사전 접촉 의혹과 신인 지명 회피 및 "양준혁 규정"[편집]


지명 규정을 피해 상무 입대를 택하면서 삼성 라이온즈로부터 월급을 받는 탈법적인 방법을 통해 삼성 라이온즈에 2년 후 입단한 사건이다.

삼성 라이온즈는 1991년 말에 열린 1992 신인 1차 지명에서 연고선수 중 좌완 투수 김태한을 택하면서 차후 양준혁에게 1차 지명을 약속했다. 한편 양준혁이 2차 지명에 나오게 되자 당시 2차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OB 베어스는 당연히 양준혁을 지명하려 했으나,[1] 2차 지명을 앞두고 양준혁이 자신은 상무에 입대하기로 결정했으며 당분간 프로 입단을 미루겠다고 말하면서 결국 OB는 양준혁의 지명을 포기했다. 그러면서 양준혁이 상무 입대를 고집하는 이유가 삼성과 모종의 합의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퍼지면서 1992 신인 2차 지명에서 어떠한 구단도 1라운드에서 양준혁을 지명하지 않았다. 다만 쌍방울 레이더스가 '아무리 선수가 프로 입단을 거부한다 하더라고 지명조차 포기하는 건 프로 구단다운 태도가 아니지 않느냐' 라면서 2차 2라운드에서 양준혁을 지명했다. 쌍방울 역시 양준혁에게 후한 대우를 해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준혁은 공언한대로 상무행을 택했고, 이후 1992년 말에 열린 1993년 신인 1차 지명을 통해 삼성에 입단했다.

양준혁의 고향 사랑의 예로 여겨지기도 하며, 일부 팬들은 이를 두고 "푸른 피가 흐른다" 라며 칭송하기도 한다. 양준혁 본인도 무릎팍도사에 출연, 삼성에 대한 애정을 얘기하며 이 일화를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하지만 쌍방울 입장에서는 자기 픽만 날린 황당한 사건이라는 것. 신생팀 쌍방울은 그 귀중한 픽을 날려버렸고 쌍방울 팬들에게 원성을 들었다.

이 사건 이후 KBO는 신인 지명 규정을 손보게 되는데, '타 팀의 2차 지명을 받은 선수는 이후 연고 구단의 1차 지명을 받을 수 없다'는 이른바 "양준혁 규정"을 신설하였다. 또한 기존 2차 지명의 보유권을 1년에서 3년으로 늘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2년으로 조금 줄였다.

이 사건의 문제점은 선수 영입의 근간을 방해하는 사전 영입이 이루어졌다는 것과 월급조로 월 100만원씩 받았다는 것. 더 심각한 것은 군복무 도중 무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삼성으로부터 월 100만원씩 수령했다는 것. 양준혁의 계약금인 1억원[2]에 비하면, 용돈 수준의 푼돈일 수 있으나, 사전 입단 합의가 된 미입단 선수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지급했다는 것부터 사전 접촉과 금전지급은 규정상으로 선수는 영구제명, 구단은 1차지명 또는 2차지명에서 금지를 받을만한 중징계 대상이다. 다시 말해 당시 KBO가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면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선수 '양준혁'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

또한, 애초 방위병 판정을 받은 양준혁이 굳이 상무에서 복무한 것도 그렇고[3], 당시의 방위 복무 기간인 18개월이라면 양준혁이 다시 신인드래프트에 나오려면 제대한 후 6개월이 지난 1994년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삼성은 1993년 드래프트에서 아직 제대가 6개월이나 남은 그를 지명이 가능하다는 유권 해석을 거쳐 1차 지명으로 선택했다. 그러면서 양준혁은 수도권에 위치하던 상무를 1년만에 퇴단하고 대구로 주소를 옮겨 방위병 생활을 계속했다. 어떻게 상무라는 군 기관의 퇴단이 쉽게 가능했으며[4] 방위 복무 중에 주소를 옮겨 근무지를 바꾸는 게 가능했던 것일까.

2021년 10월 스톡킹에 출연했을 때 아파트 제공 조건을 제시한건 OB였다고 말했으며, 상무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한 것과 근무지를 옮긴 이야기 그리고 월 100만원씩 받은 이야기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으므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듯 싶었던 해당 사건은 후일 양준혁이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을 당시 스스로 과거 삼성 입단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났다. 1991년 삼성이 일단 급한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 김태한을 1차 지명한 후, 자신을 1차 지명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도록 권유했었다는 사실을 선수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것. 따지면 규정 외의 사전접촉 및 구두 계약이라고 볼 수 있으니 문제가 되는 발언으로, 당시 쌍방울이 양준혁을 2차 지명하면서 백지 수표와 48평 아파트를 제의했지만 거절했으며, '삼성의 권유대로 상무에 입대하고 난 뒤 월급조로 삼성으로부터 매달 100만 원씩을 받았다'는 사실도 함께 밝혔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해태의 김응용 감독은 "양준혁을 회유하여 팀에 입단하게 한 삼성의 행위를 문제 삼기 위해 구단이 직접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양준혁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해태는 '양준혁의 삼성 입단은 명백한 규약 위반이다'라며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에 KBO는 삼성에 1993년 양준혁의 입단경위서 제출을 요구했다. 삼성은 이러한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다가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 생각나지 않고, 경리 장부에 매월 100만 원의 지출 내역이 있는지 확실치 않다. 일단 확인 작업을 거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이 역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2.2. 해태로의 트레이드 거부[편집]


임창용과의 트레이드 건 때 공개적으로 은퇴 의사를 밝히며 자신이 삼성을 위해 2년을 군복무하였다고 하여, 이 때 붙은 별명이 '푸른 피의 사나이'. 해외 진출 의사를 모색할 정도로 삼성구단 및 기업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듯 했으며, 양준혁의 말에 따르면 이 트레이드는 나중에 선수협 창설과 FA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동기 중에 하나가 됐다고 한다.

임창용과의 트레이드로 인해 삼성에서 해태로 가게 되자 또 '자기를 용병으로 생각해달라' 며 끝까지 삼성맨임을 고집하였다. 양준혁의 트레이드 거부는 해태팬들의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는데, 팀 투수진의 기둥뿌리였던 임창용을 내주고 데려오려는 선수가 입단거부에 은퇴를 운운하는 것은 해태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근데 애초에 해태로 트레이드는 모든 선수들이 혐오하긴 했다. 해태 트레이드 때 은퇴의사 안 밝힌 선수가 없을 지경[5] 당시의 해태는 자금난으로 최희섭, 김병현, 서재응 등의 지역 유망주들을 놓치고 박재홍의 지명권을 현대에 빼앗기는 등 돈없는 구단의 설움이 하늘까지 닿은 상태였다. 김응용 감독이 '1년 뒤에 놓아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동시에 1993년 입단 당시의 삼성-양준혁 밀약을 공개거론하며 압박하자 양준혁은 결국 해태 입단에 동의한다.

막상 와서는 친척들이 인근에 많이 산다며 안정을 찾았는지 태업을 하진 않았다지만[6], 바로 1년 후 양준혁이 돈 많은 서울 연고 구단인 LG로 옮기자 해태-KIA 팬들의 분노는 더욱 격렬해졌다. 실제로 야구 갤러리 등지에선 기록은 좋았으되 곧바로 떠나버린 이러한 행태를 비꼬며 푸른 피의 홍어, 타이거즈 레전드로 부르며 조롱한다. 사실 해태 팬 입장에서 보자면, 개인 사정이야 어쨌건 임창용을 희생한 대가로 데려온 양준혁을 데려왔는데 고작 1년 동안 사용한 거니 격분할 만하다.[7]

게다가 양준혁의 트레이드 카드 데려온 선수가 하필이면 손혁이었다. 이 손혁마저 해태 입단을 거부, 은퇴를 선언하고 야구계를 떠나면서 해태 팬들과 양준혁은 완전히 갈라서버리고 만다. 이후 양준혁과 얽혀 해태 레전드 선동열이 삼성 팬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까이자 양준혁에 대한 해태-KIA 팬들의 분노는 다시금 하늘을 찔렀다. 게다가 자서전에서마저 '해태에 가는건 유배가는 느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탓에 사실상 해태-KIA 팬들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절반 정도 지나간 느낌.

2.2.1. 트레이드 거부 사태의 다른 시각 [편집]


그러나 이 사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방적으로 양준혁의 잘못을 논하기 어렵다.
  • 양준혁 이외에 손혁마저 해태 트레이드에 거부했다는 것은 그 당시 해태의 처지가 얼마나 궁색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 이후로 명문 해태 구단은 막을 내리고 기아 타이거즈가 되어버린다. 그만큼 미래가 없어보이는 구단으로 옮기는 게 막막했을 것이다. 더욱이 양준혁이 해태로 트레이된 당시는 1997년 외환 위기에 따른 IMF 구제금융으로 인한 경제난으로 해태를 인수해 줄 기업을 찾기가 힘들었고, 실제로 쌍방울 레이더스가 이로 인해 구단의 역사가 완전히 끊어지는 비운을 맛보았다.

  • 그 이전부터 프로야구에서 선수들이 트레이드에 반발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프로야구 초창기 한대화의 선수 시절 OB에서 해태로의 트레이드이다. 이 당시는 아애 산에 잠적해 있는 한대화김인식 코치가 찾아가서 겨우 설득해서 데려 올 정도였다.

그 외에 최동원-김시진 트레이드 역시 당사자들의 반발이 무척 심했다. 사실 트레이드에 대한 반발의 이유는 트레이드를 형벌처럼 보는 시각이 결정적이기는 했지만, 그 외에 열악한 그 당시 선수인권 문제도 있었다.

  • 야구 게시판 등에서 양준혁의 트레이드 반발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메이저리그를 열심히 본 야구 팬들 중에서 양준혁에 대해서 트레이드 금지조항을 계약서에 넣은 것도 아닌 선수가 트레이드를 거부하는 게 말이 되냐는 비판도 있었다.
물론 미국 프로야구에서는 트레이드가 싫어서 아예 계약서에 트레이드 금지 조항을 넣은 선수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 보면 한국프로야구에 트레이드 금지 조항자체가 아예 없다. 그 당시에도 없었고 21세기인 지금도 없다. 트레이드 금지조항 자체가 한국프로야구에 없다는 것은 선수가 트레이드에 대항할 수단 자체가 한국프로야구에 없다는 말이다. 선수에게는 아예 합법적 제도적으로 대항할 수단을 주지 않았으니, 제도적인 방식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저런식의 대응을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따져보자. 사실 프로 스포츠는 생각보다 선수의 기본적인 권리 침해의 소지가 많은 제도가 있다. 사실 미국 프로야구의 드래프트 제도조차도 위헌적인 제도라는 게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사실상 선수와 일대일로 계약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기본이며, 현대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독과점과 기업간의 담합이다. 실제로 드래프트로 인해서 신인 선수들이 계약에 손해를 보는 게 사실이다.[8] 미국에서 스포츠 구단이 담합해서 이 선수는 어느 팀으로 가고, 저 선수는 어느 팀으로 간다고 담합하는 방식은 자본주의 체제 미국하에선 심각한 경제범죄나 마찬가지다. 이런 드래프트제도가 없었다면 신인선수가 FA처럼 자유롭게 각 구단과 계약이 가능하기에 거액의 계약이 가능하다.[9] 사실 프로축구만 해도 드래프트 자체가 없는 리그가 많다.
미국 내의 프로리그에는 선수노조가 있다. 이 경우 선수노조가 드래프트를 담합으로 고발하고 불인정하는 대신, 구단들이 선수노조에 각종 경제적 지원을 포함한 지원을 해줘서 그걸로 선수의 권익을 높이는 선에서 드래프트를 용인해 주기로 합의한 것이다. 선수노조의 선수권익 활동은 대표적으로 MLB나 NBA의 선수 연금제도가 있다. 박찬호가 자기가 나이 먹으면 연금으로 매년 30만 달러 정도 받는다고 방송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선수노조과 구단과 합의해서 선수 드래프트제도를 인정한 적이 없다. 즉, 구단 맘대로 대기업끼리 담합으로 드래프트나 선수보유규정을 정한것이다. 물론 5공 독재 정부 시절임을 감안해야하지만.

사실 국내에서도 드래프트와 FA관련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임선동의 해외진출 관련 소송이다.[10] 잘 이해가 안간다면 NBAABA라는 리그가 공존했던 미국의 70년대 프로농구 상황을 생각해보면 된다. 특정선수가 NBA에 지명받았다고해도 ABA못가게 하는 구속력이 있는건 절대 아니고, 유럽 각국의 농구리그에도 맘대로 진출할수있다.[11] 이 소송으로 선수의 동의 없이 구단이 맘대로 이 선수는 우리 구단 소유를 선언해버리는 드래프트 제도의 문제점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 이후 약간의 제도적 보완은 있었지만, 아마추어 선수들이 해외진출을 맘대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 정도 외에는 커다란 변화는 없다.

사실 여전히 선수 인권이 엉망인 것이, 선수협은 있지만 선수노조도 허용 안 되고 있다. 물론 2017년이대호와 같이 거물 FA들은 일반적인 선수들이 상상하기조차 힘든 어마어마한 액수를 보장받고 있기는 하다. 이로 인해 일부 구단의 경우 그 존폐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지출이 생겼으며, 따라서 선수의 인권과 구단의 운영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

어쨌든 이건 2017년의 이야기이고, 최동원, 양준혁, 한대화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80, 90년대는 선수 인권이 굉장히 열악했고, 트레이드 거부권도 없으며, FA 제도조차 없거나 기껏해야 처음 생겼을 시절이다. 선수는 구단과 계약과 관련해서 아무런 주장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구단은 선수에게 아무런 권리를 주지 않고 구단의 마음대로 대우한 것이다. 만약 현재의 미국처럼 FA도 있고, 자유계약시 선수가 계약서에 마음대로 트레이드 금지조항을 넣을 권리를 가진 상황이라면 다를 것이다.

양준혁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가정해 보자. 즉, 양준혁이 FA로 어떤 팀에 입단하면서 트레이드 금지조항을 넣거나 그 조항대신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선택을 할 수 있는데, 후자인 연봉을 선택하고 트레이드 금지조항은 포기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트레이드 금지조항을 안 넣은 것은 양준혁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 경우 구단이 맘대로 트레이드한다고 해도 양준혁은 할 말이 없는거다. 그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 양준혁 본인이니까.

80, 90년대 한국 프로야구는 입단 계약서 자체도 구단에서 맘대로 만든 계약서에 선수는 사인하게 만든 것뿐이다. 물론 초기에 계약금 정도는 협의했을 수 있지만, 그 외에 에이전트의 도움을 얻어서 트레이드 금지조항을 넣은 계약서를 계약할 수 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없었다. 원천적으로 선수는 아무런 권리를 받지 못하고 오로지 구단의 노예가 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즉, 제도적으로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선수들의 반발이다.

2.3. FA자격 취득 후 삼성으로의 복귀 과정[편집]


2001년 시즌 종료 후, 양준혁은 FA자격을 취득하였고, 당연히 그의 거취가 문제시되었다. 당시 소속팀이었던 LG를 상대로 양준혁은 첫 협상에서 계약금 및 연봉 포함 4년에 36억원을 불렀으며, LG에서는 3차에 걸친 협상 후 포기를 선언한다. 이후 선수협 창단에 참석했다는 이유, 비싼 몸값 등으로 나머지 구단의 입질이 없어 FA 미아로 인한 은퇴 혹은 해외진출까지 고려하던 과정에서, 삼성이 양준혁과의 협상을 시작, 최종적으로 4년에 옵션포함 최대 27억 2천만원으로 삼성과 계약하였다.

2000년 선수협 문제로 김재현과 함께 트레이드될 뻔 한 상황도 있었다곤 하나, 감독이었던 김성근감독이 양준혁을 잡아줄 것을 구단에 요청하였고 LG측에서도 그 해 타격왕을 달성하고 팀의 주장까지 맡았던 양준혁을 그냥 보내려고 하진 않았으므로 협상은 일단 진행되었지만, 협상은 3차를 끝으로 결렬되고 만다. 당시 양준혁은 LG의 협상 포기 후 언론에 "협상이라는 게 일단 서로 상대방의 반응을 떠본 다음에 협상과정에서 조정하는 거지, 바로 계약 포기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언급을 하면서 황당하다는 인터뷰를 했던 것으로 보아 어쨌든 협상의 여지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우선협상기간이 소득없이 끝나면서, 양준혁은 시장에 나오게 되지만 선수협 문제로 그를 영입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팀이 없었기에 마냥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만다.

반면 삼성측에서는 무노조경영을 원칙으로 하는 그룹의 정책에 맞춰 구단 역시 선수협을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선수협의 핵심 멤버인 양준혁을 영입할 생각이 전혀없다고 여러번 공표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뒤집은 것이 김응용 당시 삼성 감독으로, 구단의 숙원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삼고초려 끝에 모셔 온 감독이 해당 선수를 사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니 구단으로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고, 결국 양준혁과의 FA 계약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김응용이 회고하는 당시의 상황.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삼성은 싫은 티를 상당히 냈으며 첫 협상에서 양준혁이 30억 이하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구단측에서 옵션 포함 최대22억을 언론에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양준혁이 28억으로 물러서다 나중엔 22억을 수용하는 대신 옵션으로 28억을 맞춰달라는 요구를 하여 최종적으로 삼성과 FA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 한달여에 걸친 이 과정에서 LG가 불렀던 금액보다도 훨씬 낮은 금액에도 그 자존심 강한 양준혁이 군말없이 삼성으로 돌아갔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데뷔 시절 벌어진 쌍방울 지명 회피 파동을 떠올렸고, 이로 인해 소위 삼성과의 FA 밀약설이 음모론으로 대두되기도 했다. 다만 이 부분은 위에서도 언급된 김응용의 증언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말 그대로 음모론에 불과하다[12]

2.4. 은퇴 갈등과 은퇴경기[편집]


하단에서도 다시 볼 수 있겠지만, 은퇴하는 과정에서도 구단, 정확히는 선동열 당시 삼성 감독과의 갈등이 많았으며, 2009년 OPS 0.990을 찍으면서 리그 최상급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타자였으나, 당시 구단에서는 양준혁에게 얼마의 기회를 주지도 않고 플래툰으로 빼거나, 대타요원으로 사용하였으며, 특히 어느정도 컨디션이 올라오니 바로 양준혁을 몇 경기 결장시키다 대타 요원으로 출장 시키는 등의 기용을 하였다. 팬들이 보기에는 양준혁이 아직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동열이 기회를 박탈시키고 은퇴를 종용하는 모습이었고 결국 양준혁은 올스타전 후 현역 은퇴를 선언,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다.

은퇴를 선언하는 과정에서도 사실 선수 생활 연장의 기회는 있었는데, 김성근 감독이 있는 SK로 가면 선수 생활을 몇 년 더 연장할 수 있었다는 것. 실제로 삼성 구단에서도 '타 구단으로 가겠다면 아무 조건 없이 풀어주겠다'고 예우를 하였고, 은연 중에 김성근 감독도 바라고 있었던 것 같기 때문에 그가 결단을 내렸으면 SK행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구를 시작한 삼성에서 끝내는 것이 옳은 것 같다'고 밝히면서 결국 은퇴를 선언. 한때 LG에서 양준혁과 함께했던 김성근 감독도 "왜 은퇴했어? 이리 오지…" 라고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양준혁의 은퇴에 관해서는 당시 야구를 봤던 팬들과 보지 않았던 팬들, 야구를 보았더라도 선동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팬들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팬들의 의견이 갈린다. 은퇴를 반대했던 팬들은 양준혁이 한국나이로 41세였던 전년도에도 3할, 두자릿수 홈런, OPS 0.900+를 찍었는데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만약 정상적인 기회를 받았다면 2014, 15년의 이승엽이호준처럼 뛰어난 성적을 보일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며, 은퇴를 찬성한 입장에서는 아쉽지만 박수칠 때 떠나서 오히려 없이 전설로 남아 영구결번을 받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13] 또한 야구의 만약은 없지만 양준혁이 계속 자리를 지켰으면 채태인의 기량이 만개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14] 다만 양쪽 의견 모두 선동열이 양준혁을 은퇴시키는 모양새가 좋지 못했다는데는 동의한다.

위의 의견들과는 별개로 팬심으로 보면 1년만 더 참았으면 이승엽과 재회하는 모습을[15] 봤을텐데 너무 일찍 은퇴를 결심했다며 아쉬워 하는 목소리도 있다.

3. 기록원실 난입 사건[편집]


1995년 5월에 자신의 타구가 안타가 아닌 에러로 기록되자 기록원실에 난입, 기록 수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기록원실 문을 발로 찬적이 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이것으로 벌금 50만원이 부과되었지만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대라 여차저차 묻혔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과대포장되어, 잠겨진 기록원실 문을 두들기고 항의하다가 문을 안 열어주자 문을 부수고, 난입한 것같은 뉘양스가 포함되어있는 루머로 발전하였다. "양준혁이 문을 발로 부수고 기록원실에 들어갔다"라는 카더라가 세간에 널리 퍼져 있으나, 실제로는 기록을 못 고쳐준다는 말에 문짝을 발로 걷어찬 것이 전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윤병웅 기록원은 "양준혁 때도 내가 담당 기록원이었다. 양준혁이 욕을 한 적은 없고, 기록을 못 고쳐준다고 하니까 기록실을 나가면서 문짝을 발로 걷어찬 적이 있다." 라고 증언했다.

4. 메츠의 입단 제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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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뉴욕 메츠 제안서 9년만에 공개(스포츠조선)

2010년 은퇴경기를 앞두고 있었던 일로, LG 트윈스와의 계약이 끝나고 FA 미아가 될 처지가 되었던 2001년 양준혁이 사실은 뉴욕 메츠로부터 스카우트를 받아 계약서를 작성하는 단계까지 갔었음을 회고하면서 그 증거로 당시 메츠가 보낸 입단 제안서 팩스 문서를 공개했던 사건.

문제라면 양준혁이 공개한 메츠와의 계약서가 엉터리였다는 것. 보너스 항목의 PA는 타석을 의미하는데, 무려 '10만 타석(...)당 5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한다고 명시되어 있다.[16] 이외에도, 골드글러브골든글러브라고 표기하고, 실버슬러거는 아예 있지도 않는 등,[17] 여러모로 메이저리그 구단의 계약서라고 보기에는 엉성한 부분이 좀 많다. 사실상 제대로 된 계약서라고 보기 힘든데, 일반적인 엘리트 체육인들의 교양 수준을 감안했을 때 양준혁은 저 계약서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저 계약서를 공개한 시점이 선동열이 자신에게 메이저리그에서 오퍼가 왔었다고 인터뷰를 한 바로 다음날이었을 뿐더러 좀 더 이전에는 이종범정민태가 일본에서 복귀했을 때 자신에게도 해외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지만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안 갔다는 식의 인터뷰로 두 선수를 간접적으로 디스했던 전력이 있었던 그가 느닷없이 9년 전의 제안서를 꺼낸 모습이 타 팬들의 시각에서는 쓸데없는 자랑질로 보였고, 이것이 위의 엉성한 문서 내용과 합쳐져서 심지어는 지기 싫어서 사기를 친 것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로 당시에는 좋은 반응를 얻지 못했다. 얼마 뒤 있었던 은퇴식의 감동에 묻혀서 금세 잊혀지기는 했지만.

먼 훗날 스톡킹에서 밝히길 메츠에서 오퍼가 왔던것은 맞았다고 주장했다. 그날의 전말. 선수협 주동자로 찍혀 타격왕을 하고도 계약을 못하고 있을 당시 최희섭의 에이전트이던 이치훈 에이전트를 통해 메이저리그 구단들에 비디오 테이프와 자신의 성적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뉴욕 메츠에서 연락이 왔고 합의도 어느정도 됐는데 마침 그때 김응용 감독이 손을 내밀어주었고 '이대로 메이저를 가더라도 다음에 국내 복귀때 다른 구단에서 안받아 줄것 같다', '각 구단이 담합했는데도 김응용 감독님이 힘을 써주셨는데 메이저를 가는것은 아닌거같다' 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삼성과 계약했다고 한다.


5. 선동열과의 갈등[편집]


야구계의 소문난 앙숙. 사실 양준혁과 선동열의 대립의 상당 부분은 8개 구단 팬덤의 추측으로 구성된 것이다. 양준혁은 선수협 사태 이후 선동열을 비판했고, 선동열은 양준혁을 홀대한 끝에 강제 은퇴시켜버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둘의 악연은 선수협 창설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수협 발족을 기획하던 양준혁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선동열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에 선동열은 일본 선수회의 정관과 각종 규약 등의 번역본을 입수, 양준혁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선동열은 선수협을 적극적으로 지원해달라는 양준혁의 요청에는 "선수협 문제는 도와주고 싶지만 내가 나설 일은 아니다"라고 거절하면서 둘 간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선동열이 삼성 코치를 거쳐 감독으로 부임하였는데, 초반에는 팀 성적도 양준혁 개인의 성적도 잘 나와서인지 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서로 상대방을 높여주는 말을 했다. <프로야구 이모저모> 양준혁 "초보감독 같지 않았다", 선동렬 "양준혁 2,000안타는 日기록보다 값져", [말말말] 선동열 "양준혁 없으면 기둥하나 없어지는 건데.."

그러나 2008년부터 둘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2008년 양준혁이 주춤하자[18] 선동열은 양준혁을 대상으로 플래툰 체제를 가동했고, 이때부터 선수 양준혁과 감독 선동열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참고로 우투수 전용 플래툰 선수로 강등당한 양준혁의 좌투수 상대 통산 타율은 0.302이다. 또한 그의 전년도 OPS는 1.019.

그리고 2009년이 되면서 양준혁이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경쟁 선수들을 성적으로 찍어 누르며 딱히 별말이 나올 수 없게 주전으로 기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서, 둘의 갈등은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듯했다. 물론 2009년에도 초반에는 선동열 감독의 양준혁 흔들기 시도는 자주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5번 양준혁을 상대 선발이 좌투수라고 플래툰을 돌리고, 양준혁의 빈 자리인 5번에 심광호를 기용하는 것과 같은 충격과 공포의 에피소드가 있으니... 참고로 2009년 OPS는 0.990를 기록했으며, 좌타 상대로는 0.385를 기록했었다. 그리고 심광호의 2009년 성적은 2경기 5타수 타율 0할이다.

2010년 초반 역시 연례행사답게 수차례 플래툰으로 양준혁을 돌리면서 간을 봤으며, 이후 컨디션 저하를 겪자 바로 6월에 주전에서 탈락시키면서[19] 삼성 팬덤의 내전이라 적고 소수 삼성 팬 + 위장전입 감독 팬과의 내전이라고 읽는다.은 한층 격화되었으며, 양준혁의 올스타전 활약 당시 선동열의 뚱한 표정 등이 중계에 비춰지면서[20] 양준혁과 선동열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그리고 올스타전 후, 양준혁은 은퇴를 선언했다.

삼성 팬덤은 선동열이 양준혁을 강제 은퇴시켰다며 격분했고, 중립적으로 보던 6개 구단의 팬마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며 다 같이 선동열 감독을 깠다.

전반기 마감을 앞둔 어느날 그가 슬쩍 물어왔다. "왜 그렇게 나를 싫어했었을까요." 돌이켜보니 마지막을 준비하던 차에 스스로를 정리하다 의문이 생겼었던 듯 하다.

선뜻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해 머뭇거리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한번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거든요. 늘 이기기 위해 노력했구요. 야구에 대해서는 드러내놓고 반발하거나 반항하지도 않았잖아요. 열심히 하는 거 말고 뭐가 더 필요했을까요."

'장인' 양준혁이 마지막까지 찾지 못한 해답[21]

한편 양준혁의 은퇴식에서도 선동열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은퇴식 말미의 기념사를 "양준혁은 누구보다도 볼을 잘 맞혔던 선수"라는 어중간한 찬사로 마무리해 양준혁의 팬덤에게 질타를 받았다.

양준혁의 은퇴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양준혁은 2011년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류중일 감독으로 바뀔 줄 알았다면 3년은 더 뛰고 싶었다'고 밝히며 선동열 감독이 없었다면 은퇴 결심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라이언 가코를 믿을 것이라는 류중일 감독의 발언에는 "나도 믿어주는 감독님 밑에서 뛰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덧붙이며 선동열 감독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의 트위터에 올라온 "가장 싫어하는 선수 5명은?"이란 질문에 "김선수, 이선수, 박선수, 장선수, 선선수[22]"라고 답변, 대놓고 선동열을 디스했다.

대체로 은퇴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팬들이 양준혁 쪽에 손을 들어주는 편이며, 선동열 감독이 선수를 은퇴로 몰고 간 것이 옳은 판단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2011년 여름에 잠시 선수협과 관련해서 양준혁이 비판받는 것에 편승해서 선동열을 옹호하려는 시도가 나왔지만... 이후 선동열이 이종범마저 강제 은퇴시키면서, KIA 팬들도 최소 고참 타자를 강제 은퇴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선동열을 옹호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물론 골수 선동열 개인 팬들은 아직도 선동열을 응원하지만.

하지만 선수협 관련해서는 선동열을 사실과 다르게 비난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참고.

양준혁의 은퇴 이후에도 두 사람은 종종 마주치는 일이 있는데, 일단 카메라 앞에서는 훈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행사장에서 함께 하기도 하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정말로 화해했을지, 본심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 기사 사진 링크의 사인회장에서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는 두 사람의 무표정한 모습이 우연하게 찍힌 걸 수도 있지만 이 항목의 내용을 읽고 보면 사람들에 따라 미묘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후 2023년도에 박재홍과 유튜브 채널에 나와서 양준혁에게 선동열이란?이라는 질문을 받자마자 나랑 안맞아라고 대답하면서 선동열과의 관계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서 말했다.

6. 선수협과 양준혁[편집]


일반적으로 양준혁은 선수협의 투사로 알려져 있었다. 선수협을 결성할 때 송진우, 심정수, 마해영과 더불어 큰 활약을 했으며, 선수협 회장직은 송진우가 맡았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열성파는 양준혁이었다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일단 본인 스스로 방송 및 자서전 등에서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6.1. 강병규의 트윗과 양준혁의 대응[편집]


2011년 여름, 과거 선수협의 대변인이었던 강병규가 양준혁이 선수협의 단물만 빼먹고 변절했다며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트윗에 올렸다.

강병규에 의하면, '양준혁이 후배들에게 자신이 책임질테니 따라오라고 설득했다가 그를 따랐던 선수들을 내팽개치고 구단에게 붙었고, 이 과정에서 양준혁만큼의 인지도를 가지지 못했던 선수들은 버림받은 채 모조리 숙청당했다'는 것. 또한 강병규가 SK에서 방출될 때[23] 양준혁이 그에게 '구단이랑 잘 좀 지내지'라는 말을 했다면서, 자신은 이후 연예인으로 벌만큼 벌었으니 손해보진 않았지만 그때 이름없는 수많은 후배들이 야구인생을 접어야 했다며, 양준혁이 선수협 관련 이야기로 자기 자신을 미화하는 것을 가만 둘 수 없다는 등의 언급도 했다.

그러나 강병규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차차 알려지면서 강병규가 자신의 재기를 위해 일부러 노이즈를 일으키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양준혁과 선수협 주축선수들은 강병규가 방송으로 빠져나간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투쟁했고 이에 정치권이 관심을 가지면서 2001년 1월 구단과 선수협 실체를 인정받는 합의서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양준혁, 마해영, 송진우 등은 구단측에서 마지막까지 선수협에 영구히 참가하지 못하게 조건을 달아 합의안을 만든다. 이런 구단의 어이없는 짓을 봐도 선수협 주축선수들이 구단측에 붙었다는게 엉터리인걸 알 수 있다. 합의 이후 선수협의 기존 주축선수들은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하거나, 양준혁처럼 FA 미아가 될 뻔 하거나, 심정수, 박충식처럼 야구계에 남지 못하고 고생길을 걸었으며 아예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반대로 선수협 5적이라 불리는 선수들은 구단에 남아서 승승장구해서 현재 코치, 감독 생활 잘 하고 있다.

사장단 대표와 선수협 집행부는 전날 이홍석 차관보의 적극적인 조정작업으로 대략적인 합의를 마친 상태였으나, 이날 합의문 작성을 앞두고 새 집행부 구성방법을 놓고 논란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1시간 30여분 동안의 협상끝에 송진우, 마해영, 양준혁은 새 집행부에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결정했고 새 집행부는 선수협측 방안대로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선수협 구단 합의문 당시 기사 [24]


양준혁(32)에게 선수협은 영원한 족쇄인가. 선수협 정기총회가 열린 4일 경주 교육문화회관에 모인 일부 선수들은 양준혁의 영입협상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일부 구단 고위층의 입김을 의심하고 있다. 원 소속구단인 LG가 협상을 아예 포기한 뒤 양준혁의 영입을 추진했던 구단은 삼성과 기아. 지금쯤이면 어렴풋이나마 연봉과 조건에 관한 이야기나 나올 법하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은 단순히 몸값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양준혁을 비롯한 지난 선수협의 주축선수들은 이를 구단 고위층이 양준혁의 영입에 딴죽을 걸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선수협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양준혁이 거액의 연봉을 받으면서 쉽게 선수생활을 계속해 나가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 즉 선수협 활동으로 '찍힌' 선수에게 불이익을 줘 앞으로 선수들이 단체행동을 못하게 하는 등 선수들을 순치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보고 있다. 선수협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몇몇 선수들이 실제로 불이익을 당한 사례는 많다. 초대 대변인이었던 강병규는 두산에서 SK로 트레이드된 뒤 옷을 벗었고, 마해영(삼성)과 심정수(현대)도 정든 팀을 떠나야 했다. 경주에 모인 선수들은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양준혁을 미아신세로 만들려는 각 구단과 KBO의 의도가 분명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2001 경주 선수협총회 당시 선수협 선수들 분위기[25]

이후, 당시 사건에서 각을 세웠던 최익성이 양준혁 지지 발언을 하고,[26] 선수협 소속이거나 소속이었던 선수들과 양준혁 사이의 관계가 극악으로 치달았다는 등의 소식이 없다는 점에서 선수협에 대한 그의 본심이 어떠했든, 적어도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협 소속 선수들과의 사이는 원만해 보인다.

6.2. 강병규 선수협 관련 발언의 허구성[편집]


2011년 10월 이후 강병규가 양준혁에 저격을 시작하였다. 이에 의하면 양준혁은 선수협에 앞장섰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구단측에 붙어서 선수협을 배신하였고, 선수협 선수들이 고난에 처한 그 당시에 삼성으로 이적한후 선수협을 모른체한 배신자라는 주장이며, 이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사실처럼 알려졌으며, 현재도 믿는 사람이 있다. 이 내용과 더불어 그 당시 선수협 지도부가 모두 구단측에 붙어서 합의한 결과 힘없는 선수들이 희생되었다는 잘못된 사실이 퍼져나갔다.

게다가 이 대해 당시 선수협에 참여했다가 구단측으로부터 일방적 보복을 당한 최익성도 강병규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역시 조기은퇴당하고 야구계에서 퇴출되어 이민까지 갔다온 박충식 등은 양준혁을 지지하였고, 그 당시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면서 강병규의 거짓이 알려지게되고 결국 그 당시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을 당한 강병규의 재기를 위한 몸부림쯤으로 결론지어지고 있다.

  • 양준혁이 선수협에서 도망갔다??
강병규의 발언에 의하면 한참 선수협이 힘들 때 양준혁이 도망가서 삼성에 넘어가 잘먹고 잘산 것처럼 묘사되어있다. 실상은 2001년 1월 선수협과 KBO와 구단측이 모여서 합의안을 도출할 때까지 주축 멤버중의 하나가 양준혁이다.

  • 양준혁을 비롯한 선수협 주요멤버들이 구단 편으로 변절하였다??
선수협 사태에 강경대응하던 KBO는 2000년 12월 양준혁, 송진우 등 6명을 전격 방출했다. 선수생명을 끊은 것이다. 그러나 팬들의 엄청난 반발로 주요 6인은 방출철회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문화복지부 장관 김한길까지 나서게 된다. 대기업으로서는 장관까지 합의를 종용하는 상황에서 2001년 1월 어쩔 수 없이 선수협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단측에서 양준혁, 송진우, 마해영은 사퇴하고, 2차 지도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내용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합의문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선수협 사태 종결 당시 기사

즉, 마지막까지 양준혁, 송진우, 마해영 등 선수협 주요멤버는 구단의 눈엣가시였다. 강병규는 그 당시 이미 TV로 진출해서 구단의 견제 명단에도 없었다.

  • 선수협 주요멤버들에 대한 구단의 보복
의리의 회장님을 가진 송진우와, 이미 트레이드된 양준혁을 제외한 전원이 합의안 발표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보복 트레이드되었다. 그 당시 선수협 집행진이 구단 편에 붙었다면 그런 일이 있었을까?

그 이후 선수협을 지지하던 선수들 중 기량이 모자라거나 저하된 선수는 야구계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고, 기량이 여전히 좋아서 팀에 쓸모가 있는 선수는 선수생활을 유지했다. 강병규나 최익성도 그러했지만, 양준혁을 지지하는 박충식 등도 조기은퇴후 프로야구계에서 남지 못하고 결국 호주로 이민가서 10년 동안 살다 돌아왔다.

선수협 5적이라 불리는 선수들은 거의 자기 팀에서 은퇴한 후 코치를 하거나 감독까지 되었지만, 양준혁을 비롯 선수협 주요 멤버들 중에서 보복 트레이드 후 선수생활을 계속한 선수들도 어떤 이유에선지 은퇴 이후 코치나 감독직을 맡는 식으로 친정 구단에 남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27]

  • 양준혁 FA 미아설
선수협 선수들이 고난에 처한 그 당시에 삼성으로 이적한후 선수협을 모른체한 배신자라는 강병규의 주장대로라면 선수협 사태가 한참 힘들 때 양준혁이 선수들을 배신하고 떠났어야 한다.

그러나 선수협과 구단의 합의가 2001년 1월에 있었고, 그 후 11개월후 2001년 11월 양준혁은 FA가 되었는데 강병규의 말과는 다르게 선수협사태가 끝난 한참 뒤에 FA가 된 것이다.

게다가 강병규에서 촉발된 양준혁에 대한 음모론은 양준혁의 FA 미아도 거짓이고, 이미 구단측에 붙어서 삼성에 가기로 합의했다는 식의 내용이 마치 사실인양 떠돌고 있다. 그러나 FA 미아설은 양준혁이 소설로 쓴 게 아니다. 그 당시 수많은 언론에서 양준혁 FA 미아설을 떠들고 있었는데, 양준혁이 자기 입으로 자기가 미아라고 언플한 게 아니다. 김응용 감독은 양준혁 영입생각이 없던 삼성사장에게 영입을 요구했다고 직접 언론에 수 차례 밝혔다.[28]관련기사 김성근 감독 역시 그 당시 FA에서 선수협 관련으로 양준혁이 힘들어해 LG에 잡아달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한 적 있다.[29]

이후 십수년이 지난 2010년 이후에도 김응용 감독이 티비토크쇼같은데 나와서 양준혁과 같이 그때 내가 삼성 사장에게 요구해서 데려왔다는걸 또 다시 이야기한다. 강병규 단 한명의 이상한 글 외에는 양준혁의 삼성행에 대한 여러 사람의 증언은 이렇듯 확연하다.

  • 그 당시 실제 선수협을 구성한 수백명의 선수들과 양준혁
강병규가 TV에서 잘나가던 그 시절, 2001년 12월 선수협 500여명의 선수가 모여 총회를 열었고, 그 총회에서 선수협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에 더불어, 양준혁의 FA 미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 강병규는 모르는 실제 선수들의 목소리다. 선수협총회 당시기사

6.3. 2009년 선수노조 결성 투표 거부 루머[편집]


2009년에 선수협이 선수노조로 전환을 시도할 당시 삼성과 LG 소속 선수들이 투표를 거부한 일이 있었는데, 위의 트위터 사건과 더불어 이 사건이 와전되어 양준혁이 노조설립 안건에 대한 '투표 자체를 거부하고 삼성 선수들을 인솔해 퇴장했다'는 루머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확실한 것은 투표거부 사실 뿐, 이를 양준혁이 주도했다는 건 몇 년 뒤에 썰로만 퍼진 것으로 보인다. 강병규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선 '삼성선수들이 투표를 거부했으니 고참인 양준혁이 책임져야 한다'는 식의 모호한 발언만 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건과 더불어 '투표 거부를 양준혁이 주도했다 카더라'는 소문이 동네방네 퍼졌다는 것이 문제(...).

더욱이 회장인 송진우가 아직 은퇴하지도 않은 한화도 초기에 노조설립에 반대하다가 태도가 변하는 등, 선수대표가 아닌 고참 한 명이 팀 전체의 의견을 좌지우지하진 못한다. 2000년 선수협 설립 당시에 총회에서 여러 논쟁을 벌였던 당사자들인 김기태, 유지현 등도 이제 30대 내외로 최고참이 아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주장이었다는 점이다. 최고참이 아니라 주장이 선수들을 좌지우지했다.

즉, 최고참 한 명이 선수단을 좌지우지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7. 양준혁 전복갈비찜 사건[편집]


2011년 9월 홈쇼핑에서 직접 개발했다던 양준혁 전복갈비찜을 런칭. 첫 방송 때부터 매진을 기록하며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판매 후의 반응이 영 좋지 않았다. 포장 및 음식의 상태 모두 하나같이 엉망이었기 때문. 거기다 홈쇼핑 홈페이지의 부정적인 후기글이 속출하자 홈쇼핑사에서 아예 게시판을 막아버리면서 대차게 욕을 먹었다. 실제로 먹어본 사람들 말로는 이걸 판 양준혁 얼굴 보기도 싫다고 했을 정도...

이를 두고 강병규가 양심을 속이지 말라고 했다. 이로 인해 생긴 별명이 양불신.

어쨌든 이 전복갈비찜 판매는 양준혁 은퇴 이후 최악의 흑역사로 손꼽혔다.

갈비찜에도 들어갔던 전복을 포항 앞바다에서 직접 양식하고 있는데 2014년 9월 적조가 발생하는 바람에 전복이 모두 폐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2012년에도 양준혁은 계속해서 소곱창 등의 식품사업을 벌였다. 전복갈비찜 때의 좋지 않았던 반응으로 식품회사에서 신경을 쓴 모양인지 이전보다는 평가가 좋아졌다.


8. 성명권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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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이 선수협에서 탈퇴함에 따라, 2012년 4월 1일부터 성명권 및 퍼블리시티권의 선수협 위탁이 해제되었고 2012년 3월 28일 온라인 야구게임 마구마구의 시즌5 업데이트로 인하여 선수카드 명이 양준혁에서 장남식으로 변경되었다. 다른 온라인 야구 게임들에서도 모두 같은 장남식으로 변경되었다.

이미 은퇴선수를 둘러싸고 성명권과 관련한 논란이 한 차례 크게 있었고, 이와는 별개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가면서 성명권 역시 KBO의 손을 떠나 가명처리된 선수들도 있었던 만큼 은퇴선수의 가명 처리 자체는 큰 이슈가 될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4대 야구게임 모두가 이름을 장남식으로 통일하여 변경했다는 점. 마구마구의 장씨 형제들 혹은 프야매의 신씨 형제들과 같이, 각 야구게임들은 자신들만의 가명 규칙이 있는데 양준혁의 경우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장남식'[30]으로 이름을 바꿨던 것.

양준혁의 성명권 및 퍼블리시티권을 양준혁 야구재단으로 옮겼는데, 결국 게임사들이 양준혁 야구재단과의 협상 실패로 본명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게임사들이 저렇게 뒤끝 쩌는 모습을 보인 덕분에 이에 대하여 까들은 양준혁이 자기 돈 벌 욕심에 눈이 멀어서 게임사들이 저런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었냐며, 야구 게임팬들에게 추태를 보이고 있다며 신나게 깠고, 양준혁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장남식씨라며 조롱하였다. 반면 양준혁의 팬들은 아무리 협상이 안되었기로서니 멀쩡한 사람의 이름을 장가 못 간 놈이라고 고친건 디스질이라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양준혁 측은 침묵하였다.

사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양준혁은 본인 성명권을 사용하여 재단 사업을 운영할 예정이었으며, 각 게임사와의 개별 계약을 통해 성명권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한 상태였다고 한다. 다만 게임 회사 입장에서는 개인 한 명과의 계약을 할 경우 이후 유사 계약으로 은퇴 선수 계약시 혼란 및 비용이 발생할 수 있기에 계약을 아무도 안 하고 차라리 가명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추측으로 나왔다. 이 분의 선례도 있던 터라...

이에 대하여는 야구게임사와 선수 개인간의 복잡한 셈법이 얽혀있는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막장 행각이 드러나면서[31] 선수들은 선수협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나름의 이름값을 가진 선수들은 자신의 성명권을 개별적으로 (경제적 이익 목적이든, 사회적 기부 목적이든) 사용하기를 원하게 되었다.[32]

그에 비하여 프로야구 온라인 게임 업체 입장에서는 선수들이 그런 식으로 하나둘씩 선수협의 위탁 대상에서 제외되어 개별 협상의 대상이 되면 게임 운영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란 우려가 생기게 되었고, 가급적이면 선수 전체의 성명권을 한꺼번에 구입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었다.

현재 선수협과 독점으로 성명권 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NHN(야구 9단)으로, 다른 업체는 NHN에 인정된 재판매권을 기초로 선수들의 실명과 사진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 이전의 이상훈 등의 초상권 논란에서 보듯이, 온라인 게임회사는 선수 개별의 성명권이 문제가 된 경우에는 차라리 가명을 쓸지언정 선수 개별간의 협상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입장에 있다. 이런 이유로 발생한 가명의 선수는 게임사마다 가명을 임의로 붙여서 서로 이름이 다르기 마련인데, 양준혁 건에 있어서만큼은 모두 '장남식'으로 통일하였다는 점은, 앞으로도 선수 개별간의 성명권 계약은 어느 업체에서도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담합 메시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성명권 관련 논란은 마구마구의 항목도 참고해 볼 것.

양준혁 측은 양준혁야구재단에 유/무형의 성의 표시만 한다면 성명권을 무료로 쓰게 해주겠다는 입장에 있고, 유일하게 한 야구게임에서만 양준혁의 이름을 쓸 수 있는데, 이는 양준혁 야구재단 배너를 달아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야구 게임 회사에서는 이것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성의 표시'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어느 조건으로 기부를 하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 비난은 야구게임사가 받고, 그것의 공은 선수들만 받는다는 점에서 선수간의 개별 협상보다 오히려 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프로야구라는 특수한 무대에서 쌓아올린 선수 개인의 성명권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어느 정도의 가치가 더 있는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게 된다면 자연히 해결되겠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정확히 알 길이 없고, 앞으로도 이를 판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양준혁과 같은 상황이 반복될 우려가 크다는 것인데, 일단은 선수들이 성명권을 자유롭게 푸는 것이 현재까지의 모습이다. 2015년 기준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가명을 쓸 수밖에 없는 선수를 제외하면 김태균, 이범호, 이대호, 이승엽, 박찬호의 경우 해외 진출, 선수협 위탁 해제, 혹은 은퇴로 인해 한 차례 가명을 겪었다가 다시 본명으로 돌아온 상태이며, 류현진은 가명처리가 되어 있다. 반면 김병현윤석민의 경우 국내로 귀환했음에도 여전히 가명을 사용중이다. 아마도 현역이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소속으로서의 성명권이 꼬여서 그런 듯.

결국 양준혁 측에서 초상 및 성명권 사용 승낙에 관한 문서를 각 게임회사에 발송하는 것도 고려 중이란 인터뷰가 있었고 # 실제 그런 절차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2012년 4월 13일자로 야구 9단과 프로야구 매니저에서 업데이트를 통해 장남식을 양준혁으로 환원시켰으며, 마구마구에서도 2012년 4월 18일 패치로 다시 양준혁 카드가 되었다.

여담으로 야구게임 '와인드업'은 당시 양준혁의 이름을 장남식으로 바꾸지 않았는데, 배너를 삽입하는 조건으로 재단과 협상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9. 트위터와 구설수[편집]


은퇴를 선언하고 트위터 열풍에 휩싸여 그야말로 실시간 트위터글로 야구팬들을 즐겁게 하고있다. 일부 팬들은 여자팬들에게만 답장해준다고 깠는데 양준혁 본인이 이 때문에 잠시 울컥하기도 했다. 다만 슬픈 것은, 그 또래 남성들이 어린 자녀들의 사진이나 글을 쓰는 것에 비해 양준혁은 구단 후배들이나 혹은 성구회 회원(전준호와 송진우)과 찍은 사진 혹은 셀카 사진들만 올라온다는 것이…

2010년 9월 11일에는 커플지옥 솔로홈런이라는 구호를 만들어 올렸다. 그만이 할 수 있는 구호이긴 하지만 아 양신이여…

2010년 준플옵 1차전때는 트윗하면서 경기를 보다보니 이게 어째 문자중계 비스무리하게 됐는데 반응이 매우 좋아서 2차전은 아예 자리깔고 문자중계… 야구팬들은 불과 몇 달 전까지 현역으로 뛰던 최고 선수의 시각으로 경기 해설을 보게 되어 즐거워하기도 했다.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트위터에서 음주운전 사고에 연루된 이용찬을 옹호했다가 두산과 삼성을 제외한 6개구단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었고, 또 고영민의 사인 훔치기 의혹을 제기했다고 이번에는 두산팬들에게 비난받았다. 트위터의 특성 때문에 조금이라도 문제되는 발언이 나오면 바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타이거즈 팬들과는 원래 척을 진 사이였지만 이런저런 구설수가 겹치면서 "만인의 사랑을 받는" 스타로서의 성격은 퇴색되는 중. 그래도 삼성팬들에게 그의 인기는 절대적이다.


10. 10억 사기 사건[편집]


양준혁, 10억 사기당했다

지난 2014년, 강남의 A스포츠게임업체에서 사업가 정모 씨를 만났는데 A스포츠게임업체의 전환 사채와 맞바꾸는 계약을 맺고 10억을 투자했는데 정 씨는 양준혁에게 "당신은 A업체에 10억 원을 투자했고 나는 같은 업체에 10억원을 빚졌으니 서로 상계 처리하자"고 제안한다. 대신 자신이 소유한 다른 회사의 전환사채 10억 원 어치를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전환사채는 나중에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채권으로, 양준혁은 당시 이 회사의 주가가 뛰고 있다는 말만 믿고 계약을 맺었으나 검찰 수사 결과 정 씨는 해당 주식을 보유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정 씨가 양준혁에게 전환사채를 줄 생각과 능력이 애초에 없었다고 보고 정 씨를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11. 섹스 스캔들 논란[편집]


양준혁, 性스캔들 폭로글 등장..."첫 만남에 강요"

2019년 9월 18일 익명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방송에서 보는 모습. 팬서비스 하는 모습. 어수룩해 보이는 이미지의 이면, 숨겨진 저 사람의 본성"이라는 글과 함께 눈을 감고 누워있는 양준혁으로 추정되는 남성의 사진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첫 만남에 구강성교 강요부터 당신이 몇 년 전 임XX 선수랑 다를 게 없잖아. 뭐를 잘못한 건지 감이 안 온다며. 계속 업데이트 해드릴게 잘 봐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다 실시간 이틀 동안 검색어창에 뜨자 글쓴이는 글을 비공개로 돌린 상태. 또한 글쓴이의 글과 사진이 SNS를 통해 이미 퍼졌다.

양준혁 미투 사생활 폭로 인스타 여성

이에 대해 양준혁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좋은 만남을 가지려 했는데 유명인과 남자라는 이유로 애초의 느낌과 달라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어떠한 이유로 이렇게 작성했는지 모르겠다며 모욕과 향후 미래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면서 변호사를 통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인스타그램 원문

2019년 9월 20일 변호인단은 폭로女, ‘협박 정황’ 발견…좌고우면 안 해”라고 고소를 할 방침이라고 한다. 또한 양준혁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용서는 없다라고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다. 인스타그램 원문

이에 대해 JTBC 뭉쳐야 찬다MBC 스포츠플러스는 특별한 입장이 없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혔다.

반면 앞서 위에 서술한대로 前 야구선수 강병규는 선수협 갈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양준혁과 사이가 나쁜 상황... 때문에 "양불신..어쩜 이리 예상을 벗어나지를 않는지... "잘좀 하지 그랬냐?" 너가 나한테 예전에 했었던 말이야.."라고 즉 조롱성 글을 남겼다. 당연히 네티즌들 반응은 "잠잠해지다가 또 관심 끌려고 한다." 등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트위터 원문.

결국 유언비어를 퍼트린 혐의로 고소된 'ㄱ'씨가 불구속 기소의견으로 검찰 송치됐다.

양준혁은 이후 어느 예능 방송에서 스캔들 기사가 난 직후의 심정을 밝히면서 정면으로 강경대응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 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 2020년 10월 31일 상대 여성은 양준혁을 유사강간혐의로 고소했으며, 이에 양준혁은 "늘 그래왔듯 저는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할 것이고, 저를 무고한 행위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며 "잘못된 행동에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반면교사의 사례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12. 명품백 발언[편집]


지난 2월 살림남에 출연한 양준혁은 아내 박현선에게 명품백을 선물했었고 브라이덜 샤워 때 아내 박현선이 친구들에게 가방을 자랑했었다. 그런데 양준혁이 생색을 내면서 그 가방을 "네(박현선) 몸값보다 얘[33]가 더 비싼 거다"고 말했고, 박현선의 친구들은 크게 놀라며 "큰일 날 소리를 한다"고 만류했다. 이 이후 방송은 후폭풍이 불었으며 한편에선 생색도 심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가방값에 비유하냐며 난리가 났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운동 선수는 몸값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서 그런 거라며 과한 비판이라고 했다. 또 다른 편은 이걸 방송에 내보낸 제작진을 비판하는 입장이였다. 살림남 자체가 대본 티가 많이 난다는 방송이라 대본일 거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대본 여부와는 상관없이 다음 출연 때 양준혁은 아내 박현선에게 사과했다. 자신이야 비판 받는 일이 잦은 유명인이지만 아내 박현선이 상처를 입었을까봐 걱정했었다고 한다.


13. 안우진 옹호 관련[편집]


2023 WBC에서 대표팀이 일본에 패한 뒤 길게 설을 풀면서 대표팀 이강철감독과 국대선수들을 비난했고 안우진이 뽑히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등의 지나친 발언으로 야구인들과 야구팬들의 반발을 샀다.



14. 기타[편집]


자신의 야구재단을 통해 어린이 야구캠프 등 각종 사업을 벌였는데, 하필 같은 시점에 박찬호가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자신 및 유명 선수와 함께하는 야구캠프를 여는 바람에 당연히 비교가 되고 말았으며, 참가비 및 구성에서 양준혁의 캠프 참가비용이 꽤 고가였기 때문에 야구 팬들에게 까인 일이 있다.

또한 야갤을 하냐는 트윗 질문에 하지 않는다고 답하고선, 얼마 뒤 그와 대척점에 있는 엠엘비파크의 접속 인증글을 올려 야갤러들에게 배신자 양가놈이라고 대차게 디스당했다. 맞다. 바로 양가놈이란 별명의 탄생 이유.

당시 국내야구 갤러리MLB파크는 양준혁과 이종범을 두고 자주 설전을 벌였는데, 그 때 까지만 해도 국내야구갤러리에서는 양준혁을 밀어주며 '양신'이라 칭했지만 위 사건을 계기로 배신감을 느낀 국내야구 갤러들이 '양씨'로 격하시키며 '양가놈'까지 가게 된 것.


15. 항변[편집]


규정까지 신설시켰던 입단연기 사건을 제외하면 다른 선수들같으면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는 투로 가볍게 언급될 사건들이 많다는 점에서 유독 양준혁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실제로도 몇몇 항목은 루머에 그치거나 물증이 없는 경우도 있고, 사소한 해프닝이거나 양준혁의 잘못은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템퍼링 같은 경우는 관행에 따라 유야무야 넘어가서 그랬을 뿐 엄격하게 규정을 적용하면 그 당시 기준으로도 선수의 생명을 끊어버릴 수도 있는, 그래서 추가 규정까지 만들어진 큰 사건이었고 그 외의 일들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변명이 될 만한 것은 없다. FA를 통한 삼성으로의 복귀나 선수협과 관련된 문제는 루머가 사실을 덮어버렸다는 점에서 선수 본인에게는 억울한 일이지만, 적어도 후자의 경우는 양준혁이 무시 말고 적극적인 대응을 보였다면 이 정도까지 일을 키우고 불신을 사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강경대응을 한다면 강병규와 진흙탕 싸움을 해야하는데, 아예 무시해버린 덕에 그나마 팬들이 진흙탕을 덜 본 것이다. 사실 분야는 다르지만, 스타매니지먼트의 기본이 일을 키우거나 진흙탕 싸움을 피하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 고소고발해서 인실좆을 만드는 식의 대응을 하기도 한다. 이병헌과 강병규의 관계가 그러했으며 그 이후로 강병규는 유죄를 받아 방송 활동이 뜸해졌고, 이병헌의 이미지도 흐려졌다. 즉, 꼭 강경대응이 최선은 아니란 것이다. 잃을게 많은 사람과 잃을게 없는 사람의 싸움은 무조건 피하는게 최선인 경우도 많다.

어쨌든 역설적으로 그가 '신'이란 소리를 듣는 대선수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관심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 관심을 많이 받았던 만큼, 남들이라면 그냥 지나갔을 잘못도 기록되고 비난받고 있다. 은퇴 후 이런저런 구설수가 겹치면서 "만인의 사랑을 받는" 스타로서의 성격은 퇴색되는 중이라지만, 그래도 삼성팬들에게 그의 인기는 절대적이다.
[1] 후술하겠지만 스톡킹에 직접 나와 한 얘기에 따르면, OB측에서 백지 수표와 아파트를 준비했었다고 한다. OB에서는 5억까지 준비했었다고. 다만 당시에는 삼성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 거절하고 군대에 갔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어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런 선택을 못할것 같다고 밝혔다.[2] 양준혁의 계약금은 1억 1200만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발표했다. 실제 계약금은 1억원이었고 연봉은 당시 신인 선수 연봉인 1200만원으로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1800만원이었다.[3] 물론 1994년까지 상무는 6개월 및 18개월 방위 판정을 받은 선수의 복무가 가능했다. 1995년 병역 제도가 변경되면서 상무는 현역 자원 및 신장과 체중으로 인해 보충역 판정을 받은 선수들만 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보충역 판정을 받고 군 복무를 뒤로 미루고 있던 1974년생까지의 선수들 상당수가 공익요원 복무를 하게 된다.[4] 상무에서 퇴단해 일반병으로 전출되는 경우는 부대 간부나 코칭 스태프에게 찍히거나(SBS 농구단의 창단 멤버였던 박성수, 전 NC 다이노스 포수 이태원이 이런 케이스), 심한 부상으로 상무 내에서 재활 및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대표적으로 윤길현)에 한정된다.[5] 똥군기+거지구단의 시너지가 엄청났다.[6] 실제로 해태에서 양준혁은 .323의 타율에 32홈런-21도루, 그리고 본인의 한 시즌 최다 타점, 득점 기록인 105타점-96득점을 올리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7] 다만 이쪽은 김응용 감독이 약속대로 보내준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8] 마이크로소프트같은 미국의 대표 기업조차도 explorer의 불공정 계약이, 너무 높은 점유율 등의 문제로 반독과점 소송이 걸린다. 담합, 독과점은 시장경제의 기본을 무너뜨리는 행위라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는 게 서구 선진국들이다.[9] 무슨 이야기냐 하면... 클리블랜드 인디언즈에 지명된 역대급 거물 신인선수 A와 그와 똑같은 실력을 지닌 쿠바의 B선수를 생각해 보자. 쿠바의 B선수는 일단 쿠바를 벗어난 후 가고 싶으면 전 세계 어느 구단이든 계약이 가능하기에, 각 구단이 경쟁이 붙는다. 메이저리그 팀 사이에서도 경쟁이 붙어서 높은 연봉계약을 했다.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다나카 다르빗슈 등의 일본선수들도 FA와 비슷한 상태로 미국진출했기에 1억달러 이상의 계약이 가능했다. 시장경제의 기본이 수요와 공급이다. 즉, 원하는 구단이 많으면 연봉이 높다. 그런 이유로 쿠바 선수들 연봉이 높았다. 똑같은 이유로 신인선수가 팀에 묶여서 서비스타임 적은 액수의 연봉받는 것과, FA의 경우는 연봉 상승폭이 다르다. 즉, 특정 팀에 매여있다는 자체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인 자유로운 계약관계의 족쇄이다. 블로그 참조.[10] 임선동 사건이란 아마추어 스타선수를 구단에서 자기들 맘대로 선수를 지명해 놓고 그 선수가 해외를 가려고 하니까 자기들 선수라면서 못 가게 막은 사건이다. 사실 미국의 경우도 그렇지만, 구단에서 맘대로 담합해서 선수를 지명할 권리가 없다. 자본주의에서 그런 걸 담합이라 해서 매우 중대한 경제적 불법행위로 취급한다. 모든 신인은 자유계약 FA로 모든 구단과 자유롭게 일대일로 협상하는 게 원칙이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하면 구단 운용이 안 되므로, 미국의 경우 선수노조가 구단과 합의하에 구단에서 선수복지로 돈을 받고 선수는 드래프트를 신청해서 합법적으로 구단에서 선수를 드래프트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선수노조도 인정하지 않은 대한민국 야구단이 임선동의 허락도 안 받고 그들 내부에서 담합해서, 임선동은 엘지 선수라고 맘대로 정해 놓고, 엘지 선수인 임선동이 자기 맘대로 해외간다며 소송을 건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구단은 그렇게 할 권리가 원천적으로 없다. 물론 재판은 임선동이 승소했다. 그러나 그런 승소 과정에서 해외 진출은 물건너갔고, 결국 국내에 잔류하게 된다. 이렇듯 너무나 당연한 권리조차 묶여있는 게 선수들의 현실이다.[11] 실제로 NBA의 경우 미국이나 유럽이나 다른 리그의 선수들이 일정조건이 지나면 자동으로 지명대상자가 되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지명될 수 있지만, 지명과 별개로 다른 리그에서 뛸 수 있다. 그러나 NBA에서 뛴다면 지명한 구단에서 뛰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NBA방식 역시도 담합이지만, 노조가 합의하에 NBA내부에서의 담합은 눈감아준것이다. 그러나 NBA내부에서 담함은 선수노조가 눈감아줬다고해서 그 구속력이 NBA 외부까지 가는게 아니다. 어쨌거나 드래프트는 해당 리그에서 팀들끼리 전력의 평준화와 형평성을 위해 스타신인들을 최대한 공평한 방법으로 배분하기 위한 제도이지, 신인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무조건 리그의 소유물로 규정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즉, 계약을 하지도 않은 선수가 드래프트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리그에 갈 수 없다는건 말도 안된다.[12] # ## ###[13] 다만 양준혁 페이스 고려상 저 셋보다는 은퇴시즌에 상위권 성적을 낸 이승엽이나 같이 은퇴한 김재현에 가깝기는 했다. 특히 은퇴 시즌의 타율은 2할 초반대에 그쳤으나 출루율은 타율과 1할이 넘게 차이나는 3할 중후반대를 기록하며 양준혁 특유의 눈야구도 아직 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4] 양준혁과 채태인의 나이를 고려하면 조금 늦어졌을 뿐 언젠가는 각성할 거라는 의견도 꽤 많다.[15] 또는 이승엽이 이른 국내 복귀를 했다면. 두가지 모두 감독이 선동열이 아니었다면 어느정도 가능했을 것이다.[16] 메이저리그 기준으로 한 시즌 풀타임을 뛰면 600~800타석정도 나오게 된다. 1시즌당 800타석씩 부상없이 풀로 뛴다고 가정해도 무려 125시즌(...)을 뛰어야 5만달러의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참고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23년을 뛴 칼 야스트렘스키의 총 타석수가 13992타석이고, 배리 본즈가 12606타석이다.[17] 사실 실버슬러거가 누락된 것이 이 문서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더 큰 증거일 수도 있다. 양준혁을 정말 메츠가 영입하려 했다면 그의 타격을 보고 그런 것이지 수비를 보고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런 선수에게 거는 보너스에 타격 분야 상인 실버슬러거가 없을 리가 없다. 굳이 실버슬러거에 보너스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수비 분야 상인 골드글러브는 있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다. 골글에는 보너스가 있는데 실슬은 없다면 당연히 뭔가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18] 연속 두자릿수 홈런 기록이 15년에서 마감되었다. 그러나 16년 연속 세자릿수 안타 기록을 달성하며 타격의 정확도는 어느 정도 건재함을 증명한 상황.[19] 2010년 당시 양준혁의 기록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 참조. 시즌 초 양준혁이 부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꾸준하기로 유명하고, 전년도 리그 10위 안에 드는 타자를 2~3개월 만에 완벽한 백업으로 돌리는 건 상식에 어긋나고 팀 성적을 위한 운영도 아니라는 의견이 대다수.[20] 표정이 굳은 채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21] 은퇴 결심을 한 후의 양준혁의 인터뷰[22] 참고로 한국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 1군 출장기록이 있는 선씨는 딱 한 명이다(...). 이름이 선으로 시작하는 선수는 선우대영도 있다.[23] 강병규 본인은 두산에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된 후 연습 부족 등으로 야구판에서 퇴출되었다.[24]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0049615[25] http://cafe.daum.net/bluetwins/5Wv/890?q=%BE%E7%C1%D8%C7%F5%20%C1%B7%BC%E2&re=1[26] 더군다나 1월 5일에 양준혁은 최익성이 운영하는 저니맨 야구육성 사관학교에 방문하였으며 같이 웃으며 사진도 찍었다.[27] 김기태, 김태형, 류지현은 감독까지 올랐고, 김경기, 조경택 모두 한 팀에서 10년 넘게 코치로 재직해 왔다. 반면 양준혁, 마해영, 심정수, 박충식 등은 코치를 안하는지 못하는지 상태고, 이 중 박충식과 심정수(다만 심정수는 유학 성격이 컸다)는 외국으로 이민까지 갔다. 과거 1차 선수협 당시 주축이었던 최동원 역시 은퇴 후 야구계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거의 20년만에 잠시 코치생활을 했다. 다만 반론이 있다면 역시 선수협 주요 멤버였던 송진우, 최태원, 박정태는 코치생활을 제법 했고, 김재현도 한화 코치 2년, 대표팀 코치에 해설위원 활동을 하고 있다.[28] 김응용 감독은 우승청부사로 삼성에 영입된 감독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것이 그 당시 삼성 방침이었다. 게다가 김응용이 삼성 사장의 고교선배로 삼성 사장은 정말 선배처럼 예우해줬다.[29] http://sports.media.daum.net/sports/baseball/newsview?newsId=20100730203420591 김 감독은 "양준혁은 효자다. 기본적으로 착하다. 2001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렸는데, 당시 선수협 문제가 있었다. LG 구단에게 '양준혁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착한 아이다. 내가 책임질테니 LG에서 꼭 계약을 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는데, 결국 LG에서 잡지 못하고 삼성으로 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30] 장남식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가도 못간 히(새끼) 혹은 자라는 의미가 유력하다고 야구팬들은 추정중.[31] 소속 선수들의 성명권 및 퍼블리시티권을 위탁 관리하는 중 20여억 원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막장 행각을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항목 참고.[32] 해당 링크에 대한 예는 NBA 라이브 시리즈MVP 베이스볼 시리즈를 참고할 것.[33] 펜디의 피카부 백이며 400만원 후반대에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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