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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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A)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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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杨扬 | Yáng Yáng


파일:external/images.china.cn/000cf1a48b7f0ce09f372e.jpg

출생
1976년 8월 24일 (47세)
헤이룽장성 자무쓰시
국적
[[중국|

중국
display: none; display: 중국"
행정구
]]

신체
165cm
종목
파일: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픽토그램.svg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주종목: 500m, 1000m, 1500m
은퇴
2006년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이후
4. 평가
5. 수상 기록
6. 기타



1. 개요[편집]


중국의 前 쇼트트랙 선수이며, 여자 쇼트트랙 역사상 최고의 기량을 지녔던 선수로 평가받는다.


2. 선수 경력[편집]


쇼트트랙 역사상 최고의 여자선수로 불리는 전설적인 선수다. 1997년 전이경과의 공동으로 세계선수권 우승을 한 이후 2003년 최은경에게 저지당할 때까지 세계선수권 6연패(1997-2002)를 했다. 이는 빅토르 안의 6회 우승과 타이기록이며 연속우승으로는 역대 최다 기록이다. 양양(A)가 올림픽+세계선수권에서 획득한 메달은 총 55개로(금메달 34개/은메달 15개/동메달 6개) 남녀통합 역대 최다 (금)메달리스트다.[1] 500m부터 3000m 슈퍼파이널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목에서 최강의 모습을 보여준 올라운더였다. 전성기 시절엔 아웃코스를 이용하여 한번에 선두로 치고나가는 화려한 플레이를 주로 선보였으나 복귀이후엔 상대적인 체력열세를 노련하고 탁월한 경기운영으로 적절하게 커버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2]

실력과 세계선수권에서의 압도적 업적에 비하여 올림픽 메달이 상대적으로 적은데(금2/은2/동1) 전명규 감독이 지도하던 대한민국 대표팀의 인해전술식 집중 견제작전 때문에 매번 올림픽에서 아쉬운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1997년 이후 전이경과의 대결에서 줄곧 앞섰으나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는 한국팀의 단체 견제를 막아줄 수 있는 동료 없이 혼자 헤쳐나가는게 지나친 부담감으로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라이벌 전이경이 중요한 순간에 강한 모습을 보여서 개인전에선 빈손으로 돌아갔고 계주 은메달에 그쳤다. 나가노 올림픽의 충격으로 은퇴하려고도 생각했다고 하나 마음을 다잡고 복귀하여 4년 간 세계 여자 쇼트트랙을 평정했다. 전이경은 올림픽에서만 승리하고 나머지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 등에서는 양양을 별로 이기지 못했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500m와 1000m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1500m에서 최은경의 견제와 고기현의 깜짝 등장으로 메달은 따내지 못했다. 2003 세계선수권에서 7연패가 무산된 뒤 2003-04 시즌을 스킵하면서 휴식을 취했고, 복귀한 2004-05 시즌에는 나이에 따른 체력저하와 진선유라는 괴물의 등장으로 장거리보다는 단거리에 집중했다. 2005-06 시즌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만 30세의 나이로 1000m 동메달을 따고 은퇴했다.


3. 은퇴 이후[편집]


파일:external/www.chinadaily.com.cn/002564bc674517228b350c.jpg
선수생활 내내 대한민국 여자대표팀의 견제를 받았던 선수로 노골적인 견제와 팀플레이를 당한 적이 많았지만 후배선수와 다르게 언제나 깨끗한 매너로 많은 선수들에게 실력과 인품 모두 존경을 받았다. 중국의 동계올림픽 첫 금메달을 안겼고 수년 간 쇼트트랙 여자부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중국 인민영웅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은퇴 후에는 국가적으로 IOC 위원 선출에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2010년 IOC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2012 런던 올림픽 사격 남자 10m 공기권총에서 이 대회 대한민국 첫 금메달을 딴 진종오에게 금메달을 걸어 주기도 했다.

이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성화봉송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CCTV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중국 선수들이 연이어 실격 판정을 받자 이해할 수 없다며 굉장히 울상을 짓기도 했는데, 이후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 시상식에서 은메달을 딴 중국 선수들에게 메달을 걸어주며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때는 성화 봉송 주자로 등장했다.


4. 평가[편집]


자국 후배 선수들이 더티 플레이로 비난을 받는 데 비해 오로지 실력으로, 깨끗한 플레이로 거의 10년 가까이 세계를 제패한 레전드로 인정을 받고 있다. 수많은 대회 중에서 중국에서 개최된 1996 하얼빈 동계 아시안 게임 1500m 결승에서 전이경에 이어 2위로 들어왔지만 당시 주심인 왕시안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금메달을 딴 사건은 옥의 티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양양의 더티플레이는 없었다.


5. 수상 기록[편집]


대회



올림픽
2
2
1
세계선수권
26
8
4
세계 팀선수권
4
4
0
아시안 게임
7
1
0
합계
39
15
5

파일:오륜기(여백X).svg 올림픽
금메달
2002 솔트레이크시티
500m
금메달
2002 솔트레이크시티
1000m

은메달
1998 나가노
3000m 계주
은메달
2002 솔트레이크시티
3000m 계주
동메달
2006 토리노
1000m
파일:국제빙상경기연맹 로고.svg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7 나가노
종합
금메달
1997 나가노
500m
금메달
1997 나가노
1000m
금메달
1998 비엔나
3000m 계주
금메달
1998 비엔나
종합
금메달
1998 비엔나
1000m
금메달
1998 비엔나
1500m
금메달
1999 소피아
3000m 계주
금메달
1999 소피아
종합
금메달
1999 소피아
500m
금메달
1999 소피아
1000m
1위
1999 소피아
3000m S.F.
금메달
2000 셰필드
3000m 계주
금메달
2000 셰필드
종합
금메달
2000 셰필드
1000m
금메달
2000 셰필드
1500m
금메달
2001 전주
3000m 계주
금메달
2001 전주
종합
금메달
2001 전주
1000m
금메달
2001 전주
1500m
1위
2001 전주
3000m S.F.
금메달
2002 몬트리올
종합
금메달
2002 몬트리올
500m
금메달
2002 몬트리올
1000m
금메달
2002 몬트리올
1500m
금메달
2003 바르샤바
3000m 계주
금메달
2003 바르샤바
500m
금메달
2005 베이징
500m
은메달
1994 길퍼드
3000m 계주
은메달
1996 헤이그
3000m 계주
은메달
1998 비엔나
3000m
은메달
1999 소피아
1500m
2위
2000 셰필드
3000m S.F.
은메달
2001 전주
500m
은메달
2002 몬트리올
3000m 계주
은메달
2003 바르샤바
종합
은메달
2005 베이징
3000m 계주
동메달
1994 길퍼드
500m
동메달
1997 나가노
3000m
동메달
2003 바르샤바
1000m
동메달
2003 바르샤바
1500m
파일:국제빙상경기연맹 로고.svg 세계 팀선수권
금메달
1998 보르미오
단체전
금메달
1999 세인트루이스
단체전
금메달
2000 헤이그
단체전
금메달
2001 노베야마
단체전
은메달
1995 조테미어
단체전
은메달
2002 밀워키
단체전
은메달
2003 소피아
단체전
은메달
2005 춘천
단체전
파일:아시안 게임 로고.svg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6 하얼빈
3000m 계주
금메달
1996 하얼빈
1500m
금메달
1999 강원
500m
금메달
1999 강원
1000m
금메달
2003 아오모리
500m
금메달
2003 아오모리
1000m
금메달
2003 아오모리
3000m
은메달
1999 강원
1500m


6. 기타[편집]


  • 양양(S)와 이름의 발음이 완전히 같아서[3] 구분을 위해 이름 뒤에 알파벳을 붙여 구분한다.[4] 처음에는 나이가 1살 많다는 점에 착안해 '대(大) 양양'이라는 뜻인 '양양(Large)'로 불렀으나, 본인이 이를 싫어해서 '양양(August)'로 호칭이 바뀌었다. 양양(S)는 Small이나 September(9월 14일생이라서)나 첫 글자가 S이다.

[1] 현재 빅토르 안과 메달수 (55개)와 금메달수 (34개) 타이를 이루고 있다. 빅토르 안이 세계선수권이나 올림픽 (금)메달 하나를 더 추가하면 이 기록이 깨질 수 있었으나 빅토르 안이 2019-20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면서 무산되었다.[2] 한 예로 전성기였던 나가노와 솔트레이크에선 주로 뒷쪽에 있다가 후반부에 한번에 스피드를 내서 치고나가는 플레이 위주였던 반면, 복귀이후인 토리노에선 초반부터 선두권을 유지하며 적절한 체력안배와 견제위주의 플레이가 많았다.[3] 양양(S)의 이름은 阳이다. 정체자로 쓰면 양양(A)는 揚이고 양양(S)는 陽이라 표기로도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4] 이게 단순히 중계할 때만 구별하려고 쓰는 게 아니라 공식 선수명이었다. 그들의 활동 시기 장내 아나운서가 '양양에이~', '양양에스~'라고 외치는 소리를 올림픽 및 여러 대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으며, 둘 중 한 명이 출전하지 않는 대회에서도 그냥 양양이라고 부르지 않고 꼭 에이와 에스를 붙여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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