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논란

덤프버전 : r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양심적 병역거부

1. 개요
2. 사법부에서의 논쟁
2.1. 결론
2.2. 국제인권규범상 양심적 병역거부의 인정
2.2.1. 처벌론
2.2.2. 허용론
2.3. 한반도 안보상황의 특수성
2.3.1. 처벌론
2.3.2. 허용론
2.4. 병력 자원의 손실
2.4.1. 처벌론
2.4.2. 허용론
2.5. 심사의 곤란성
2.5.1. 처벌론
2.5.2. 허용론
2.6. 사회적 공감대
2.6.1. 처벌론
2.6.2. 허용론
2.7. 양심적 납세거부와 비교
2.7.1. 처벌론
2.7.2. 허용론
3. 사회에서의 논쟁
3.1. '양심적'이라는 용어의 논란
3.2. 단순 병역기피자와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구분 문제
3.3. 군대 무용론에 근거한 병역거부
3.3.1. 처벌론
3.3.2. 허용론
3.4. 대체복무제에 관한 쟁점
3.4.1. 처벌론
3.4.2. 허용론
3.4.2.1. 병역의무의 적합성에 대한 담론
3.5. 폭발물 처리 대체복무에 대한 논쟁
3.5.1. 찬성론
3.5.2. 반대론
3.6. 인적자원 측면의 쟁점
3.6.1. 처벌론
3.6.2. 허용론
3.7. 병역거부가 도덕적 명제인가?
3.7.1. 처벌론
3.7.2. 허용론
3.8. 안보 무임승차
3.8.1. 처벌론
3.8.2. 허용론
3.8.2.1. 타국과의 비교에 대한 반론
3.9.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국적 박탈론
3.9.1. 문제점



1. 개요[편집]





2. 사법부에서의 논쟁[편집]


대법원은 2004년에 병역거부자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린 후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었으며, 헌법재판소 역시 2004년#,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병역법 제88조 제1항에 합헌 판결을 내린바 있다. 그러나 하급심에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비판하며 병역거부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빈도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2015년 6건, 2016년 7건, 2017년 8월 기준 25건). 일반적으로 하급심의 판결을 상급심이 뒤집을 때에는 하급심의 판결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마련인데, 이 사안만큼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하급심에서 반박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2.1. 결론[편집]


2018년 6월 28일 헌법재판소는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제5조 1항에 대해 "과잉금지원칙에 위배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결정문 전문

2018년 11월 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오승헌(34)에 대한 상고심에서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판결문 전문

이하의 처벌론에 기재된 헌법재판소의 결정문(2008헌가22)은 판례, 논거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2.2. 국제인권규범상 양심적 병역거부의 인정[편집]




2.2.1. 처벌론[편집]


우리나라가 가입한 시민적·정치적권리에관한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에 따라 바로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인정되거나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법적인 구속력이 발생한다고 보기 곤란하고,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명문으로 인정한 국제인권조약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으며, 유럽 등의 일부국가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보장에 관한 국제관습법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없어 양심적 병역거부가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로서 우리나라에 수용될 수는 없으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에 의하여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한다고 하더라도 국제법 존중의 원칙을 선언하고 있는 헌법 제6조 제1항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 2008헌가22 -폐기된 결정례이다. 대체복무 없는 병역거부 처벌은 위헌이라는 것이 2018년 12월 현재 헌재의 유효한 판단이다.



2.2.2. 허용론[편집]


그러나 국제인권규약에 대한 ‘살아 있는 문서이론’[1]

을 고려하면, 제정 연혁이 그렇다고 하여 그 조약의 보호범위가 영구불변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의 헌법해석이나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제1항에서 보는 것처럼 명문의 규정이 없다고 하여 기본권을 도출할 수 없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나아가 자유권규약위원회는 규약 제8조 제3항 (C) 제(ⅱ)호와 규약 제18조의 관계에서 왜 규약 제18조를 해석함에 있어서 규약 제8조 제3항과 연관지어 해석할 필요가 없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하였고, 그 후 유럽인권재판소도 2011년 바야탄 사건에서 유럽 인권 조약(European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제4조와 제9조(자유권규약 제8조, 제18조와 동일한 내용이다)의 관계에 대한 해석에서 이러한 자유권규약위원회의 해석을 전부 받아들여 인권협약 제9조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도출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권규약의 이행 여부를 감시하는 국제인권기관인 자유권규약위원회의 규약에 대한 해석은 법적 구속력(legally binding)까지는 없지만 ‘규약의 효력을 위한 중요한 자료(a major source for interpretation of the ICCPR)’로서 인정하거나 당연히 ‘상당한 설득적 권위(considerable persuasive authority)’를 보유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아가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 제26조, 주2)제27조는 “조약은 신의성실에 좇아 지켜야 하고,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 사유로 국내법의 존재를 들 수 없다.”라고 적시하고 있는바, 국내법의 존재가 의무 이행의 거절을 정당화하는 사유가 될 수 없는데, 사법기관의 조약에 대한 소극적, 부정적 해석이 곧바로 국제조약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의무이행 거절을 정당화하는 사유가 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헌법 제6조 제1항이 국제법 존중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국제조약에 대한 이행의무의 주체는 행정부뿐만 아니라 사법부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모든 점들을 고려하면, 자유권규약 제18조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도출할 수 없다는 대한민국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국제사회의 흐름에 비추어 시대에 뒤떨어지고 국제인권규약에 대한 정당한 방법론적 해석으로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선택의정서에 가입한 취지에도 맞지 않다. 따라서 자유권규약과 그 위원회의 해석이 헌법 제6조 제1항에 따라 이 사건 법률의 정당한 사유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영향을 미치는 만큼 정당한 사유에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광주지방법원 2015노1181



2.3. 한반도 안보상황의 특수성[편집]




2.3.1. 처벌론[편집]


세계적으로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고 국가적 실리에 따라 다자간의 협력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에도, 국방·안보·북한문제에 관하여 국민들 사이에서 이념적 대립이 극심할 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무기 개발, 미사일 발사 등으로 초래되는 한반도의 위기상황은 미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외교·안보적 상황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최근 각종의 무력 도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이제 간접적·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현실적인 것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특유한 안보상황을 고려할 때, 주관적인 사유로 병역의무의 예외를 인정하는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경우 국민들 사이에 이념적인 대립을 촉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하여야 한다.헌법재판소 2008헌가22-폐기된 결정례이다. 대체복무 없는 병역거부 처벌은 위헌이라는 것이 2018년 12월 현재 헌재의 유효한 판단이다.



2.3.2. 허용론[편집]


한반도는 6ㆍ25 전쟁 이후 남북으로 분단되어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휴전상태로 대치하여 왔다. 최근 이러한 상황에 대한 변화의 토대가 마련되었으나 항구적인 평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고, 우리나라 및 주변국들을 둘러싼 국제정세도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대체복무제의 도입이 우리나라의 국방력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거나 병역제도의 실효성을 떨어뜨린다고 보기 어려운 이상, 위와 같은 특수한 안보상황을 이유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지 않거나 그 도입을 미루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종교적 사유로 참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전투복무 대신 비전투복무 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민간업무에 복무하도록 하였고, 통일 전 서독은 동서냉전이 진행 중이던 1949년 및 1956년 각각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에 관한 내용을 기본법에까지 규정하였다.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과 1994년까지 전쟁 후 휴전하였으나 지금까지도 소규모 무력충돌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2003년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중국과 군사적 긴장관계에 있는 대만에서도 2000년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외국의 사례들은, 안보위협이 심각하더라도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실시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한다.헌법 재판소 2011헌바379


2.4. 병력 자원의 손실[편집]




2.4.1. 처벌론[편집]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전체 정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국방력은 전투력에 의존하는 것만도 아니고, 현대전은 정보전·과학전의 양상을 띠어 인적 병력자원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으므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더라도 국가안보에는 지장이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국방력에 있어 인적 병력자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최근의 급격한 출산율 감소로 인한 병력자원의 자연감소도 감안하여야 하고, 정보전·과학전의 발달로 병력수요를 줄일 수 있다 해도 그 감축규모와 정도는 군의 정보화·과학화의 현실적 실현에 달려 있으므로, 군의 정보화·과학화에 대한 기대만으로 병력자원의 손실을 감수할 수는 없다.

그동안 이 사건 법률조항은 병역기피자들에게 형벌을 부과함으로써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산을 억제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고, 비록 현 단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전체 현역복무 인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고 하더라도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여 형벌을 과하지 않는다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양심을 빙자한 병역기피자들이 급증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남·북한간의 군사적 긴장상태가 고조될 경우 더욱 그러할 것으로 예상된다. 헌법재판소 2008헌가22-폐기된 결정례이다. 대체복무 없는 병역거부 처벌은 위헌이라는 것이 2018년 12월 현재 헌재의 유효한 판단이다.



2.4.2. 허용론[편집]


2016년 국방백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병력은 대략 육군 49만 명, 해군(해병대 포함) 7만 명, 공군 6만 5천 명으로 총 62만 5천 명에 이르는 한편, 병무청 통계에 의할 때 2016년 병역판정검사를 받은 인원은 총 34만 명(현역 28만 1천 명, 보충역 4만 3천 명, 전시근로역 8천 명 등으로 판정)에 달한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연평균 약 600명 내외일 뿐이므로 병역자원이나 전투력의 감소를 논할 정도로 의미 있는 규모는 아니다.

더구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교도소에 수감할 수 있을 뿐 입영시키거나 소집에 응하게 하여 병역자원으로 활용할 수는 없으므로, 대체복무제의 도입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를 이행하게 된다고 해서 병역자원의 손실이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물론 대체복무제가 도입됨으로써 처벌 및 그에 따른 불이익이 두려워 그동안 자신의 양심상의 확신을 외부로 드러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체복무를 신청하여 종전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늘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보듯 공정하고 객관적인 심사절차, 현역복무와 대체복무 사이의 형평성 확보 등을 통하여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이를 가장한 병역기피자를 제대로 가려낸다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숫자가 지금보다 다소 늘어나더라도 우리의 국방력에 영향을 미칠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급격한 출산율 감소로 인해 향후 예상되는 병역자원의 감소를 감안할 때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국방력은 인적 병역자원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고, 현대전은 정보전ㆍ과학전의 양상을 띠므로, 전체 국방력에서 병역자원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이는 우리의 실제 국방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2006. 12. 28. 제정되어 2018년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 제25조 제1항 및 같은 법 시행령 제14조 제1항은 국군의 상비병력 규모를 연차적으로 감축하여 2020년까지 50만 명 수준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국방부는 2018년 업무보고에서, 군 구조 개편과 방위사업 혁신을 추진함과 동시에 2017년 현재 61만 8천 명인 상비병력을 2022년까지 50만 명 수준으로 단계적으로 감축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대체복무를 부과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국방력에 의미 있는 수준의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헌법 재판소 2011헌바379





2.5. 심사의 곤란성[편집]




2.5.1. 처벌론[편집]


어떤 개인이 단순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다고 하여 그것만으로 병역거부를 인정할 수는 없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양심의 자유의 보호대상인 ‘양심’은 인격의 존재가치를 좌우할 수 있는 진지한 마음의 소리이므로 진정한 양심에 따른 것인지에 대한 심사가 불가피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자의 대부분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으므로 그간의 종교 활동을 근거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병역기피자를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병무비리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병역을 기피하기 위하여 불법행위까지 불사하는 풍조를 고려하면 현역복무 기피를 위하여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 개종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다른 한편, 양심의 자유에서 보장하는 양심이 반드시 종교적인 신념에 기초한 것을 요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윤리적·사상적 확신에 기초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할 경우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념을 객관적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기 곤란하다는 문제가 있다.

더구나 양심을 가장한 병역기피자의 경우 심사단계에서 요구하는 객관적 기준들을 충족한 듯한 상태에서 대체복무를 요구할 것이므로 심사단계에서 이들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헌법재판소 2008헌가22-폐기된 결정례이다. 대체복무 없는 병역거부 처벌은 위헌이라는 것이 2018년 12월 현재 헌재의 유효한 판단이다.



2.5.2. 허용론[편집]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하여 대체복무를 인정하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빙자한 병역기피자들이 증가하여 국방의무의 평등한 이행확보가 어려울 수 있고, 국민개병제를 바탕으로 한 전체 병역제도의 실효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러한 우려는,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양심을 가장한 병역기피자를 심사를 통하여 가려내기 어렵고, 이에 따라 대체복무제를 허용할 경우 양심을 가장한 병역기피자가 급증할 것이라는 점에 주된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관리하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전심사절차와 엄격한 사후관리절차를 갖출 경우,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려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즉, 대체복무를 신청할 때 그 사유를 자세히 소명하고 증빙자료를 제출하게 하고, 신청의 인용 여부는 학계ㆍ법조계ㆍ종교계ㆍ시민사회 등 전문분야의 위원으로 구성된 중립적인 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하며, 필요한 경우 서면심사 뿐만 아니라 대면심사를 통하여 신청인ㆍ증인ㆍ참고인으로부터 증언 또는 진술을 청취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위원회에 폭넓은 사실조사 권한을 부여하고, 신청인ㆍ증인ㆍ참고인 등의 자료나 진술이 허위인 것으로 사후에 밝혀지는 경우 위원회가 재심사를 통하여 종전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면, 양심을 가장한 병역기피자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역복무와 대체복무 사이에 복무의 난이도나 기간과 관련하여 형평성을 확보해 현역복무를 회피할 요인을 제거한다면, 심사의 곤란성과 병역기피자의 증가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빙자하여 복무를 기피하는 것은 대체복무에의 종사가 개인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므로, 대체복무의 부담과 어려움이 커질수록 양심을 빙자한 병역기피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체복무의 기간을 현역 복무기간보다 어느 정도 길게 하거나, 대체복무의 강도를 현역복무의 경우와 최소한 같게 하거나 그보다 더 무겁고 힘들게 함으로써 양심을 가장한 병역기피자가 대체복무 신청을 할 유인을 제거한다면, 심사의 곤란성 문제를 상당 부분 극복하고 병역기피자의 증가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대체복무의 기간이나 고역의 정도가 과도하여 양심적 병역거부자라 하더라도 도저히 이를 선택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대체복무제를 유명무실하게 하거나 징벌로 기능하게 할 수 있으며 또 다른 기본권 침해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할 경우 병역기피자가 증가하고 병역의무의 형평성이 붕괴되어 전체 병역제도의 실효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견해는 다소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예측에 가깝다. 반면, 이미 상당한 기간 동안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서도 여러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여 징병제를 유지해오고 있다는 사실은,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면서도 병역의무의 형평을 유지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헌법 재판소 2011헌바379





2.6. 사회적 공감대[편집]




2.6.1. 처벌론[편집]


우리나라는 국민개병과 징병제를 채택함으로써 병역문제와 관련하여 국민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병역부담의 형평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강력하고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복무제의 도입에 관한 사회적 여론이 여전히 비판적임에도 병역의무에 대한 예외를 허용함으로써 의무이행의 형평성 문제가 사회적으로 야기된다면 대체복무제의 도입은 사회 통합을 저해하여 국가 전체의 역량에 심각한 손상을 가할 수 있고, 나아가 국민개병 제도에 바탕을 둔 병역제도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 헌법재판소 2008헌가22-폐기된 결정례이다. 대체복무 없는 병역거부 처벌은 위헌이라는 것이 2018년 12월 현재 헌재의 유효한 판단이다.



2.6.2. 허용론[편집]


자유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지만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전제로 할 때에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국민 다수의 동의를 받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국가가 언제까지나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일방적인 형사처벌만으로 규범의 충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확인되었다. 그 신념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제 이들을 관용하고 포용할 수는 있어야 한다.대법원 2016도10912



2.7. 양심적 납세거부와 비교[편집]




2.7.1. 처벌론[편집]


(원문)The State party considers that it is difficult to accept that the views of the Committee on the issue of conscientious objection under article 18 have been altered. Since the cases of Min-kyu Jeong et al., the Committee has been interpreting conscientious objection as a right that is inherent in the right to freedom of thought, conscience and religion under article 18, paragraph 1, of the Covenant, rather than as a right to freedom to manifest one’s beliefs. This new interpretation is erroneous in two respects. First, the Committee claims that conscientious objection is an absolute right that is non-derogable even in exigencies under article 4 of the Covenant. In these circumstances, the claim of conscientious objection could be extended as a justification for acts such as refusal to pay taxes or refusal of mandatory education.

(한국어 번역)당사국은 자유권규약 제18조에 의거한 규약위원회의 양심적 병역거부 사안에 대한 조정된 견해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주장한다. 정민규 등 대 대한민국 사건 이후로 본 위원회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표명할 권리로 해석하기보다는, 자유권규약 제18조 제1항에서 말하는 사상·양심 및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권리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본 위원회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자유권규약 제4조에 명시되어 있는 비상사태의 경우에서조차 절대불가침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양심적 병역거부는 세금 납부를 거부하거나 의무교육을 거부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자유권규약위원회에 대한 공소외 6 등 50명의 개인통보 사건(개인통보 2179/2012)



2.7.2. 허용론[편집]


양심적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자주 자신이 내는 세금이 살인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이유로 하는 양심적 납세거부 등 일반적인 시민불복종 운동과의 차별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나찌 치하에서 그리고 구 소련 치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였다는 이유로 투옥과 처형을 당하였음에도 지금까지 자신의 양심과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는 행위를 거부하면서 기꺼이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에, 세금납부거부는 그와 같은 강렬한 역사적 경험이 없다. 뿐만 아니라 양심적 병역거부는 그 결과로 인하여 투옥과 생명의 박탈까지도 감수하여야 하는 반면에, 납세거부는 그 결과로 국가의 강제징수로 인한 재산권이 침해되는 결과가 초래되는 점에 비추어, 서로 간에 침해되는 법익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한편 자유권규약위원회도 이러한 대한민국의 주장에 대하여 “납세나 교육과 달리 병역의무는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게 타인의 생명을 앗아갈 위험이 있는 행위에 관여하게 만드는 점에 비추어 보면, (거부를 주장하는) 개인이 우려하는 인명 침해에 관여하는 정도 즉 기여도에 큰 차이가 있다.”라는 취지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을 배척하였다. 이런 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는 그 역사와 저항의 강도, 법익침해의 정도에 있어서 다른 일반적 시민불복종 운동과 구별되는 차별성이 있다. 광주지방법원 2015노1181



3. 사회에서의 논쟁[편집]




3.1. '양심적'이라는 용어의 논란[편집]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표현은 전세계적으로 쓰이는 표현[2]이다.

영어에서의 어휘 'conscience'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conscience /kɒnʃəns/

: The moral sense of right and wrong, chiefly as it affects one's own behaviour.

(주로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올바르고 그른 것에 대한 도덕적 지각)

Wikimedia Wiktionary 발췌 (출처)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한국어 '양심', '양심적'이란 어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양심(良心) 「명사」

: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양심-적(良心的) 「관형사·명사」

: 양심을 올바로 지닌. 또는 그런 것.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발췌



한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의 허용에 반대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즐겨 사용한다.

1. 대부분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다.

2. 따라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아니라 종교적 병역거부가 더 올바른 표현이다.

3. 따라서 종교적 병역거부의 합법화는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이며,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난다.


실제로 병역거부의 절대다수는 종교적 이유이다. 여호와의 증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병역거부를 한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불교 등의 타 종교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이들이 있으며, 심지어 현역병, 예비역이 병역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역사적으로 재림교회, 퀘이커 신자들 역시 병역거부를 했다.

한편, 한국 사회에서 "양심"의 의미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라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다. 법률상의 의미와는 달리 맹자가 정의한 양심처럼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강하게 갖는다. 예를 들면 다음 문장과 같다.

  •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 대하여 양심 선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 "어떻게 그런 뻔뻔한 거짓말을 할 수가 있니? 양심도 없니?"
  • 친구의 답안지를 베껴 좋은 성적을 얻었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 때문에 보다 적절한 새 단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영어의 'conscience'는 주관적인 개념(개인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주관적 신념 내지는 양심)이라면, 한국어의 '양심'은 객관적인 개념(사회 통념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3]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양심적'이라면[4], 병역을 이행하는 것은 비양심적이 되어 버린다는것이 반대자들의 주장이다. 여러 보수·사회단체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함은 성실하게 복무하는 대부분의 현역병들을 '비양심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와 비양심적 병역거부가 있는 것이지. 양심적 병역거부가 허용됐다 해서 병역자들이 비양심적으로 되는건 아니므로 보수 단체들의 성명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병역이행자가 비양심적인가'는 서로 별개의 문제다. 예를 들어서, '양심적인 △△시민'을 인정했다면 △△시민이 아닌 사람은 비양심적이 될까? △△시민이 아닌 사람이 양심적인가 비양심적인가의 문제는 '양심적인 △△시민'이라는 말과 완전히 무관하다. 대체복무를 허용한 헌재 판결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이들의 선택이 '양심의 자유'에서 우러나온 행동인 것이고, 병역을 이행한 사람이 비양심적인 것이 절대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한편, 판례상 헌법적 의미의 '양심'은 민주적 다수질서의 규범이나 도덕체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이고, 그 동기나 내용, 이성적인, 합리적인 정도 등은 양심의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5] 그 중 대표적인 판례는 다음과 같다.(자세한 내용은 양심의 자유 항목 참조.)

헌법 제19조가 보호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는 양심형성의 자유와 양심적 결정의 자유를 포함하는 내심적 자유뿐만 아니라, 양심적 결정을 외부로 표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양심실현의 자유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 96헌바35


헌법이 보호하려는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이지,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양심이 아니다. 음주측정에 응해야 할 것인지, 거부해야 할 것인지 그 상황에서 고민에 빠질 수는 있겠으나 그러한 고민은 선과 악의 범주에 관한 진지한 윤리적 결정을 위한 고민이라 할 수 없으므로 그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음주측정에 응하였다 하여 내면적으로 구축된 인간양심이 왜곡 굴절된다고 할 수도 없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 96헌가11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일부 극단적인 부류를 제외하면 현역병으로 복무하는 사람을 비양심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다. '군복무로 인해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있지만 그보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conscience이기 때문에, 병역거부를 할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건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있거나 끝마친 사람이 양심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용어의 이름이 오해하기 쉽기 때문인데, 대부분의 주장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은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사람' 으로 본다.

89헌마160 판례에서는 "양심이란 세계관, 인생관, 주의, 신조 등은 물론 이에 이르지 아니하여도 보다 널리 개인의 인격형성에 관계되는 내심에 있어서의 가치적, 윤리적 판단도 포함된다"고 명시하였다. 이는 누구나 자신이 뜻하는 바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굳이 적절한 번역어를 들자면 주관 정도가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 용어가 여전히 논란이 되는 것은 사실이므로, 보편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양심' 대신 다른 의미의 용어를 대체하자는 움직임이 강하다.[6] 그 대안으로 '종교적 병역거부', '신념적 병역거부', '집총거부' 등의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양심이라는 더 긍정적인 용어를 원하는 병역거부자들로부터 반발에 부딪치고 있으며, 양심 쪽이 선점효과로 먼저 각인되어 여전히 매체 등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주된 호칭의 변화 조짐은 보이고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일단 여호와의 증인 대상으로 '종교적 병역거부'가 가장 주된 대체어로 대두중이며, 비종교적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정리되지 않고 있는데 보통 이에 대해서 종교적 이유까지 모두 포괄하여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를 대체어로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2010년 현재 '양심적 병역거부'란 표현은 여전히 구어로서 통용되고 있으며 위키백과의 동일한 항목의 명칭 역시 '양심적 병역거부'로 되어 있다. 일단 병무청과 국방부에서는 '입영 및 집총거부'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60년대 신문에서는 이를 "선의의 병역기피"라고 표현했다. 군대가 싫어서 기피하는게 아니라 나름대로 사상과 의식에 따라 갈 만한 상황에서도 안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라는 뜻.

2018년 현재 징병제를 시행 중인 대한민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역문제에 민감하게 되어버렸기에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다만 시간 낭비하기 싫다고 온갖 꼼수를 써서 벌이고 공개하지도 않는 특권층 병역기피 문제와는 별도로 다뤄지는 편이다.

2018년 헌법재판소는 '양심'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논란을 두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은 병역거부가 ‘양심적’, 즉 도덕적이고 정당하다는 것을 가리킴으로써, 그 반면으로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은 ‘비양심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치부하게 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 본 양심의 의미에 따를 때, ‘양심적’ 병역거부는 실상 당사자의 ‘양심에 따른’ 혹은 ‘양심을 이유로 한’ 병역거부를 가리키는 것일 뿐이지 병역거부가 ‘도덕적이고 정당하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병역의무이행은 ‘비양심적’이 된다거나, 병역을 이행하는 거의 대부분의 병역의무자들과 병역의무이행이 국민의 숭고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대다수 국민들이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헌법재판소 2011헌바379


여담으로,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용어 논란을 의식했는지 '양심적 병역거부자' 대신에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란 표현을 쓰고 있다.

3.2. 단순 병역기피자와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구분 문제[편집]


병역거부 처벌론자들이 가장 흔히 드는 문제이다. 즉, 누군가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했을 때, 이 사람이 진심으로 사람을 죽이기 싫고 전쟁이 싫은 사람인지, 아니면 단순히 병역을 피하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했을 시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을 판별할 길이 없으므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양심, 즉 Conscience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기에 나온 주장이다. Conscience의 특성상, 누군가의 Conscience에서 비롯된 주장을 비판, 반박하는 것은 가능할지언정 그 Conscience의 진위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진위판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양심의 자유 문서를 참고. 즉 진지하게 병역이라는 제도 자체에 회의를 느끼는 것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타인을 살해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국가가 강제로 징병을 의무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조차도, 당사자가 그것이 진정으로 옳지 않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헌법적 의미에서의 양심에 해당한다.

덧붙여 위의 처벌 근거는 어떤 치료용 약물 A를 가지고 특정 약물 알레르기가 있다며 거부하는 사람을 그냥 치료거부를 하는 사람이랑 구별할 방법이 없으니 병원에서 쫒아내도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이 A 약물 대신 B 약물을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건 환자의 권리이고 그것으로 환자가 진료 거부를 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다. 특히 B 약물이 더 가격이 비싸거나 의료보험에 적용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것이 병원측이 이미 보유한 치료법이라면 병원은 그를 쫒아내서는 안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요구하는 약물 B는 대체복무제이다. 양심이 진위판별의 대상이 아니긴 하지만, 대체 복무를 수용하겠다고 밝히는 경우라면 그것을 무조건 적인 병역 기피로 간주하기 어려워진다. 대체복무의 기간이 더 길거나 그 강도가 높아 군복무와의 형평성에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 이것으로 자연스럽게 병역기피를 구분해 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대만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대만 역시 한국과 비슷하게 대체복무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고, 이를 막기 위해 대체복무제에 한 해 받을 수 있는 대체복무자의 숫자에 제한과 대체복무 난이도 상승을 두는 쿼터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막상 대체복무제를 시행하자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대체복무제를 택하는 사람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입영대상자들은 "그냥 군대 가고 말지, 뭐하러 저렇게 힘들고 긴 일을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로 벌목을 맡긴 사례가 있다. 벌목공은 미국에서 해마다 가장 위험한 직업 1위로 꼽히는 직업#으로, 노동강도가 굉장히 높으며, 가장 높은 산업재해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단순히 편하게 지낼 궁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벌목업을 선택할 리가 없다.

당연하지만 만약 양심적 병역거부 만으로 그냥 군 면제가 되거나, 혹은 대체복무를 하는데 형평성이 어긋날 정도로 그 강도가 약할 경우엔 반대론자의 주장이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만의 경우처럼 적절한 대체복무제를 시행한다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만일 이 형평성 밸런스 조절에 실패한다면 군복무자가 50%인 국가 특성상 정치적인 표에 영향이 심하게 갈수 있으니 정치인으로써는 위험한 의제이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늘 그랬듯이 게임을 걸고 넘어졌는데, "가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이들이 실제로 사람을 쏠 확률이 더 희박한 군대를 왜 거부하냐"[7]라는 것이다. 만약에 진짜로 사람을 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이미 종교적 신념과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끌려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굳이 게임을 걸고 넘어질 거면 차라리 '종교에서 법을 어기는 한이 있어도 금기시하는 살인 및 군사 활동을 게임으로 즐긴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정도가 맞을 것이다. 이나마도 말도안되는 트집이다. 게임에서 사람을 죽이는것과 현실에서 죽이는것은 전혀 같게볼수없다. 이것이 성립하려면 기독교 신자임에도 우상이나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게임을 하거나, 독실한 불교 신자임에도 육식이 주로 나오는 게임을 즐기면 안 될 것이다.

3.3. 군대 무용론에 근거한 병역거부[편집]




3.3.1. 처벌론[편집]


군대 무용론에 의거한 대다수의 병역거부자들이 갖고 있는 신념적 목표는 군대의 해체이며, 그 목표가 달성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많은 병역거부자들은 그에 따른 반전과 평화 운동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이러한 구상 자체가 비현실적이며 이상에 불과하다는것은 잘 알고 있다. 실제 군대가 없는 나라는 존재하지만 이들 나라는 준군사집단을 보유하며 이들의 안보 서비스 역시 무기를 사용한다. 이런 조직이 아예 없는 소규모 국가들은 국방이나 치안을 타국에 위탁하고 있기에 무방비 상태로 방관하는 나라는 없다. 심지어 바티칸에서도 스위스인 경비대가 있다.

병역 거부자들의 집총거부는 적을 살상할수 있는 무기를 거부하고 상징적으로 집총을 거부하는데 아니라 전시에는 인간이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총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단의 공격 수단이 존재하며, 적이나 적국의 인명손실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군대 자체도 법적 존립의 근거는 전투가 아닌 '평화'이며, 현대 국가에서는 군대 존재의 목적이 전시만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내란, 자연재해나 그에 준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민사작전 또한 군의 임무이며, 군의 존재 자체가 평화 유지에 도움을 준다.


3.3.2. 허용론[편집]


대다수의 병역거부자 군대무용론을 신봉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교리에 따라 군사훈련을 거부하지만, 굳이 세속국가의 정책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신의 것은 신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입장이다.

비종교적 사유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군대무용론에 대한 의견은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군대무용론의 허점을 근거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비판하는 것은 가장 흔한 담론이지만, 이를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결정적인 반박으로 볼 수는 없다.



3.4. 대체복무제에 관한 쟁점[편집]


대체복무에 관한 쟁점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하여 감옥에 보낼 것인가, 아니면 대체복무제도를 시행할 것인가?
전쟁 시 전투를 거부할 만한 사람은 군인으로서 활용도가 낮고 위험한 전시 상황에서 동료들의 생존율을 떨어뜨린다. 조현병, 정신지체, 자폐성 장애 환자 등에게 군 면제를 주는 이유는 전시 상황에서 이들에게 총을 쥐어주는 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아군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비폭력주의자가 동료인 상황이라니, 이런 인물은 단호히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 목숨을 지켜주지 못할 동료가 입대하는 것을 당신은 왜 바라는가?

2) 군복무와 형평성을 맞출 수 있는 대체복무가 가능한가?
군복무와 대체복무의 형평성은 대체복무에 기피요소를 두거나, 군복무에 유인요소를 두는 것으로 맞출 수 있다. 당장의 열악한 군복무 환경이 이런 논란을 만드는 측면도 있다. 한국의 징병제는 다른
징병제 국가에 비해 병사들의 대우가 심하게 안좋으며 이로 인해 합법적으로 안갈 수 있으면 안가겠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해있다. 정부는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병사 월급 인상, 출퇴근제 도입, 군 제대 이후 학비, 취업지원과 같은 유인책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또한 대체복무가 군복무에 비해 기간도 길고, 업무강도도 높고, 월급도 적다면 당연히 대체복무를 피하고 군복무를 택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이 공허할 수 밖에 없는게 군인의 월급인상 하나 조차 지지부진한게 대한민국이며, 대체복무는 국방의 의무를 대체하는건데 처벌성 요소를 삽입하는건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사실 한국의 전문연구요원, 산업기능요원, 공익근무요원, 의무소방대와 같은 경우도 일종의 대체복무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러한 비전투복무자들에게도 집총훈련이 포함되어 있는 기초군사훈련을 강요하기 때문에 병역거부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의무소방제도는 미국에서 병역거부자들을 복무시키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한국은 미국의 제도를 벤치마킹하면서 정작 기초군사훈련 과정을 포함시켜버리는 바람에 병역거부자들에게는 무의미한 제도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도 어찌보면 헬적화의 한 사례일지도.


3.4.1. 처벌론[편집]


병역은 유사시 생명을 잃기에 본질적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다.

병역은 개인적으로 복무자는 군령에 의해 신체 정신상 극심한 인내를 요구하며, 생명을 잃는 것까지 감수해야 하고, 공동체의 입장에서 국방 안보라는 공공재는 대체불가능한 성격이며 복무에 의존하기에 대체복무자들이 주장하는 긴 복무기간의 사회복무로 절대로 대체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병역 대체 논리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대체 서비스에 종사하면 국방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렇게 치면 현역 복무 의무는 대체가치로 측정이 되어 대체가능한 사회복무 뿐만 아니라 금전적 성질로 거래될수 있는것이 된다. 개인의 양심의 가치는 측정 불가능한 본질적 가치를 주장하며 현역복무자의 다수의 양심적 복무에 대해선 가치의 교환성을 주장하고 있는 모순이 생긴다.

병역거부자들 중 상당수인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가같은 세속권력에 대해서 충성이나 맹세를 교리 금지하고 과거 세속권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데서 한발 물러서 세속권력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지만 집총만을 제외하면 입영과 통제된 숙소생활, 현역보다 긴 복무기간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집총을 하지 않아도 되는 대체복무제도만 보장된다면 그보다 더한 고생도 감수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에 못잖게 극단적으로 아예 모병제로 전환하자는 부류도 많은데, 이들도 현 병역제도 폐지를 위한 과도기적 중간 단계로서의 대체복무제 도입은 수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도 때문에 대체복무제가 까이기도 한다.

유럽의 경우는 나토라는 집단 안보 방어체제로 안보위협이 한반도보다 현격히 낮은편이며 냉전이 종식되고 군축이 많이 진행되었기에 병력 수요가 매우 적다. 독일의 경우 과거 동서독 합쳐서 90만 병력이 현재는 육해공군 합쳐 17만으로 감축했으며 징병제도 폐지했다.[8] 기타 다른나라들도 사정은 비슷하고 프랑스를 제외하면 상징적인 수준의 군 병력만 남겨둔 실정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는 2007년 대체복무 시행을 추진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현역 기간의 2배 가량 동안 합숙으로 중증장애인, 치매노인 등에 대한 사회봉사활동 방안 등이 검토되었다. 다만 원하는 사람을 모두 받아주는게 아니라 정원이 700여명 내외로 엄격히 제한시킬 방침이었으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이 또한 완전한 의미에서의 대체복무제 입안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이 과정조차도 여론 조사 결과 반대 의견이 많은 점이 문제시되었고, 무엇보다 실질적으로 국방을 주관하는 국방부 쪽에서 난색을 표해 결국 정권이 교체된 2008년 12월에 전면 백지화되었다. 대체복무를 도입한 국가 상당수가 국민 투표와 같은 공론적 방식을 거쳤음을 감안하면, 당시 대체복무제가 지나치게 졸속으로 추진되어 그만큼 쉽게 폐기당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국민 투표와 같은 헌법적 절차를 밟았다면 아무리 새 정부가 고집이 강해도 이를 그리 쉽게 폐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찬성론자들이 UN에서 군복무기간의 1.5배가 넘는 대체복무기간은 사실상의 처벌이라고 발언한 것이나 대만에서 1.1배 기간의 대체복무제를 도입하고 있는 점 등을 인용하며 현역 군복무와 최대한 비슷한 노동강도와 군복무에 비해 지나치게 길지 않은 기간 등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군복무 자체를 단순히 고생으로 계량화시켜 근본적인 군대라는 조직의 존립 목적 자체를 슬쩍 비껴나간다는 반론과 부딪친다. 즉 "대체복무자들한테 힘든 거 시키면 현역병들도 불만 없지?" 라는 소리인데, 엉뚱한 곳에서 열심히 푸닥거리한다고 나라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이는 현역 복무의 노동 강도만 단순히 비교하려 든 것으로, 기존 사회복무자는 퇴근후 일과시간이나, 휴일 공휴일의 활동을 하지 않기에 심야와 주말 명절에도 근무를 서는 현역보다 복무기간을 길게 가져가는 것이 특별한 혜택도 아니며, 미필자는 현역 제대후에도 8년의 예비군 소집도 면제되어 시간상 금전상 불이익도 적게 받으며 또한 현역 제대자는 전시에는 동원령 선포시 소집의무에 응해야한다. 그러니 현역과 비슷한 대체복무 기간을 주장하는것은 현역과 예비역 복무의 현실적 부담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대체복무제는 결코 군대처럼 강압적인 위계질서를 고수하지 않으며, 전쟁 등의 급변상황이 터질 때 목숨을 담보할 우려도 없으므로[9], 사람에 따라서는 병역을 수행하는 것보다 충분히 매력적인 선택일 수 있다. 이는 '가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양심적' 거부를 인정한다면 입영후 복무 환경에 환멸을 느껴 양심적으로 거부자에게 복무전환을 받아들여야 할것이고 강제로 양심의 여부를 심사할 근거가 없다. 군령 군법상 열악한 환경에도 복무 의무를 부과함에도 상대적으로 긴 복무기간을 감안해서라도 열악한 병영생활을 거부하려는 수요가 분명이 존재하기엔 복무환경이 극심하게 악화되는 전시에는 이러한 구분할 수 없는 양심들이 많이 증가할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 문제를 현역 복무자들에 대한 추가 보상 지급 등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논란을 피해가는 찬성측의 견해도 있지만 군가산점제 사례에서와 같이 추가 보상이라는 것은 역시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거나, 다른 사람의 기회를 간접적으로나마 빼앗아갈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올바른 반론이 될 수 없다.

만약 대체복무제로 전체 징집 대상자의 5%만 빠져도 전체 장병들의 복무기간은 약 한 달 정도 늘어나고, 10%가 빠지면 두 달은 늘어나야 현재와 같은 숫자의 병력자원을 유지할 수 있는데, 그러면 군대 간 분들의 입장에서는 민폐가 된다. 대한민국의 육군 위주 편제나 밥그릇 문제, 비효율적인 병력 운영을 비판하며 대체복무를 추진할 여력이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병력 감축이 가능하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혜택을 받는 군복무기간 단축 등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며, 전 국민 중 극히 일부만 필요를 제기하는 병역거부자를 위한 배려로 이어져야 한다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사실 비효율적인 병력 운영을 지적하는 의견의 근거들 중 상당수는 한반도 전장환경이나 대한민국 방어를 위해 필요한 전력 수준을 분석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 과외병이나 테니스병 등의 단편적인 사례의 집합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체복무제가 생기는 자체가 병역기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반대의 원인이다. 현재 병역은 그나마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신체에 하자가 없다면 여자 빼고 누구든 공평하게 수행해야 할 몇 안되는 평등의 장이다. 이렇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가 없는 지금조차도 매년 고위층 병역비리가 판치고 있으며, 몸짱 연예인들 중에도 공익근무요원이나 면제가 수두룩한데,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면 악용 가능성을 어떻게든 차단해본다고 해도 높으신 분들이나 돈 깨나 만지는 이들이 그것을 어떻게 요리조리 피해갈 지 불안하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제도상의 철저함을 기하면 된다고 해도 애당초 그걸 주무르는 양반들부터가 이 사람들이니 말이다. 더구나 2010년 외교부 장관 딸 특채 비리가 터지면서부터는 이런 사회적 불신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대체복무제를 찬성한다는 입장에서는 선진국은 물론이요 이미 전 세계 국가의 거의 절반이 대체복무제를 시행한다는 점을 강조한다.[10] 하지만 그런 나라들이라도 전면전의 위협이 심각하게 높아졌거나, 아예 전쟁중인 상황에서 현재의 대체복무제를 계속 시행할 수 있을까? 지금은 소수의 사람들만 대체복무제로 빠진다지만 정작 그런 상황이라면 족히 전체 징집대상자의 90% 이상이 빠지는 수가 있다. 그러면 정작 병력자원이 가장 필요한 상황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자국의 대체복무제를 손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대체복무제가 있는 나라들 중 시행 이후 아직까지 딱히 그런 규모의 전쟁을 겪은 나라들이 없다 보니 그런 사례도 없지만, 진짜 제 3차대전이라도 일어나면 더 이상 대체복무제라는 이상이 지금처럼 원활하게 적용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지구상에서 전면전이 일어나 군인, 민간인 수만 수십만명이 살상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편이다.

이에 대하여는 거의 모든 나라가 적국이며 무장세력이 연일 본토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이스라엘과 비교해 한국이 특히 더 많이 위험하다고 할 수 있냐는 식의 주장이 있는데, 그들이 반론으로 드는 서독의 경우는 우리와 대치상황에서의 위험도가 아주 달랐고, 이스라엘의 경우는 역사 부분 항목을 참조해도 알겠지만, 애초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국가가 성립된 것이며, 애초 전세계에 흩어져있던 유태인들은 이스라엘 국적을 얻고 그곳에서의 국민의 의무를 다할지, 아니면 기존에 정착한 국가의 국적을 유지할지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상황이 아주 다르다. 제대로 된 화약고의 예를 들려면 냉전기 서독을 드는 것이 적당하다.

소련-러시아 앞에 있고 겨울전쟁도 겪었던 핀란드의 집총거부를 예로 드는 경우도 있지만, 핀란드는 전쟁 위험이 가장 높았던 냉전기에는 친소 중립국이었으며 현재는 쪼그라들어버린 러시아와 맞부딪힐 일이 없다. 그나마도 핀란드의 대체복무자들은 전시에는 구호활동이나 군수산업에 투입되어 총을 들지 않더라도 국가방위를 지원하게 된다. 현행 대한민국의 대체복무제도 역시도 이와 유사하게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관여되어 있으며,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동사무소 공익조차도 집총훈련은 받고 병사로 투입될 수 있다.

교도소에서 사는게 더 낫다는 주장도 전시에 교도소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조금만 알아봐도 말도 안되는 소리임을 알 수 있다. 간단하게 6.25전쟁만 조금만 봐도 말이다. 형벌부대가 괜히 있었던거도 아니다. 인권이 발달해서 괜찮을리 없다. 그럼 왜 화생방에대해 공부하고 가스 공부와 전쟁시에 신경안정제들을 왜 배부 받겠는가. 인권운운으로 생산이 중단된 그것들은 북한에서 버젓이 생산되고 있고 요덕수용소도 여전히 존재한다. 전쟁에 인권 운운한지는 50년정도 밖에 안됐다. 그렇게 가볍게 교도소가 더 안전하니 교도소 가고 말지는 얼토당토 않는 소리다

사실 대체복무의 핵심은 매우 간단하다. 전시에 생명의 위협을 함께 나눠 감당할 수 있는지의 여부 하나 뿐이다.

군인은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폭력을 강요받아 자신의 손을 피로 물들여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군인은 살인광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어지간한 멘탈킹이 아니고서야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거나 그런 상황에 몰리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심지어 언제든 현대화된 무기와 폭력에 노출될 것이며 그들의 작전지역은 지뢰밭이거나 바다 한가운데인 경우도 있고 고공에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만 봐도 알겠지만, 이건 스포츠도 아니고 항해도 아니다. 북한은 실제로 우리 군인을 죽이기 위해 어뢰를 발사하며 포를 쏜다. 대체복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러한 생명의 위협과 어마어마한 수준의 PTSD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위험성을 동시에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인가? 대체복무라는 것은 말 자체부터 잘못됐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없다. 대체복무가 가능하려면, 최소한 병사들에 대한 복지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진 후에나 가능하다. 여전히 봉급은 최저시급보다도 한참 아래고 24시간 강제합숙이며 심지어 그 공간은 상하관계로 치밀하게 짜여져 있으므로 강력한 정신적 압박을 가해온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병역 문제에 민감한 이유는 단순히 노동의 강도와 그 노동의 기간 때문이 아니다. 대한민국 병역 의무 문서에서 볼 수 있겠지만, 위에서 설명한 여러가지 내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무경험자가 상상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만들어낸다. 이 문제들이 해결되기 전에는 대한민국의 병역 의무와 동등한 수준의 대체복무는 있을 수 없으며, 만든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의 어마어마한 반대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MC몽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병역의 의무와 관련하여 현행 제도를 일탈하는 어떠한 행위도 환영받지 못한다.

3.4.2. 허용론[편집]


병역은 유사시 생명을 잃기에 본질적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인간의 의무로 부적합하다.

또한 병역은 유사시 생명을 잃기에 대체가 불가능하다면, 한국에서 시행 중인 산업기능요원, 전문연구요원, 예술체육요원 등의 병역특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백번 양보해 병역을 대체할 길이 없다면, 감옥 생활은 병역을 대체할 수 있는가?

결국 문제는 유사시 생명을 잃는, 국가를 위해 생명을 희생하는 병역의 속성이다. 이를 원론적으로 의무로 인정할지 말지는 되게 까다로운 논제다. 간단하게 말해 병역은 '국가를 위해 죽으라면 죽어라.'라는 명령일 뿐이다. 서구 사회에서 1,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으로 떠올랐던 이유다.

위의 처벌론에서는 병역은 본질적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다며, 병역을 신성불가침한 그 무엇인 것처럼 묘사해놨지만, 이미 전문연구요원, 예술체육요원 등의 병역 특례제도가 존재한다. 즉, 이미 한국은 필요에 따라 병역을 미끼로 거래를 일삼아 왔다는 것이다. 결국 '신성'한 병역의 의무도 경우에 따라 대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한 논쟁 여부와 무관하게, 위의 병역거부 반대론의 예시들은 오류가 있다. 우선 병역거부로 인한 현역 입영자원의 부족의 경우, 만약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모병제 전환 혹은 병력 감축 후 군 첨단화, 정예화 등 병제 개편이 필수적인데, 병제 개편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논리를 미리 가정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발상은 무조건 징병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노이로제에 가깝다. 병역거부자들이 괜히 모병제 이야기, 군 감축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반대론에서는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선진국들도 총력전이 발생할 시 대체복무제를 폐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미 영국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16년 3월 2일부터 병역거부권을 보장하기 시작했으며, 병역거부자들은 민간적 성격을 띈 대체복무를 하거나, 비전투병과에서 복무할 수 있었다. 일부 병역거부자들이 처벌받은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대체복무마저 거부한 경우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병역거부권 비판론자들의 우려하는 것처럼 너도나도 병역거부 하는 바람에 군이 와해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반대자들은 한국의 안보위협이 크기 때문에 대체복무를 도입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휴전국가인 한국의 안보가 독일의 폭격을 실시간으로 맞아가며 총력전을 펼쳤던 영국의 안보보다 위급한지 묻고싶다. 20세기의 경우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겨울전쟁 당시 영국, 미국, 핀란드총력전을 치루면서도 대체복무제도를 성공적으로 운영한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론자들은 엄연히 휴전상태인 한국의 안보상황이 추축국을 상대로 총력전을 치루던 연합국의 안보상황보다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위의 반대론에서 언급한 '전시에 징집대상자의 90% 이상이 빠지는' 상황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2017년 현재의 제도 하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논리대로라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것 보다는, 교도소에 가서 사는게 훨씬 나으므로, 전쟁이 벌어졌을 때 징집대상자의 다수가 교도소로 빠지는 사태는 막을 수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게 되면 형평성에 문제가 생긴다는 주장 역시 해당 서술자가 사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가 나오게되면 군복무를 할지, 아니면 대체복무를 할지는 순전히 개인의 판단으로 남게 된다. 군대 가는게 억울하다고? 그럼 대체복무를 선택하면 그만이다. 각자의 선택에 따라 복무를 하는 것이므로 여기에 형평성 논란이 낄 여지는 없다. 위의 반대론에서는 '가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헌법에서 정의한 양심은 그 특성상 참과 거짓 여부를 가리지 못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위의 비판에서 집총거부와 병역거부를 의도적으로 분리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합치 가능한 개념이다. 실제로 핀란드나 노르웨이, 그외 많은 국가들의 대체복무는 교전 이외의 군사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또한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구 유고권 국가들의 경우, 비무장 상태로 경계 근무에 투입시키는 방식의 대체복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와같은 대체복무제를 시행할 경우, 유사시 많은 인원이 대체복무제를 선택할 것이라는 우려를 없앨 수 있다. 병역거부자들의 신념은 다양하며, 선택 할 수 있는 대체복무제도의 정도도 다양하다. 위에서 지적한 병역거부에 반대하는 이유들을 불식할 수 있는 대체복무제 도입은 충분히 가능하며, 이미 많은 예시들이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현실은 양심과 관련된 그 어떤 대체복무도 도입되고 있지 않다는 것.

또 위의 반대론에서는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핀란드의 대체복무제와 한국의 대체복무제에 차이가 없는 것처럼 왜곡서술하고 있다. 핀란드의 대체복무자들은 엄연히 자진해서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집총훈련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대체복무자들에게도 집총훈련을 강제하므로 병역거부자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군인, 경찰관, 소방관들의 희생, 봉사, 직업 정신은 칭송받아 마땅하나, 이를 국가가 강제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선로에 떨어진 어린이를 구하고 대신 목숨을 잃은 시민의 행동을 용감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국가가 개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선로에 떨어진 저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 네 목숨정도는 희생해라'라고 강요하는 순간 그건 거룩한 희생정신이 아니라 국가의 폭압일 뿐이다.

3.4.2.1. 병역의무의 적합성에 대한 담론[편집]

찬성론 문단에는 "병역은 생명을 잃을 수 있기에 인간의 의무로 부적합하다"라고 반대론의 맨 첫 문장을 비판했으나 의도가 어찌되었든 그건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생명을 잃을 위험'이 존재하는 일은 군대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반드시 존재하며, 소방관이나 경찰, 심지어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제3국 파견의사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에서 전 인류를 지켜낸 사람들은 통상적인 군대와는 비교도 안되는 고위험지역에 들어갔던 장구류도 제대로 못 갖춘 이들이었다. 그러나 UN은 이러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징병제와 전시 징병제의 위험성을 상회할 정도로 위험한 일일지라도 강제성이 적고[11] 특례로 보여질 수 있거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안 목적의 반강제적인 대체복무에 대해서는 강제노동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들은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다. 이걸 인간의 의무로 부적합하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사람들을 지키려는 숭고한 정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감정적 사실 뿐만 아니라 국가가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징병제라는 폭압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어떠한 나라를 막론하고 결코 없어질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13] 현재도 징집된 많은 군인들이 희생하고 있다는 답에 침묵해서는 안된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이하 찬성론에서 주장하는 반대론측이 병제개편을 반대한다는 가정은 심각한 악의적 해석이다. 반대쪽이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사고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에 나오는 의견인데, 그렇다면 반대론자들이 전부 군 복무기간을 늘리는데 찬성하고 차츰 줄여가는 군 복무기간에 대해 반대할 때나 가능한 말이다. 실제로 지금도 군 복무기간을 줄이고 있는 것은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성사가 되지 않는 게 아니다. 병역자나 전역자들도 모병제를 찬성하는 사람도 많고 군감축에 찬성하는 사람이 많다. 군 감축 안하고 늘려서 배부른 건 윗사람들 뿐 이라는걸 군대만 갔다와도 알 수 있다 찬성론의 서술은 반대론에서 주장하는 군 생활에 있어서의 징집자들이 감내해내는 국가를 위한 희생 및 정신적 고통은 교묘하게 피해가고 가치없음을 주장하며 반대론자들의 의견을 오직 이데올로기적 서술 및 나만 당할 수 없다는 꼰대들의 생각이라고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론에서 주장하는건 대체할 수 없다라는거지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서술이 아니다. 국가의 명령으로 죽기 싫은 건 누구나 같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면 90%가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가족이 총 맞아 죽게 생겼는데 도망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없는 총도 가져가서 싸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총쏘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뭘 한단 말인가? 병력자원이 가장 필요한 상황에서 무용지물이 되는게 요지지 모이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북한은 을 가지고 있고, 영국-독일 간의 거리보다 훨씬 우리 국토에 가깝게 인접해있다. 또한 전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해 참전할 것이 뻔한데, 한국-중국+북한(+러시아)는 소련-핀란드 국력 차이보다 훨씬 더 격차가 크다. 물론 미국의 지원이 있겠지만 어차피 영국도 핀란드도 미국과 독일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한반도가 전쟁이 나면 서술된 영국이 폭격당하는 것보다 더 위급한 안보상황이 될 지역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반대론쪽은 그 상황에서의 변동을 말한거지 지금 상황에서 하는말이 아닌데도 지금은 그때보단 나으니 괜찮다는, 완전히 헛짚은 난독증을 벌이고 있다.

찬성론자들은 비무장 경계 근무나 비전투적인 군역 등으로 대체복무제가 생명을 담보로 하는 문제를 불식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군대와 연관된다며 거부한 것은 (특히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병역거부 찬성론자 자신들이다. 이러한 담론에 대해 병역거부자들은 반대측이 비현실적인 주장과 현실적인 방안까지 일반화하여 비난한다고 주장하지만 찬성론측 역시 주장을 분명히 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공익근무요원을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의 예시로 들 수는 없다. 그들은 군에서 현역복무를 안할 뿐이지, 예비군도 나가고 국방부나 병무청, 심지어 군사시설에 근무하는 요원도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국가안보에 꽤 도움이 된다. 반면 전술했듯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중 보편적 거부자들은 병역의무는 인간의 의무로서 부적합하다면서 군사와 관련된 모든 대체복무까지 거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따지면 교전 이외의 군사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비무장 경계로 대체복무를 이행하는 유럽 선진국들의 병역제도 역시 반대해야 하는데 떡하니 반박이랍시고 걸어놓았다. 때문에 이러한 비교전적인 군사의무 이행을 찬성하는 쪽과 보편적 거부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유럽 선진국의 병역 공무기관은 그러한 문제를 고려하여 평시에는 국방과는 연관이 극히 적은 사회복무 분야에서도 복무하되 전시나 재난 등의 상황에서는 민간인 보호 및 적십자, 군 장병 의무 활동 등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위의 비판에서는 이러한 사회복무역에 비해 합리적이고 국방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대체복무까지 부정될 수 있는 발언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익근무요원은 본인이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가는 것과 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찬성론자들은 반대론자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 역시 만기 전역자들이 직접 겪은 뒤에 제기하는 대한민국 병역 의무의 스트레스 수준에 대해서는 듣지도 않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병역 의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찬성론자들 역시 비슷한 관점으로 비판을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3.5. 폭발물 처리 대체복무에 대한 논쟁[편집]




3.5.1. 찬성론[편집]


명분상으로 집총을 할 필요가 없으며, 반전과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 만일 국방부 혹은 군대에 소속되는 것 자체가 곤란하다면, UN 지뢰제거위원회 등의 국제기구나 NGO 등과 협력하여 외국의 지뢰지대에 파견하면 이런 소속 문제도 피하면서 세계평화 실현과 국위선양에 이바지할 수 있다. 즉 양심적 병역거부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이걸 시킨다면 찬성하겠다는 사람도 많다.

찬성론자 중에서도 한홍구의 경우 이런 의견을 상당히 비꼬는 어조로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지뢰제거가 반대론자들을 설득시킬 하나의 대안이 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병역거부로 교도소에 들어갔던 여호와의 증인 신자 중에서도 차라리 지뢰제거를 하는게 더 낫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교도소에 들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예비군 훈련에 불참해서 내는 벌금이라든지, 호적에 빨간줄이 간다든지 하는 불이익이 많기 때문이다.

'지뢰제거' 이야기가 나오는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가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가려낼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지뢰제거는 전쟁에 대한 '개념을 실감할 수 있으며', '위험도 상당'하지만 '평화에 대한 기여도가 높다.' 이 정도라면 단순한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하는 '가짜'들을 확실히 솎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양심적 병역거부 찬성자들은 지뢰제거에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동이 군사주의를 일소하고 무기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이라는 해석이다. #### 더불어 위험하다고 반대하는 논리는 전쟁이 벌어지면 일반 군인들은 더 위험한 전쟁터에 가야한다는 점에서 설득력과 형평이 떨어지는 논리다.

또한 현실적으로 군의 인력만으로 모든 지뢰를 제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하여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민간업체를 통한 지뢰 제거에 대해서 정부 차원에서 검토한 바가 있다.[14] 물론 이 경우는 해당 인력의 전문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뢰제거기술사 같은 자격을 부여하여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민간업체를 통해 지뢰제거에 투입되면 군복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된다.

업무내용 자체가 타인을 전혀 해하지 않으며 체력문제 역시 이들이 감시업무나 별도 훈련에 투입되지 않는 이상 최전방 수호병과 동급의 체력을 갖출 필요도 없다. 또한 현재 폭발물 탐지와 제거는 사실상 이분화되어 있어 제거업무는 숙련된 인원들만 차출하여 진행하므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가 일반 전투공병의 그것에 비해 딱히 더 위험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국방부 스스로가 폭발물 관련작업의 위험도를 인지하고 있기에 작업의 안전성을 꾸준히 개선하고 있으므로 탐지장비와 제거장비의 개선과 자동화 역시 매우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애초에 DMZ 지뢰 제거는 남북 평화 협상을 통해서 서로 제거하기로 한건데 거기다가 총 맞을 위험을 지고 가네 어쩌네 하는 것도 잘못된 반론이고, 그럼 거기서 근무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죽고싶어서 자살하려고 들어가는건가 총을 드는 것은 본인의 선택으로 거부한 것이다. 찬성측에서 말한 동구권에서 경계근무 때 비무장으로 내보낸다는 대체복무와 다를게 없다. 경계근무도 유사시엔 무기가 필요한 근무니까.

3.5.2. 반대론[편집]


찬성론에서는 민간업체로 보내 폭발물 해체 자격을 획득하게 하면 된다고 주장했지만 결론적으로 이들 역시 군대 소속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병역거부자들이어도 지뢰 제거를 하기 위해선 역시 고도의 전투 훈련[15]과 폭발물에 대해 전문가에 준하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민간업체에 소속시킨다 해도 지뢰 제거시에는 군대처럼 무기를 운용해야 하니 군대와 같이 움직일 수 밖에 없다.[16]

파일:질외제거.jpg

찬성론에서 말한 바 같이 집총을 안하는 상황은 후방의 도시 부근 군부대 주변에 묻은 지뢰제거에서나 가능한 희소 상황이다. 그리고 일반 전투공병도 간단한 훈련 후 되는 것이 아닐 뿐더러, 더 전문적인 폭발물 처리반(EOD)은 그냥 시험쳐서 양성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병역거부자들의 대체 복무기간을 현역의 1.5배에서 2배 가량 더 길게 한다는 것이 여론과 정부의 목표인데, 완전히 지뢰제거에 관한 전문성을 갖추고 투입하려면 긴 훈련기간이 필요하며 훈련기간을 제외하고서도 실질적인 지뢰 제거 기간이 현역들보다 더 느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대체복무자들이 찬성론에서의 주장처럼 '위험도 상당'한데 일반 현역들보다 훨씬 긴 복무기간으로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불참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지뢰의 대부분이 최전방 지역에 매설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투입될 병역거부자들은 적어도 최전방 수호병과 동급의 조건을 갖춰야 한다. 즉, 최소한 휴전선 인근의 산악 지형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높은 체력 등급과 힘든 업무 강도 및 비상시에도 동요하지 않을 우수한 정신력을 갖추고, 사상에서 문제없는 보안상 안전한 인력이어야 한다. 참고로 22사단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처럼 GOP 등에서 현역으로 복무하다가도 군대가 싫어서 월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아예 총 들기도 싫어서 병역거부를 하는 인원들이 최전방을 간다..? 악폐습으로 인해 월북한 사람들과 동일선상에 놓을 순 없지만, 지뢰제거를 지속적으로 하려면 대체복무자들도 최전방에서 가까운 곳에서 집단 숙식하며 관리해야 하는데 혹여 그 기숙사나 관사가 민간업체에서 관리하는 곳이라고 해도 지뢰제거라는 '위험도 상당'한 업무의 고강도 스트레스를 견뎌내지 못해 일탈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민간인이면 회사일이 힘들고 맘에 안 들면 사표내고 나오면 되지만 대체복무는 그럴 수 없다. 병역거부 대체복무자들의 근무지 위치가 민간인 출입통제선 위라면 일탈의 결과는 체포 아니면 월북 혹은 사망이다. 결국 제 2의 군부대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WRI[17]를 비롯한 반전주의 시민단체들은 군대와 그에 따른 모든 군사적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군 복무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쪽 계통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군대와 그에 속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이쪽이 다수다. 또한, 지뢰제거 등의 업무는 통상적인 군인의 임무에 비해서도 위험성이 극히 높으며, 사실상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벌 부대 마냥 운용한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어떤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자진해서' 지뢰제거 대체복무를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양심적 선택으로서 인정할 수 있겠지만,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대체복무자를 지뢰제거 현장에 내모는 것은 형벌부대와 다를 게 없다는 것. 실제로 소련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형벌부대를 지뢰 제거 현장으로 보낸 역사적 사례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스탈린의 잔혹한 독재 정권과 똑같이하면 전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될것은 뻔하다.

바른미래당하태경 의원은 자유한국당 김학용 의원의 지뢰제거 발언에 대해 “대한민국 군대는 군인의 인권을 생각해 지뢰 제거 로봇을 개발하고 있고 상용화 직전이다. 군대에도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자유한국당이, 안보를 그렇게 강조하는 자유한국당이 로봇을 제끼고 대체 복무자를 지뢰 제거 작업에 투입하자고 하는 것은 정말 유치하고 반인권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하였다.관련 기사

이러한 점을 의식한 일부에서는 차라리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로 지뢰제거 따위를 시킬 것이 아니라 하수처리장이나 쓰레기 처리장에서 근무시키는 것이 양심적 병역거부 대체복무의 취지에 맞고, 다른 병역의무와의 형평성을 맞출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다.

어차피 국방 정책의 당사자인 대한민국 국방부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의 대체복무수단으로 지뢰제거를 옵션에서 아예 배제하였으니 지뢰제거 대체복무의 논의의 실익은 적다고 볼 수 있다.

3.6. 인적자원 측면의 쟁점[편집]




3.6.1. 처벌론[편집]


찬성론자들은 충분히 활용 가능한 인력을 감옥으로 보내면 인력 활용도 못 하고 돈만 축내는 삽질을 한다는 의견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반론을 피할 수 없다. 일단 이런 논리는 비단 입영거부자 뿐만 아니라 징역, 금고형에 해당하는 모든 범죄자들에 해당한다. 단순히 경제적 논리 문제로 처벌 대상인 범죄자들을 수감시키는 대신 새로운 직업을 줘서 써먹는게 온당키나 하냐는 것. 또한, 인력 활용 문제는 교도작업으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하기에 이러한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교도작업이 징벌적인 의미보다는 교화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게 된 오늘날에 와선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징역형을 받고 수감중인 범죄자들로 하여금 노역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게 하는 것 또한 인력 활용 방식의 하나이며, 교도작업 상당수가 수감자나 교정직 공무원용 피복 제작, 시설 관리, 조리 등 교도소 및 구치소 등 교정기관 운영비용을 상당 부분 절감하는 데 투입되고 군에 가지 않아도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군대라는 곳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군필자들의 심리적 박탈감이나 회의감 등이 더 커질 수 있다. 이는 형법적 조치 없이는 법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맥락과 같다.군복무자들이 더 당당하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예시로, 모병제를 채택한 미국은 군인들이 더 인정받는다. 굳이국가에 의한 혜택이 아니더라도 민간차원에서의 존경의 의미로써의 혜책이 적잖이 주어진다: 할인, 무료메뉴, 퇴역군인/상이용사 우대, 군출신 우선채용 등. 요약하자면 한국에서는 병역거부자를 해코지하는게 곧 현역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라는 것이다.

공익, 병특은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진 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해야만 하며 전쟁 발생시 보충역으로 징집되고 예비군 기간에도 현역제대자와 동일한 복무 의무를 진다. 게다가 공익은 병무청에서 직접 심사함으로써, 병특은 숫자를 직접 통제함으로써 부작용을 관리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해 오고 있다.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부작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즉, 사회적 비용을 감수해가면서 병역을 거부하는 자들과 합숙을 하면서 똑같은 방법으로 부작용을 통제시킬 이유도 없고, 같은 사회활동을 시켜줄 이유도 없다. 게다가, 이들의 주장은 보충역들은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신체 조건을 가진 이들이라는 사실 역시 간과하고 있다.


3.6.2. 허용론[편집]


대체복무제 도입 찬성측에서는 병역거부자들에게 부과되는 징역형이 사실상의 대체복무제라고 입을 모은다. 대부분의 병역거부자는 법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으며, 구치소에 머물면서 행정 업무 보조 역할을 맡는다. 이들이 수감자라는 사실만 빼면, 사실상 합숙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인 셈이다. 병역거부자는 대체복무제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받았는데, 막상 수감 중에는 대체복무제와 비슷한 일을 떠안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제대로 된 대체복무제를 도입해서, 병역거부자들도 합법적으로 의무를 다할 기회를 주자는 뜻이다. 실제로 병역거부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문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한 바가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형 확정 후에는 교도소로 보내져 일반적인 정역의무를 부과받아야 함에도 일률적으로 미결수용소인 구치소에서 교도관의 행정 및 운영업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바, 이는 사실상 병역의무 대신 대체복무 또는 사회복무를 이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피고인으로서는 대체복무를 요구하면서 실정법을 어겼다고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국가는 대체복무는 불필요하다고 하면서 막상 유죄를 선고한 후에는 사실상의 대체복무를 부과하는 이런 역설적 상황을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굳이 유죄의 선고를 거쳐 전과자 신분으로 이런 의무를 담당하게 할 것이 아니라,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으로 병역의무에 갈음하여 떳떳하게 우리의 공동체를 위하여 기여하고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함이 마땅하다.#


위의 처벌론에서는 미군의 전역자 혜택을 들어가며, 병역거부자 처벌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중에 군 전역자에게 혜택 주지 말자는 사람은 없다.[라지만] 또한 처벌론에서 예시로 든 미국은 정작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고 있다. 2017년 현재의 미국은 모병제국가이지만, 유사시 징병제로 전환하기 위해 Selective Service System을 유지하고 있으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해 대체복무제를 마련해두었다. 대체복무 자격요건


3.7. 병역거부가 도덕적 명제인가?[편집]




3.7.1. 처벌론[편집]


군대가 도덕적 악이기 때문에 거부한다는 주장에는 여러가지로 무리가 많으며, 이는 종교적인 이유로 대체복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도덕은 보편성을 요구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는 식의 불공평한 명제는 도덕적 원리가 되지 못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병역을 거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거나 병역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이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도덕적 명제가 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최소한 보편성과 일관성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정상적으로 병역의 의무를 수행한다는 전제 하에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 빠져야겠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도덕적 명제가 될 수 없다. 심지어 군대 해체가 목표라는 사람들도 동시에 "몇 명 빠진다고 국방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다수의 사람들이 병역을 거부하면 국방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되며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열외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먼 장래의 목표는 군대 해체라고 하지만, 그 먼 미래의 이상이 현재의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군대가 필요없는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현재에 병역 거부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를 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환자는 돈을 내지 않더라도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 보자. 이것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이와는 별개로 최소한 보편성과 일관성은 있으므로 일단 규범적인 종류의 명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모든 환자가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어렵다는 점은 동의하겠다. 대신 궁극적으로 모든 환자들이 무료로 진료를 받게 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우선 '모든 사람들이 무료로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리들'만은 공짜로 진료를 받게 해 달라"고 주장한다면 보편성과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도덕적인 명제로 간주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이 국방의 의무를 면제받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만은 면제받게 해 달라"는 것은 도덕적인 주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군대가 절대악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병제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병역이 절대악이기 때문에 내가 하면 안 된다면, 남들도 마찬가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군대에서 무기를 드는 것이 도덕적 악이라면 남들이 군대에서 무기를 드는 것도 도덕적 악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모병제 등을 주장하면서 그런 악행으로 내 손을 더럽히면 안 되니까 다른 사람에게 대신 악을 행하도록 하자는 주장이 과연 도덕적 명제일 수 있을까? 내 손으로 직접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일 수는 있으나 도덕적-규범적 명제는 될 수 없다. 이에 대해서 현재의 상태보다는 나으니 진일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나는 악행에서 빠져나가고 대신 다른 사람이 하도록 하자는 것은 위선에 불과하므로 도덕적으로 오히려 퇴보했으면 퇴보했지 진일보한 상황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군대를 해체하는 것이라면 대조적으로 군대 해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전투병이 되는 것을 기피하고 대체복무를 선호하게 되어 군대가 무너지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목적이 군대를 해체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놀랍게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불안감이 타당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상당수의 병역거부자들은 국가에 대한 병역의 의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집총을 면제해주면 일반적인 군생활보다 더 길고 힘든 복무를 감수해서라도 국가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고 애국심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군대를 해체하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병역거부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게 된다.

즉, 양심적 병역거부가 도덕적 명제라는 주장은 앞뒤도 맞지 않으며, 그러한 주장하에서는 대체복무와 같은 대안이 오히려 정당성을 잃게 된다. 도덕적 죄악과 종교적 금기는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적 금기를 피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일반적인 현상이다. 유태인들이 비유태인 하녀를 고용해서 안식일에 일을 시킨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도덕적 죄악을 범할 수 없다면서 도덕관념이 희박한 다른 사람을 시켜서 악행을 벌이게 한다면 이는 위선일 뿐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이 될 수 없다. 내가 직접 손을 더럽히면서 악행을 저지를 수 없으니 대신 남에게 맡기겠다는 것은 도덕적 문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이는 종교적 금기에서 나온 주장을 무리하게 도덕이라고 각색하는 과정에서 나온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규정에 대한 위헌제청 사건 (헌재 2004. 8. 26. 2002헌가1)에서도 , 합헌의견 중 별개의견의 논거는 이 문단에서 설명하는 논지와 취지가 거의 같다.

"보편타당성의 내용은 윤리의 핵심 명제인 인(仁)과 의(義), 두가지로 집약되며 적어도 보편타당성의 획득가능성과 형성의 진지함을 가진 양심이라야 헌법상 보호를 받으며, 보편타당성이 없을 때에는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 불의한 침략전쟁을 방어하기 위하여 집총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의심스러운 행위로서 보편타당성을 가진 양심의 소리라고 인정하기 어렵다." (재판관 권성)[18]

"양심을 이유로 한 병역거부자의 양심이라는 것 자체가 일관성 및 보편성을 결한 이율배반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이어서 헌법의 보호대상인 양심에 포함될 수 있는지 자체가 문제될 수 있고 적어도 이를 우리 공동체를 규율하는 정의의 한 규준으로 수용하기 어렵다 할 것이므로 양심을 이유로 한 병역거부자에 대한 형벌의 부과가 정의의 외형적 한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없다." (재판관 이상경)

그러나 합헌의견 중 다수의견은 양심의 자유는 성질상 꼭 일관성, 보편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 두 재판관의 별개의견이 헌법재판소가 공식적으로 취한 견해라고 볼 수는 없다.


3.7.2. 허용론[편집]


양심적 병역거부를 병역에서 소수의 사람들만 빠져야겠다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를 병역기피의 연장선 상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역거부라는 점이 중요하다. 병역거부는 애초에 병역을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를 거부하겠다는 것이기 때문.

또한 전쟁에 대해 더 강한 물리력을 내세우는 논리도 그 자체로 맞는 것은 아니다. 전쟁은 여건이 충족되면 상호간의 물리력과는 무관하게 발생한다고 볼 수도 있다. 더 강한 힘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가진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상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상식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실현해버리기에 발생한 것이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제1차세계대전이 왜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면 명확하다. "힘의 균형을 통한 평화"라는 논리로 유럽 각국이 군비증강에 힘을 썼으나, 그 결과는 인류역사에 유례가 없는 대량학살극이었다.

군복무가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의 군복무에 침묵하는 병역거부자들의 입장이 비일관적이라는 비판도 합리적이지 못하다. 누군가 특정한 도덕관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그 도덕관을 타인에게 강요할 의무는 없다. 예를들어, 채식주의자들 중 일부 극단적 부류를 제외하면 타인에게 채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들이 육식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에게 채식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의 입장에 일관성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오히려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도덕관을 강요하지 않는게 시민의 미덕이다. 서유럽 국가에서 비무슬림들에게 샤리아법을 강요하는 무슬림들이 현지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생각해보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혹은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다 제각각이다. 그 중 어떤 의견들은 현실성이 없거나 정합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데 가장 다수인 여호와의 증인은, 현존하는 모든 국가의 국가통치제도에 복무하는 것을 종교적인 이유로 거부하며, 이는 평화주의나 반전주의와는 궤가 다르며, 이들의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일은 종교적인 신념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 이외에 합리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다.


3.8. 안보 무임승차[편집]




3.8.1. 처벌론[편집]


양심에 따라 정당한 복무자의 희생으로 만들어낸 평화를 병역거부자가 양심상 누릴 수 있느냐는 비판이 있다. 개인의 신념을 일방적으로 인정해달라면서 현실적인 양심적 행동으로 법을 지키면서 군복무를 한 사람과 동일한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어쨌든 민주주의와 법치는 개개인의 양심을 존중하지만, 행동의 의도 뿐만 아니라 행동과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것이 원칙이다. 더군다나 병역거부자들이 주장하는 반전평화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 생명존중 같은 주장은 병역거부와 일단 직접적 연관이 있는지부터 논란이고, 그런 가치가 물론 민주주의에서 수용될 수는 있으나 병역거부로 달성할지의 여부는 거부자들의 가상이나 공상 또는 막연히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일 뿐으로 어떠한 증거나 결과, 합리적 판단과는 거리가 있다.

반면 병역복무자들의 복무의 결과는 이미 실존한다. 아직까지 각 나라들은 병역거부자들의 시각상 피 묻은 손으로 평화를 만들어내고 있고, 자신들이 부정하는 행위로 만들어진 산물을 누리는 것 또한 양심의 일관성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밑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그런거 바란 적 없다는 식으로 서술 하는데 바란 적이 있건 없건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또한 안보가 당연한 권리라는 말도 결국 국민에 대한 국가의 약속이기에 국가가 위기에 처하거나 사라지면 그대로 끝이고, 이것이 국방의 의무가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인 이유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는 인권과 기본권 정도인데 이마저도 그것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국방에는 인력이 필요하고, 국방부와 군대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평상시에도 수천만 국민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아가며 존재하는 이유도 그 안보를 지키기 위함이다. 말로만 떠든다고 성립하는 쉽고 간편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를 갈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요건이 갖춰져 있는데도 이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타인의 희생에 기대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것을 무임승차라고 부른다.

찬성론에서 피 묻은 안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충분히 피 묻은 안보를 가지고 있다. 1차, 2차 연평해전 / 천안함 사태 / 연평도 포격 등 눈 앞에서 병사들과 민간인이 죽어가고 현재까지 고통 받는 사람들이 바로 피로 만들어진 안보이며, 군대가 있는 이유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대한 거부감은 모병제라면 큰 문제가 없다. 애당초 모병제는 선택적으로 군대가 가지만, 모병제로 가면 대다수 가난한 이들이 대신 들어가는 곳이다. 용병이 바로 돈으로 팔려가 피로 안보를 지키는 이들이며, 용병으로 이름을 날리는 스위스 용병 역시 돈이 이유이며, 쿠르크 용병과 외인부대 역시 경제적 이유가 절대적이다.[19]

찬성론에서 여성과 장애인을 예로 들었는데 이는 악담에 불과하다. 여성도 군대에 입대할 수 있으며, 역사에서 여성을 군대로 편입한 것은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 할 때의 일이다. 대표적인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여성도 징병을 당하며 1차, 2차 세계 대전 당시 여성들도 후방에서 군대에서 무기를 생산했으며, 나중에 이를 바탕으로 여성의 권리가 높아지는 결과도 낳았다.

그리고 장애인들을 들먹이는 것은 악담 중의 악담이다.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고, 몸이 불편하고, 말을 하기 어려운 혹은 정신이 불편한 사람들이 작전과 무기 사용을 능숙하게 할 리 없다.[20] 이를 안보 무임 승차에 연계 짓는 것은 장애인들의 특수성을 무시하며 상처를 주는 발언이다.그리고 이 분들이 과연 장애인이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는 것과 비장애인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을 더 원하겠는가.

국방의 의무가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안보가 국민의 권리인 것은 슬프게도 군대가 있어야 하는데 군대는 대신 죽어야 하는 임무를 뛰기 때문이다. 사람은 동물이며 역사를 보면 전쟁에서 인간이 벌이는 짓을 보면 알 수 있다. 야만성과 폭력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전쟁을 막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예를 보면 모병제 시행으로 군, 자위대에 입대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렇듯 군대는 가기 싫은 곳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북한이라는 적이 있고 이 때문에 강제적인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정작 군대를 가지 않는다고 하면 색안경을 보면서 또 부러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나오는 문제이다. 단순히 윤리와 법의 문제가 아니라 군대의 강제적으로 가야하고 혹은 그것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이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는 병역 회피로 보여지기 충분하다.

일반인이 보기에 과연 양심적이라고 했을 때, 자신들의 양심이 없기에 군대를 간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꼴이 된다. 원치 않는 군대를 가야 하는데 누군가는 양심을 말하며 가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하는 행동의 정당성과 명분이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군대라는 곳이 가고 싶지 않는 곳이며 동시에 자살과 사고 그리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도 문제다. 자신의 중요한 시점에서 희생되어야 하는 시간과 미미한 보상 그리고 죽음을 담보로 해야 하는 근무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계속 양심적 거부에 대한 반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의 대한 해결책은 될 수 없지만, 충분한 예시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이다. 그는 병역 거부를 해 감옥에 갔다왔다. 그런 그가 한 일은 병사들의 인권을 향상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2017년에 일어난 박찬주 대장의 갑질 사건에 그의 군인권센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곳을 찾아간 사람은 병역을 마친 예비역들이다. 이런 점에서 징병제를 실시하는 국가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받아들이기 위함은 매우 간단하다.

임태훈 소장처럼 병역 거부를 한 이들도 사회의 충분한 도움과 고난을 함께 하고 있음을 알리면 쉽게 해결 될 문제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양심적 병역 거부는 군대를 억지로 가야하는 이들 혹은 군인들에게는 단순 도피처로 보일 뿐 이다. 이는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21]

허용론은 극단적으로 히틀러의 예를 들고 있지만, 처벌론은 단순 처벌이 아니라 왜 양심적 병역거부의 대한 반발이 나왔는지 서술하고 있다. 모병제라면 양심적 병역거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왜냐면 가기 싫은 사람은 대체로 군대의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징병제를 고수하고 있고, 병력을 줄여서라도 징병제를 유지할 계획이다. 문제는 군대의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야 하는 상황. 그것에 비해 미미한 보상 그리고 고위층의 병역비리가 한 몫 한다. 위의 서술한 용병은 군대의 가기 싫은 이유와 군대라는 본질을 말하고 있다. 즉 어느 정도 여유만 있으면 군대 따위는 안간다 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훈련소를 갔다 오는 것을 제외하면 얼마든지 대체복무할 길은 남아 있다.

허용론에서 '안보는 모두가 누릴 당연한 권리'라고 하였으나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그 당연한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맞바꾸는 무수한 희생을 치뤄왔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결과물을 내기 위해 수많은 과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건강 상, 법적규정 상 의무대상에 속하는 자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안보 확보 노력에서 손을 놓거나 노력을 들이지 않고 혜택만 받겠다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당연한 권리라고 하여 무작정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장 의식주라는 기본권리만 해도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않은가.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도 있는데 바로 '그럼 힘든 훈련을 하고 총을 쏘는 살인행위를 배우는 자신은 무엇이 되는 것인가' 이다. 현실적으로 원치 않게 끌려와 총을 맞고 폭침을 당하고 지뢰에 공격받아 신체가 훼손되어 장애인이 된 장병들에겐, 양심을 말하며 하는 병역거부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다. 그럼 자신이 하는 행위는 비양심 행위냐고 비쳐지기 때문이다.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병역비리와 궤를 달리하는 것은 알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생명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왕좌의 게임 작가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이지만 사지를 오가며 환자를 구해 훈장까지 받은 일이 있을 만큼.

국가가 국민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국가가 무엇인지부터 생각을 해야한다. 변호인(영화)에서도 나오듯이 국가란 국민이며 그래서 그 당연하다는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가기싫어도 군대에 가는 것이다. '국가가 당연히 해야되는 것이니 나는 모르겠고 남의 희생 위에 발 뻗고 눕겠다'는 식의 논리가 과연 옳은지는 판단에 맡긴다.

또한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들먹이면서 이 사람들은 뭐냐고 하는데 여러 효율성 측면이나 실질적으로 임무 수행이 불가능해서 가는 것이랑 가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걸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들먹이는 것은 논점을 흐리려고 물 타는 짓이나 다름없다.

3.8.2. 허용론[편집]


현대 민주국가에서 안보는 사회구성원으로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지, 누군가가 베풀어주는 '은혜'가 아니다. 국가는 PMC나 사설경호업체가 아니다. 상당수의 병역거부 비판론자들은 안보를 특권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사실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은 모두 한국이 제공하는 안보를 누릴 권리가 있다. 합법적으로 한국에 관광, 취업, 이민 목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도 한국의 경찰, 소방, 군 당국의 보호를 받고있으며, 심지어 불법체류자들도 적절한 절차를 거쳐 추방되기 전까지는 한국의 보호아래에 있다.

추가로, 한국인들은 '안보'라는 단어를 들으면 외국 군대의 침략을 군대를 동원해 막아내는 것만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것은 외국 군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염병 발생, 지진, 태풍 등 각종 재난, 재해 상황도 충분히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절대 다수인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경우, 군복무가 아니라면 그것보다 더 길고 힘든 일도 하겠다는 입장이다.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2017년 포항 지진, 조류독감, 구제역 사태 등을 봤을 때 한국도 결코 재난, 재해로부터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병역거부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재난, 재해 현장 최전선에서 근무하게끔 한다면, 이들을 무작정 안보 무임승차자라고 비난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들은 총만 안들었을 뿐이지 나름의 방식으로 국가안보에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일괄적으로 교도소에 보내는 작금의 제도 자체가 이들이 국가안보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박탈하고, 강제로 안보 무임승차자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깊이있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게다가, 처벌 찬성론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 옹호론자들이 여성, 장애인들을 향해 악담을 퍼붓는다고 했다. 그러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므로 안보 무임승차자이다' 라고 주장한 것은 처벌 찬성론자들이다. 그리고 저들은 반대론자들을 향해서 여성, 장애인 운운하며 악담을 퍼붓는다고 주장할 뿐, 그래서 도대체 군복무를 하지 않는 여성, 장애인들은 무슨 논리적인 근거로 그들이 수행하지 않은 의무에 대해 안보라는 권리를 누리는지 설명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안보 무임승차'라는 논지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여성이나 장애인이 안보 무임승차자라고 공격하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주장의 모순을 반박하기 위한 반례로서 제시한 것 뿐이다.

또한, 이 사례에서 전과자들을 예시로 들 수 있다. 1년 6개월 이상의 형을 받으면 자동으로 현역 및 사회복무요원 의무가 소멸되고 전시근로역에 편입되어 사실상 면제나 다름없게 되고(신체검사 5급이 엄히 말해서 전시근로역에 속하지만, 일반적으로는 6급과 합쳐 면제로 받아들여진다), 6년 이상의 형을 받으면 완전히 군적에서 말소되어 어떠한 병역 의무도 부과하지 않는다. 즉 이들은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데, 대한민국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이들 또한 당연히 정부의 보호 대상 하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들은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보호를 받는가? 귀화자들 또한 병역이 의무로 부과되지 않는데 귀화자들은 무슨 근거로 수행하지 않은 의무에 대한 안보라는 권리를 보장받는가?

그리고 처벌론자의 논리대로라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처벌을 그만두고 대체복무를 인정하라는 UN 인권위원회의 권고는 '안보 무임승차'를 조장하는 꼴이 되고, 실제로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독일, 이스라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같은 나라들은 '안보 무임승차'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이상한 나라라는 결론이 나온다. 처벌론자들에 따르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21세기 현대의 독일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사형시키던 나치 독일이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3.8.2.1. 타국과의 비교에 대한 반론[편집]

현 시점에서 저 위 나라중 안보에 위협이 심한 나라는 이스라엘 뿐이다. 이외의 나라들은 전쟁위협이 없어 인구대비 군인 비중이 매우 낮고, 그에 대한 사회적 불만도 없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된 상태의 국가들이다. 그리고 일종의 '병영국가'화 되어 병역을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사회적 차별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심하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외국도 다 하는건데 한국은 왜 불가능한데?" 물론 국가에서 여건만 된다면 국제 기준에 맞추는 게 맞다. 그런데 할 상황도 안되는 나라에서 국제 기준을 무리하게 맞출 필요가 있는가? 나중에 통일되면 몰라도 당장 북한이라는 확실한 적이 있어 내일 전쟁나도 이상하지 않은 한국에서, 더구나 징집가능 인구가 줄어 병력도 모자라는 나라에서 형평성을 고려한 현실적인 방안까지 징벌적이라며 거부하며 무조건적으로 징병제에 비해 위험성이 극도로 낮아 형평성에 객관적인 문제가 있는 평시 유럽 선진국들의 방식[22]만을 고집하는 행위는 안보 무임승차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리고 각종 병역특례 대상자들은 사회복무요원같이 몸 어디가 아픈 곳이 있는 사람이거나 기술이 있어 그것으로 국방의 의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면제자의 경우도 아파서 가는 사람들이기때문에 가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의무면에서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반대하거나 최소한 서유럽식의 현행 제도에 부정적인 사람 중에 여성징병제를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성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안보 무임승차를 한다는 비판은 어제오늘 나온 말이 결코 아니라, 양심적 병역거부의 '양'자도 꺼내지 못하던 2000년대 초부터 나오던 담론이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허나 국민의 4대 의무에 엄연히 국방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당연한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이다.


3.9.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국적 박탈론[편집]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군 복무자의 의무복무 서비스가 바탕이 된 안보 서비스에 무임승차하고 있으므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국적 박탈 후 추방, 입국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해당 기사 댓글 참조

3.9.1. 문제점[편집]


자국민의 국적을 박탈(=가족관계등록부 직권폐쇄)하고 국외로 추방한 다음 영원히 입국 금지하는 것은 국제법상 불법이다. 참고로 스티브 유는 미국 국적자이기 때문에 입국 금지 처분을 받았어도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북한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국민을 국외로 추방한 사례(김평일 등)가 있고, 또한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테러 혐의가 있는 자국민의 국적을 박탈하고 국외로 추방하는 것은 물론 입국을 금지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예외 사례다. 그 서슬퍼런 군사정권조차 병역 거부를 명분삼아 자국민의 국적을 박탈시킨 다음 국외로 적극 추방하고 입국을 금지시키는 정책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달리 말한다면 병무청은 국적/출입국이나 가족관계등록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말이다[23]. 또 국가가 병역기피를 사유로 하여 국민의 가족관계등록부를 강제로 폐쇄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조항은 그 어디에도 없다. 호적 시절에도 병역기피를 사유로 강제로 제적할 수 있게 하는 법률조항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 아니꼽다면 병무청이 병역 기피자의 가족관계등록부를 직권 폐쇄[24]하고 그 자에게 강제퇴거를 명령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부여하도록 입법청원해야 할 것이다.[25]국적법 등도 이에 맞추어 정비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작 수많은 군필자들의 바람대로 병역거부자들의 국적을 박탈하고, 외국으로 내쫓으면 그들에겐 이득이다. 이러면 대한민국 국적의 미필자가 해외에서 난민 신청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병역 거부에 따라 국내에서 정치적, 사회적 박해를 받는" 교과서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국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는 정확히 난민의 기준에 부합한다. 이러면 유럽이나 북미권에서 한국인 병역거부 난민들에 대해 까다로운 심사가 대폭 생략되고, 난민 심사를 통과할 확률이 급격히 높아지기 때문에 병역거부자들의 엑소더스가 벌어질 지도 모른다.[26] 아무리 국제기구의 권고를 쿨하게 씹는 대한민국이라지만, 하늘을 찌르는 국민적 요구와는 별도로 국가가 이런 적극적인 조치를 망설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만약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국적을 박탈하여 불법체류자로 만들고, 종국에는 국외로 추방하도록 하는 법률이 제정된다면, 법률의 제정 취지와는 달리 법률 시행일 이후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하는 방법으로 말로만 외쳤던 헬조선 탈출을 결행(決行)하는 이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실제로 병역거부를 사유로 난민 신청이 성공한 사례가 알려진 이후, 병역거부 난민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한국의 현행 헌법 상으로는 국적 박탈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국은 특정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국민으로 인정하는 나라가 아니라, 국내에서 출생한 한국계 혈통의 사람에게 국적을 부여한다.[27] 그리고 재외동포들에게 출입국시 우대를 부여하는 등 생각보다 한국은 순혈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민족주의적 개념이 강하다. 이런 체계 하에서 국적을 박탈하는 법을 만들려면 현행 헌법 체계 자체를 아예 다 뜯어고쳐야 하고, 누구나 자연법에 의거하여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공화정의 이념과도 맞지 않다. 다시 말해 국적 박탈에 관한 법을 만든다면 당장의 국민 여론은 충족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곧장 위헌으로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28][29]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81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81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685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685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02-05 16:22:41에 나무위키 양심적 병역거부/논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The Living Instrument Doctrine, 현시대 민주주의 국가들의 시대정신에 맞게 인권조약을 해석하여야 한다는 이론으로서, 그렇지 않고 제정 당시의 문헌에만 근거하여 해석한다면 인권의 진전을 위해 수십 년 전에 제정된 국제인권규약(국내법과 달리 그 개정이 쉽지도 않다)이 오히려 현시대 인권 증진의 발목을 부여잡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고려하여 유럽인권재판소 등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론이다.[2] 같은 동아시아 언어인 일본어, 중국어로도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한다. 일본어로는 良心的兵役拒否, 중국어로는 良心拒服兵役者라고 표기한다. 두 언어 모두 良心(양심)이라는 한자어를 포함하고 있다.[3] 영어는 이러한 주관적/객관적 개념을 한국어보다 더 명확히 구분한다. 심지어 개념이라는 그 용어 자체도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인 'concept'와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개념인 'conception'을 구분한다.[4] 여기서부터 이미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예를 들어, '학생이 양심적이다.'와 '양심적인 학생'은 완전히 다른 말이다. 전자는 학생 전체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후자는 학생 중에서 양심적인 사람을 뜻한다. 즉,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이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양심적이다.'가 될 수 없는 것.[5] 2002헌가1.[6] 애초에 군대를 안가는게 양심적인 것이라면 군필자들은 당연히 화가 난다.[7] 만약 실제로 사람을 죽여야 할 일이 일어난다면 이 문서를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8] 통일 당시 소련과의 합의가 병력 37만 이내로 감축, 핵무기 보유 금지, 나토군 동독지역 주둔 금지였는데 그보다 더 심하게 감축했다.[9] 즉 군인은 일단 전쟁이 터졌다 하면 그 어떤 직분을 들이댄들 비할 데 없이 압도적으로 위험한 입장이며(특히 전투부대 소속일 경우) 이 경우에는 이를 대체할 더 위험하고 힘든 요건이라는 것 자체가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 애당초 군인의 존재 의의 자체가 이런 경우를 예비하는 것이기에 평시의 군생활만을 저울에 올려놓는 것은 부당하다 할 수 있다. 전시에는 민간인보다도 더 안전한 환경에 있는 군인들은 극소수인데, 이들은 B1이나 탱고 같은 최고 등급 지하벙커에 짱박혀 지내는 군부 최고위 장성들(합참의장 등)과 그들을 벙커 안에서 보좌하는 일부 장교, 부사관, 병사들이다. 나머지 기행부대 소속 군인들은 전투부대 소속 군인들과 달리 적진 돌격을 강요받진 않는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 있긴 하나, 그들도 미사일 공격, 후방침투 특작부대 등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다.[10] 애초에 선진국이라고 할 만한 나라 중 현재 징병제 하는 나라 자체가 별로 없다. 독일, 영국 등 과거에 징병제와 함께 대체복무제를 시행했던 국가들이 대부분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2011년 기준 징병제를 실시하는 국가는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정도.[11] 이 때문에 신체등급이 낮은 인원을 강제로 차출하는 한국의 사회복무요원 제도는 국제 노동 기구로부터 강제노동으로 보여지고 있다.[12] 헌법상으로 전시 징병제가 존재하지 않으며, 곧 위헌이다.[13] 예외적으로 캐나다는 전시 징집마저도 불가능하나[12] 영연방의 일원이고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국토가 연결되어 사실상 안보를 외주하고 있기에 단순 비교는 어렵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일 대한민국과 혈맹이고 사실상 중국 인민해방군이 한국의 안보를 책임지는 형편인 것이다. 그리고 막상 일이 벌어졌을 때 개헌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14] 한국법제연구원에서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한 2007년 보고서인 '민간사업체를 활용한 지뢰제거 사업에 관한 법률 제정에 관한 연구'[15] 급조 폭발물(IED)을 처리하는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지뢰 제거는 어떤 상황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한적한 날에 안전이 다 확보된 평시에만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만 봐도 작전 중에 지뢰가 터진 것이고, 병사들이 다친 하사들을 부축하면서도 총으로 엄호를 해야 했다. 영화로는 허트 로커 등에 잘 표현되어 있다.[16] 병역거부 대체 복무자들에게 지뢰탐지기와 보호장구만 착용하게 한다 해도, 만약 상황 발생시 적 총격이 쏟아진다면 이들이 자기 방어를 해야 한다. 그 때도 총 들기 싫다며 무장을 안한다면 주변 엄호병력이 사라질 경우 이들의 신세가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17] War Resistence International. 전쟁 반대와 징병거부를 위해 만들어진 국제 단체. 참고로 제창자는 버트런드 러셀도 있었다.[라지만] 양심적 병역거부 자체가 병역은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기 때문에 현역병 자체를 생각없이 군대가는 사람, 비인간적인 행동의 잠재적 묵인자로 보는 의견이 쟁점마다 언급되는 편이다. 물론 대다수는 그들의 양심은 자신의 양심과 다르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는다.[18] 권성 재판관은 재임 기간 내내 유교적 관점의 판결문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호주제 위헌심판 당시에도 "평등의 잣대로 우리 전통문화를 함부로 재단해 전통 가족문화가 송두리째 부정되고 해체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라며 합헌 의견을 낸 바 있다. 그의 이런 성향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적 관점의 판결을 내리는게 정당하냐는 비판을 받았었다. 그나마 그 잘난 유교적 관점이 일관적이었으면 또 모르겠는데, 막상 노무현 탄핵 심판 사건에서는 "국회가 탄핵 했으니 헌법재판소는 이를 인정해야한다"며, 유교적 잣대를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는 비일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19] 모병제로 유명한 미국에서도 스탠리 매크리스털 장군이 징병제 부활을 이야기 했는데, 이유는 모병제로 뽑은 군인들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자살율이 높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명장으로 이름 높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모병제의 모순이 잘 드러난다.[20]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을 관심병사로 운영하는 것. 그리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군대의 편입시키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21] 단적으로 로마 군인들이 군복무 하면서 담보로 받은 것이 시민권이며 동시에 최악의 형벌이 평생 군복무였다고 한다. 칸나이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병사들에게 내린 형벌이 평생 군복무였다고 한다.[22] 이 경우도 전시에는 평시에 비해 훨씬 위험하거나 군과 연관성이 강한 임무를 수행하게 될 수 있다.[23]기사 말미에 국적에 관한 병무청의 입장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병무청은 국방부 소속이라서 이 이슈에 관해 아무런 상관이 없다.[24] 가족관계등록부가 폐쇄되어야 국적이 박탈된다(이 둘의 관계는 미묘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와 비슷하다고 한다). 폐쇄 사유로 병역기피에 따른 직권폐쇄가 들어가면 될 것이다.[25] 법률로 제정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헌성 시비나 국제법과의 충돌 문제는 논외로 한다.[26] 게다가 한국 정부는 "군대를 안 가도 되는" 제도가 생겨나면 정말 "아무도 안 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은 병역 미필자가 해외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다. 병역법에는 만 25세 이상의 미필자는 출국할 때 허가를 받도록 되어있으며, 여권법 시행령에는 만 25세 이상의 미필자들에게 여권 발급을 제한하도록 설계되었다. 심지어 한국은 국적법에 따르면 아예 가족이 전부 다 이민가지 않는 이상 국적 포기가 불가능하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해외에 나가서 해당 국가에서 고등교육을 마치고 정규직에 채용되어야 납세 실적이 쌓여서 새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데, 아직 경력이 없는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정착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마저도 25세에 한국 정부에서 여권을 만료시키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합법적인 이민이 불가능하다. 심지어 병무청의 병역기피자 신상공개가 2017년부터 시작된 이후로는, 아예 국가가 나서서 끝까지 추적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추노[27] 종종 사람들은 이주노동자 자녀들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부모 혈통 중 하나가 한국인이 아닐 경우, 부모의 국적을 따르도록 되어있다. # 영토 내에서 출산하면 자동으로 국적을 취득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혈통에 따른 배타성이 생각보다 강한 편이다(하지만 요즘은 이에 대해 연좌제라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28] 법률 상으로 한국 국적을 잃는 것을 "국적 이탈"이라고 표현한할 정도로, 한국인에게 국적은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부여된 것에 가깝다.[29] 비슷한 예로, 6.3 항쟁의 주동자였고 60년대 내내 박정희 반대 투쟁을 했던 김중태(1940)씨의 경우, 별의 별 수를 써도 말을 안듣자 중앙정보부에서 1969년에 비행기표와 여권을 강제로 쥐어 줘서 억지로 출국시켜 버렸다.# 그래도 한국 국적을 박탈하지는 못했다. 김형욱이 키배에서 지는 바람에 관리자 권한을 남용하여 한국 서버에서 김중태씨를 차단 했다 카더라. 김중태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