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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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중림동 약현성당
中林洞 藥峴聖堂 | Yakhyun Catholic Church
기본 정보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47-1 (중림동)
종교
가톨릭
교구
서울관구 서울대교구
지위
성당(Church)
주임사제
김경하 베네딕토 신부(2022 ~ )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건축 역사
건축가
외젠 코스트 신부
정초
1891년 10월 27일
준공
1892년 11월 6일
축성
1893년 4월 23일
건축 정보
양식
네오 고딕(고딕 리바이벌)
면적
1,309㎡
전체 길이
32 m
전체 너비
12 m
종탑 높이
26 m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252호
서울 약현성당
서울 藥峴聖堂
Yakhyeon Catholic Church, Seoul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천주교 / 성당
지정일자
1977년 11월 22일
시대
조선시대, 1892년
소유자
(소유단체)

(재)천주교서울대교구유지재단
관리자
(관리단체)

약현성당


파일:서울_약현성당_배면_전경_(촬영년도___2015년).jpg

약현성당 본당[1]

파일:서울_약현성당_측면_출입구_(촬영년도___2015년).jpg

약현성당 측면 출입구[2]

파일:서울_약현성당_배면_(촬영년도___2015년).jpg

약현성당 배면[3]
1. 개요
2. 건축적 의의
3. 한반도 최초의 사제서품식
4. 방화사건
5. 기타



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에 위치한 성당.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성당으로, 사적 제252호(1977년 11월 22일 지정)이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에서도 천주교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성당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많은 신앙 선조들이 순교한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을 매입해 약현성당(중림동 성당)을 지었다. 주보성인나자렛의 성 요셉이다.[4]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랑스인 외젠 코스트 신부(Eugene-Jean-Georges Coste, 파리 외방전교회)가 명동성당의 설계의 핵심을 담아 1891년 10월 건축을 시작, 착공 1년 만인 1892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벽돌집 성당이 준공되었으며, 1893년 4월 축성식을 가졌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이 1887년 5월 부지 매입을 마치고, 그 해 겨울부터 부지 정지 작업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1892년 5월에 기공식, 1898년 5월 축성식을 가져 축성 순서로만 보면 약현성당이 명동성당에 앞선다. 당시에는 명동성당이 한양도성 내의 사목, 약현성당이 한양도성 외의 사목을 분담하였다. 즉, 현재 서울대교구 내 본당 대부분은 명동성당이 아닌 약현성당에서 갈라져 나온 본당들이다.

가까이 가톨릭출판사, 서소문 성지역사 박물관, 가톨릭대학교 음악대학원 (최양업홀)이 자리잡고 있다.

교황청으로부터 아시아 지역 최초 국제 순례지로 승인 (2018년 9월 14일) 받은 천주교 서울 순례길 생명의 길(2코스)의 도착지이며, 일치의 길(3코스) 출발지이다.

2. 건축적 의의[편집]



파일:yakhyeontopsmall.jpg


파일:yh01.jpg

약현성당 종탑
외부
파일:yh02.jpg }}}
내부
한국 천주교 입장에서는 명동성당 짓기 전, 첫 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지어보는 경험이 되었다. 이유는 고딕 양식 건축물을 지어본 적 없는 한국의 인부, 중국에서 수입해 온 서양식 벽돌 및 기타 자재 등으로 한반도에 고딕양식 건축물을 지어본 사례가 전무했기 때문에 약현성당을 지으며 많은 도전적 시도란 것.

실제 고딕 양식의 건축은 건축가와 인부의 호흡도 중요하고 건축 자체가 어려운 경향이 있다. 약현성당의 경험이 있음에도 규모가 더 큰 명동성당을 지을 때 붕괴사고가 발생하여 인부가 사망한 사건이 있을 정도로 고딕양식 건축물 짓기는 어렵고 까다롭다.[5] 그렇기에 약현성당 건축 경험은 바로 이어진 명동성당 건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어 1905년에는 종탑 꼭대기에 첨탑을 올렸고, 1921년에는 성당 내부 칸막이를 철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하였다. 1974년부터 대대적인 해체 복원공사를 실시하여 1977년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으나 아래 항목에 나온 바와 같이 방화로 소실되어 1년 6개월의 재복원공사 끝에 2000년 9월 건립 당시 원형에 더 가깝게 복구하여 다시 축성식을 거행했다.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은 1991년에는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1999년에 서소문 공원 안에 1984년에 건립되었다가 1997년 철거 당한 순교자 현양탑을 새로 제작하여 세웠다. 2009년 9월 13일에는 기존의 피정의 집으로 쓰던 곳을 증개축하여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약현성당의 건축과 역사적 의의 (tbs 〈시민의 방송〉 제작)


3. 한반도 최초의 사제서품식[편집]




강도영 마르코 신부의 삶을 다룬 CPBC 뉴스
1896년 4월 26일 거행. 강도영 마르코 신부(1929년 3월 12일 선종),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1943년 10월 23일 선종),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1903년 9월 19일 선종)의 사제서품식.

4. 방화사건[편집]


1998년 "예수님은 놔두고 성모 마리아만 칭송[6][7] 해서 화가 났다"는 얼토당토 않은 개소리 무식하면 가만히라도 있지 주장을 한 술취한 개신교 신자 장모 씨에 의해 방화, 전소되었다. 그러나 한반도 최초의 천주교 성당이라는 역사성과 성지를 관할하고 있는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에 원형 그대로 복원을 결정하고 2000년 복원을 마쳤다. 약현 성당 방화 사건 링크 참고. 약현성당 화재 MBC뉴스 보도 참고.

5. 기타[편집]


성당이 위치한 중림동은 노령인구가 많기에 노인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렇기에 자연히 과거 전통적인 신앙 태도를 지키는 분위기가 강하다.

약현성당 다니는 여성 신자의 미사보 착용 비율이 엄청나게 높고, 주교좌성당명동성당도 없앤 장궤틀[8]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 장궤틀을 실제 미사 중 사용한다. 사실 이렇게 해야 마땅하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전례 중 장궤하는 순서 때 장궤를 하지 않는 다른 성당이 명백히 원칙을 어긴 것이다. 역시 등록문화재이자 한국에 지어진 세번째 성당인 혜화동 성당에도 장궤틀이 있으며 실제 미사 때 사용 중이다.

아울러 일반적인 동네 성당의 경우 주일 청년미사는 일렉기타와 드럼을 치며 생활성가를 부르는데, 약현성당에서는 그렇지 않다. 성당 분위기 자체가 경건해서인지 2017년 1월에 들어선 청년성가대의 청년들이 자청하여 라틴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청년미사에서는 젊은 이들이 일렉기타와 드럼을 치며 생활성가를 부르고 심지어 성탄대축일 미사 때는 캐롤까지 부르는 분위기인데, 이 성당은 청년들이 라틴어 성가를 자청하여 부르니 이색적으로도 느껴진다.

기타 혼인성사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약현성당은 본당이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은 물론 공간의 단아함과 고즈넉한 꾸밈새로 신혼부부들이 주목하는 것. 이에 많은 혼인성사 신청이 몰려 1년에 한번 추첨을 통해 선정할 정도고, 영화나 드라마 촬영도 자주 이루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2016년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함에 따라 천주교 서울대교구명동성당, 약현성당, 새남터 순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 4곳에 성문을 마련했다. 약현성당의 경우, 성당의 북문을 희년의 성문으로 2016년 2월 23일 개문해 동년 11월 13일 폐문했다. 성문으로 사용되었던 북문은 현재 폐쇄된 상태이다.

또한 인근에는 성요셉아파트도 존재하며 이 아파트는 1970년에 완공되어 이듬해에 입주를 시작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이다.

드라마 열혈사제에 나오는 구담성당이 바로 이 약현성당이다. 또한 드라마 펜트하우스 시리즈의 엔딩 때 천서진-하은별 모녀의 서사가 마무리 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서은제일성당으로 나왔다. 또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Part 2에서도 등장했다.

서울대교구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196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 첫 보좌신부로 부임한 성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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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4] 6년 후에 서울대교구주교좌성당으로 세워진 명동성당성모 마리아를 주보성인으로 지정했다. 이는 서울을 대표하는 이들 두 성당을 예수의 보호자인 두 성인에게 봉헌했음을 뜻한다.[5] 고딕 양식은 다른 건축 양식과 달리 건축물 하중을 역산하여 설계해야 한다. 보통의 건축물은 지면에서부터 튼튼하게 계산하여 천정을 떠받히는 식으로 설계하지만, 반대로 고딕 양식은 특성상 건축 시작 때 존재하지 않는 천정의 하중을 고려한 밑단을 설계·시공하는 식. 그렇기에 도면을 그리는 건축가도 굉장히 노련해야 하며, 시공 인부들도 대략적인 개념 숙지도 필요하다.[6] 물론 저러면 이단이다. 마리아의 구원방주가 교황청 공인 이단으로 인정받은 사례도 있다. 관련된 전원이 자동 파문이라는 교회법상 최고형을 받았다.[7] 그런데 실제로 비가톨릭 기독교인이나 타 종교인들은 저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간혹 존재한다. 개중에는 가톨릭 신자가 제대로 알려줘도 듣는 척도 하지 않는 부류가 있기도 하다.[8] 천주교 전례 중 무릎을 꿇는 순서를 진행할 때 신자들의 무릎을 보호하고자 각 의자 아래에 설치한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