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쿱 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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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비정통 황제 · 반란 지도자 · 할거정권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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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어: محمد یعقوب بیگ (무함마드 야쿱 벡, Muhammad Yaqub Bek)[1]
중국어: 阿古柏 帕夏 (아고백 파하[병음])
1820년? ~ 1877년 5월 30일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풀 네임은 무함마드 야쿱 벡. 중앙아시아에서 마지막 유목제국을 세운 군인-정치가다.


2. 생애[편집]


초기 경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원래 우즈베크인 또는 타지크인으로서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코칸트 칸국의 장군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청나라아편전쟁-태평천국의 난으로 쇠퇴한 것을 계기로 한족 민간인들이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감숙성-섬서성의 무슬림들이 한족들과 충돌하였고 1862년 대대적인 반란으로 번졌다. 2년 후 청나라 조정이 회족들을 전부 학살할 계획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가면서 쿠차에서 회족[2]들이 봉기한 것을 계기로 신장 각지에서 무슬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반청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코칸트 칸국의 군인이었던 야쿱 벡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위구르족의 본거지였던 타림 분지로 진격하였다.

당시 신장에서는 팔기군들이 궤멸된 후 위구르인들과 회족들이 서로 내전을 벌이던 상황이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농기구나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상황이었고 총기로 무장한 기병대를 이끈 야쿱 벡에게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투항하고 만다. 그리고 더욱 동진하여 1870년에는 돈황톈산 산맥 너머 신강의 수도였던 우루무치까지 점령했다. 그리하여 100여년 전 건륭제가 합병했던 신강은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파일:Flag_of_Yettishar_(1873-1877).png
예티샤르 왕국의 국기

야쿱 벡은 스스로를 에미르라고 칭하고 자신의 왕국을 카슈가리아 혹은 예티샤르(يەتتىشەر دۆلەتى, 일곱 도시의 나라라는 뜻)라고 불렀는데 이 나라는 1865년에서 1878년까지 존속했다.

오스만 제국은 범튀르크+범이슬람 종주국으로서 카슈가리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를 에미르로 인정하고 군사 고문과 물자까지 보냈다. 여기에 영국러시아 제국은 청나라를 약화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심산으로 카슈가리아 왕국을 승인했다. 특히 영국은 인도를 통해 야쿱 벡에게 서양식 무기를 원조했고 영사관까지 설치했다. 청나라조차 이홍장을 비롯한 해방파(해안 방위 중시파)를 중심으로 야쿱 벡의 동투르키스탄을 자치왕국으로 인정하던가 아예 러시아에게 할양하여 그 지불금으로 해군력을 확충하려고 할 정도로 위구르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할 지경이었다.

야쿱 벡은 자신을 신앙의 수호자이자 이교도인 키타이(중국인)에 대한 가지Ghazi; 성전사라고 선전하면서 엄격한 이슬람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카지Qadhi; 이슬람 법관는 제대로 베일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이나 터번을 쓰지 않은 남성을 매질하고 샤리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무리의 경찰들과 함께 거리를 순찰했다. 현지 위구르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전적으로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야쿱 벡이 정통성을 얻기 위해 시행한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무거워진 세금 부담과 회복이 더딘 경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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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역사 / James A. Millward


하지만 야쿱 벡은 왕이 되자마자 국방비를 이유로 청나라와 다를 바 없는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원성이 자자했다. 세금을 무겁게 매길 거면 최소한 지도자부터 솔선수범 근검절약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주변국 각지에서 미녀들을 모아서 하렘을 만드는 일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때문에 안 그래도 코칸트 출신 외부인이라 정통성이 부족했던 야쿱 벡은 현지의 위구르인들과 회족들에게 인망을 잃었고 "폭군", "호로자식"이라고 증오받았는데 이에 야쿱 벡이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취한 정책은 강압적인 근본주의 정책이었다.[3] 민족도, 언어도, 반란의 이유도 다 달랐던 반청반란세력을 하나로 묶어 주는 요소라고는 오직 종교뿐이었으며 야쿱 벡은 코칸트 칸국에서 굴러들어온 외부인에 불과했고 가뜩이나 저런 명분이 아니고서는 다른 무엇으로도 정통성을 만들 수가 없었다. 결국 강압적인 통치로 신생 정권과 그 군사력을 어떻게든 유지해서 주변 열강들과 대치해야 할 만큼 상황이 급박하며 취약하기도 했다.

게다가 같은 무슬림에다가 그것도 같은 교파를 믿던 회족에게 지하드를 선포하여 이들을 학살하는 최악의 행위를 저질렀다. 이 때문에 회족이 분노하여 청나라에게 가담했고[4] 민심의 이반이 있었으며 청나라 정부가 공격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일부 위구르 독립운동가들이나 이들에 동조하는 이들이 야쿱 벡 왕국을 마치 위구르족의 독립국가였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야쿱 벡 자신부터가 중앙아시아에 있던 코칸트 칸국의 우즈베크족 혹은 타지크족 군인이었고 지배층이 코칸트 칸국 출신이었을 뿐 분리운동을 일으켜 타림분지에 거주하던 위구르족을 제압해 자립한 상황이었고 오히려 위구르인들은 중과세를 매기고 탈레반식 근본주의를 실시하던 야쿱 벡을 싫어했다.

해방파와 대립하는 새방파였던 좌종당은 신장을 상실하면 청나라가 러시아 제국의 침략 앞에 더 취약해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장을 다시 병합할 것을 요청하였다. 1875년 청 조정은 좌종당을 흠차대신(전권대신)에 임명하고 12만 명[5]의 토벌군을 보냈다. 청나라군은 대부분 보병으로 척박한 신장의 사막들을 행군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얼어죽거나 굶어죽을 확률이 높았고 야쿱 벡의 군대가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했던 데 비해 좌종당의 군대는 병력은 많아도 병사 개개인의 무장상태는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다.[6] 이 때문에 영국이나 러시아, 오스만 제국 측에서는 청나라가 야쿱 벡 정권을 다시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야쿱 벡과 다투던 하미의 칸이 좌종당에게 군량을 대주고 좌종당의 군대는 하미시에서 훈련을 하면서 신장 기후에 적응을 끝내면서 컨디션을 유지한 상태로 신장으로 진군하였다. 야쿱 벡은 청나라 군을 대상으로 협상을 중지하고 발포 중지 명령을 내렸으나 1876년 6월 좌종당은 발포 중지 명령으로 우왕좌왕하던 야쿱 벡의 군대를 격파하고 우루무치를 탈환했다. 7월에는 톈산북로의 야쿱 벡 군에게 다대한 손실을 주었다. 1877년 겨울 청군은 다시 남진하여 발판성을 함락시켰다.

야쿱 벡은 영국의 중재를 통해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정전하려고 했으나 이미 승기를 잡은 청군이 멈출 이유가 없었고, 투르판 지역에 대한 총공세를 펼쳤다. 또한 야쿱 벡을 지원해줄 수 있었던 오스만 제국이나 영국은 국내 사정상 중앙아시아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투르판이 청군에 함락되자 중앙아시아로 피했다가 1877년 5월 30일 급사했다. 음독자살이라는 설도 있고 중풍일 가능성[7]도 있다. 야쿱 벡이 급사하자 이후 카슈가리아 왕국은 와장창 무너졌고 패잔병은 11월까지 모두 소탕되었다. 함락 후 아팍 호자의 무덤 뒤뜰에 묻혀 있던 그의 시체는 부관참시당하고 불탔으며[8] 야쿱 벡의 가족들도 모두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성년들은 처형되었고 미성년 자손들은 궁형을 받아 청나라의 환관이 되었다.[9]


3. 평가[편집]


신강은 중국 전토의 1/6을 차지하는 거대한 땅으로서 청나라에서 신장으로 군사 작전을 펼칠 때는 보급 문제로 원정을 100일 이하로 잡아야 했으며 전력 상당부분을 기병으로 구성해야 했다. 1300년 전 이 지역을 침략한 당나라 군대도 이 지역에 파견하는 병사들은 보병들 역시 대부분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전투 시에는 말에서 내려 싸우는 식으로 편재하였으며 2000년 전 한나라에서는 이광리 장군과 6만 대군을 파병했다가 군인 대부분이 행군 과정에서 얼어죽거나 굶어죽어서 대차게 실패했던 사례가 있었다.

청의 좌종당 군대는 대부분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정 상황이 좋지 않았으나 야쿱 벡의 지나친 무능 폭정과 사치, 허접한 정치력과 외교력 덕분에 별다른 피해 없이 신장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야쿱 벡의 첫 번째 패착으로는 하미 칸국을 제대로 점령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대치한 것이다. 하미의 칸은 좌종당의 군대에게 식수와 군량을 보급해 준 것은 물론 신장의 기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충분한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두 번째는 영토 내 위구르인과 회족, 시버족 등등의 갈등을 제대로 봉합하지 못한 것이다. 야쿱 벡은 휘하 국민들을 하나로 아우르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취하기는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위구르인과 회족은 심지어 같은 교파를 믿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 회족들을 사실상 2등 국민으로 대우하였으며 일리 지역의 시버족 등등 비무슬림 마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행정력을 행사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즉 야쿱 벡이 휘하 국민들을 규합하겠다고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실시한 것 역시 본인부터가 회족들을 차별하면서 실패한 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패착으로는 낭비가 있다. 1864년 봉기 당시 신장성은 내란 와중에 카레즈바자르가 상당부분 파괴되고 경제가 엉망이 되었는데 이를 먼저 복구하는 대신 야쿱 벡 개인 하렘에 데려오려고 오스만 제국에서 금발 여성 노예를 데려오는 일 따위에나 돈을 뿌렸다. 회족뿐만 아니라 위구르인들의 민심 역시 야쿱 벡에게서 완전히 이반하였고 결국 그의 국가는 방어에 매우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야쿱 벡의 무능으로 이곳은 청나라에 수복되었고 1878년까지 신강 지역의 대부분은 다시 청나라에 합병되어 대부분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신강 위구르 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카슈가리아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이곳은 영영 중국의 영토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홍장의 제안처럼 러시아에 할양했거나 카슈가리아 왕국을 그대로 두었다면 이곳은 후에 중앙아시아의 여러 튀르크계 공화국처럼 러시아 제국-소련의 영토가 되었다가 소련 붕괴 후 동튀르키스탄이나 위구리스탄 등으로 독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때 청나라는 영토를 러시아에 상당부분 상실했는데 러시아는 야쿱 벡을 직접 지원하는 대신 혼란상을 이용하여 신장 영토의 상당부분을 병합했다. 야쿱 벡이 할거했을 즈음에 러시아는 신장 서북부의 일리(伊犁) 지역으로 군대를 파병해 병합하였다. 청나라 조정이 야쿱 벡을 못 이기면 적당히 실효지배 하다가 꿀꺽하고 청나라 조정이 야쿱 벡을 진압하더라도 많이 약해졌을 테니 러시아가 손쉽게 먹을 수 있을 거라 계산한 것이다. 그런데 믿겨지지 않게도 청나라가 러시아를 이겼다. 그럼 러시아가 일리지역을 토해내야 할 것이 분명했지만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청나라는 러시아와 영토 반환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숭후(崇厚)라는 인물을 보냈는데 이 양반이 일리 지역 뿐만이 아니라 신장 지역의 70% 가량을 러시아에 내준데다가 러시아군의 일리 주둔 비용 500만 루블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리바디아” 조약) 이런 어처구니 없는 조약에 청나라 조정은 당장에 숭후에게 사형선고[10]를 내리고 증국번의 아들인 증기택을 보내 재협상을 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압박을 주자 러시아는 차지한 지역을 일부 반환해야 했지만, 일부 지역은 러시아령이 되었다가 현재에는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영토가 되어 이어지고 있다.

파일:789px-청나라_영토.png

청나라의 서북쪽을 보면 과거엔 청나라 영토였으나 1864로 적혀 있고 현재는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타지키스탄,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위구르의 잠깐의 영웅이었으나 이후 광신과 폭정으로 몰락한 케이스다. 한족들의 입장에서는 유목민족판 홍수전이었던 셈이다.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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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위구르어 표기로는 ياقۇب بەگ (Yaqub Beg), 현대 타지크어 표기로는 Яъқуб-бек (Ya'qub-bek)이 된다. '야쿱'은 '야고보'의 이슬람식 이름이며 '벡'은 이슬람권의 영주 '베이'를 다르게 적은 것이다.[병음] Āgǔbó pàxià, 야구보 파샤[2] 신장에서 반란의 스타트를 끊은 사람들은 위구르인들이 아니라 회족들이었다.[3] 금주령이 대표적이다. 위구르인과 회족들이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술을 멀리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가 아랍인들만큼 엄격하지는 않았다.[4] 신장의 회족 상당수는 중국 본토에서 신장으로 이동 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한족 출신이었다.[5] 일설에 따르면 9만 명이라고도 한다.[6] 다만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 의하면 최신 무기로 무장한 측은 오히려 청군이었다고 한다.[7] 서울대 김호동 교수의 설이다.[8] 아팍 호자의 영묘 부지에는 지금도 파헤친 흔적이 남아있는 무덤 하나가 남아 있는데, 위구르족들은 야쿱 벡의 묘가 있었던 자리라고 믿고 있다.[9]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 의하면 장남이 (러시아의 영토가 된) 코칸트 지역으로 탈출했다고 한다.[10] 외국 공사의 개입으로 죽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