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코프 주가슈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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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이오시포비치 주가슈빌리
Я́ков Ио́сиф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1]

출생
1907년 3월 18일
러시아 제국 쿠타이스현 바지[2]
사망
1943년 4월 14일 (향년 36세)
나치 독일 오라니엔부르크 작센하우젠 수용소[3]
국적
[[소련|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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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제르진스키 운송학교
프룬제 군사대학 포병군사학교
직업
군인
복무
소련군 (1941~1943)
최종 계급
중위
서훈 내역
적기훈장
조국전쟁훈장

1. 개요
2. 생애
2.1. 유년시절
2.2. 아버지와의 갈등
2.3. 사망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오빠에게는 공명심도 권력욕도 없었고, 거친 면도 고집 센 면도 없었다. 그는 또 내면적인 모순이나 외향의 분열과도 인연이 없었다. 또 비교적 빛나는 인연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고 가식이 없는 성격이고 대단히 근면하며 실제로 일도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그 조용한 태도는 사람을 절로 매료시켰다.
이복동생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의 회고
소련의 군인이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장남이다. 독소전쟁에 소련 육군 포병중위로 참전하였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스탈린의 장남이지만, 평생 아버지와 갈등과 반목이 매우 심했다. 스탈린은 야코프가 어린 시절 그를 거의 방치하기도 하였고, 그런 탓에 야코프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반항심이 심했다. 이후 새어머니와 살게 되면서 새어머니와 이복 동생들에게 차별당하자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런 아들에게 제대로 총도 쏠 줄 못해 죽지도 못한 놈이라 비웃었다. 부자간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마침내 스탈린은 부자관계의 단절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탓에 바실리 스탈린이라 불린 동생과 달리 그는 스탈린이라는 성을 쓰도록 허가받지 못했고,[4] 스탈린이 조지아에서 쓰던 성인 주가슈빌리라는 이름을 써야 했다. 동생 바실리가 소련군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불과 26세의 나이에 공군 중장으로 승진하여 공군에서 가장 요직인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된 반면 야코프는 바실리보다 14살이나 많은데도 초급 임관 장교의 계급인 중위에 불과했다. 게다가 바실리는 실제로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에만 머물면서도 26세에 군최고위 장성이 된 반면, 야코프는 소련 지휘부가 그를 후방으로 전근시키려 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막고 야코프를 최전선에 투입시켰다. 결국 격전이 벌어진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후에도 스탈린은 그를 적극적으로 구조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독일의 포로교환 협상 제의에도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사망한 후에 스탈린은 야코프의 아내를 의심하여 야코프의 아내와 자녀들을 구금하기도 했다. 배다른 동생 바실리가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망나니 같은 짓을 일삼다가 스탈린 사후 비참한 삶을 살았던 것에 비해 야코프는 훨씬 불우한 환경을 겪었지만 난잡한 여성 문제를 제외하면 동생에 비해서 큰 사고는 치지 않고 살았기에 상대적으로 나은 평판 혹은 동정을 얻고 있다.[5]

다만, 바실리가 워낙 개차반 같은 인생을 살았기에, 단지 반대급부로 야코프는 비교적 훌륭한 인성을 가졌다고 치켜 세우는 것은 미화에 가깝다. 야코프 역시 제어불가에 가까운 막장 행동을 많이 했던 건 사실이었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바실리보다 야코프가 훨씬 심한 막장, 망나니, 강도 같은 놈이라고 비난했다. 야코프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반항심이 워낙 심한 나머지 그를 엘리트 권력자로 키우기 위한 아버지의 뜻에 반항하기 위해 일부러 기술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그랬기에 군부 실세가 되었던 바실리와 달리 사회적으로 평범한 계층의 삶을 살았고, 그 탓에 동생에 비해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막장 짓을 할 기회도 없었을 뿐이었다. 대신 그는 끊임없는 여성 편력을 일삼았고, 그의 난잡한 여자 관계에 대한 루머로 스탈린의 체면이 구겨졌다. 30대에 들어서야 아버지에 대한 반항을 줄이고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아버지가 계획한 엘리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결국 전쟁에서 사망하였다.

2. 생애[편집]



2.1. 유년시절[편집]


1907년 3월 18일, 조지아인 이오세브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ჯუღაშვილი)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에카테리나(카토)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კატო) სვანიძე) 사이에서 태어났다.[6] 이오세브 주가슈빌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본명으로 스탈린은 본래 조지아인이었다. 그 때문에 스탈린이 러시아에서 러시아인 여성 사이에서 낳은 이복동생들과 달리 조지아 출신이다.[7] 따라서 본명 역시 조지아어로 이아코브 이오세비스 제 주가슈빌리(იაკობ იოსებ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 Iakob Iosebis dze Jughashvili)이지만, 러시아어 표기를 따른 '야코프 이오시포비치 주가시빌리(Яков Иосиф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Yakov Iosifovich Dzhugashvili)'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때 카토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불충분 및 여러 지인들의 로비로 감방이 아니라 지역 경찰서장인 레치츠키 중령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스탈린과 스탈린의 어머니인 에카테리네 "케케" 겔라제가 야코프의 탄생의 순간을 지켰다. 스탈린은 자신을 도와준 바 있었던 이아코브 에그나타슈빌리(იაკობ ეგნატაშვილი, Iakob Egnatashvili)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이아코브(იაკობ, 러시아어식 표기로는 야코프·Яков)로 지었다.

당시 언론활동에 열중하던 스탈린은 야코프가 울음을 터트리면 짜증을 내곤 했지만 울음을 멈추면 즉시 아들을 간질이고 키스하며 매우 귀여워했다. 이때 스탈린이 아들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일에 야코프의 정확한 생일에 관해서 혼동이 있었다. 9월에 야코프는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혁명활동 중이었던 스탈린은 아들을 팽개치고 은행강도질을 하거나 아예 시베리아 유형을 끌려가기도 했으며 어린 아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스탈린은 가족들을 데리고 바쿠로 이주했는데 1907년을 넘기기 전에 카토가 병에 걸려 죽었다. 카토가 죽었을 당시 스탈린은 무척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카토가 죽은 후 스탈린은 야코프를 처가인 스바니제 일가에 맡기고 떠났다. 이후 1912년이 되어서야 유형에서 탈출하여 한번 찾아보았지만 아들에게 거의 애정을 표시하지 않고 얼마 안 가 떠나버렸다. 이 때문에 스바니제 일가는 스탈린의 매정한 행태에 상당히 분개해했다.[8] 그리고 이들은 모두 대숙청 기간 중에 스탈린의 사생활을 너무 떠들어댄 죄로 총살된다.


2.2. 아버지와의 갈등[편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건국된 후인 1921년에야 스탈린은 14살이 된 야코프를 찾아가 모스크바로 데려와 후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에게 키우게 했다. 같은 해에 배다른 동생 바실리 스탈린이 태어났다. 하지만 스탈린은 애지중지했던 바실리와 달리 야코프를 무척이나 싸늘하게 대했다. 스탈린은 공공연하게 야코프를 바보라고 망신을 주었다.

스탈린은 정치에 바빠 가정일에는 소홀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스탈린의 후처 나데즈다가 야코프의 교육을 담당했다. 하지만 야코프와 새어머니 나데즈다는 6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야코프는 그런 어린 새어머니와 그다지 잘 지내지 못한 모양이다. 스탈린의 집안에 들어온지 1년이 지난 1922년 10월, 나데즈다는 시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께 키스를 보냅니다. 소소도 안부를 전합니다. 그이는 아주 건강하고 기분도 좋아요. 일도 열심히 하고, 어머니 생각도 한답니다. 야샤(야코프)는 공부하고, 뛰놀고, 담배를 피우고,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바센카 역시 뛰놀고, 엄마에게 함부로 하고,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요. 그래도 아직 담배는 안 피우는데, 머지 않아 이오시프에게 배워 담배도 피울 거예요. 이오시프가 파피로스카 담배[9]를 피울 때마다 늘 아이에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니까요.

이런 기록 등으로 볼 때 상당히 삐딱선을 탔던 모양이다. 1926년 나데즈다는 야코프가 정신을 차리기는 완전히 글렀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나데즈다는 야코프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주려고 하면서 헌신한 모양이고 둘의 관계는 이후에 매우 좋아져서 나데즈다는 사실상 야코프에 대한 유일한 방패막이가 된다.

1925년 야코프는 기술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 스탈린에게 동급생 조야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 스탈린은 길길이 날뛰면서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자 야코프는 가출하여 조야와 동거했다.

결혼을 둘러싼 스탈린과 야코프 부자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결국 18세의 야코프는 항의표시로 부엌에서 권총 자살을 기도했다. 하지만 총알을 빗나갔고 야코프는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스탈린은 자살을 시도한 아들에게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른다고 비웃었다. 야코프는 병원에 석달 가량 입원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결혼을 둘러싸고 부자간의 극한 대립은 이어졌다.

결국 1928년 4월 9일, 스탈린은 나데즈다에게 이렇게 말하며, 사실상 아들과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야샤에게 내 말을 전해 주시오. 너는 망나니, 공갈배, 강도처럼 행동했고, 너와 나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나는 너와 더이상 어떤 관계도 지속하고 싶지 않다. 이제 내가 너를 위해 해줄 어떠한 일도 없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아무데서 아무거나 하고 네 멋대로 살아라."


야코프는 퇴원하자마자 레닌그라드로 떠나서 살았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야와 결혼했다. 레닌그라드에서 그는 화력발전소 전기기사로 일했다. 스탈린은 야코프 일가를 찾아가 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얼마 후 야코프와 조야는 딸을 낳았다. 스탈린은 손녀가 생겼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코프 일가를 무시했다. 그러나 얼마 후 불행히도 딸이 죽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자살시도까지 하며 했던 결혼이지만 얼마 후 둘의 관계도 틀어지기 시작했고 둘은 이혼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야코프는 새로운 여자와 동거했고 아이도 가지게 되었다. 스탈린은 아들과의 연락을 완전히 끊지는 않았지만 아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매우 불쾌해 했다.

이후 스탈린은 야코프에게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라고 요구했지만 야코프는 이를 무시하여 스탈린을 분노케 했다. 스탈린은 야코프에게 이렇게 호통을 쳤다.

"너는 내 아들이야! 네가 그러면 내가 어떻게 보이겠니? 중앙위원회 서기장인 내가! 어떤 문제에서든 네 의견을 가질 수 있어. 그렇지만 아버지 생각도 좀 해라!"


결국 야코프는 마지못해 공산당에 가입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와 사이는 좋지 않았고 왕래도 없었다.

그러나 야코프 역시 철없는 10대를 지나 20대에 들어서면서 차차 철이 들어가며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 노동자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23세에 제르진스키 운송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대에 가끔 가족 모임이 있었는데 스베틀라나의 회고에 따르면 야코프는 모임에서 늘 조용한 태도였지만 바실리가 여자들 앞에서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두들겨팬 적이 있다고 한다. 바실리 스탈린의 인격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하지만 이복 여동생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Аллилуева)[10]와는 사이가 굉장히 좋아 그녀가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같이 놀기도 했다.

1935년, 야코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모스크바 항공학교 생도인 올가 골리셰바와 약혼하고 동거하였으나 파경을 맞이했다.

1936년 오데사 출신의 무용수이자 이혼녀인[11] 유대인 여성 발레리나 유디트 "율리야" 멜처와 결혼하였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유대인 며느리를 마음에 불만스러워했으나 이미 다 큰 아들의 반복되는 결혼과 이혼에 지치기도 했고 스탈린의 병적인 반유대주의가 폭발하기 전이라서[12] 예전처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반대 표시는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야코프에게 유대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곤 했었는데[13] 그때마다 야코프는 열렬히 아내를 변호하곤 했다고 한다.[14] 두 사람의 사이에서 1938년 2월에 딸 갈리나 "구랴"(1938~2007)가 태어났다. 한편 야코프와 파경을 맞이했던 올가 골리셰바는 고향인 스탈린그라드로 돌아갔는데, 그녀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1936년에 예브게니(1936~2016)[15][16]를 낳아 야코프에게 알리지 않고 예브게니 골리셰프로 이름짓고 혼자서 키웠다. 야코프는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1938년에야 알게 되고 예브게니를 자신의 호적에 다시 올리기 위해 소송을 걸었지만 양육권은 골리셰바가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의심병 환자인 스탈린은 골리셰바를 의심했고 자신의 장손인 예브게니를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파일:스탈린일가.jpg
1930년대 스탈린 일가의 모임, 왼쪽부터 바실리 스탈린, 안드레이 즈다노프,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이오시프 스탈린, 그리고 야코프.

1930년대에도 야코프와 스탈린 부자는 사사건건 의견차를 보이면서 대립했고 야코프는 아버지의 의도를 따르기를 거부하기를 반복했지만 그럼에도 서로 나이를 먹으면서 대립의 정도는 조금씩 누그러졌고 부자간에서 서로 계속 의견대립을 보이면서도 예전처럼 서로 일방적으로 고집을 꺾지 않으며 평행선을 달리는 강도도 조금씩 줄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둘의 사이가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야코프의 끊임없는 여성 편력이 가십 아닌 가십이 되면서 스탈린은 야코프를 무척 불쾌해 했다. 그러나 본인이 반대한다고 한들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예전처럼 대놓고 극렬 반대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스탈린 역시 어느 정도는 자포자기를 한 것이지 아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계속해서 아들에게 비난을 계속했다.

1930년대 말 야코프를 길러줬던 외가집 일가가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었다. 친가 이상으로 그에게 소중했을 외가집의 숙청 사건은 야코프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외가의 숙청 이후 본격적으로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양녕대군과 달리 야코프는 아버지의 막강한 권력의 힘에 압도당했는지, 또는 자포자기했는지 이시점부터 오히려 반항을 멈추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시작한다.

이무렵 야코프가 스탈린의 아파트를 찾아왔을 때 스탈린은 소련엔 기술자보단 장교가 더 필요하다고 아들을 질책하며 사관학교에 들어가라고 요구한다. 예전 같으면 아버지의 말 따위야 가볍게 무시했을 야코프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야코프는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순순히 프룬제 군사대학 포병군사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5월 5일, 스탈린은 야코프와 포병군사학교 졸업생들을 크렘린에 초청하였고 좌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포병군사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그의 공책을 어깨 너머로 보니 1916년에 퇴역한 대포들을 공부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쏟고 있더라고."라는 아재 개그도 시전했다. 어쨌든 본인의 의도대로 야코프가 군사학교에 들어가자 스탈린은 여름이 되면 야코프 일가를 전부 자신의 집에 부를 정도로 관계를 회복했다. 하지만 아래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야코프가 포로로 잡힌 후 그의 처자식에게 했던 행동들을 볼 때 스탈린이 야코프 일가에 대한 신뢰와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2.3. 사망[편집]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육군 제14전사사단 포병연대 소속 대위였던 야코프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공군 장교였던 이복동생 바실리가 아버지 빽을 써서 모스크바에서 꿀을 빤 반면 전방 육군 부대에 있었던 야코프는 전쟁이 발발하자 실제 전장에 투입되었다. 개전 당시 해당 전선 사령관인 이반 코네프는 스탈린에게 야코프의 부대도 곧 최전선에 투입될 예정이니 야코프를 후방으로 전근시켜도 되겠느냐고 넌지시 건의했지만 스탈린은 "그따위 쓸데없는 아첨을 하려들지 말라"고 대꾸했고 야코프는 그대로 최전선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전쟁 초기에 스탈린의 화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당시 소련군부가 스탈린의 의도를 오해해서 생긴 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스탈린 화법은 겉으로 말하는 것과 실제 의도가 일치하지 않았다. 부하들 앞에서 체면을 매우 중시했던 그는 앞에서는 항상 자신에게 아첨하지 말라고 말하며 아첨하는 부하들을 질책했지만, 뒤에서는 아첨하는 부하들을 키워주는 스타일이었다. 예를 들어 스탈린의 부하들이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와 아첨으로 점철된 전기를 만들어 발행하려 하자 스탈린은 자신에 대한 아첨으로 가득찬 이런 전기는 발간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부하들은 스탈린의 발언을 거스르며(?) 그의 전기를 무려 100만부나 찍어 전국에 뿌렸다. 그리고 스탈린의 말을 거역한 부하들은 숙청되기는 커녕 오히려 중용되었다. 스탈린의 아들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스탈린은 교사들에게 아들을 엄하게 다스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방탕한 스탈린의 아들을 조금이라도 엄하게 대했던 교사들은 전부 숙청당했고 거의 학교가 폐교될 정도로 쑥대밭이 되었다.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 육군 수뇌부가 야코프를 후방으로 보내자고 건의했을 때, 스탈린이 겉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말했어도 알아서 장남을 후방으로 빼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당시 스탈린의 스타일을 잘 몰랐던 소련군부는 스탈린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야코프를 전선에 내보내 버린 것. 야코프가 전선에 투입된 것과 달리 공군에 있었던 바실리는 후방으로 보내져 꿀 빨면서 지냈는데, 이는 당시 육군 수뇌부, 공군 수뇌부가 스탈린의 화법을 다르게 이해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평시였다면 이후 육군 수뇌부가 숙청되는 것이 수순이었겠지만 당시는 스탈린으로서도 절박했던 위급한 전시 상황이었기에 숙청 없이 넘어갔다.

한편 전쟁 발발 후 야코프의 가족들은 스베틀라나와 함께 소치로 피난 갔다.

파일:야콮.jpg
포로가 되어 루프트바페 장교들과 함께 사진찍힌 야코프. 독일군은 이 사진을 삐라로 만들어 모스크바에 살포했다.

스탈린은 아들의 부대가 최전선에서 얼마나 위험한 위치에 있는지를 지속적인 보고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전쟁이 시작된지 한달여만인 7월 야코프는 스몰렌스크 전투 중에 비텝스크에서 독일군의 포로로 잡혔다. 이 사실은 8월이 되어 확인되었다. 사실 오랫동안 야코프가 독일에 자진 투항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며 이에 대한 진실은 불분명하다.

한편 야코프가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이 확인된 후 스탈린은 소치에 피난갔던 야코프의 아내와 자녀들을 모스크바로 돌아오게 하였고, 스탈린은 유대인인 며느리가 독일에 야코프를 팔아넘긴 게 아닌가 의심하여 270호 명령에 따라 즉시 며느리를 포함한 장남 일가를 수용소에 투옥시켜 버렸다.

한편 야코프를 포로로 잡은 독일군은 야코프에게 스탈린의 약점을 캘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 심문을 계속했다. 또 독일은 야코프와 아버지의 불화를 이용하여 그를 전향시키려고 시도하며 독일의 거대한 군수 공업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야코프는 독일이 스탈린의 장남인 자신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전쟁이 끝나든 끝나지 않든 간에 언젠가는 결국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은 야코프가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듣고 괴로워했다. 며칠 동안 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를 불러 같이 잤다. 소련의 모든 지도층은 감히 스탈린 앞에서 야코프의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야코프의 안부와 더불어 구출작전의 실행 여부를 묻자 스탈린은 이를 허락하면서도 아들이 살아오길 기대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식사 자리에서 스탈린은 식사를 하다 말고 접시를 밀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니, 야코프는 모국을 배신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거요. 전쟁은 정말 끔찍해! 얼마나 많은 우리 인민의 생명을 앗아갔소! 틀림없이 가족과 친척 가운데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은 없을 것이오."

스탈린의 말처럼 야코프는 아버지를 믿으며 나치 독일에게 전향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탈린은 야코프의 바람과 달리 그를 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독일 측이 흔히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로 지목되는 독일군 장군과 야코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는 말이 있다.[17] 그러나 1941년 시점에서 파울루스는 아직 포로로 잡히지 않았고 독일 측이 그러한 제안을 해왔다는 문서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1943년에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하는데, 야코프가 43년 4월에 죽었고 파울루스의 항복은 2월 직전이라 2개월 정도 시간이 있기는 하다. 일단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후 스탈린이 독일 측에서 야코프와 누군가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이는 히틀러의 조카 레오 라우발 또는 하인츠 히틀러로 추정된다(아돌프 히틀러/가족관계 참고).

1943년 4월 야코프는 작센하우젠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특급 포로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 수많은 썰이 난무하였다. 포로수용소에서 경계병이 쏜 총에 사망하였다는 썰, 끈질긴 탈옥 시도에 독일군이 포로 수용소를 둘러싸고 전기가 흐르는 담장을 설치하였으나 그 사실을 알고도 담에 뛰어들어 감전사했다는 썰 등이 존재한다.[18] 자세한 정황은 상당히 불분명하나, 훗날 기밀 해제된 러시아의 자료 등에 따르면 수용소의 명령을 듣지 않아 경계병에게 사살되었다고 한다.

아들인 야코프의 죽음을 알게 된 스탈린은 겉으로는 멍청한 놈이라고 말은 했어도 속으로는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부하들에게 자식의 최후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몸이 떨리도록 놀라면서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3. 참고문헌[편집]


  • 젊은 스탈린,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시공사.
  • 스탈린 평전,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 스탈린 평전, 올레크 흘레브뉴크, 삼인.
  • 나의 아버지 스탈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일신서적출판사.

[1] 로버트 서비스나 올레크 흘레브뉴크 등의 스탈린 평전에서는 '야코프 스탈린'으로 표기하지만 다른 서적에서는 일반적으로 러시아어 이름과 조지아어 성씨를 합친 야코프 주가슈빌리(Yakov Dzhugashvili, 러시아어 표기법을 따르면 주가시빌리)로 칭한다.[2]조지아 라차레치후미크베모스바네티주 암브롤라우리시 바지(ბაჯი).[3]독일 브란덴부르크주 오버하펠군 오라니엔부르크 작센하우스 수용소.[4] 정확히 말하자면 스탈린은 자신의 성을 아들딸들이 쓰도록 허락한 적이 없다. 사실 스탈린은 원래 가명에서 시작된 이름이고, 또 스탈린은 '스탈린'이라는 성씨가 소련 전체의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라며 바실리가 스탈린이라는 성씨를 쓰는 것을 질책하였다. 바실리가 그런 걸 다 씹고 다니는 망나니였다는 게, 그리고 천하의 이오시프 스탈린 또한 아들 앞에서는 약해지는 여느 아버지들과 똑같은 아버지였다는 게 문제였지만.[5] 죽은 자신의 아내가 생각나 첫째인 야코프를 외면하던 스탈린도 야코프가 성실하게 싸우다 전쟁포로로 잡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씁쓸한 말투로 자신의 측근들에게 야코프의 근면함을 칭찬하기도 했다.[6] 야코프 주가슈빌리의 얼굴은 어머니를 거의 닮았고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았다.[7]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러시아 제국 쿠타이스현이다.[8] 심리분석학이 발달한 이후 스탈린의 이러한 행동이 설명되고 있는데, 스탈린은 성격상 뭔가를 잃어버리면 그것을 가슴에 묻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잊어버리든가 아니면 계속 붙들고 있든가 둘 중 하나였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의 아내를 잃은 뒤 아들을 볼 때마다 죽은 아내가 떠올라 제대로 된 정치활동이 어려울 것을 스스로 직감하고 의도적으로 정을 끊었다고 추정한다.[9] 해당 번역본의 출처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папироска(파피로스카)는 (필터 유무와 상관없이) 물부리 달린 궐련을 의미하는 папироса(파피로사)에 지소사가 붙은 형태다. 즉 브랜드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일반명사다.[10] 당시 이름은 스베틀라나 스탈리나(Светлана Сталина).[11] 전남편은 NKVD 장교인 니콜라이 베사라브였고 야코프와 율리야가 맨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결혼 상태였으나 불화로 별거하게 되고 곧 이혼한다.[12] 유대인 지도층 인물들을 사고사로 위장한 타살로 처리하는 등 스탈린의 반유대주의가 폭발한 것은 못해도 2차 세계 대전 후이다.[13] 공식적으로 소련은 일체의 인종 차별을 배격하였으나 일명 포그롬(pogrom)으로 대표되는 민간의 뿌리깊은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 전선 여기저기서 터져나온 유대인 박해 및 학살은 물론 대다수가 나치의 짓거리였지만 이때다 싶어 민간인들이 저지른 경우도 없지 않았다. 스테판 반데라 같은 케이스야 말할 것도 없고.[14] 특히 야코프의 외숙모인 마리야 스바니제가 율리야를 교양도 없고 무식한 창녀라고 죽도록 미워했다. 게다가 어디서 들었는지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다는 괴상한 정보도 가지고 있었다.[15]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자신의 친할아버지가 욕을 얻어먹자 할아버지가 너희들 잘먹고 잘살게 해줬으면 찬양을 해야지 까면 되느냐는 망언을 날려 우크라이나로부터 영구 입국금지를 먹은 비범한(?) 인물이다. 여기에 더해 이복 고모 스베틀라나가 아버지의 만행에 사과한다는 말을 하자 미친년이 노망났다고 까는 등, 확실히 제정신인 위인은 아니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은 뒤늦게 예브게니의 존재를 보고받고도 자신의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사실상 남남이었다.[16] 반대로 망나니로 유명했던 숙부 바실리 스탈린의 아들(예브게니의 사촌 동생)은 고모와 비슷하게 할아버지의 과오를 인정했다.[17] 그 말에 따르면 스탈린은 교환 제안을 듣고선 "어떻게 원수와 중위를 교환할 수 있냐?"고 펄쩍 뛰었다.[18]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야코프가 포로수용소에서 화장실 사용 문제를 놓고 같이 수용된 영국 장교와 싸움을 벌였다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고압 철조망에 돌진해 죽었다는 야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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