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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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스쿠니 대만인 시위 사건
2. 야스쿠니 신사 방화사건
3. 야스쿠니 한국인 1인 시위 사건
4. 야스쿠니 신사 방뇨 사건
5. 야스쿠니 신사 방화 미수 사건
6. 아베 신조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7. 저스틴 비버 야스쿠니 신사 참배
9. 야스쿠니 신사 천황 모독 사건
10. 야스쿠니 신사 정문 부근 화재사고
11. 야스쿠니 중국인 먹물 사건


1. 야스쿠니 대만인 시위 사건[편집]


2009년 8월 11일 대만인들이 일본을 방문해 야스쿠니 신사의 배전 앞에서 야스쿠니 신사 반대 활동을 벌였다. 1, 2

대만 원주민 출신으로, 영화배우로도 유명했으며 40세에 중국 대입시험을 거쳐 중국의 명문대에 합격해 화제를 모았던 대만의 여성 입법위원 가오진 쑤메이는 8월 11일 오전 대만인 약 50명과 함께 '합사를 중단하라'고 위쪽에는 중국어로, 아래쪽에는 중국어와 일본어가 같이 혼용되어 있는 상태로 쓴 플래카드를 들고 야스쿠니 신사를 습격하였다.

시위대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제지에 나선 신사 직원들과 몸싸움도 벌어져 일부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비병들이 위에는 구호 현수막을 빼앗으려고 했고, 양측 간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계속 전진해 본당 앞 넓은 광장에 도착했고 "야스쿠니 NO!NO!NO!", "신사사과배상!", "조상의 영령을 돌려달라"는 구호를 외치는 등 시위를 벌였다.

이후 일본 경찰 인력들은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차례차례 본당 앞 광장으로 진입했고, 일본 경찰이 시위대를 제지하려하자 양측 간 상대적으로 격렬한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며 시위가 격화되었다. 경찰로 위장한 대만인들까지 몰려들어 시위대를 제지하는 척 하다가 시위대를 제지하려는 일본 경찰과 다툼을 벌이면서 야스쿠니 신사 안 상황은 난투극으로 변질됐다. 이어 시위대는 중앙광장에서 레퀴엠을 불렀으며, 약 30분 정도 머물다가 줄을 서서 야스쿠니 신사 본당을 빠져나온 뒤 차로 현장을 떠났다.

일본 내에서는 "단호히 용서할 수 없다", "남의 나라에서 왜 소란이야?", "미치광이 중국인들은 일본에 오지마라", "이놈들 전부 일본 입국 금지 시켜야한다", "경찰은 이걸보고 대체 뭘 한거냐", "이 녀석들 전부 죽이고싶다!", "하는 짓거리가 더럽다"는 등 크게 발끈했다. 대만친일 성향이 매우 강한 곳인데 대만인들이 이러한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에 대다수의 일본인은 충격을 받으며 이 사건을 두고 대만인이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며 시위대가 대만인이 아닌 중국 본토 출신이라거나 외성인이나 중국 공산당원이라고 악을 썼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이 이 시위대들은 대만인이다. 물론 대만인들이 일본에 우호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였을때 우서 사건을 비롯한 참혹한 학살이 있었고 일본의 전쟁범죄에 강제징용된 대만 원주민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으로 합사하면서 같이 합사된 A급 전범들과 동급 취급하며 참배하고 있다 보니 대만 역시 평상시의 호의적인 감정과 관계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반발한다. 무엇보다 가오진 입법위원이 대만 원주민 출신임을 감안하면 더욱 분노할 점이다. 때문에 가오진 입법위원은 그동안 일본을 10차례나 방문해 야스쿠니 신사대만 원주민의 조상신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인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큐멘터리에 나오며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2007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관한 영상을 모아 만들어진 중일합작 다큐멘터리 영화인 야스쿠니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가오진 입법위원은 대만도 한국처럼 일본에 당당히 맞서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친일성향과 혐한감정이 매우 강한 대만에서 한국과 손잡고 일본을 비판할 정도로 야스쿠니 신사의 행태가 심각한 것이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하토야마가 이 시위에 대해 아무 반응도 없자 일본 내부에서는 "하토야마는 이걸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거냐?"라는 반응도 있었다. 게다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오히려 이 시위가 발생한 2009년 8월 11일 "총리 되더라도 야스쿠니 참배 안할 것"이라고 발언하자 일본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

2009년 8월 17일 일본 오사카의 히고바시역에서 2명의 남성이 야스쿠니 신사 반대 시위를 주도했던 가오진 입법위원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2009년 12월 일본 극우들이 가오진 입법위원을 "일본인의 종교적 감정을 침해했다"며 고발했다. 일본 경찰은 이례적으로 외국 국회의원을 서류상으로나마 입건했지만 재판에 넘기지는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에 침입한 혐의(건조물침입과 위력업무방해, 상해)로 불구속 입건된 가오진 쑤메이 대만 입법위원을 불기소처분했다. 입법위원은 국회의원에 해당한다. 일본 검찰은 불기소한 이유나 상세한 내용은 '사생활에 관련되는 사항'이라는 이유로 밝히지 않았다. 어차피 가오진 입법위원은 대만에 있었기 때문에 형사 처벌은 불가능했다.

2. 야스쿠니 신사 방화사건[편집]


2011년 12월 26일 새벽에 누군가가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질렀다. 경비원이 재빨리 발견했기에 신사 안의 산문기둥이 그을린 정도로 끝났다.

2012년 1월 8일 주한일본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진 중국인 리우 치앙이 검거되었다. 그는 자신의 외할머니가 일본 때문에 피해를 입은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였으며,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이 중국인은 재판을 받고, 징역 10개월을 살게 되었다.

2013년 1월 3일, 야스쿠니 신사 방화범 리우 치앙을 중국으로 송환하기로 했다. 한일 범죄인 인도조약 3조 '절대적 인도거절' 항목에 따르면, "정치적 범죄이거나 정치범으로 판단될 경우 범죄인 인도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야스쿠니 신사를 불태우는 것이 정치적 범죄라고 판단한 것이다. 리우 치앙은 이미 징역 10월을 복역했지만 일본이 자국내 범죄를 이유로 신병인도를 요구해와서 범죄인 인도 재판을 받았으며, 이 결정에 중국은 환영했고 일본은 유감을 표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어쨌든 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진 것에 대해 한국 측에서 처벌하여 일본 측의 입장을 어느 정도 수용했고, 또한 류창에 대한 일본의 인도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국 측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 그 외에도 한국이 일본에 가진 유감을 인도 거부라는 형태로 표현했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나름대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대처를 잘 했다는 평이 많다.


3. 야스쿠니 한국인 1인 시위 사건[편집]


2012년 8월 15일 한국인 문신 예술가 이랑 씨는 오후 2시 무렵에 일본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일본 정부는 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사과하라"는 내용으로 1인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극우 단체 회원으로 보이는 5-6명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했다.

이후 일본 경찰이 출동해서 이씨를 경찰서로 데려다 놓았다가, 주한대사관 영사부에 연락해 인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8월 17일, "나는 평화적으로 1인 시위를 했을 뿐인데 일본인들이 나를 일방적으로 공격했다"라면서 당시 찍은 사진을 증거로 자신을 린치한 자들을 일본 경찰고소하겠다고 밝혔다.

1인 시위를 행하는 것 자체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오히려 폭력을 행사한 야쿠자와 극우단체 회원에게 문제가 있다. 하지만 1인 시위가 시작되자마자 이씨를 잡아간 일본 경찰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에는 1인 시위가 불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 현장의 경찰들 대응은 시위를 막기 위한 것이라기보단 극우 세력들이 휘두르는 폭력으로부터 이랑 씨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더 짙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씨가 극우 단체 회원들을 일본 경찰에 고소하더라도 극우 단체를 두려워하는 일본 경찰의 성향상 이들이 제대로 처벌을 받을 지는 의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선 이씨의 행동이 잘했다는 반응이 대다수였지만, 일부에선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한 건 잘못되었다는 반응도 있는 듯.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이씨는 일본을 비하하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평화롭게 시위했을 뿐이다. 여담으로 이 한국인을 린치한 일본인들에 대해 한국 내에서는 "린치는 일본인의 전통?"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참고로 1996년 주일한국대사관 정문에 일본 극우단체 회원이 차량으로 들이박은 사건이 벌어졌던 적이 있었는데 일본 경찰은 불구속 입건하고 대충 풀어준 적이 있다.


4. 야스쿠니 신사 방뇨 사건[편집]


2013년 5월 24일 한 한국인이 야스쿠니 신사 연못에 방뇨행위를 했다. 이 한국인은 자신이 오줌을 갈긴 인증 게시물을 힛갤에 올리자 벌써 몰려온 정사갤러들과 국빠, 일빠, 관심병자들의 병림픽으로 헬게이트가 될 조짐을 보였다. 관련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한국인 청년에 대해 야스쿠니 신사는 담당 경찰서에 피해 신고서를 제출하며 조속한 체포를 희망했다고 일본 J-CAST 뉴스가 보도했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하시모토 도루 일본유신회 공동대표의 망언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이와 관련 국내 네티즌들은 "국가 망신이다"와 "속 시원하다"라고 반응이 엇갈리는 가운데, 해당 사건은 이후 니코니코 라이브에서도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소개됐고 2ch 같은 사이트에도 급속히 퍼지며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일본 네티즌 측은 분노보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 많았고, 일본 최대 사이트 2ch에도 관련 게시물들이 대량으로 올라오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야스쿠니 신사에도 관련 사실이 알려지게 되어, 신사 측은 '신성한 장소에서 용서 할 수 없는 폭거', '장난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악의적'이라고 분노하며 "재범의 가능성이 있어 경비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관할 경찰서에 피해 신고서를 제출하며 야스쿠니 신사측은 신성한 장소에서 용서할 수 없는 폭거 범인의 빠른 체포를 희망했다.

5. 야스쿠니 신사 방화 미수 사건[편집]


2013년 9월 22일 한국인 강모 씨가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침입해 방화를 저지르려다 순찰 중이던 경비원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본 경시청에 따르면 용의자는 21일 일본에 입국했으며 22일 오후 5시 경 야스쿠니 신사에 침입하여 폐문 후에도 화장실 쪽에 숨어 방화 계획을 꾸미던 것을 경비원에게 발각당해 도주하다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한국 여권과 톨루엔으로 추정되는 액체가 담긴 페트병, 라이터 등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체포 도중 경비원에게 붙잡히자 페트병을 꺼내 던지려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용의자인 한국인 강모 씨는 자신의 혐의를 인정했으며 이후 자세한 동기 등에 대하여 조사를 받았다.


6. 아베 신조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편집]


2013년 12월 26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덕분에 이미 냉각될대로 냉각되었던 한일관계절대영도를 향해 가는 중. 예전에도 총리가 참배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현직 총리로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이후 7년만의 참배였다. 또한 아베 신조는 지난 임기 때는 참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동이 더욱 크다. 정작 본인은 지난 내각 때 참배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고 발언했을 정도. 게다가 이번에는 한일관계가 매우 안 좋은 상태에서 참배했기에 파장이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성토했다.

게다가 아베 신조는 야스쿠니 신사에 2013년부터 8년 연속 다마구시(たまぐし)[2]를 공물로 보내왔다. 매번 참배를 하지는 않았어도 사실상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간 셈이 된다.

한국중국은 이 참배와 관련해 "우리 정부는 개탄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날 오후 정부 서울청사에서 성명서를 통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그간 이웃나라들과 국제사회의 우려와 경고에도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범들을 합사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유 장관은 "야스쿠니 신사는 동아시아를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조선 총독으로서 징병, 징용, 공출 등 각종 수탈통치로 우리 민족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피해를 안긴 고이소 쿠니아키 등 용서받을 수 없는 전쟁범죄자들을 합사하고 있는 반역사적 시설물"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아베 총리가 이러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그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서 한일관계는 물론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협력을 근본부터 훼손시키는 시대착오적 행위이다"라고 지적했다. 유 장관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소위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이름 아래, 국제사회에 기여하겠다고 하나 과연 이러한 잘못된 역사관을 갖고 평화 증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는 이 참배에 대해 아베 신조 총리를 규탄하며 반일시위가 일어났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십명의 시민들이 일장기를 찢고 밝으며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외쳤고 '일본제품 사지말자', '정신나간 일본'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랫카드를 들면서 일본 대사관 앞으로 진입하려던 시위자과 경찰 간의 충돌이 벌어져 일본 대사관 앞은 아수라장이 됐다. 시민사회, 아베 야스쿠니 참배 한목소리로 규탄

중국아베 신조 총리가 신사 참배를 강행한 데 대해 "강렬한 분노와 함께 비난을 표시한다"고 밝혔다. 또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침략전쟁을 부인한 것과 다름없으며 인류 역사와 정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중국 외교부는 이날 또 주중국 일본대사에게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방문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주일중국대사관도 일본 외무성에 항의를 전달했다. 중국 외교부 친강 대변인은 담화를 통해 "일본 아베 총리가 중국의 결연한 반대에도 거리낌 없이 2차대전 A급 전범들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고 비난했다. 친강 대변인은 또 "일본 군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은 중국아시아 국가 인민에게 심각한 재난을 불러왔으며 일본 인민 역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면서 “야스쿠니 신사는 2차대전 기간 일본 군국주의가 침략전쟁을 일으킬 때 사용한 정신적 도구이자 상징”이라며 지적했다.

그동안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문제라며 줄곧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왔던 미국도, 이 사태에 대해선 '일본이 잘못했네'를 외쳤다.야스쿠니 참배 아베 두고 미국도 규탄 "실망스럽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일관계를 어떻게든 개선하여 대중국 포위망을 짜야 하는 입장인지라, 여기에 초를 치는 일본의 이런 움직임이 당연히 달가울 리가 없다. 그런데 일본이 거기에 완전히 반하는 행동을 했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격노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이 이런 미국의 반응에 굉장히 당황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미국의 반응을 예측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다.

참배 얼마 전에 미국미국 부통령까지 파견해가며 한일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해왔다. 당시, 부통령이였던 조 바이든[3]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만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말렸다. 이에 아베 신조 총리는 "갈지 말지는 내가 판단하겠다"고 대답했다고. 그리고 바이든 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일본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지 않을 것이니 한일관계를 개선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베 신조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졸지에 미국 부통령이 한국 대통령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 셈. 일본 정부는 바이든 부통령을 겨냥하며 "확답 안 했는데 왜 자기네 희망사항을 섞어서 한국 대통령(박 대통령)에게 말해 놓고 거짓말시켰다고 화내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 참배로 인해 중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양국 간의 민간 교류도 잇따라 취소됐고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왜구는 중국에서 나가라" "일본 상품을 불매운동 해야한다"는 등 중국 내 반일 감정이 격화되었다.
대만홍콩에서도 잇따른 항의집회가 열렸다. 2013년 12월 27일 오전 대만 타이베이시의 일본대만교류협회 앞에서 약 50명의 시민들이 "일본군국주의다!" "아시아의 평화 유지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등 항의하였다. 영상(중국 본토에서 전한 방송) 가오진 쑤메이 입법위원도 이 집회에 참여해 이번에도 야스쿠니 반대 활동을 벌였고 아베 신조 총리의 사진을 찢어 던지며 항의 퍼포먼스를 했다. 같은 날 홍콩에서도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영상 홍콩 역시 일본의 점령을 받아 당시 중국인이 많이 학살당하고, 홍콩의 언어인 영어와 광둥어 모두 사용금지되고 일본어만 쓸 것을 강요받고, 강제 지명 변경 및 창씨개명,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대규모 생체실험까지 겪은 엄연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야스쿠니 참배에 격앙하는 것은 당연하다. 참고로 이 시위대들은 홍콩의 대표적인 반일 단체로, 이들은 2012년에도 센카쿠 제도에 상륙해 오성홍기를 들고 의용군 행진곡을 부르며 댜오위다오가 중국땅이라고 외치다가 결국 일본 측에 체포됐던 친중 성향의 홍콩인들이다. 한편 시위 참가자 중 한명은 "일본의 이러한 행동은 아시아 인민들의 우정과 신뢰를 얻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여태껏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러시아유럽연합까지 이 참배에 대해 '실망했다', '유감이다' 등의 뜻을 표했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 모두 2차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생각했을때 당연한 일이다. 여담이지만 이 일에 대해 일본에서 활동 중인 혼혈 방송인 하루카 크리스틴은 "해외에서 가장 비교할 만한 사례라면, 만약 독일 총리아돌프 히틀러의 묘에 참배한다고 하면,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라고 소신을 밝혔다. 하루카 크리스틴, 아베 비난 … "독일 총리가 히틀러 묘 찾은 꼴"[4]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경한 어조로 비판했다. #

싱가포르 외무부는 이 일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대변인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이어 "최근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의 야스쿠니 참배는 "더한 반발감정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싱가포르 역시 2차대전 당시 일본에게 겨우 4년 지배당했음에도 무수한 중국계 화교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하거나 살아남아도 특별세금에 시달렸기 때문에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반발한다.

2014년 1월 1일 새해 첫날 베트남은 이 참배와 관련해 일본에 야스쿠니 신사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루옹 타잉 베트남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교도통신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 측으로부터 설명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이 지역 평화와 안정, 협력을 위해 문제를 적절히 처리할 것을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베트남을 포함한 여러 아시아 국가들을 침공하고 식민지배 및 학살을 일삼았던것을 생각했을때 사실 야스쿠니 신사는 베트남 입장에서도 매우 불편한 장소이다. 다만 베트남이 워낙 친일 국가인지라 베트남양국관계를 고려해 직접적인 비판과 우려를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문제의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팜빙밍 베트남 외교부 장관은 지난 30일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과 전화회담했다. 두 장관은 "최근의 동북아 움직임 등 양측이 관심을 갖고 있는 지역·국제 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베트남 외교부는 전했다. 두 장관은 이번 통화에서 일본의 야스쿠니 참배 문제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1월 10일 프랑스 외무장관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일본 아베 신조 내각을 편드는 듯한 입장을 표명했다는 보도가 전해져서 국내외에서는 보도 직후 "2차대전 승전국, 그것도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프랑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불과 하루만에 프랑스 외무장관의 해당 발언이 일본 언론에 의해 왜곡되어 보도된 것으로 드러났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은 "프랑스독일과 전쟁의 비극을 겪어 봤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다", "이는 언제나 민감한 기억에 관한 문제이며, 그에 대한 해답은 역사가들의 연구와 민주적인 토론을 동시에 진행하고, 무엇보다도 상대에 대한 존중을 통해 찾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 자체로는 과거사 문제의 정치외교적 중요성을 전제로 하면서 일본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외교적으로 잘 조율된 수사였던 셈. 그런데 일본의 주요 언론, 특히 교도통신은 프랑스 외무장관의 발언 중 '기억(memory)에 관한 문제'라는 대목을 아베 신조 내각을 비롯한 일본 극우진영에서 애용하는 '전몰자 존숭(memorial)'으로 표현했다. 여기에 '역사가들의 연구와 민주적인 토론'이란 대목에서도 '역사가가 다루어야 한다'는 내용만 보도하여 1년 전 아베 신조 수상이 "침략 여부의 판단은 정치가가 아닌 역사가에 맡겨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2014년 1월 15일 그레이스 푸 싱가포르 총리실 외교담당 장관은 싱가포르를 방문한 야마모토 이치타 일본 해양정책 담당상과 만난 자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다른 나라를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푸 장관은 이어 야스쿠니 신사는 아시아 국가에 응어리가 있는 곳이라면서 아베 총리의 참배 자제를 촉구했다. #

영국 주재 중국대사 류샤오밍은 "야스쿠니 신사는 호크룩스 같은 존재다. 일본 영혼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드러낸다[5]."라고 비판했다.

마잉주 대만 총통은 "야스쿠니 참배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짓"이라고 강력 비난했다. #

2014년 1월 20일,[6] 일본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안중근테러리스트인데 그런 테러리스트 기념관을 만든 중국이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러자 중국이 폭풍처럼 "테러리스트보다 훨씬 더 무수한 사람을 학살하고 피해가 더 큰 A급 전범들을 애국자이니 평화의 주동자이니 헛소리로 찬양하며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두는 너희들이 할 소리냐?"라는 비웃음으로 응수했다.

2014년 2월 7일 오후 일본 도쿄를 찾은 약 10명의 한국 대학생이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에 반대하는 집회를 하려다 일본 경찰과 충돌했다.

7. 저스틴 비버 야스쿠니 신사 참배[편집]


2014년 야스쿠니 신사에 캐나다의 가수 저스틴 비버가 방문했다. 이후 저스틴 비버는 신사 앞에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자 중국과 한국의 누리꾼들은 크게 분노했고 "사과하라" "부끄러움을 알라" 등의 댓글이 무더기로 달리는 등 팬들로부터 비판이 제기되자 저스틴 비버는 게시물을 삭제하고 사과했다.

저스틴 비버는 "순전히 기도하는 장소로만 잘못 생각했고, 내가 마음의 상처를 준 모든 분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중국도 일본도 사랑한다"며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 사과로 소동은 가라앉기는커녕 새로운 불씨가 되고 말았다. 사과의 말 속에 한국이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인터넷에서는 "이제 한국에 오지 마라" "사과문을 보고 더 화가 났다"며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게시물이 삭제된 뒤에도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에서는 저스틴 비버를 보이콧하자는 움직임이 뜨거웠다. 이 불길은 인터넷상에서만 그치지 않고 TIME지와 BBC에서도 보도됐으며 친강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캐나다 가수들이 일본의 침략과 군국주의 역사를 명확히 이해하기를 기대한다며 저스틴 비버의 행동을 비판했다.

저스틴 비버의 사죄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사죄하려면 아예 참배하지 말라!"는 등의 격앙하는 반응이 나왔고 일부 넷우익들 사이에서는 "특아의 압력에 굴복한 저스틴 비버는 이 아니다" "개인 참배에 관해 중국과 한국은 간섭하지 말라"는 등 화제가 되기도 했다.


8. 야스쿠니 신사 화장실 폭파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야스쿠니 신사 화장실 폭파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야스쿠니 신사 천황 모독 사건[편집]


[월드리포트] 일본 극우 야스쿠니 신사가 일왕을 비판한 이유는?

야스쿠니 최고책임자는 왜 6개월만에 사임했나

2018년 6월 야스쿠니 신사 내에서 진행된 내부회의 중 '고호리 구니오' 궁사가 천황을 모독하는 발언을 해서 일본 내에서 논란이 된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전쟁 이후 현 아키히토 천황은 단 한번도 신사를 참배하러 오지 않았는데[7] 이를 보고 궁사가 아키히토의 행보를 비판하면서[8] "천황이 야스쿠니 신사를 망치려고 하고 있다!"라는 발언을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회의록은 일본의 한 주간지가 녹음해서 유출시켰다.

아무리 일본 천황이 별다른 실권이 없다고는 해도 일본 자국 내에서는 분명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만큼 유출된 이 회의 내용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결국 해당 궁사가 '사퇴'하는걸로 결론이 났다. 日야스쿠니 궁사 "일왕이 신사 망친다" 발언 파문에 사퇴

일본에서만 논란이 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사건은 야스쿠니 신사의 현 상황을 말해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본 극우가 떠받드는 일본 황실에서 배척받는 것이 야스쿠니 신사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압박이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야스쿠니 신사도 더 이상 예전같은 위상을 가진 곳이 못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19년 8월 보도에 따르면 "2018년경 야스쿠니 신사에서 당시 아키히토 덴노에게 '2019년 야스쿠니 신사 창설 150년을 맞아 실시할 예정인 기념 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궁내청 차원에서 이를 거부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망언의 배경에는 그때 당시 야스쿠니 신사 150주년 기념식 참석 거부에 대한 반발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10. 야스쿠니 신사 정문 부근 화재사고[편집]


2018년 12월 12일 오전 7시경 중국인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이름이 쓰인 종이에 불을 질렀다.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있는 신몬(정문에 해당) 부근에서 불이 났지만 곧바로 꺼지면서 다른 건물 등으로 옮겨붙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 중국인은 불을 지른 뒤 "난징대학살에 항의한다", "군국주의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야스쿠니 신사의 경비원은 시위를 벌인 남성과 이 상황을 촬영한 홍콩인 여성 1명을 붙잡았다.

도쿄 경시청은 불을 붙인 것으로 보이는 외국인 남녀 2명을 대상으로 화재 당시 상황과 경위, 방화 여부 등에 대해 조사를 벌였으며, 이들은 경찰에서 "우리는 홍콩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日 야스쿠니 정문 인근서 불…현장에 있던 '홍콩인' 남녀 조사(종합)

도쿄 경시청은 일단 남성을 신사 경내로 무단 침입한 혐의(건조물 침입)'를 적용해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아울러 함께 있던 여성에 대해서도 당시 상황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 측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화재와 관련된 사항은 경찰에서 대응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11. 야스쿠니 중국인 먹물 사건[편집]


2019년 8월 19일 오후 2시 반쯤 야스쿠니 신사에서 중국인 남성 후다핑이 야스쿠니 신사 배전이 매달린 막에 먹물 같은 검은 액체를 뿌렸다. 이 남성은 중국어로 보이는 문장이 적힌 종이를 걸려고 했다고 하며 검은 액체를 뿌린 칸막이 천에는 일본 왕실의 상징인 국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 남성은 근처에 있던 야스쿠니 신사 경비원에게 제압됐다.

이후 이 중국인은 경찰에 체포되어 기물 파손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 대해 '먹물을 뿌린 것이 틀림없다'라고 용의를 인정하고 있어, 동 경찰서가 상세한 동기등을 조사하고 있다. 경시청은 해독을 진행하고 있다. 후 씨는 이달 17일 가족과 함께 일본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12. 카야노 아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카야노 아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또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불참하였으며, "야스쿠니는 머리에서 지워달라"라는 발언까지하자 오키나와의 주일미군기지인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와 정치자금 스캔들, 중국와의 어선 분쟁 외교 굴욕, 경제 불안 등과 함께 결국 위상이 추락하여 집권 약 9개월 만에 퇴임하였다.[2] 물푸레나무 가지에 흰 종이를 단 것.[3] 현 미국 대통령[4] 아돌프 히틀러는 총통벙커에서 4월 30일에 자살한 후 시체는 벙커 입구 근처에서 불태워졌으며 베를린 자체가 한창 전투 중이었기 때문에 무덤이고 뭐고 없다.[5] The Yasukuni Shrine in Tokyo is a kind of horcrux, representing the darkest parts of that nation's soul.[6] 일본열도에서 중국이 한국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상하이에서 수용하였다는 오랜 소식을 접하여도[7] 사실 이와 같은 행보는 아키히토의 아버지인 히로히토 때부터였다. 히로히토는 패전 후 59년 B,C급 전범들이 야스쿠니에 합사된 후에도 참배했지만 78년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이후에는 참배한 적이 없으며, 사후 시종이 남긴 메모에도 이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참배하지 않았다. 아키히토도 아버지의 의지를 이어받아 참배를 하지 않았다.[8] 여기에는 아키히토 덴노가 전후 평화주의적 행보를 보이며 참회발언을 한 것에 대한 비판 또한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위령 여행으로 어디를 방문하든 거기에 위령은 없다"라는 망언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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