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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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신토 야스쿠니교
2. 야스쿠니 신사를 이해하기 위한 사상적 배경
3. 야스쿠니 신사의 문제
4. 합사 취소 운동과 소송
5. 총리 참배와 전범 분사 문제
6.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안 모셔놨나?


1. 국가신토 야스쿠니교[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성향을 삭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신토의 상징적인 조직이었기에 폐지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종교법인으로 종교의 자유를 방패 삼아 살아남았다. 문제는 특정 개인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것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국주의 자체를 숭배하는 곳이 되었고, 거기에 유력 정치인들이 적극 참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는 그냥 사설 종교법인이다. 이 신사는 일본이라는 국가와는 법률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므로 현재 야스쿠니 신사의 지위는 야스쿠니 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추도하는 것도 딱히 일본에 그런 법이나 조례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며, 일본 정부에서도 딱히 제어할 권한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위 이야기는 단지 겉으로 하는 소리다. 연립여당이자 보수당인 자민당을 필두로 정치인들이 사적으로 참배하는 것은 물론이요, 일본 최대의 우익 결사단체인 일본회의에는 일본 정치인 수뇌부가 떡하니 들어 있고 이것이 신사본청과 깊은 커넥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고, 일본 후생노동성에서는 자위대 대원 같은 사람들의 명부를 넘겨주는 일을 하면서 대놓고 야스쿠니 신사의 업무를 지원하고 있으며, 신사본청 역시 야스쿠니 신사와 업무를 제휴하고 있다. 방위대학교 사관생도들도 참배를 하는데, 방대 측에서는 개인 참배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편의를 봐주고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야스쿠니 신사는 현충원이나 알링턴 묘지와 같은 국가의 공공 추모 시설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법률상으로는' 일본에는 제대로 된 추모 시설이 없는 것이다.[1]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충원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로서 운영되고 있어 국가의 공식적인 시설이며, 알링턴 묘지는 종교에 대해서 중립적이고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예식에 따른 장례도 허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신토의 사설 종교집단'인 야스쿠니 신사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물론 현충원 역시 종교에 대해 중립적이다.

하지만 "일본은 국가에 몸바친 사람을 위한 추도 시설이 없으니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시설을 건설하자."라는 주장은, 극우 측에서는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정상적인 국립묘지가 생긴다면 야스쿠니 신사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시설인지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연간 20억에 달하는 운영 자금은 국가에서 분리된 뒤에는 유족회의 봉납금이나 유취관의 입장 수익료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차례차례 사망하면서 재정 위기를 겪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애초에 쇼와 덴노는 A급 전범들을 제사 지낸다는 것 자체에 불만을 드러냈다. 그의 입장에서는 되지도 않는 전쟁을 일으킨 탓에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자들을 도저히 충성스러운 신하로 볼 수 없었기 때문.

야스쿠니 신사는 심지어 건립 당시의 일본 전통과도 맞지 않는다. 당시 일본 관습에 따르면 망자의 제사는 망자의 자손 주도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이 이렇게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정당한 제사권을 지닌 이들을 침해하는 일이었다. 야스쿠니 신사 초기에 일본 민중들이 영 야스쿠니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를 띄우고자 화려하게 제전을 거행하고 봉안된 망자의 유족들을 불러 행사를 하는 등 조치를 취하여, 민중들이 야스쿠니를 받아들이고 가족이 합사됨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야스쿠니 신사가 마치 일본의 신사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있어 여론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2. 야스쿠니 신사를 이해하기 위한 사상적 배경[편집]


이미 일본인들 스스로 주장하는 그 신토에서도 멀리 동떨어진 지 오래다. 일본에는 온갖 이 있는데[2], 이중 인귀(人鬼)[3]를 신사에서 모실 때는 주로 원한을 품어 세상에 재앙을 끼치는 영을 진정시키는 목적이었다.[4] 바꾸어 말하면 세상에 재앙을 끼칠 수 없는 인귀, 살아생전 권세를 누리다가 평온히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신사를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신토 전통을 깨트렸다. 자신이 죽거든 신사를 세워, 승리한 권력자로서 죽는 자신을 신으로 모시라 하였다. 이때부터 인귀를 모시고자 신사를 세우는 데에는 민중 전통과 권력자 전통으로 나누어졌다. 민중 전통은 전통적인 목적대로 세상에 재앙을 끼치는 혼령을 진정시키고자 하였고, 권력자 전통은 권력자들이 죽어서도 자신과 자신의 후예들을 높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시신사를 그냥 철거한 것도 아니고, 폭파시켜 버렸다. 현재 존재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신사는 추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복구시켰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인의 종교관에서는 적대한 세력이나 심지어 반역세력조차 죽게 되면 은혜와 원한과는 상관없이 영혼을 구제하고 위로하는 제례를 행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으나, 도쿄 쇼콘샤는 에도 막부를 지지한 측의 전몰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메이지 유신 지지 측 전사자의 영혼만을 위로하는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에도 막부 측 사망자를 모시지 않았으니, 이미 쇼콘사 시절에도 일본의 옛 전통과 비교하면, 이미 반쪽짜리 시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목적이 바뀌어서 영혼을 위령함이 아니라 충혼, 즉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 군인을 높이 받들어 그 명예를 빛나게 함이 된다. 원한을 품은 영혼을 위로한다"는 목적에서 "충성스러운 군인의 영혼을 높이 받들어 공을 기억하고 명예를 빛나게 한다"는 목적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스쿠니 신사는 원한을 풀게 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야스쿠니 신사에 이름을 올림을 죽은 혼령이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에 충성하라는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즉, 야스쿠니 신사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국가에 충성하고 천황을 우러르라는 프로파간다를 위한 장소로 재건축된 것이다. 때문에 메이지 유신에 큰 공로를 세운 에토 신페이(사가 번)와 사이고 다카모리(사쓰마 번) 조차 사가의 난과 서남전쟁에서 천황에게 적대하였다는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않았다.

이러한 목적은 명백하게 의도한 것이다. 도쿄 쇼콘샤 시절부터 1880년대까지 야스쿠니 신사 주변은 시장거리였던 까닭에 항상 소란스러웠으나, 대대적인 주변정리를 통해서 경건한 분위기를 지니도록 주변을 조성하였고, 1898년 9월 이전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병으로 죽은 군인은 설령 전쟁터에서 죽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가히 명예롭게 죽은 군인들만 받아들였다.[5] 하지만 이러한 기준으로는 청일전쟁 전사자들 대부분이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갈 수 없기에, 천황의 특별한 허가와 배려로 말미암아 그러한 구분 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즉, 야스쿠니 신사의 성격이 처음부터 천황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겸한 군국주의 성향 강화였지만, 이때를 기점으로해서 보다 노골적으로 바뀐 셈. 그리고 이때부터 배향된 신위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6] 메이지 덴노, 다이쇼 덴노, 쇼와 덴노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적에 육군 대원수 군복을 입은 데서도 야스쿠니 신사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3. 야스쿠니 신사의 문제[편집]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 도중에 죽은 황군(천황의 군대)을 미화하는 장소였다. 군인으로서의 행적은 평가에서 제외하고, 그저 전사자라면 무조건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는데,[7] 이런 식의 선전은 일본의 팽창주의가 극에 달한 태평양 전쟁에서 두드러지는데 일본이 궁지에 몰리고 아사자가 속출하던 전쟁 말기에 가서는 자살 공격을 독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된다. 어차피 죽으면 야스쿠니에 모셔지니 사악한 연합군에게 항복했다가 험한 꼴 당할 바에 자살 공격을 해서 편히 죽고 영령으로 모셔시는 게 낫다는 논리. 이에 대해 CIA의 전신이 되는 OSS는 일본 지도부가 자포자기식 자살을 유도하기 위해 야스쿠니를 활용되고 있다고 보았다.[8] 이런 인식은 전쟁 후에도 변하지 않아서 단순 전사자만이 아닌 도조 히데키를 포함하여 여러 전범 또한 위령하는데 이르렀는데 이를 미루어 보아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본질은 '전쟁의 희생자들을 통해 과거의 전쟁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로 미화하는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특히나 도조 히데키 같은 경우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전범 재판을 했을 경우에도 사형을 면키 어려웠으리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군인 겸 수상으로서 막장으로 정부를 운영했다. 순수하게 일본인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도조 히데키는 욕을 먹으면 먹었지 칭송받을 인물이 아니다. 자기 나라를 말아먹은 이런 인물마저 야스쿠니 신사에 배향함은 문제가 심각하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일반 전몰자들도 있으니 전범들만 합사한 것이 아니며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다'라는 해명을 하고 있다.

거기다가 야스쿠니 신사 내에 있는 전쟁박물관인 유슈칸(遊就館)이라는 박물관은 더욱 극우적인데, 가이텐이나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한 죽음의 철도에 사용된 C56형 증기 기관차[9] 같은 군수품을 전시하거나 '대동아 전쟁은 아시아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따위의 전시물들을 대놓고 전시하고 있다.[10] 심지어는 한국인이나 대만인들도 자발적으로 참전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따로 전시물이 있을 정도.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여기서 장교용 일본도도 만들었다.

일본 신사에서 도리이(鳥居)[11]를 높게 세우는 것도 야스쿠니 신사에서 시작한 유행이다.

다른 신사와는 달리 야스쿠니 신사는 패전 전까지 해군육군이 공동으로 관할했는데 일본군 군부는 야스쿠니 신사에 청동으로 당시 일본에는 없던 큼지막한 도리이를 세웠다. 이후 일본 각지에서 경쟁적으로 도리이를 크게 세우기 시작했다. '도키노 사쿠라'(동기의 벚꽃)라는 전쟁 시절 노래에도 노래 가사 중에 '전쟁 중에 각지에서 흩어져 죽은 전우들이 야스쿠니 신사 앞마당 벚꽃으로 다시 만나자' 하는 가사가 있을 정도로 군국주의국가신토의 상징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이런 상징물이 되지는 못해서, 한동안은 일본 정부가 유족들을 상대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게 유도하느라 꽤나 애를 썼다.

상당히 널리 알려진 잘못된 상식으로, 야스쿠니 신사가 전사자들의 '위패'를 모셔두고 있다는 것이 있다.

위패를 모심은 유교 전통으로 동북아시아 불교가 그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 불교 역시 이를 사용한다. 신토에서는 본디 위패가 없었지만, 근대에 신토식 조상의례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교와 일본불교의 형식을 참고하여 위패를 받아들이되, 영새(靈璽)라고 하였다. 신토의 영새가 불교나 유쿄의 위패와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영새를 담는 함에 거울을 설치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만약 모셔야 할 신위가 한둘이 아닌데 공간이 부족하다면? 일본 신토에서는 그럴 때에는 영새부(靈璽簿)라 하여 문서에 죽은 이의 이름과 간단한 사항을 적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영새부는 본디 영새(위패)를 대신하여 만든 것이므로 그 또한 영새함과 비슷한 함을 만들어 그 안에 넣고 신단에 안치한다.

야스쿠니 신사 역시 영새부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있으며, 특히, 신좌파 계열에서는 없애야 하는 1순위 대상으로 꼽히고 있다.야스쿠니 해체 기획라는 단체도 있다.

4. 합사 취소 운동과 소송[편집]


야스쿠니 신사 관련 뜨거운 감자 중 하나는 한국, 대만, 오키나와 출신자 합사[12][13] 문제이다.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되어 전쟁에 나가서 사망한 외국인들의 신위까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징집되어 전사한 부친이나 다른 가족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 많은 유족들이 합사취소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름을 제거해 달라는 소송이 많았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적 해석을 이유로 거부하고 있다. 그 해석에 따르면 야스쿠니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모셔진 각각의 신위들이 전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신을 모시는 좌(座)는 단 하나뿐이고, 수백만의 '영령'이 그 단 하나의 좌에 모셔지기 때문에 그 중 일부만 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야스쿠니에서 모시는 신은 수백만의 귀신들이 하나의 도가니 안에 합쳐져 있는 귀신 덩어리이고, 그 안에 귀신을 한번 집어넣고 나면 다시는 꺼낼 수 없다는 소리이다. 야스쿠니 신사 측은 A급 전범 분사 문제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내세워 반대한다. 모셔진 신위가 A급 전범이든 징용 피해자든 뭐든 간에, 사전에 동의를 받았든 안 받았든 어떤 사정이 있든 간에 한번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졌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 불교 식으로 "고인의 불단을 다른 곳에 마련했다고 고인 유해 모신 곳에 성묘 안 가느냐"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사실 일본 전통 신토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위 단락들에서 설명된 대로 야스쿠니 신사의 애초 건립 목적, 그리고 국가신토의 종교적 논리 자체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신격화된 천황을 중심으로 국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신민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야스쿠니의 신의 좌가 하나 운운하는 것도 이 때 새로 만들어진 설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원이 어찌됐건 야스쿠니 신사 측은 그것이 자기네들이 신을 모시는 원칙이라며 전혀 바꿀 생각이 없고, 일본 행정부와 사법부는 그 종교적 해석에 국가가 관여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야스쿠니 신사 측의 주장을 지지, 묵인하고 있다.

물론 야스쿠니 신사의 이러한 입장은 별다른 동의도 없이 합사당한 식민지 출신 피해자 유족들 입장에서는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느껴질 소지가 크다. 그래서 여러 유족들이 항의 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일본 법원에 합사 취소 소송을 제기했지만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 행정부, 사법부 측의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백번 양보해서 거기 합사시키는 건 좋다고 쳐도, 그럼 합사된 한국인의 유족이 야스쿠니에 방문하면 받아들여주느냐? 희한하게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일본 처녀 아끼꼬의 진실 찾기' 에피소드에서 이 어처구니 없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심지어 살아 있는 한국인까지 강제로 합사되어 있다. 당사자가 항의해도 무시한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안녕, 사요나라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도록 하자.

그런데 사실 합사된 한국인들 중에서도 전범이 많다. A급은 없으나 B, C급 전범으로 148명이 있는데, 이들 중 23명은 처형당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국인 출신 군인 중 가장 높은 직위까지 올라간 홍사익. 그 때문에 대한민국이 출범하자마자 외무부나 장택상도 전범 재심사를 요구했고##, 한국인 전범들도 한국 정부에 사정했다. 강제징병된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외교문제로도 번졌다.###,## 전쟁 중에도 한국 정부는 한국인 전범 석방에 노력하는 등 야스쿠니 신사와 한국인 전범은 뗄 수 없는 문제다.

2011년 7월 21일, 일본 법원은 "살아있는 한국인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해서 제사를 지내는 건 인권 침해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 이런 강제 합사 문제는 일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종교나 유족 의향도 무시하고 막 집어넣어서 일본그리스도교 신자 유족들이 소송을 낸 적이 있고, 해결을 위해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 아스쿠니 신사 문제위원회를 만들어 법정투쟁까지 나섰지만, 친절하신 일본 사법부는 '종교적 인격권은 법적 보호 대상외'라면서 기꺼이 무시해 주셨다. 이 정도면 고인드립이자 부관참시의 최종판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 안타깝게도 일본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발언권이 약한 나라라서 이렇게 문제를 삼아도 논란은 커녕 제대로 된 의제화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

이는 일본 사법계 특유의 보수주의 폐단 때문으로, 일본의 사법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평온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친다. 신토와 관련된 종교적 관습을 건드리는 것은 일본 사회에서 큰 터부이므로 법리가 어쨌든,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 이와 관련해서 더 알아보고 싶다면 엔자이메이와쿠 참조.

즉, 본질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는 신위를 배향함에 있어서 (대상이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대만인이든) 본인 혹은 유족의 의사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 철저하게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패전 전에도 그러했고 패전 후에도 그러하다. 영광스러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주거늘, 설령 유족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가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의 방식은 메이지 덴노가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이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올 만한 말인가.[14][15]

참고로 아소 다로가 비유의 예로 자신있게 입에 올린 알링턴 국립묘지는 종교는 물론 매장 여부에 있어서도 유족의 의향에 따르고 있다.

2013년 10월 23일 한국인 합사 문제 소송이 일본 법원에서 또 한 번 기각됐다.

한국인 유족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를 합사한 것을 빼달라고 소송했으나 5년 7개월 만에 내려진 판결은 “원고들의 모든 요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은 전액 원고가 부담한다.”로 읽는데 5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판사는 판결이유는 밝히지 않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떴다고. #


5. 총리 참배와 전범 분사 문제[편집]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리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주변국과 외교 문제를 빚었다. 의외로 최초의 참배자는 진보적 성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미키 다케오 총리. 다만 그는 사적 참배라며 선을 그었고, 공물 역시 그의 사비에서 충당되었다.

그 이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패전 40주년인 1985년 8월 15일 최초의 공식 참배를 했고(다만 2배2박이 아닌 1배 등 비 신토 양식으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1992년 11월 일본 유족회의 압력으로 일정을 알리지 않고 후다닥 참배했다. 1996년 7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사촌이 합사되었다는 이유로 다시 사적 참배. 이렇게 전후 공식, 비공식 참배는 4번 정도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한국에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사람은 역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前 총리. 그는 한국중국의 반대도 무시하고 결국 취임 직후인 2001년 8월 13일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방문하여 참배하였다.[16] 그나마 패전 60주년인 2005년 8월 15일에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하면서 좀 안 하나 했는데, 결국 다음 해인 2006년 8월 15일에는 총리 퇴임을 앞두고 기어이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방문하여 참배하였고, 주변국의 반대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반대 세력'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노골적인 불쾌감까지 드러냈다.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일본민주당자유민주당 초대 총재로 자리 매김 하였던 이후) 창당 이후 최초로 선거로 정권 교체를 이룬 민주당 정권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햐토야마 정권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A급 전범들을 모두 분리하는 방안 혹은 국립추도시설 건립을 검토하였으나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근 몇 년 동안 총리 자리가 바늘방석인지라 재임기간이 짧았던 탓. 실현 가능성도 적었겠지만, 그의 퇴임과 함께 이 해결은 물 건너 갔다.

2010년과 2011년 8월 15일,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세계대전에서 많은 국가, 특히 아시아 여러 국가에 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며 사죄했으며(2010년 간 나오토 담화),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2011년 이 날 52명의 일본 여야 의원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간 총리 내각은 일본인이 아니다"라고 발언했으며, 민주당의 차기 총리가 되었던 노다 요시히코 (전) 재무상은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A급 전범들은 전쟁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결국 자민당으로 정권이 갈린 2013년 4월 23일, 일본국회의원들이 대규모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자민당, 민주당 등 168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과 부총리 등 각료 3명이 참여했고, 66명의 국회의원이 대리인을 보냈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로, 아베 신조 총리의 침략 부정 망언과 시너지를 일으켜 외교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심지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는 미국알링턴 국립묘지와 다를 바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2013년 10월, 미-일 정례 외교-국방장관 회담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존 케리국무장관, 척 헤이글국방장관은 역시 도쿄에 위치한 치도리카후치(千鳥ケ淵) 전몰자 묘원을 참배했다.[17] 두 장관의 참배는 미국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알링턴 국립묘지와 동격으로 주장한 아베 신조 내각의 주장을 반박하는 무언의 메시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애초에 이 A급 전범 합사 문제에 쇼와 덴노조차 상당히 불쾌하였고, 이후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18] 이 정도면 천황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명분이고, 사실은 천황을 제대로 엿먹이는 시설이다. 다음 천황인 헤이세이 덴노 역시 황태자 시절에는 몇 번 참배하였으나 합사 후에는 참배한 적이 절대로 없고, 결국 헤이세이 시대 동안에는 한 번도 참배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외의 신사 참배 자체도 영 호의적이지 않은 쪽이고. 나루히토 덴노 또한 신사 참배를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A급 전범으로 사형당한 기무라 헤이타로의 아들인 기무라 타로도 A급 전범 신주 분사를 신사 측 주도로 실현시키려고 했다[19].

2017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정권 시절에 중국이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추도시설 설립을 타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에는 참배행위 자체가 일본 법에 문제될게 없음이 확인 되었다.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2013년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가 위헌이라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에서 아베 총리가 승소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계 뿐만 아니라 법계에 걸친 일본 사회전반에 걸친 문제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

현재까지는 현직 총리가 직접 참배까지는 안하고 공물로만 보내고 있다.

6.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안 모셔놨나?[편집]


단순히 전몰자들[20]이 모셔졌다는 이유로 대한민국현충원 비슷한 시설로 착각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야스쿠니 신사는 국립묘지와 같은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현충원과 같은 국립묘지는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이들에게 감사하는 곳이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국립묘지와 같이 보편성을 가진 곳이 아니다. 천황에게 충성한 자들은 '(죽어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고 다짐했는데, 이들은 죽어서 신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맹목적인 희생을 강조하는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허울 좋은 말일 뿐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결코 문화상대주의니, 국립묘지라느니 하는 이유로 용인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A급 전범이나 군인들만 추모하는 것만이 아니다. 도쿄 대공습 당시 군수공장의 인부와 국가의 강요 등으로 일하던 학생들, 그 외 민간인들도 함께 합사되어있다. 아마 당시 어떤방식으로든 군관련,사회관련으로 종사하던 사람들을 '군인'으로 뭉뚱그려놓았기 때문에 민간인에 대한 정보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인다. 다만 공습시 희생된 모든 민간인들이 합사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야스쿠니신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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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는 결정적으로 국립묘지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기는 힘든 것이 말은 거창하게 '합사'라는 것이지만 유골도 위패도 아닌 책에 이름만 적어놓았다. 게다가 유명한 전범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절대 다수 합사된 이들은 명부가 비공개이기도 하고.[21] 묘비에 이름이 공개되어 있고 시신이 매장되어 있는 국립묘지와, 유골도 위패도 아닌 책에 이름을 적는(그것도 비공개) 것은 경우가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다행히 전쟁 범죄자들 말고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을 추도할 만한 대체 시설이 있긴 한데,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라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무명용사를 추도하는 국립 시설이 그것이다. 게다가 이 묘원은 일본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는 시설이다.[22] 이렇게 대체 추도 시설이 있는데도 일본 극우들은 굳이 전범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 근래 들어 순국7사묘극우들의 집회 장소로 새로이 떠오르고 있다.[23][24]

사실 현충원도 유교 문화권 특유의 제사 중시와 공동묘지를 멀리 두는 문화, 그리고 미군의 철저한 영현 체계의 영향을 받아 건설된 것이지, 전사자들을 최대한 발굴해 국립묘지에 공동 매장하는 시스템이 세계적으로 그렇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팡테옹이나 이탈리아의 산타 크로체 성당,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처럼 직접 매장되는 것은 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위인들 뿐이고 일반적인 전사자들은 추모 공원이나 추모비 등을 통해 기념하는 경우가 많다. 상술되어 있지만 야스쿠니 합사 자체가 만들어진 전통이고 일본 전통으로 장례는 그저 유족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가끔 전몰자들의 영혼들이 원령이 되지않게 신사에서 달래는 정도다.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에 무명 용사와 민간인들만 묻혀있는 것도 사실 유체를 가져갈 유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일본에서도 정교분리는 지켜지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민간인이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것과 정치인들이 정부요인 자격으로 참배하는 것을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1] 사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정부 단위에서 설립, 운영하는 추모 시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 그것. 지금의 일본이 우경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야스쿠니가 더 관심을 받는 것이지, 중도정권이면 야스쿠니는 관심받을 일도 없었다.[2] 흔히 일본내에서 관용적 표현으로 800만 신(일본어로는 야오요로즈)이라고 하는게 이런거.[3] 사람이 죽어서 된 영. 중국 전통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중국에서는 신을 셋으로 분류하여 천신(天神)은 하늘과 관련된 신, 즉 상제나 별의 신, 기후의 신 등을 가리키고 지기(地祇)는 땅과 관련된 신, 즉 땅이나 곡식과 관련된 신이며, 인귀(人鬼)는 사람이 죽어서 된 영이라 하였다.[4] 이런 일본의 종교관을 기본적인 세계관으로 반영한 만화가 바로 블리치이다.[5] 이는 세계 각국의 국립묘지라면 고인에 대해 평가를 해서 명예로운 이들만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야스쿠니 신사의 기준으로는 훈장을 받을 정도로 공을 세운 인물임에도 오직 전쟁터에서 전사하지 않았다고 거부한다. 그런 반면 온갖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단지 전쟁터에서 전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아들인다. 과연 이게 제대로 된 국립묘지의 방식일까?[6] 야스쿠니 신사 측에서는 "일본을 위해 죽은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인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배향된 명단을 보면 오직 군인-남자인 경우에만 받아들였다. 민간인이거나 여자일 경우는 명백히 배척했다. 일본을 위해 죽은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인다는 말은 야스쿠니 측의 의례적인 말에 불과하다.[7] 이러한 행동은 모든 전몰장병들이 기꺼이 천황과 국가를 위해 기쁘게 충심으로 죽었다는 프로파간다로 활용된다. 청일전쟁 때, 기존 기준으로는 명예롭지 못하게 죽은 군인들도 야스쿠니에 모시도록 함은 유족들을 위로하는 의미도 있지만, 모든 장병들이 일심단결로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이미지 조성이 더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8] 원문[9] 철덕이 이거 보러 여길 갈 필요는 없다. 동형의 증기 기관차는 일본 각지에 수십 량이 전시되어 있고 복원운행중인 것도 2량이나 있다.[10] 그리고 그 안에서 극우들이 자발적으로 그네들 시각의 '불순분자'들을 감시하고 있다.[11] 일본 전통의 문. 문이라고 해서 여닫는 개념은 없다. 만화에서 간혹 절의 입구가 나올 때 나오는 큰 문. 바로 그것이다.[12] 合祀: 망자 둘 이상의 혼령을 한데 모아 제사함.[13]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것이 확인된 한국인은 19,650명, 대만인은 27,000명이고 추정범위까지 늘리면 한국인은 21,000명, 대만인은 28,000명일 것이라고 한다.[14] 애당초 일본인이라면 모를까 타국의 사람들에게는 메이지 덴노가 누군지 알든 모르든 한 가지는 일치한다. 자국의 우두머리는 아니라는 것. 여기에 메이지 덴노는 이미 죽은 지 한참이나 지난 사람인데 죽은 사람이 결정한 일에 꼭 산 사람이 따라야 한다는 법조차 없다. 심지어 메이지 덴노가 죽은 후(1912년) 합사된 이들은 설령 메이지 덴노가 되살아난들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다. 자신이 죽은 후 일이니까 그냥 야스쿠니 신사 측에서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 것 밖에 안된다.[15] 앞부분에도 어폐가 있는데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영광스레 모셔주는 것' 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야스쿠니 신사에서만 통하는 얘기고 각 종교 믿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는 매우 불쾌한 행위가 될 수 있으며(일본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만큼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것을 거부할 권리는 분명히 있다.) 외국인은 또 외국인대로 불쾌한 것이 현실이다. 즉 야스쿠니 신사의 '영광스레 모셔주는 것' 에 극우가 아닌 이상은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결국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자신들이 그들을 모셔주는 것을 마치 이타적인 양 주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당사자나 유족들을 조금도 배려해주지 않는 매우 이기적인 행위다. 여기에 그들을 빼준다고 해도 야스쿠니 신사의 존재 가치가(더이상 모신 사람들이 한 명도 안남는 것)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A급 전범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에 A급 전범도 뺀다고 쳐도 그래도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사람은 여전히 많다.[16] 원래 8월 15일 참배하기로 했지만 주변국의 반대를 의식하여 2일 앞당겨 참배하였다고 한다.[17] 치도리카후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명 일본군 병사들의 유골을 안치하며, 사설 종교기관 야스쿠니 신사와는 달리 엄연한 국가시설이다. 때문에 일본이 진정으로 자국 전몰자들을 위한 추모시설을 원한다면 야스쿠니 신사보다는 차라리 치도리카후치가 더 적합하다는 평가가 제기되어 왔다.[18] 히로히토는 나중에 중국의 의지로 전범재판에서 사실상 2차 세계대전에서 전범으로 처벌받아 사형 내진 폐위당했을 뻔 했지만 미국의 의지로 다행히 사면받아 전범재판에 기소되어 처벌받아 사형당하지 않고 목숨을 간신히 건졌을 뿐이니 참배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자기 목이 덜렁덜렁 했을 테니까. 물론 여기 묻힌 놈들이 고운 놈들도 아니고, 쓸데없이 전쟁을 벌인 결과 참패하여 히로히토의 목을 간당간당하게 만든 놈들이므로 개인적으로는 싫어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A급 전범 합사 이전에는 8번 정도 참배했다.)[19] 반면 기무라 헤이타로의 부인이던 기무라 카누이는 전범자의 유족회인 <시라기쿠(白菊) 유족회>의 회장을 역임하거나 A급 전범들만의 유족회인 '칠광회(七光会)'를 운영하는 등 전범자들의 명예회복(?)에 나섰다.[20] 그게 전범이건 아니건[21] 한마디로 유족 관계자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누구 이름이 종이에 적혔는지 알 도리도 없다.[22] 사실 이것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 사병이 항명하고 자기 소신을 지켜 제국주의에 가담하지 않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어쨌든 군인은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극렬 반전주의자들은 이것도 뭐라 하기도 한다.[23] 우리나라의 진보/보수들의 끝없는 논쟁인 건국절/광복절, 김구와 이승만의 경우와 같다. 야스쿠니 신사는 어쨌든 명목상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지 않는 사설 종교법인이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가 추구하는 방향과 이념은 일본 극우진영과 부합하기 때문에 일본 극우진영의 정치인들이 이곳을 가는 것 뿐이다. 다시말해 이념에 따른 선택의 문제이지 대체시설의 유무에 따른 선택이 아니다.[24] 사실, 일본에는 전몰자나, 의사자, 순직 공무원들과 같은 국가유공자들을 기리는 국립묘원같은 게 치도리가후치말고는 없다. 무명용사가 아닌 '신원이 알려진' 전사자들 또한 유족들이 유체를 인수했기에 치도리가후치에 없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전몰자들을 야스쿠니같은 곳에서 추모하는 면도 없진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전쟁범죄자들을 모셔놓은 게 그른 일이며, 애초에 전몰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제대로 된 장소 하나 만들지 않은 일본 정부 역시 분명히 문제가 있으므로 그렇게 된 속사정이 있다고 해서 이런 곳을 옹호해 줄 건덕지는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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