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시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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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시어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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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파일: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36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토니 아담스
(1994~1996)

앨런 시어러
(1996~2000)


데이비드 베컴
(2000~2006)


앨런 시어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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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프리미어 리그 심볼.svg

1994-95 · 1995-96 · 1996-97
파일:PFA_UK_logo.png

1994-95 · 1996-97
파일: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1998-99 · 1999-00 · 2002-03
파일:FWAlogo.png

파일:프리미어 리그 심볼.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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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1991-92 · 1992-93 · 1993-94 · 1994-95 · 1995-96 · 1996-97 · 2002-03
파일:UEFA 유로 1996 심볼.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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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5 ESM 올해의 팀



1996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호나우두
2위
조지 웨아
3위
앨런 시어러
1996 Ballond'or
수상
마티아스 자머
2위
호나우두
3위
앨런 시어러
파일:월드사커 로고.png
Player of the Year 1996
수상
호나우두

2위
앨런 시어러

3위
조지 웨아


앨런 시어러의 기타 정보

연도별 전 세계 축구 이적료 1위
1995
스탠 콜리모어
(1300만 유로)

1996
앨런 시어러
(2100만 유로)


1997
호나우두
(2800만 유로)






영국방송공사
BBC SPORT

파일:external/www.fm-base.co.uk/911557d1437316687-alan-shearer-pundit-manager-shearer.jpg

이름
앨런 시어러
Alan Shearer CBE
출생
1970년 8월 13일 (53세)
잉글랜드 타인 위어뉴캐슬어폰타인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
신체
183cm, 82kg
직업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해설자
경력
선수
사우스햄튼 FC (1988~1992)
블랙번 로버스 FC (1992~1996)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6~2006)
지도자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5~2009 / 코치)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9 / 감독대행)
기타
BBC (2009~ / 해설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21~ / 앰버서더)
국가대표
63경기 30골 (잉글랜드 / 1992~2000)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은퇴 후 행보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수훈
6.4. 개인 기록
6.5. 리그 기록
7. 기타



1. 개요[편집]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現 BBC 축구해설가.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대표한 선수이며, 나아가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260골)이자 3시즌 연속 득점왕을 달성한,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전드 공격수였다.[1]

은퇴 이후에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 대행직을 맡기도 했으며, 현재는 BBC의 축구 해설가이자 뉴캐슬의 앰버서더로 활동 중이다.

2. 클럽 경력[편집]



2.1. 사우스햄튼 FC[편집]



뉴캐슬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뉴캐슬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의 우상은 뉴캐슬의 간판 스트라이커이자 후일 감독으로 재회하게 되는 케빈 키건. 학교대표팀 등에서 활약하며 두각을 나타냈으나, 정작 트라이얼에서는 고배를 맛보며 뉴캐슬 입단에 실패하게 되는데, 그를 눈여겨 보고 있던 스카우터가 유소년 육성으로 유명한 사우스햄튼으로 그를 불러 고향팀이 아닌 사우스햄튼에 입단했다.

1988년 4월 9일 만 17세 240일의 나이로 아스날 FC전에서 첫 1군 선발 출전과 동시에 해트트릭으로 팀을 3-0 승리로 이끌며 잉글랜드 1부리그 역사상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자가 되었다. 이후 점진적으로 1군 출전수를 늘려가면서 사우스햄튼에서 5년간 활약했고, 당시 팀의 주전 공격수 맷 르 티시에를 받치는 역할을 수행하며 158경기 43골을 기록했다.


2.2. 블랙번 로버스 FC[편집]


1992년, 시어러의 잠재성을 알아본 알렉스 퍼거슨 감독[2]이 시어러를 올드 트래포드로 데려오려 했지만, 정작 시어러는 당시 영국 최대였던 33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블랙번 로버스로 이적했다. 당시 영국 최고의 재벌 중 하나였던 잭 워커에게 인수된 블랙번은 90년대의 첼시라 할만한 엄청난 머니파워를 자랑한 클럽으로, 시어러의 영입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었다.

블랙번에서 재능을 만개한 시어러는 93-94 시즌, 94-95 시즌, 95-96 시즌 모두 경기당 1골에 육박하는 엄청난 득점력을 자랑하며 PL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급부상했다. 특히 94-95 시즌에는 당대 최고의 타겟맨 중 하나였던 크리스 서튼과 "SAS (Sutton And Shearer)"[3] 라고 불리우는 콤비를 이루면서 블랙번을 81년만에 3번째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 1부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4]

우승 당시 기뻤던 시어러는 집으로 달려가서 집안 담장에 페인트칠을 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2.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편집]


시어러는 유로 1996 이전 국가대표에서 12경기 연속 무득점으로 무지하게 까였으나, 유로 96 본선에서는 같은 뉴캐슬 출신인 폴 개스코인과 더불어 당대 최강 팀들 중 하나였던 네덜란드를 4-1로 무찌르는 등 날아다녔고, 정작 95-96 시즌 케니 달글리쉬 감독이 풋볼 디렉터로 영전하면서 지도력에 문제가 생긴 블랙번은 7위로 떨어져 시어러를 지킬 여력이 없어졌다. 바비 롭슨 경의 FC 바르셀로나를 비롯하여 유벤투스 FC,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까지 유럽 최고의 팀들이 시어러를 잡기 위해 움직였고, 시어러가 가족을 위해 영국에 머물려 했던 탓에 이들 중 제일 유력한 행선지는 맨유였다. 결국 맨유로의 이적이 성사되려던 찰나,[5] 고향팀 뉴캐슬에서 드라마틱한 하이재킹에 성공하며[6] 1500만 파운드라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세계 최고액의 이적료를 대가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뉴캐슬 쪽으로 마음이 움직인 것은 자신의 고향팀인 것과 더불어 당시 뉴캐슬의 감독이 자신의 우상이었던 케빈 키건이었기 때문.

파일:external/news.bbc.co.uk/_45626947_shearer_newc_signing_416pa.jpg

팬들은 전 시즌 2위를 기록했던 뉴캐슬이 시어러의 합류로 화룡점정을 찍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첫시즌에는 31경기 25골을 기록했으나 팀은 또다시 2위에 그치며 우승에 실패했고, 그 다음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하여 17경기 2골에 그치고 팀의 성적 역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이후 뉴캐슬이 감독 교체 등으로 인해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우승 후보에서 중하위권팀으로 곤두박질하는 사이에도 시어러는 꾸준히 득점을 올렸으나 1969년 인터 시티 페어스 컵(現 UEFA 유로파 리그) 우승 이후로 메이저급 트로피 획득에 실패한 뉴캐슬 팬들의 갈증을 풀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00-2001 시즌에는 또 한번의 심각한 부상으로 선수생활이 끝날 위기까지 갔으며,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국가대표팀 은퇴를 택하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대부분의 축구 팬은 시어러, 그리고 뉴캐슬의 전성기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shearer_robson_1454929c.jpg

하지만 전설적인 명감독 바비 롭슨의 조언으로 시어러의 플레이 스타일은 크게 일변했다. 상술했듯 섀도우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빠른 스피드와 뛰어난 패스플레이에 기복 없는 득점능력까지 보유했지만 무릎이 박살나며 스피드가 급감해버렸다. 동시대 최고 스트라이커 호나우두와 비슷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시어러는 호나우두와 다르게, 부상으로 쉬는 기간 동안 바비 롭슨의 조언에 따라 열심히 운동해 몸을 불려 타겟 스트라이커로 완벽히 변신했다. 원체 섀도우 스트라이커로 뛸 때도 축구 자체를 보는 눈은 뛰어났기에 타겟으로 변신해서도 공간을 읽고 동료를 활용하거나 동료에게 공간을 열어주는 플레이가 준수한, 프리미어 리그 최상급 타겟 스트라이커가 되었다.

이후 웨일스 출신의 준족 스트라이커 크레이그 벨라미와 황금콤비를 이루며 2001-2002 시즌 37경기 23골로 재기하여 팀의 우승도전을 이끌었다. 뉴캐슬은 이후 세 시즌 동안 꾸준히 국내리그와 유럽에서 우승에 도전하지만 행운이 따르지 않아 번번히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시간은 흘러 결국 롭슨 감독과 벨라미 모두 팀을 떠났고 뉴캐슬은 다시금 하향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점점 들어가는 나이와 어수선한 주변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어러는 계속 뉴캐슬을 최전방에서 한결같이 이끌었고 계속 한결같이 골을 넣었다.

막장 감독의 대명사 그레이엄 수네스 아래에서 뉴캐슬은 강등 위기에까지 몰리기 시작했고, 2004-2005 시즌 종료 이후 은퇴를 결심했던 시어러는 마땅한 대체자가 보이지 않았던 팀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 한 시즌을 뛰기로 한다. 뉴캐슬 팬들은 이 마지막 한 시즌 동안 시어러가 고향팀의 유니폼을 입고 트로피를 손에 쥘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마지막 기회는 FA컵에서 찾아왔다. 불안정한 리그 성적에도 불구하고 FA컵에서는 원정에서 아스날 FC를 격파하는 등 선전했고, 결국 8강에 오르나 첼시 FC 원정이라는 난관을 만나게 되었다. 시어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뉴캐슬에서의 트로피를 안겨주기 위해 팀은 혼신을 다해서 뛰었으나 첼시의 막강한 수비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1-0으로 석패하고 말았다.

파일:external/news.bbc.co.uk/_45626948_shearer_lastgoal_gt.jpg

그로부터 1달여 뒤였던 2006년 4월 17일, 시어러는 라이벌 선더랜드와의 경기에서 페널티골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훌리오 아르카의 거친 태클에 무릎인대 파열이라는 부상을 당하며 시즌, 그리고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숙적 선더랜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선수생활을 마감한 모습은 역시 "시어러답다"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거 같다. 커리어 마지막 시즌에도 시어러는 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고 박수받을 때 그라운드에서 은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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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06년 5월 11일, 시어러는 은퇴 기념 경기를 갖고 모든 축구팬들의 축복 속에서 현역생활을 마무리한다. 그가 뉴캐슬에 남긴 것은 395경기 206골,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추억이었다.

시어러가 은퇴한 이후로 뉴캐슬은 공격력이 눈에 띌 정도로 떨어졌고, 이는 뉴캐슬이 08-09 시즌에 강등당한 이유 중 하나였다. 앤디 캐롤이 시어러의 계승자로 기대를 모았으나 캐롤이 리버풀로 이적함에 따라 9라는 숫자는 다시 공석에 놓이게 되었다. 앤디 캐롤 이적 후, 파피스 시세가 새로이 9번을 달았지만 이 선수는 만능인 시어러와는 달리 아주 전통적인 득점만 노리는 스트라이커이기 때문에 시어러의 공백을 메꾸지 못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시어러는 잉글랜드 대표팀 소속으로 유로 1992, 유로 1996유로 2000,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다.

특히 자국에서 열린 유로 1996에서 5골로 득점왕에 올랐지만 안타깝게도 잉글랜드는 독일과의 4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이후 1998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5골, 본선에서 2골을 기록했고, 유로 2000 예선에서 6골, 본선에서 2골을 기록했다.

유로 2000이 끝난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한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사우스햄튼 시절에는 우월한 피지컬과 유스시절 미드필더로 뛴 경험을 살린 쳐진 공격수로서 득점보다는 팀플레이에 중점을 두었으나 블랙번 이적 이후에는 순간스피드와 탁월한 위치선정을 100% 활용하는 전형적인 골잡이가 되었다. 뉴캐슬 시절 때문에 시어러가 본래부터 전형적 타겟맨인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 신체적 전성기였던 블랙번 시절까지의 시어러는 거의 축구선수로서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완벽한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당시에도 무결점 스트라이커로서 칭송받았다.

그러나 뉴캐슬에서 당한 두 번의 부상, 특히 대표팀에서 은퇴하게끔 만든 두번째 부상으로 인해 스피드가 급격히 저하된 후로는 꾸준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플레이스타일을 180도 바꿔 상대 수비수들을 괴롭혀 팀메이트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타겟맨으로 변신했고, 이 때 날카로운 공간돌파가 특기였던 전성기의 벨라미와 완벽한 콤비를 만들어냈다. 뉴캐슬을 배경으로 한 축구영화 "골!"에도 카메오 출연했는데, 주인공 산티아고 뮤네즈가[7] 자신의 몇 배나 되는 무게를 지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운동하는 시어러를 보고 경악하는 묘사가 있다.

하늘이 내린 재능도 뛰어났으나 하나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팀의 요구, 그리고 자신의 신체적 변화에 맞춰서 매번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 낸 것이 시어러의 대단한 점이라고 불 수 있겠다. 이러한 적응을 위한 피나는 노력 덕에 그는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도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다. 부상으로 속도가 죽으니까 한순간에 먹튀가 된 옛 팀 동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8][9]

전성기에는 모든 면에서 흠잡을 곳이 없었으나 한가지 상징을 꼽자면 역시 강슛. 박스 어떤 각도에서도, 어떠한 불편한 자세에서도 날렸던 총알같은 슈팅은 지금까지도 현지 팬들에게 생생히 기억되곤 한다. 2002년 에버튼을 상대로 보여준 놀라운 발리슛, 1997년 레스터 시티 전에서 보여준 영국 축구 역사상 5번째로 빠른 속도의 슈팅을 기록한 그의 슈팅력은 힘과 정확도를 겸비했으며, 특히 페널티 상황에서 빛났다. 그리고 이 강슛이라는게 단지 발로 찬 슛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시어러는 헤딩으로도 상당히 많은 골을 넣었는데 헤딩골을 넣기 위한 위치 선정과 피지컬도 훌륭했지만 헤딩 자체가 굉장히 강력한 선수였다.[10]

또한 앨런 시어러는 축구 역사상 가장 페널티를 잘 찬 선수로 축구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거의 항상 변함없이 골대 우측 상단으로 차넣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날카롭고 강력한 슈팅을 하면서도 공이 목표 지점에서 빗나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게 항상 먹혔다. 시어러는 개인 통산 77회 PK시도 중 72회 성공, 성공률 93.5%라는 무시무시한 성공률을 갖고 있다.[11]# 클럽에서도 국대에서도 항상 페널티를 전담했으며 뉴캐슬에서 득점한 206골 중 총 45개가 페널티다. 은퇴 후에는 호주의 유소년 캠프에 초청되었다가 시범삼아 차본 페널티를 선방한 중학생 골키퍼(14세)의 손목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그걸 막은 골키퍼도 대단하고, 어린아이 상대로 전력으로 공을 찬 시어러도 참 대단하다.[12] 단, 페널티킥 득점 비율이 높은 것이 시어러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득점능력을 의심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힘있는 직선적 타겟맨으로 90년대를 풍미한 선수라는 점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종종 비교된다. 실제 시어러와 바티스투타는 1998 프랑스 월드컵 16강전에서 만나 각각 페널티킥 한 골씩을 넣으며 막상막하의 경합을 벌였다. 경기는 데이비드 베컴이 어리석게 퇴장당한 잉글랜드의 패배였지만..

파일:external/news.bbc.co.uk/_1546081_keano300.jpg

그밖에 정신적인 측면으로도 자기관리는 물론 리더로서 타고난 기질을 발휘하여 특유의 카리스마로 혼란스러운 뉴캐슬의 라커룸을 휘어잡았다. 다소 완고하고 원칙주의적인 측면이 있어 몇몇 선수 (선수시절 벨라미, 감독 때 바튼)와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의 명성 앞에 녹아내리고 시키는대로 잘 따라갔다. 그밖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성격으로,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로이 킨"저 ㅄ은 뭐임?"이란 표정으로 내리깔아 보면서 퇴장까지 시켜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승부욕도 강해서[13] 훈련중에도 동료들과 즉석 프리킥 대결 등의 경쟁을 즐기기도 하고,[14] "일등은 일등이고, 이등이나 삼등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는데, 실제 이 말은 시어러가 성취지상주의자여서 한 말이 아니라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뒤 아쉽게 놓쳐 버린 많은 우승컵들에 대해 아쉬워하면서 남긴, 어찌 보면 약간의 회한이 묻어 있는 말이었다. 이는 어찌 보면 트로피보다도 성취감보다도 돈보다도 고향팀을 사랑한 시어러의 소탈한 성품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말이기도 하다.

고향 클럽에 충성을 바치느라 커리어적으로는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15] 실력과 품성만으로 본다면 어떠한 반론의 여지도 없는 월드클래스 선수였고 티에리 앙리, 디디에 드록바, 웨인 루니 등과 함께 프리미어 리그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라고 할 수 있다.[16] 호나우두가 기술적이고 화려한 축구로 90년대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라면, 시어러는 "방법이 뭐든간에 어떻게든 골을 쑤셔넣는" 스트라이커의 표본이다.


5. 은퇴 후 행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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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즌인 2005-06 시즌부터 코치를 겸직했으며 은퇴 이후 지속적으로 뉴캐슬 감독 취임설이 나돌았다. 현직 감독들이 직접 불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앨런 시어러 감독설" 은 뉴캐슬의 고정 떡밥이 되었고, 시어러 역시 언젠가는 뉴캐슬 감독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수차례 뉴캐슬의 감독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러는 BBC에서 축구해설가로 남아있었고 방송인 생활에 만족하는 듯 했다.

그런데...

뉴캐슬이 강등 위기에 직면한 2008-09 시즌 막바지, 결국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죠 키니어 감독 대신 앨런 시어러가 구원투수로 투입된 것이다. 시어러의 지휘 하에 뉴캐슬은 잠시 향상된 경기력을 보이며 강등을 피하는 듯 했으나 그동안 쌓아온 업보(?)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2009년 5월 24일, 데미안 더프의 자책골로 아스톤 빌라에 무기력하게 1-0으로 패하며 16년간의 프리미어리그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시어러 본인은 팀에 잔류하여 재승격을 도모할 계획이었으나, 구단주 마이크 애쉴리와의 의견차이로 인하여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뉴캐슬은 크리스 휴튼 감독대행 체제로 2부리그에서의 첫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고, 시어러는 다시 BBC로 돌아갔다.

새로 부임한 휴튼 감독이 팀을 승격시킨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지금은 시어러의 위치가 좀 어중간해져 버렸다. 그도 그럴듯이 뉴캐슬을 제외하고는 팀을 강등시킨 것 외에는 경력이 일천한 감독에게 기회를 줄 팀이 흔할리는 없다. 하지만, 본인이 감독직으로 재도전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잉글랜드 축구계에서는 워낙에 명망이 높은 인물인데다가 선수 시절부터 지도력 하나는 대단히 뛰어났기 때문에 공석이 생긴다면 앨런 시어러에게 도박을 걸어볼 팀이 생기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감독직은 오지 않고 2009년부터 BBC 축구 해설가로 활동했고 2021년 10월 마이크 애슐리 구단주가 뉴캐슬 구단을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에 매각하자 새 보드진들이 시어러를 뉴캐슬 홍보대사로 위촉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프리미어 리그 레전드 출신 패널로서 본인이 직접 선택하여 이 주의 팀이나 올해의 팀을 선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6.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3위: 1996
  • FIFA 올해의 선수 3위: 1996
  • FIFA 100: 2004
  • UEFA 유로 득점왕: 1996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96
  • UEFA컵 득점왕: 2003-04[17]
  • PFA 올해의 선수: 1994-95, 1996-97
  • PFA 올해의 팀: 1991-92, 1992-93, 1993-94, 1994-95, 1995-96, 1996-97, 2002-03
  • PFA 세기의 팀 (1997~2007)
  • FWA 올해의 선수: 1993-94
  • FWA 공로상: 2001
  •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 1994-95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1994년 11월, 1998년 9월, 2002년 12월, 2003년 10월
  •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1994-95, 1995-96, 1996-97
  • 프리미어 리그 10시즌 최우수 선수 (1992-93~2001-02)
  • 프리미어 리그 10시즌 베스트 XI (1992-93~2001-02)
  • 프리미어 리그 20시즌 베스트 XI (1992-93~2011-12)
  • 프리미어 리그 명예의 전당: 2021
  • ESM 올해의 팀: 1994-95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4


6.3. 수훈[편집]




6.4. 개인 기록[편집]


  • 프리미어 리그 통산 최다 득점: 260골[18]
  • 프리미어 리그 통산 최다 페널티킥 득점: 56골
  • 잉글랜드 1부 리그[19] 최연소 해트트릭: 17세 240일
  • 뉴캐슬 유나이티드 통산 최다 득점: 206골


6.5. 리그 기록[편집]


연도
소속
경기

경기당 득점율
비고
1987-88
사우스햄튼
5
3
0.6

1988-89
사우스햄튼
10
0
0

1989-90
사우스햄튼
26
3
0.12

1990-91
사우스햄튼
36
4
0.11

1991-92
사우스햄튼
41
13
0.32

1992-93
블랙번
21
16
0.76
PL 출범
1993-94
블랙번
40
31
0.78

1994-95
블랙번
42
34
0.81
득점왕
1995-96
블랙번
35
31
0.89
득점왕
1996-97
뉴캐슬
31
25
0.81
득점왕
1997-98
뉴캐슬
17
2
0.12

1998-99
뉴캐슬
30
14
0.47

1999-00
뉴캐슬
37
23
0.62

2000-01
뉴캐슬
19
5
0.26

2001-02
뉴캐슬
37
23
0.62

2002-03
뉴캐슬
35
17
0.49

2003-04
뉴캐슬
37
22
0.59

2004-05
뉴캐슬
28
7
0.25

2005-06
뉴캐슬
32
10
0.31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20]
118
23
0.19

프리미어 리그[21]
441
260[22]
0.59

총합[23]
559
283
0.51



7. 기타[편집]


파일:external/i1.mirror.co.uk/Alan-Shearer.jpg
  • 세레모니는 한 손을 인사하듯 들고 뛰는 이른바 국회의원 세레모니로 유명하다. 다른 사람이 비슷한 세레모니를 보여주면 십중팔구 세레모니가 마음에 든다며 칭찬한다. 나름 자부심이 있는듯.

  • 뉴캐슬을 배경으로 한 축구 영화 에서 카메오로 특별출연했다.

  •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고 선수 리스트에 늘 최상위에 있는 선수고 축구 패널로서도 성공한 인물이지만 블랙번 시절 이뤄낸 프리미어리그 우승이 그의 프로 경력 중 유일한 트로피일 정도로 팀 커리어가 조촐해서 다른 축구 패널 동료들한테 자주 놀림을 받는다. 대표적으로 게리 리네커는 FA컵 기간때마다 앨런 시어러는 FA컵 우승 경력이 없다고 맨날 놀리는데 이건 아예 밈으로까지 굳어버렸다.

  • 탈모로도 많은 놀림을 받는다. 나이는 10살 가까이 많지만 모발은 풍성한 게리 리네커한테 이안 라이트, 대니 머피 등의 대머리 동지들과 묶여서 탈모 디스 농담을 자주 받는다.

  • 뉴캐슬이 21년만에 챔피언스 리그를 확정지은 레스터 시티전을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직관했고, 당연하게도 매우 흡족하고 대견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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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위 해리 케인이 2023년 8월 분데스리가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기에 시어러의 1위 기록은 유지될 전망이다.[2]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감독이었다.[3] 알다시피 SAS는 영국 특전사의 약자기도 하다.[4] 시어러와 서튼은 94-95 시즌 리그에서만 13골을 합작했는데, 이 기록은 PL 단일 시즌 최다 합작골이었으며, 26년이 지난 20-21 시즌이 돼서야 기록이 깨졌다.[5] 이미 맨체스터에 이사할 집까지 사둔 상황이었다.[6] 이렇게 시어러를 놓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시어러를 대체할 자를 찾다가, 평소 눈여겨보던 한 선수에게 영입 제의를 했는데, 그가 바로 올레 군나르 솔샤르...[7] 영화 속 주인공이자 가상의 축구선수이다.[8] 다만 둘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체조건의 차이가 매우 크긴 하다.[9] 여담으로 시어러와 오언의 사이는 좋지 않다. 대표팀에서도 자주 함께 했고 오언이 뉴캐슬에 막 합류해서 집을 구하지 못했을 때는 시어러의 집에서 잠시 지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시어러가 잠시 뉴캐슬의 소방수 감독으로 부임했을때 그가 오언의 멘탈적인 부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사이가 틀어졌고 둘의 은퇴 이후에 자서전과 트위터로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10] 아이러니하게도 헤딩이 뇌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이슈가 되자 헤딩과 치매의 연관성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였다.[11] 성공률 100%인 선수들은 PK를 몇번 차 보지 않은 선수들이다. 시어러와 PK 시도 횟수가 비슷한 선수 중에서는 이 기록을 뛰어넘는 선수가 전혀 없다.[12] 시어러 본인의 말로는 ‘이 녀석 제법이군. 살짝 프로의 실력이란걸 맛보게 해주마’라는 생각으로 찬 공이었다고.[13] 이안 라이트는 시어러랑 대표팀에서 같이 훈련도 하고 경기도 뛰면서 잘 지냈는데 클럽팀 경기에서 적으로 만나면 시어러가 경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기를 아는 척도 안했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는 친한 사이이고 지금은 방송 출연도 같이 많이 할 정도로 가깝고 라이트는 시어러를 "이 나라가 배출한 최고의 9번"이라 평할 정도로 존중하지만 시어러의 현역 시절에 대해 얘기할 때 이 일화를 자주 언급하는걸 보면 약간 밉상(...)이었던듯 하다.[14] 뉴캐슬의 2010년 승격 이후 첫 홈경기였던 대 아스톤 빌라 전에서 앤디 캐롤의 해트트릭이 터지자 관중석에서 돈뭉치를 움켜쥐고 파안대소하는 시어러가 화면에 잡히기도 해 큰 웃음을 안겼다. 캐롤 해트트릭에 걸었던 듯.[15] 뉴캐슬의 리그우승은 1927년이 마지막... FA컵 마지막 우승도 1955년일 정도로 우승과 완전히 멀어진 클럽이었지만, 그가 존재했을 때, 두번의 리그 준우승과 두번의 FA컵 준우승을 이뤄냈고, 뉴캐슬의 마지막 챔스 출전인 03/04도 이끌어냈다. 고향팀에서 우승만 못했을뿐. 대신 블랙번에서 리그우승으로 위안을 삼겠지만.[16] 앙리는 좋은 활약을 이어갈 수 있는 나이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했고 드록바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빅리그에 입성하여 꽃을 피운 선수임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시어러와 그 외의 선수들은 통산 득점 기록에서 상당히 차이가 난다. 프리미어 리그 경력을 10대부터 시작한 웨인 루니도 결국 시어러의 통산 득점 기록을 넘어서지 못했다.[17] 마테야 케즈만, 디디에 드록바, 소니 안데르송과 공동 수상.[18] 2위는 토트넘 홋스퍼 FC에서만 213골을 넣은 해리 케인이고, 3위는 웨인 루니의 208골. 그 뒤를 이어 4위는 앤디 콜의 187골, 5위는 세르히오 아구에로의 184골, 6위는 프랭크 램파드의 177골이며 7위는 아스날 FC에서만 175골을 넣은 티에리 앙리다.[19] 당시는 프리미어 리그 출범 전이었으므로[20] 1987~1992[21] 1992~2006[22] 여담으로 시어러는 자기가 넣었지만 득점 인정이 안된 골이 하나 있다면서 프리미어 리그 통산 261득점이라고 주장한다(...). 게리 리네커는 이 말에 VAR이 없던 시절에 뛰어서 실제로는 225골로 줄어야한다고 디스한다[23] 1987~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