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티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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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Antietam
Battle of Sharps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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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투 이전
3. 전투
4. 전투 이후
5. 기타



1. 개요[편집]


남북전쟁의 전투. 1862년 9월 17일에 벌어졌으며, 북부 측은 앤티텀 전투라고 부르지만 남부 측은 샤프스버그 전투라고 한다.[1]


2. 전투 이전[편집]


남군의 로버트 E. 리는 자신의 휘하인 북버지니아군 4만 5천명을 이끌고 메릴랜드 주 방면의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미 반도 전역과 8월의 제2차 불 런 전투에서 승리하여 사기가 높아져 있던 남군은 그때까지 계속된 방어전을 벗어나 전략적으로 공격에 나서 북부로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즉 메릴랜드 주를 장악해서 워싱턴 D.C.를 포위하고, 다시 이를 넘어 펜실베이니아 주까지 올라가서 필라델피아, 뉴욕, 볼티모어 등 핵심 공업지대를 위협한다는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북군은 남군을 따라 전장을 끌려다니며 북진해야하므로 더이상 남부를 공격할 수 없게 되고, 이를 격파하거나 북부의 공업지대를 장악하면 유럽 열강의 승인을 얻어내면서 남부연합이 완전히 국제적인 승인을 받게 된다는 노림이었다.

이때 남군은 노예주였기에 남부에 동조적이었던 메릴랜드 주의 민심을 얻어 인적, 물적자원을 충당해보고자 했다. 남군은 군악대를 통해 매일같이 선전을 했는데, 이때 연주한 곡이 메릴랜드 나의 메릴랜드였다. 그러나 별 효과는 없었다. 강성 남부연합 지지파 메릴랜드인들은 이미 주를 탈출하여 남군에 가담한 뒤였고,[2] 나머지 메릴랜드인들은 남군을 단순히 다른 주에서 온 침략자로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리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부대를 둘로 나누어(롱스트리트군 1만 7천과 잭슨군 2만 8천) 하퍼스 페리를 점령하고 메릴랜드 주를 넘어 펜실베이니아 주로 북진하려고 하였다. 상대측인 북군의 포토맥군 사령관 조지 브링턴 매클레런(1826~1885)은 반도 전역(Peninsula Campaign) 때 보여준 소극적인 지휘행태로 보아 이렇게 군을 나누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진격해오지 않을 것이라 예측한 것. 그러나...

북버지니아군 기동계획이 그대로 들어있는 특별명령 191호 사본이,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서 매클레런 손에 들어가 버렸다.[3]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병력 우위를 확보하고 있는 포토맥군이 분산기동하는 북버지니아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셈.

이 사실을 알고 화들짝 놀란 리는 최대한 병력을 긁어모아 사우스 마운틴에서 지연전을 펴는 한편 스톤월 잭슨에게 하퍼스 페리를 최대한 빨리 장악한 후 달려오라고 명령한다. 잭슨은 9월 15일 오전 하퍼스 페리를 작은 피해로 점령하고 12,000명의 연방군 병력을 포로로 잡았으며 다량의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한편 리는 9월 14일 사우스 마운틴에서 매클레런을 지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샤프스버그로 후퇴를 강요받았다. 리는 사우스 마운틴에서 후퇴한 뒤 전군이 버지니아로 퇴각할 것을 고려했지만, 잭슨이 하퍼스 페리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리는 집결지인 샤프스버그에서 일전을 결심한다.

역사학자들 상당수는 9월 15일부터 16일까지 매클레런이 리와 잭슨을 각개격파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매클레런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신중한 지휘관이었던 매클레런은 그가 남북전쟁 내내 그랬듯이 리의 병력이 10만명에 달한다고 터무니없이 높게 추정하고 있었고, 16일 아침에 공격을 시도할 수 있었음에도 공격을 하루 미루는 선택을 했다. 리는 9월 15일, 16일의 여유를 샤프스버그의 방어를 강화하고 전군을 집결시키는 데 사용했으며, 잭슨은 도보 기병대의 명성에 걸맞는 속도로 달려와 리에게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3. 전투[편집]


9월 17일,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하루였던 앤티텀 전투가 시작되었다.[4]

전투는 샤프스버그 외곽에 구축된 남군의 방어선에 북군이 차례로 부딪쳐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17일 새벽 조 후커가 지휘하는 북군 1군단이 스톤월 잭슨이 지키는 남군 방어선 북단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남군 존 벨 후드의 텍사스 사단의 활약 등에 힘입어 후커의 군단은 돌격 전 위치로 다시 밀려났으며, 후커 본인도 발에 총상을 입어 지휘에서 이탈했다. 맨스필드의 북군 12군단이 후커를 지원하기 위해 전진했지만 맨스필드 본인의 미숙한 지휘로 남군 포병의 좋은 타겟이 되어 큰 피해를 입었고 맨스필드 본인도 총상을 입고 하루 뒤 전사했다.

이후 남군 방어선 중앙부가 주요 전장이 되었다. 북군 12군단 잔여 병력과 2군단이 남군 D. H. 힐의 사단을 중심으로 한 방어선을 공격했다. 피투성이 길(Bloody Lane)로 불린 해당 구역에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리는 예비대의 거의 전부를 소진한 데 비해 매클레런은 충분히 예비대를 남겨놓고 있었다. 하지만 매클레런은 고민 끝에 중앙부 공세를 지속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오후에는 남군 방어선 남부에서 주요 교전이 일어났다. 앰브로즈 번사이드가 이끄는 9군단은 오전 10시부터 방어선 남부에서 앤티텀 천을 사이에 두고 남군과 마주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전술적 목표는 앤티텀 천을 건너는 가장 남쪽 다리였던 로어바흐 다리(Rohrbach Bridge)였다.[5] 앤티텀 천은 그렇게 큰 하천이 아니었지만 다리 남쪽의 여울목은 수위가 높아 건너가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번사이드는 다리를 확보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작전 계획을 실행했다. 하지만 번사이드 휘하 병력은 남군 샤프슈터들과 포병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결과적으로 북군이 다리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리 자체가 앤티텀 천 건너로 북군 지원군을 보내는 데 병목현상을 일으켰고, 리는 이 지역으로 계속 지원군을 파견했다. 결국 번사이드는 공세를 더 지속하지 못하고 다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매클레런이 더 이상의 공격을 중단하면서 앤티텀 전투는 끝이 났다.

남군인 북버지니아군은 수적으로 절대적 열세였으나[6] 북군의 축차투입된 공격과 지형적인 우세를 활용해 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해내는 데 성공하면서 무승부에 가까운 전투결과를 이루어내었다. 남군의 우익은 앤티텀 크릭, 중앙은 참호처럼 되어버린 침하된 도로, 좌익은 숲 속이라는 방어에 극도로 유리한 지형에 배치되었고, 거기다 그 사이는 개활지가 펼쳐져 있었으며, 이를 이용해 리는 전선에는 최소 요구 병력만을 배치한 상태에서 다수의 예비대를 운용할 수 있었다. 이때 매클레런은 반도 전역에서도 보여준 바 있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지휘로 몇 차례의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줘도 못먹는다더니 반면에 리는 열세한 병력과 급한 행군으로 지친 병력을 지휘하면서도 달려온 증원군을 시의적절하게 방어선에 계속 투입해 버텨내는 데 성공한다. 북군은 최종적으로 2108명 전사, 9549명 부상, 753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히며 도합 12410명의 사상자를, 남군은 1567명 전사, 7752명 부상, 1018명 실종으로 도합 10317명의 인명 손실을 보며 하루에 걸친 전투 동안 3675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2만27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7]

얼핏 보면 무승부이긴 하지만, 북버지니아군은 수적인 한계가 있었던 탓에 그 타격은 더 심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리는 다음날의 전투를 준비했지만, 다음날 북군은 두개 사단을 더 증원받아 3배에 달하는 절대적인 병력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럼에도 매클레런은 리의 남군을 상대로 전투에 나서지 않았고, 리 역시 그 상황에서 북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둘 수도 없었기에 메릴랜드에서 후퇴한다.

4. 전투 이후[편집]


에이브러햄 링컨은 매클레런이 북버지니아군을 궤멸시키지 않은데 대해서 대단히 실망감을 표시했다. 결국 매클레런은 포토맥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군인 경력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작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리웠고(본인이 바라기도 했고) 반도 전역의 전략적 구상을 보면 대담하고 스케일이 큰데다가 전후에 리가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북부 장군이라고까지 평가한 매클레런이 왜 이렇게 항상 소극적으로 당연히 이겨야할 전투들을 놓쳐버렸느냐에는 여러 의견이 나뉘는데, '전쟁이 빨리 끝나버리면 자신이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 싫었다'부터, '너무 좋은 기회라 함정이라 의심했다', '진지에 대한 공격으로 발생할 막대한 피해를 우려했다' 등의 해석이 있다. 허나 이유가 어찌 되었건 매클레런은 여기서 남북전쟁의 영웅이 될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후 링컨은 매클레런이 지닌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시는 사령관으로 임명하지 않았다.[8]

매클레런의 앤티텀 전투 전후 행동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여러 비판이 나왔고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사우스 마운틴 전투 직후 매클레런이 보다 기민하게 움직였다면 실제 앤티텀 전투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에서 교전을 시작할 기회가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 뒤에도 매클레런은 자신의 예비대가 리보다 훨씬 많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리의 병력을 경계하며 소극적으로 움직였고, 리에게 치명타를 입힐 몇 번의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매클레런이 해임된 것이 단순히 앤티텀 전투 전후의 실책 때문만은 아니다. 매클레런의 해임은 당시 명백히 병력 규모와 보급면에서 우세한 상황에서 대통령 링컨이 원하던 동부전선의 공세적 진격을 매클레런이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 늦추며 전황을 지지부진한 장기전으로 만든데 대한 비난여론이 계속 누적되다가 앤티텀 전투의 결과를 통해 폭발했다고 하는 쪽이 옳다. 그래서 실제 매클레런의 해임도 앤티텀 전투의 결과가 아닌, 하퍼스 페리까지 물러난 리의 남군을 포토맥 강을 건너서 추격하라는 명령에 대해 매클레런이 늑장대응으로 일관하여 9일이나 소요하는 등 싸울 의사가 없다는걸 알고 나서 단행했다.

애초에 매클레런은 오만함과 연방 수뇌부에 자신의 전략을 숨기는 행태로 오랫동안 정부의 신뢰를 잃었으며, 앤티텀 직전 9월 초부터 이미 링컨 정부의 장관 대다수가 전쟁장관 에드윈 스탠턴의 주도로 링컨에게 항명하면서까지 매클레런의 해임을 요구했을 정도였다. 매클레런이 앤티텀까지 지위를 유지한 것은 오직 링컨의 인내심과 판단 때문이었고, 링컨 본인 또한 제2차 불 런 전투의 패배 뒤 매클레런 외의 대안이 없어서 기용한 것이었지 딱히 매클레런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한편 링컨은 전투 이후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할 계획이었는데,[9] 북버지니아군을 궤멸시키지는 못했어도 메릴랜드 주에서 남군이 퇴각하긴 한 만큼 이를 기회로 전투 며칠후인 9월 22일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했다. 노예해방선언은 유럽 각국이 남부를 인정하지 않게 하는 외교적 효과를 거두었다. 비록 앤티텀 전투는 전술적으로는 무승부였지만, 전략적으로는 남부의 공세를 일시적으로나마 저지하였고 앞서 언급한 외교적 효과를 거두어 북부의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기타[편집]


앤티텀 전투는 게티즈버그 전투와 함께 남북전쟁의 두가지 큰 분기다. 그래서 '특별명령 191호 사본'의 노획 이야기는 게티즈버그 전투와 함께, 미국의 대체역사 계열에서 대단히 유명한 떡밥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해리 터틀도브의 타임라인-191 시리즈.

미국의 게임회사 탤론소프트(TalonSoft)의 턴제 전략게임인 배틀그라운드 시리즈 중 5번째 타이틀이 앤티텀 전투를 다루고 있다(Battleground 5: Antietam). 게임 발매년도는 1996년.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종족 전쟁(Brood War) 이전)의 테란 시나리오에서 아크튜러스 멩스크의 혁명은 마치 남북전쟁의 각 단계에 맞물려 비유된다. 코랄의 후예의 상대가 남부삘 나는 테란 연합이기도 하고.

미 해군제7함대 소속의 이지스 순양함 8번함의 함명이기도 하다.

1900년 갤버스턴 허리케인 참사(8000여 명)에 이어 미국 역사상 두번째로 사망자가 많았던 하루(3600여 명)였다. 그러나 2020년 이후 사망자 수가 일간 5000명까지도 뚫고 3600명 이상인 날도 많이 나와 이젠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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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남부 측 명칭은 도시명, 북부측 명칭은 자연물을 따른다. 앤티텀은 포토맥 강의 지류에 붙은 이름. 불 런 전투와 매너서스 전투가 같은 것과 동일하다.[2] 이들이 제일 많이 지원한 부대가 바로 가장 가까운 리의 북버지니아군이었다.[3] 원칙대로라면 주요 지휘관에게 한 부씩만 전달되어야 하는 사본이, 남군의 불분명한 지휘체계 때문에 한 장군에게 2부가 전달되는 사고가 났고, 여분의 사본을 참모 중 하나가 담배 보관용으로 쓰다가 길에서 흘렸다. 보통이라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휴지쪼가리였겠지만, 하필 담배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담배냄새를 맡은 북군 병사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담배를 피우면서 내용물까지 읽어보게 된 것. 한국 역사에서도 가야멸망전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 신라가 승리한 일이 있다.[4] 사망자 수만 쳐도 진주만 공습, 9.11 테러보다 많았다. 게티즈버그 전투의 경우 3일에 걸친 전투였고 챈슬러스빌 전투 역시 7일간 진행된 전투였다.[5] 전투 이후 이 다리는 번사이드의 다리(Burnside's bridge)로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로 문서 상단의 앤티텀 전투 기록화의 다리가 바로 이 다리이다.[6] 북군-개전시 7만 5천, 전투 중반에 1만 2천의 증원군이 합세해 최종 전투 참여병력 8만 7천. 남군-개전시 2만 5천, 전투가 지속되면서 계속 증원군이 합세하여 최종 전투 참여병력 4만 5천.[7]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군 전사자가 2334명, 부상자가 1143명이었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미군의 사상자가 2500명이었고 911 테러때도 3000명이 사망에 2만 5천명 부상이었다.[8] 매클레런은 이에 대한 복수로 민주당의 지원을 받아 1864년 대선에 출마했고, 그렇게 링컨의 재선에 도전하였으나 패했다. 선거인단 결과는 212(링컨)대 22(매클래런). 전체 투표수로는 55% 대 45%, 그가 지휘했던 포토맥 군단에서의 지지율은 30%였다(링컨은 70%).[9] 왜 하필 이 시기냐 하면 북군이 연전연패하고 있을 때에 노예해방선언을 해봐야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