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메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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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메이슨의 수상 이력




베스트팀
파일:NBA 로고.svg

3rd : 1996-97



파일:Anthony mason.jpg

앤서니 조지 더글라스 메이슨
(Anthony George Douglas Mason)
출생
1966년 12월 14일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사망
2015년 2월 28일 (향년 48세)
뉴욕 주 뉴욕시 맨해튼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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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테네시 주립대학교

203cm (6' 8")
체중
116kg (255 lbs)
포지션
파워 포워드
프로입단
1988 NBA 드래프트 3라운드 53순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지명
소속팀
에페스 필센[1] (1988~1989)
뉴저지 네츠 (1989~1990)
덴버 너기츠 (1990~1991)
뉴욕 닉스 (1991~1996)
샬럿 호네츠 (1996~2000)
마이애미 히트 (2000~2001)
밀워키 벅스 (2001~2003)
등번호
42번 / 34번 / 14번 / 17번

1. 개요
2. 커리어
2.1. NBA 입성 이전
2.2. NBA 입성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4. 이모저모



1. 개요[편집]


NBA의 농구 선수. 포인트 포워드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유행시킬만큼 독특하고도 세련된 플레이를 선보여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통제하기 힘든 사고뭉치에 가까웠던 성격으로 인해서 NBA에서만 6개의 팀을 거친 저니맨이었다. 팬들에게는 90년대 중반 뉴욕 닉스에서 찰스 오클리, 존 스탁스 등과 함께 패트릭 유잉의 보디가드로 활동했던 시절의 이미지가 뇌리에 강렬히 남아있었다.


2. 커리어[편집]



커리어 하이라이트 필름


2.1. NBA 입성 이전[편집]


1966년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태어났으며 가족들과 함께 뉴욕 퀸스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테네시 주립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에는 4년간 총 111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3.6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6.1%, 평균 18.7득점, 8.1리바운드, 2.4 어시스트라는 상당히 준수한 성적을 선보여주었지만, 메이슨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4번을 보기에는 무척이나 작은 201cm의 신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 1980년대 농구는 2010년대 후반처럼 슛과 스몰라인업이 중시되는 시대가 아니었고,[2] 이로 인해서 메이슨은 드래프트 3라운드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포틀랜드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머캠프에서 메이슨은 포틀랜드 수뇌부들의 눈에 드는데 실패하였고, 결국 개막을 앞두고 방출을 당하고 만다. 그 후로 몇년간은 눈물젖은 빵을 먹는 시절의 연속. 터키 리그에서 뛰는가 하면[3] USBL과 같은 미국 내 실업리그에서도 뛰고는 했다. 이후로도 뉴저지 네츠, 덴버 너기츠에서 단기 계약을 맺었지만 그에게 정식 계약을 제시하는 팀은 없었다.


2.2. NBA 입성 이후[편집]



2.2.1. 뉴욕 닉스 시절[편집]


그러던 중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1991년 닉스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팻 라일리.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이라면 NBA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맹장의 눈에, 헝그리 정신과 강인한 체력으로 똘똘 뭉친 메이슨이 포착되었고 그렇게 메이슨은 NBA에 안착할 수 있었다. 91/92시즌부터 94/95 시즌까지 4년 동안 메이슨은 닉스의 키식스맨으로 활동하면서 맹활약을 선보였고, 특히 조던이 은퇴했던 94년 닉스가 21년만에 파이널에 진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파이널에도 절륜한 수비력을 앞세워서 팻 라일리 감독에 의해 올라주원의 전담 수비수로 붙여졌고 뛰어난 플레이를 펼쳤지만 팀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석패. 또한 이듬해인 94/95 시즌에는 77경기에 출장(선발 11경기), 평균 32.4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56.6%, 평균 9.9득점, 8.4리바운드, 3.1어시스트, 0.9스틸을 기록하면서 올해의 식스맨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안게 된다.

이러한 메이슨의 활약에 고무된 닉스 프런트는 95/96 시즌을 앞두고 메이슨에게 6년간 25mil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계약을 안겨주게 되고, 마침 그 시즌에 부임한 신임 감독 돈 넬슨은 기존의 주전 스몰포워드였던 찰스 스미스를 벤치로 내리고 메이슨을 주전으로 올리며 포인트 포워드 역할을 맡겼다. 그렇게 맞이한 시즌에서 메이슨은 82경기 전 경기를 선발출전해 무려 평균 42.2분을 뛰며 경기당 14.6득점, 9.3리바운드, 4.4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닉스의 코어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식스맨에서 벗어나 주전으로 포인트 포워드 역할을 맡으면서 기량이 만개한 케이스. 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인 스카티 피펜을 스핀무브로 벗겨내고 레이업을 올릴 정도로 엄청난 덩치에 걸맞지 않게 부드럽고 세련된 플레이가 전매특허였다. 하지만 메이슨과 닉스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번번이 챔피언으로 가는 길 앞에서 무너졌던 닉스의 프런트진은 전력 개편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고, 메이슨은 래리 존슨을 받아오는 댓가로 샬럿 호네츠로 트레이드되었다. 자존심이 강했던 메이슨은 "래리 존슨이 나보다 잘난게 대체 무엇인가? 한 시즌 평균 득점이 6점 높은 것? 그 6점을 위해서 그는 나보다 1년에 슛을 600번은 더 쏘지 않았나?"라는 독설을 남겼고, 뉴욕의 극성맞은 팬들 역시 닉스 프런트진을 성토해서 GM이 "우리는 재능을 얻기 위해 또다른 재능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사과 성명을 발표해야 할 정도였었다(…).


2.2.2. 샬럿 호네츠 시절[편집]


그렇게 이적한 샬럿 호네츠에서 평균 43.1분을 소화하며 야투율 52.5%, 평균 16.2득점, 11.4리바운드, 5.7어시스트를 기록한 커리어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리그 1위의 플레이 타임과, 리그 3위에 해당하는 리바운드 기록을 수립하면서[4]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고, NBA All-Defensive Second Team과 All-NBA Third Team에 선정되었다. 한편 이 시즌 메이슨 본인이 직접 볼을 상대편 진영으로 운반하여 탑에서 리딩 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본격적으로 선보여주면서 포인트 포워드라는 개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후로도 어깨 부상으로 인해 개점휴업 상태였던 98/99 시즌을 제외하면 메이슨은 준수한 활약을 선보이면서 샬롯 호네츠가 박터지던 90년대 중후반 동부 컨퍼런스[5]에서 파이널 진출 경쟁력을 갖추는데 크게 기여한다.


2.2.3. 마이애미 히트 시절[편집]


파일:마이애미 히트 앤서니 메이슨.jpg
한편 00/01 시즌 도중 메이슨은 마이애미 히트로 트레이드되어 옛 은사였던 팻 라일리와 재회했다. 마이애미에서도 부동의 주전으로 활동하면서 80경기에 출장, 평균 40.7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8.2%, 평균 16.1득점, 9.6리바운드, 3.1어시스트, 1.0스틸을 기록하였다. 특히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에 선정된 것도 이 때의 일.[6]


2.2.4. 밀워키 벅스 시절[편집]


이후 밀워키 벅스로 옮겼지만 이 곳에서는 고난의 연속이었고 본인의 성적 역시 뚝 떨어졌으며 조지 칼 감독 및 다른 팀원들과 계속 불화를 빚으면서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결국 02/03 시즌을 끝으로 커리어를 마감하게 된다.

이후 2015년 메이슨은 심부전으로 인해 4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현대형 포인트 포워드의 시초

외국 리그를 떠돌다 온 선수답게 허슬이 엄청났다. 착화 201cm라는 파워 포워드치고는 부족한 신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트위너스러운 키는 도리어 수비 범용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점프력은 별로지만 발이 빠르고, 버티는 힘이 좋기 때문에 발빠른 1번에서 바클리, 말론과 같은 S급 빅맨까지도 막아낼 수 있었다. 특히 1994 NBA 파이널 당시 파이널 진출의 핵심 중 하나였다. 찰스 오클리, 존 스탁스, 패트릭 유잉과 같은 뛰어난 수비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지만 메이슨의 절륜한 수비력은 이 사이에서도 빛났다. 스탁스가 엄청난 활동량으로 가드 수비를 맡고, 유잉은 우직하게 골밑을 지키며, 오클리가 궂은 일을 담당했다면 메이슨은 스위치 디펜스라는 개념이 현재처럼 널리 사용되기 이전에 미스매치를 버티며 대표적으로 이를 가장 잘 활용하는 선수 중 하나였다.[7]

하지만 그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포인트 포워드로서의 능력. 지금이야 르브론 제임스, 드레이먼드 그린 등 적지않은 포인트 포워드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메이슨은 폴 프레시[8]이후 스카티 피펜등과 함께 개념을 정립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하프코트 볼운반을 무리없이 할 수 있고, 1대1 상황에서도 상대 수비수를 무리없이 제칠 수준의 드리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타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탑에서 단독으로 리딩을 진행할 수 있었다.[9] [10]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언더사이즈 빅맨이라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림프로텍팅에서 약점이 있었고, 때문에 그의 파트너로는 림프로텍팅이 확실한 빅맨을 붙여줘야 했다. 또한 뛰어난 볼핸들링과 시야와는 별개로 외곽 슈팅 능력은 없는 수준이었고, 때문에 그가 평균 15득점을 넘긴 시즌은 단 2번 뿐이다.[11]

현대 농구에서 메이슨에 비교할 수 있는 선수라면 드레이먼드 그린이 있다. 물론 메이슨은 3점슛이 없다시피한 윙플레이들도 꽤 있던 90년대 선수란 특성상 그린만큼 슛거리가 길지 않은(통산 12개 던져서 2개 성공) 등 디테일한 플레이스타일은 다르지만, 그린과 마찬가지로 공격에서 뭐하나 특출나진 않아도 리딩부터 득점, 스크린까지 다방면에서 공헌해주고 수비에서 모든 포지션을 막아주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지닌 선수였다. 그런 면에서 어찌보면 90년대보다 팀 수비의 중요성이 커진 2010년대에 더 빛이 날 수도 있는 그런 선수였다. 90년대와 2010년대는 수비스타일이 매우 다르다. 기본적으로 양시대 모두 맨투맨 수비를 기반으로 하지만 핸드체킹룰의 금지는 거칠게 힘으로 막는 수비가 불가능하게 했고, 이전처럼 1대1에서 거칠게 윽박지르는 수비보다는 드리블러 앞에서 견제하는 수비가 주가 되었다. 이 때문에 그린이나 메이슨처럼 팀수비에서 많은 분야에 공헌하더라도 매치업을 확실히 압도하는 것까진 아닌 선수들이 톱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실제로 당시 최고의 수비수들인 하킴 올라주원, 데니스 로드맨, 데이비드 로빈슨,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디켐베 무톰보, 게리 페이튼, 무키 블레이락, 조 듀마스 등은 모두 골밑에서 매치업을 압도하거나, 외곽에서 상대방에게 이른바 '락다운 수비'를 할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물론 팀 수비에서도 뛰어났지만.

실제로 메이슨은 맨투맨 수비에서도 괜찮았지만 톱급에는 좀 모자랐는데,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트위너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키는 2미터 언저리의 스윙맨들을 막는데 딱이지만 그는 파워포워드에 가까운 몸무게와 파워를 지닌 선수였기에 빠른 스윙맨을 시리즈 내내 막기는 좀 무리였다. 물론 마이클 조던같이 빠른 선수들에게 한 경기 정도 한시적으로 정도 붙어 그의 강한 힘으로 고생시킨 적은 있지만, 풀타임으로 붙기는 무리가 따랐다. 반면 로우포스트 공격비중이 높은 시기에 빅맨들을 막기엔 그의 키가 작았다. 이 때문에 그는 커리어내내 뛰어난 수비수로 인식되었지만, 위에 언급된 선수들처럼 '리그를 주름잡는 압도적인 수비수'로 인식된 적은 없었다. (디펜스 세컨팀 1회) 마찬가지로 키와 사이즈가 애매한 그린이 90년대에 뛴다고 치면, 메이슨과 마찬가지로 올디펜스 퍼스트팀급이 되긴 힘들 가능성이 높다. 당시 그의 경쟁자들은 포워드 포지션에서 로드맨, 피펜, 찰스 오클리, 벅 윌리엄스, 칼 말론 정도일텐데, 모두 그린이나 메이슨보다 1대1 수비력이 좋은 선수이기 때문.

그러나 그린이 현대농구에서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인정받는 것처럼, 팀수비가 더욱 중요해진 현대농구에서 메이슨이 굉장히 빛날 여지가 있다.

실제로 그린의 수비스타일메이슨의 수비스타일을 보면 시대적 차이에도 불과하고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는 걸 볼 수 있다. 바로 그 어느 선수보다도 스위치 수비와 헬프수비를 적극적으로 하며, 매치업을 압도하는 것보다도 상대 팀 전체의 공격을 방해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것.

물론 시대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메이슨이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할지 정확히는 알기 힘들다. 당시 메이슨은 닉스의 센터이자 그보다 5인치나 큰 센터 유잉과 몸무게가 비슷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어마어마한 근육덩어리였고, 수비할 때 힘으로 압박하는 등 신체접촉이 잦은 선수였다. 반면 현대농구는 신체접촉에 대해 훨씬 엄하게 판정한다. 다만 그의 로테이션 능력이나 농구이해도가 굉장히 높았으며, 기본적으로 힘으로만 압박하는 수비수가 아니라 그린처럼 발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코트 전반을 압박하는 수비수였기에 현대에서 활용도가 대단히 높은 것은 분명하다.


4. 이모저모[편집]


  • 굉장히 터프한 이미지였으며, 실제 성격 역시 터프한 것을 넘어서 사고뭉치에 가까워서 소속팀 감독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그와 관련된 이런 저런 사건사고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뉴욕 닉스에 사실상 연습생에 가까운 신분으로 초대된 서머 트레이닝 첫날, 당시 닉스의 주전 스몰포워드였던 자비엘 맥대니얼과 바로 난투극을 벌임.[12][13]
    • 출장시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다가 1994년 4월과 1995년 3월 각각 3경기, 5경기에 해당하는 자체 징계를 팻 라일리 감독으로부터 받음.
    • 샬럿 호네츠에서 뛸 시절 팀메이트 먹시 보그스가 엉망진창의 리딩을 선보이자 "그따구로 하면 내가 포인트가드 보는 수가 있다."라고 사자후 시전.[14]
    • 1998년에는 강간 혐의로 피소
    • 말년이었던 밀워키 벅스 시절에는 체중 관리 문제로 인해 팀원들 및 감독 조지 칼과 불화를 빚음.
    • 2015년 메이슨이 사망한 후, 기자들이 그의 오랜 팀메이트였던 패트릭 유잉에게 찾아가 메이슨에 관련된 일화를 알려달라고 요청하자 유잉은 "말해도 기사화 될 수 없을 이야기들이 대부분(I don't think a lot of them can be put in the paper)"이라고 답변했다(…).

  • 이러한 사고뭉치의 모습과 별개로 따뜻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선수이기도 했다. 뉴욕의 노숙인들에게 20불을 베풀기도 했고, 장기계약을 맺은 후에는 성공을 도왔던 주변의 사람들에게 300만원 짜리 고급 코트를 선물하기도 했는데, 이는 어려웠던 본인의 사회 초년생 시절을 잊지 못해서라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일관된 진술.

  • 샬럿 호네츠 시절에는 동료 먹시 보그스와 함께 방한한 적도 있다. 그리고 먹시 보그스는 경기에 코빼기도 안비췄지..[15][16]

  • 은퇴 후에는 맨해튼에서 팀메이트였던 존 스탁스와 피자집을 열었는데 90년대 잘 나가던 닉스 시절에 향수를 가진 팬들이 몰려와서 꽤나 장사가 잘됐다는 후문. 메이슨 본인이 15년 1월 가진 인터뷰에 따르면 CEO같이 으리으리한 직함을 가진 손님들이 와서는 "당신이 현역일 때 어린 팬이었어요."라는 말을 많이 건넸다고..

  • 비스티 보이즈가 메이슨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본인들의 노래 가사에도 실명을 언급할 정도.

  • 무지막지하게 강인한 체력으로도 유명하다. "메이슨은 48분을 뛰어도 안 지칠 것 같다."라는 말이 팬들 사이에서 나돌 정도. 닉스의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팻 라일리는 프로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무려 4시간의 트레이닝을 감행했는데,[17][18] 이 트레이닝을 가장 잘 견딘 독종 중 하나가 바로 메이슨이었다. 그리고 95/96 시즌에는 전경기를 선발로 뛰면서 무려 42.2분의 플레이타임을 뛰었고, 이듬해 샬럿으로 이적해서는 전 경기 출전을 하지는 못했지만 경기당 43.1분을 소화하는 기염을 보여주기도 했다.

[1] 터키 리그[2] 실제로 앤서니 메이슨과 매우 비슷한 플레이스타일(트위너로 평가받은 작은 신장, 탁월한 수비력,리딩 능력 겸비, 리그 최강의 똘끼)을 보유한 드레이먼드 그린 역시 대학시절 4번을 보기에는 너무 작은 신체 조건으로 인해 저평가를 받았으며, 데뷔 초반에 받은 평가가 "앤서니 메이슨 season 2"였었다.[3] 터키 리그에서도 초반부에는 적응에 애를 먹어서 모친이 이역만리 뉴욕에서 터키까지 날아가서 멘탈 케어를 시전해줬다고 한다.[4] 1위는 데니스 로드맨 16.1개, 2위는 디켐베 무톰보 11.6개.[5] 90년대 중후반 동부 컨퍼런스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GOAT가 버티는 시카고 불스, 친정팀 뉴욕 닉스, 옛 은사 라일리의 조련 하에 강팀으로 거듭난 마이애미 히트, 레지 밀러인디애나 페이서스 등..[6] 팀 메이트였던 알론조 모닝신장 이상 및 그랜트 힐의 부상으로 인해 대체자로 선정.[7] 스위치 디펜스란 개념은 메이슨 훨씬 전부터 이미 존재했고 90년대에도 당연히 스위치 디펜스를 적극 활용하는 팀들이 있었다. 주로 높이가 딸리면서 기동력이 뛰어난 팀들이었는데, 시카고 불스의 하퍼-조던-피펜-로드맨 라인업은 서로 키가 비슷하고 운동능력이 모두 뛰어나단 점을 이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매치업을 바꿔가며 스위치 디펜스를 적극 활용했다. 특히 피펜-로드맨이 존 스탁턴-칼 말론 듀오를 막을 때는 이 점을 적극 활용했는데, 픽에 걸려서 스위치되어도 무난히 막을 수 있었기 때문. 또다른 예로는 팀에 7푸터 한명도 없이 리그 최강의 수비팀으로 군림했던 90년대 중반의 시애틀 슈퍼소닉스였는데, 게리 페이튼은 '미스터 소닉' 네이트 맥밀런 등 뛰어난 수비수들도 있었지만 수비면에서 이들에 못 미치는 허시 호킨스, 데틀레프 슈렘프들도 기동력을 활용한 헬프 수비와 스위치 디펜스로 소닉스 특유의 질식 수비를 만드는데 공헌했다. 소닉스의 팀수비가 가장 빛난 96년 파이널 장면. 어쨌거나 90년대라고 해서 무슨 맨투맨 수비만 하던 시절은 아니었다는 것.[8] 1980년대 밀워키에서 뛰었던 스몰 포워드. 애초에 포인트 포워드라는 단어가 그의 플레이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9] 마이애미 시절 돈 넬슨은 가드 1명, 포워드 3명에 메이슨을 무려 슈팅 가드 슬롯에 세우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메이슨은 넬슨의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펼친다.[10] 흔히 아름다운 패싱 농구하면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밀레니엄 킹스를 많이 떠올리지만, 페자 - 웨버 - 디박 이전에 1990년대 후반 샬럿의 라이스 - 메이슨 - 디박이 있었다. 이타적이고 넓은 시야와 패싱 스킬을 가진 빅맨들, 폭발적인 외곽 슈터인 스코어러.[11] 샬럿에서 뛴 1996-97 시즌과 마이애미에서 뛴 2000-01 시즌[12] 이 싸움은 메이슨의 부고를 다루는 기사에서도 거의 대부분 언급될만큼 매우 유명한 일화인데, 후일 닉스 선수들의 회상에 따르면 이런 bad ass한 팀 분위기를 좋아했던 라일리는 두 선수의 주먹다짐을 다른 선수들이 만류하지 못하게 내버려두었다고 전해진다. 덧붙여서 유잉의 회상에 따르면 싸움 결과는 무승부(…).[13] 참고로 맥대니얼은 당시 시애틀 시절에 올스타까지 오른 베테랑 선수였는데, 깡다구와 힘이 대단한 선수였다. 92년 플레이오프 당시 스카티 피펜과 시비가 붙었다가 마이클 조던이 피펜을 끌어내고 자신이 맞상대했는데, 이때 조던과 서로 이마를 맞대고 죽일 듯이 서로 노려보는 장면이 유명하다.맥대니얼과 메이슨, 그리고 그 유명한 찰스 오클리까지 해서 닉스는 리그에서 가장 거칠고 터프한 팀이었는데, 이 셋이 같이 뛰던 91-92시즌에 대해 당시 코치였고 훗날 닉스 감독을 지낸 제프 밴건디는 "그(맥대니얼), 오클리와 메이슨을 데리고 있을때 우리가 모든 경기를 이기진 못했지만, 모든 싸움은 이겼었죠"라고 말했다.[14] 정확히 말하면 리딩이 문제가 아니라 작은 키로 인한 수비가 문제였다. 메이슨은 96-97시즌부터 샬럿에 합류했는데, 당시 10년차에 접어들던 보그스는 전 시즌에 무릎수술을 하면서 6경기만 출전했고 96-97시즌에도 계속되는 무릎문제를 겪은데다 나이로 인해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많이 잃었다. 보그스는 젊은 시절엔 수비에서 운동능력과 활동량으로 단점을 커버하는 선수였는데 기동력이 떨어지자 수비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고, 이에 메이슨은 수비가 안되는 보그스를 왜 계속 기용하느냐고 화를 낸 것. 결국 호네츠는 보그스에게 은퇴를 종용했다가 97-98시즌 초에 그를 트래이드하게 된다. 보그스의 명예를 위해 언급하자면 초단신 선수들은 (단신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운동능력을 잃은 후 급격히 몰락하는 경우가 잦은데, 메이슨과 같이 뛴 96-97시즌은 그가 32세에 접어든 나이에 부상까지 겹쳐 기량이 확연하게 떨어지던 해였다.[15] 위 각주에 언급됐듯이 보그스는 방한 당시 전 시즌을 거의 날려버린 무릎수술에서 회복 중이었다. 애초에 보그스는 호날두처럼 스타파워로 갑질할 만큼 대형스타는 아니었다.[16] 그래서 대신 메이슨이 리딩을 했었다.[17] 당시 닉스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남긴 회고에 따르면 뛰다가 토하는 선수들이 부지기수라 아예 양동이까지 훈련장에 대령해 놓았다고(…).[18] 당시 닉스는 60승으로 리그 2위의 성적을 올린 92-93시즌에도 팀 평균 득점이 전체 27개팀 중 24위, 경기 페이스를 감안해 공격권 100번당 득점수치인 오펜스 레이팅은 22위로, 공격력은 떨어지지만 강력한 수비로 상대를 제압하는 팀이었다. 그런데 닉스의 수비전략은 불스나 시애틀 슈퍼소닉스처럼 뛰어난 운동능력과 강력한 로테이션으로 틀어막는 것보다는 주로 육탄수비. 이들의 주 타겟이던 불스의 조던과 피펜은 리그에서 운동능력이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었고, 이들을 상대하는 존 스탁스, 메이슨, 맥대니얼 (92시즌 한정) 등은 그야말로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며 거칠게 막았다. 92년, 93년 모두 조던은 닉스 시리즈에서 돌파빈도수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거칠게 몰아붙히며 상대방을 지치게 하는 전략, 특히나 상대가 역대급 체력을 지닌 조던이라면 당연히 닉스 선수들은 어마어마한 체력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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