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설레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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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식스·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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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thelred_the_Unready.jpg
왕호
애설레드 2세(Aethelred II)
별칭
애설레드 디 언레디
(Aethelred the Unready)
생몰년도
966년에서 968년 사이 ~ 1016년 4월 23일
재위기간
978년 3월 18일 ~ 1013년,
1014년 ~ 1016년 4월 23일
종교
기독교

1. 개요
2. 덴마크인들과의 투쟁
3. 이모 저모



1. 개요[편집]


고대 영어: Æþelrǣd Unræd (애델래드)
영어: Æthelred the Unready (애설레드)
라틴어: Ethelredus II (에텔레두스 2세)

애설레드 2세는 10세기 후반 ~ 11세기 초반의 잉글랜드 왕국 국왕이다. 재위 후반부에 덴마크인들이 잉글랜드를 점령했었기 때문에 통치 기간 중에 몇개월 정도의 공백기가 있다. 즉, 1013년 말에 쫓겨났다가 다음해인 1014년 봄에 다시 즉위했다. 복위 후에는 얼마 통치하지 못했고, 2년 후인 1016년에 숨을 거두었다.

별칭은 Aethelred the Unready. 우리 말로는 준비 안된 왕 애설레드였다. 그러나 이는 고대 영어가 근대 영어로 바뀌면서 잘못 전해진 것이다. 원래는 Æthelred Unræd 라 불렸는데, Unræd는 고대 영어에서 "나쁜 조언자" 쯤의 뜻이다. 당시 상황에 맞게 의역하자면 "제대로 조언을 못 받은(unadvised)" 정도의 뜻. 이 Unræd 가 근대 영어의 Unready 로 잘못 전해지면서 '준비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변질되었다. 그가 왕임에도 이런 오명으로 이름이 남은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또 '2세'라고는 하나 당대 잉글랜드에는 넘버링을 붙이는 문화가 없었다. 이 넘버링 문화는 노르만 왕조가 가져온 것이고, 이전까지는 동일인을 별명으로만 구분했다.[1]

이전 왕인 순교왕 에드워드와는 배다른 형제 사이였다. 에드워드가 암살(!)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이다. 피살 당시 에드워드는 15, 16세였고, 애설레드 2세는 더욱 어려서 약 10세, 많아 봐야 13세였다.


2. 덴마크인들과의 투쟁[편집]


애설레드 2세의 역사는 덴마크인들과의 투쟁의 역사였다. 당시 덴마크인들이 끊임없이 잉글랜드를 침략했고, 애설레드 2세는 일생동안 피터지게 그들과 싸웠다. 심지어 그가 죽고 나서는 그의 아들 에드먼드 2세와 덴마크 왕 스벤 1세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대를 이어가며 싸웠다. 크누트 대왕 참고.

아버지인 에드거 1세가 덴마크인들을 제압해놨기 때문에 애설레드 2세가 어렸을 때까진 평화로웠다. 그러나 980년에 들어서 덴마크인들이 작은 무리를 이루어 계속해서 잉글랜드 해안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원래 노르만족은 노르드계 바이킹이 프랑스의 북부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하여 프랑스화한 사람들이었는데, 당시까지도 노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덴마크인들과 동질감을 갖고 있었고, 덴마크인과 색슨족의 전투가 잦아지다 보니 색슨족에 적대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덴마크인들의 침략은 점점 거세졌고, 991년, 잉글랜드는 말던(Maldon)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덴마크로 조공을 보내게 되었다. 994년에 덴마크 주력 부대가 노르웨이로 떠나 평화가 잠시 찾아왔으나 997년 덴마크는 다시 침략했다. 1001년에도 덴마크가 침략해서 잉글랜드의 서식스가 털렸으며, 1002년 봄에 애설레드 2세는 돈을 주고 평화 협정을 맺었다. 반면 그도 1002년 11월 13일에 덴마크 정착민에 대해 학살을 저질렀다. (성 브릭티우스 축일의 학살)

그 후로도 침략과 격퇴, 그리고 조공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1013년에 덴마크 왕 스벤 1세가 아예 왕위를 뺏을 생각을 가지고 잉글랜드를 침략했다.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스벤 1세는 그해 말 잉글랜드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애설레드 2세는 노르망디로 튀었고, 스벤 1세는 1013년 크리스마스에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스벤 1세는 불과 몇달 후인 1014년 2월에 죽었다. 그를 따르던 덴마크 세력들은 당연히 스벤 1세의 아들인 크누트 대왕을 추대했지만,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도망가 있었던 애설레드 2세를 추대했다. 뭐 잉글랜드 귀족들이 민족 정서라든가 애국심에서 애설레드 2세를 지지한 것은 아니고, 단지 그들의 실리를 챙기기 위해 지지한 것이었다. 그들은 애설레드 2세에게 사신을 보내 협상을 했다.

그 내용을 보면 잉글랜드 귀족들의 의도가 매우 분명하게 보인다. 귀족들은 애설레드 2세에게 왕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대신 자신들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자신들의 마음에 안 드는 제도들을 전부 수정해줄 것과 이전에 애설레드 2세와 불미스러운 사이였던 귀족들을 모두 용서해줄 것을 요구했다.

영국 역사에 보면 왕과 신하간의 협약을 맺은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이 문서로 남겨진 최초의 협약이라 하겠다.

귀족들의 세를 업은 애설레드 2세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1014년 4월, 미처 준비를 못 마친 크누트는 아무런 전투 없이 잉글랜드를 떠났다. 남아 있던 그의 병력은 애설레드 2세에게 격퇴당했다. 하지만 1015년 8월, 크누트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당연히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승승장구하여 몇달새 잉글랜드 대부분을 차지했다.

1016년 4월 23일, 애설레드 2세가 사망했다. 왕위는 아들 에드먼드에게 계승되었고, 그는 대를 이어 덴마크인들과 싸웠다.


3. 이모 저모[편집]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우아한 예의범절을 지녔다고 한다.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왕이 되었고,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왕이 되었다. 각각 에드먼드 2세참회왕 에드워드였다.

두 번째 아내 노르망디의 엠마는 그가 죽은 후, 적이었던 크누트 대왕과 재혼했다.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도 역시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하레크누드 참고.

영미법의 중요 요소인 배심원 제도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인지에 대한 논란도 많다.

바이킹스:발할라에서는 딱히 별 이유 없이 잉글랜드에 정착해서 개종하고 잘 살던 노르드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종 학살범죄를 저질러놓고선[2], 정작 본인은 천수를 누리고 가버린 만악의 근원(...)으로 등장한다. 뒷수습은 왕대비와 후계자가 떠맡고, 정작 죗값은 잉글랜드의 백성들이 치루게 됐으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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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워드 1세가 4세가 아니라 1세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 에드워드, 순교왕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 때에는 넘버링 문화가 없었고, 노르만족도 딱히 이전의 웨식스 계보를 잇는 등의 정통성 확립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탓이다. 에드먼드 1세, 2세와 해럴드 1세, 2세, 애설레드 1세, 2세는 모두 후대에 역사가들이 붙인 것이다.[2] 바이킹스의 에크버트 시절 바이킹 이민자들이 숭배하던 북구 신앙에는 인신공양의식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정말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지만, 본편에서의 정착민들은 말만 바이킹이지 이미 몇세대에 걸쳐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잉글랜드에 세금도 꼬박꼬박 바치면서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