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퐁스 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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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
Alphonse Daudet


파일:external/www.nndb.com/alphonse-daudet-1.jpg

출생
1840년 5월 13일
프랑스 왕국
사망
1897년 12월 16일 (향년 57세)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국적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학교명 학부명 (학과명1 · 학과명2 / 재학 여부)
종교
종교
직업
소설가
소속
소속
서명
파일:Signature_Alphonse_Daudet.jpg
1. 개요
2. 생애
3. 대표작
4. 극우성향
5. 그 외



1. 개요[편집]


프랑스소설가.


2. 생애[편집]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 지방의 (Nîme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뱅상 도데는 비단 제조업을 하고 있었지만 불운을 부르는 사람이었고 하는 일마다 실패해서 알퐁스 도데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불우했다. 알퐁스 도데는 자라서 리용(Lyon)을 떠나 알레스(Alès)로 가서 교사 생활을 했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학생들 때문에 심한 노이로제에 시달렸다고 한다. 결국 1년여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었으며 후에 그의 회고로는 "알레스를 떠난 몇달 뒤에도 나 자신이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 가운데 서 있는 듯한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교사 생활을 그만둔 뒤 3살 연상의 형과 함께 살았는데 형은 파리에서 기자가 되고 싶어했다. 알퐁스도 형을 따라서 를 썼는데 쓴 시들을 모아 <사랑하는 여자들>을 출판했다. 이는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르 피가로지>가 도데를 기자로 기용했고, 2~3편의 희곡을 써서 장래성을 주목받았다. 한편으로 나폴레옹 3세의 대신이자 입법회의 의장인 샤를 드 모르니 후작의 후원을 받아서 모르니 후작이 사망하는 1865년까지 모르니 후작비서로서 활동했다.

1866년, 첫 소설을 써서 크게 성공하게 된 그는 이후 소설가의 길을 걸었다. 1868년에 <Le Petit Chose>[1]라는 첫 자전적 장편 소설을 썼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후 <밝은 타타린>과 3막짜리 희곡 <아를의 여인>을 썼지만 역시 흥행에 실패한 뒤[2], 집필한 희곡 <프로몽과 리제르>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어권에도 주목을 받을 정도였다.

이후로 <나바브> 등의 여러 편의 소설과 희곡을 쓰는 등 작가로서의 위상은 뚜렷해졌다. 1867년에 쥴리아 아라드와 결혼했는데 그의 부인도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1883년 도데는 자신이 아카데미 회원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쓴 기자와 결투를 벌였고 자신의 부인에 대한 안좋은 기사를 쓴 기자와도 결투를 신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약을 잘못 쓴 탓에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1897년 12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3. 대표작[편집]


알퐁스 도데의 소설은 서정적이며 그의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현실성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소설의 서정성은 그가 남프랑스 출신이라는 점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 듯하다. 생전에 알퐁스는 찰스 디킨스와 스타일이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도데 자신은 디킨스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디킨스와 비교해 보면 유사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도데가 디킨스를 모방한 건 아니며 분명하게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다.

그의 소설 중 마지막 수업은 한국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 있으며 특히 보불전쟁을 다룬 소설이 많다.[3]

말년엔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라는 소설을 썼으며 위기철논리야 놀자 시리즈를 봤다면 이 소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줄거리는 황금 뇌를 가진 아이가 머리를 다칠 때 피에 황금 조각이 발견되었을 때 어머니는 누가 유괴해 갈까봐 비밀에 부치다가 나중에 아들에게 알려줬다.[4] 그러자 아들은 뇌에 든 황금을 막 쓰다가 정신이 나쁘게 변했고 중간에 황금이 바닥나게 되면 결국 자기 생이 온전치 않게 되리라는 걸 알고 황금 쓰기를 자제한 적도 있었으나, 아들과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아들의 뇌가 황금이라는 사실을 어쩌다가 알아내고는 몰래 밤중에 기어 들어와서 뇌 속의 황금을 조금 남겨두고 훔쳐갔다.

그후에도 예쁜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불행히도 그 여자가 허영심이 많아서 머리의 황금을 계속해서 썼으며 어느 날 여성이 사망하자 그녀의 장례식을 위해 모든 황금을 쓰게 된 남자는 기억력이 희미해져서 여인의 죽음을 잊어버리고 구두를 선물로 사주기 위해 머릿속에 남은 황금 부스러기와 바꾼 뒤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후 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


4. 극우성향[편집]


정치적으로는 아버지도 왕당파였고 도데 자신도 나폴레옹 3세의 대신의 비서를 지냈으며 반유대주의적인 면모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태생적으로는 파리 우월주의자, 즉 쇼비니스트였다. 이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레옹 도데(1867~1942)는 극우 정치 단체 악시옹 프랑셰즈의 회원이었고 비시 프랑스를 옹호하고 나치에 부역하기까지 했다. 반대로 작은 아들 뤼시앵 도데(1878~1946)는 아버지와 형과 달리 이런 반유대주의 같은 것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고 작가로 살다가 갔다.


5. 그 외[편집]


평생을 매독에 시달려[5] 17세 때 걸린 매독이 39세에 척수 매독으로 진행,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통증만이 아니었다. 척수신경 손상으로 다리의 감각 기능이 없어진 탓에 몸의 균형 잡기가 힘들어져 걸핏하면 비틀거렸고 걸을 때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남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라르를 비롯하여 귀스타브 플로베르, 졸라, E.공쿠르, 투르게네프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아내 쥘리의 내조로 행복한 57년의 생애를 파리에서 보냈다.

당시 매독의 '첨단 치료제'는 수은이었다.[6] 오랫동안 수은 치료를 받았던 도데는 수은중독에도 시달렸다. 통증을 견딜 수 없었던 도데는 모르핀까지 맞았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구역질로 고생했지만, 모르핀을 맞아야 그나마 통증을 잊고 잠시라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사망하기 얼마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생을 너무 많이 사랑한 나머지 하느님이 내게 벌을 주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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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는 <꼬마 철학자>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2] 단,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아를의 여인>의 음악들은 지금까지도 클래식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3] 대표적 예시가 바로 '당구 게임'이라는 단편으로, 당구에 열중해서 부대원들이 다 적군에게 죽어나갈 때까지 당구를 그만두지 않은 무능한 장군의 이야기다.[4] 그런데 이 어머니는 낳고 키워준 댓가로 아들의 뇌를 좀 떼어달라고 요구했고, 아들 역시 어머니에게 뇌 한조각을 떼어준 후 뒤도 안돌아보고 떠난다...[5] 페니실린이 나오기 전까지 매독에 걸린 사람의 운명은 말 그대로 온몸이 썩어 문드러진 채로 죽는 것 밖에 없었다. 타임슬립 닥터 진에서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6] 현재는 물론 페니실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