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레이스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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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레이스백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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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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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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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레이스백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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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인


알렉스 레이스백
Alex Raisbeck
본명
알렉산더 갤로웨이 레이스백
Alexander Galloway Raisbeck
출생
1878년 12월 26일
스코틀랜드 폴커크 주 왈라스스톤
사망
1949년 3월 12일 (향년 70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리버풀
국적
[[영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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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스코틀랜드"
행정구
]]
)
직업
축구 선수(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스카우터
소속
선수
라크홀 시슬 FC (1894~1896)
히버니언 FC (1896~1898)
스토크 시티 FC (1898)
리버풀 FC (1898~1909)
파틱 시슬 FC (1909~1914)
감독
해밀턴 아카데미컬 FC (1914~1917)
브리스톨 시티 FC (1921~1929)
FC 핼리팩스 타운 (1930~1936)
체스터 FC (1936~1938)
배스 시티 FC (1938~1939)
행정
리버풀 FC (1939~1949 / 스카우터)
국가대표
8경기 (스코틀랜드 / 1900~1907)

1. 개요
2. 선수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선수
5.2. 감독
6. 여담



1. 개요[편집]


스코틀랜드의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으로, 리버풀 FC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뛴 바 있으며 이후 다수의 잉글랜드 클럽 감독직을 역임했다.


2. 선수 경력[편집]


13세의 나이로 스코틀랜드 라크홀 시슬 FC에 입단한 레이스백은, 탄광에서 광부일을 겸임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레이스백은 단 한 시즌만에 1군으로 승격해 오른쪽 윙어로 뛰게 되었으나 그 이후 수비수로 전향하였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축구를 포기할 뻔 했으나 히버니언 FC에 스카웃되어 광부를 그만둔 뒤 1896년 7월 30일 이적, 본격적인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레이스백은 1896년 9월 12일 히버니언 소속 데뷔전을 치렀고, 이후 리그에서 인정받으며 스코틀랜드 리그 베스트 11에 소집될 정도로 인상적인 활약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는 팀을 연속해서 리그 상위권 성적으로 이끌었고, 1897-98 시즌 후반에 스토크 시티 FC에게 스카웃[1]되어 잉글랜드 리그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는 스토크 시티의 승강 플레이오프 무대에 출전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스토크 시티에게 영구적인 계약을 제시받았으나 리버풀의 톰 왓슨 감독이 재빨리 그에게 계약을 제시해 안필드로 입성하게 되었다.

1898년 5월 6일, 계약을 완료짓고 리버풀 선수가 된 그는 구단의 환영을 받으며 입단했고 당시 리버풀엔 다수의 스코틀랜드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팀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는 1898년 9월 3일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고, 이후 팀의 핵심 수비수로 자리 잡으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안필드에서 두 시즌을 보낸 후, 그는 활약에 힘입어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맞이한 1900-01 시즌에 리버풀을 사상 첫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3년 뒤 리버풀은 좋지 못한 성적을 보이며 2부 리그로 강등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레이스백은 원래 1903-04 시즌에 이적을 예정에 두고 있었으나, 팀이 강등되자 생각을 바꾸었고, "나는 내 클럽이 재난을 당했을 때 떠날 수 없다."라는 말과 함께 충성심을 보여주며 자리를 지켰다. 그는 구단에 남아 한 시즌 만에 팀을 다시 1부 리그로 승격시켰으며, 시즌 내내 필드 플레이어 중 최다 경기에 출장했다. 1부 리그로 돌아온 이후 레이스백은 지속적으로 핵심적인 활약을 펼쳤고, 리버풀은 런던 채리티 실드 우승을 시작으로 FA컵 준결승 진출과 두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레이스백은 두 번째 리그 우승 이후 부상으로 인해 신체적 어려움을 겪게 되어 지속적으로 출장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결국 1908-09 시즌 그는 무릎 부상으로 4개월간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고, 향수병도 겹쳐 결국 스코틀랜드로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구단에 알렸다. 리버풀은 존경받는 주장인 그가 떠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으나 건강상의 이유임을 존중하여 그를 보내주었다. 레이스백은 리버풀에서 총 341경기에 나서 19골을 득점하며 전설적인 존재로 각인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로 복귀한 레이스백은 파틱 시슬 FC에 입단하여 마지막 커리어를 보냈다. 그는 곧장 구단의 주장으로 임명되어 5년 동안 100경기 넘는 출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1914년 던디 FC와의 리그 경기에서 그는 복부에 부상을 당했고, 결국 통증이 심해져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없음을 인지하였고 이후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1900년 4월 17일, 스코틀랜드 리그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대표팀에 소집되었으며 리버풀로 이적한 이후에는 대표팀 주장으로도 활약했다. 1902 아이브록스 참사를 경기 중 겪기도 하였다.


4. 지도자 경력[편집]


1914년 3월, 해밀턴 아카데미컬 FC에서 일하는 관계자를 만나 초대 감독직을 제안받았고, 이후 해밀턴 아카데미컬의 감독으로 부임하여약 3년간 감독직을 역임했다.

이후 1921년 12월 28일에는 2부 리그에 있던 브리스톨 시티 FC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첫 시즌에 3부 리그로 강등의 아픔을 겪었고 이듬해 3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팀을 다시 2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팀을 승격시킨 시즌의 좋은 지도력으로 인해 레이스백은 데이비드 애시워스 감독의 후임을 찾던 리버풀의 감독직 물망에도 올랐으나 결국 리버풀은 맷 맥퀸을 선임했고, 그는 브리스톨에 남게 되었다. 이후 브리스톨은 1923-24 시즌에 다시 강등을 당했고, 3년 후에 2부 리그로 다시 승격했음에도 그는 1929년 6월에 감독직을 사임했다.

이후엔 핼리팩스 타운 AFC[2]에서 감독으로 6년의 시간을 더 보냈다. 1936년에는 체스터 FC에서 찰리 휴이트의 후임으로 선택된 후 감독직을 이어갔다. 1938년 7월에는 남부 풋볼 리그 배스 시티 FC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든 리그가 중단되었고, 그는 클럽에서 떠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친정팀 리버풀로 돌아와 1949년 사망할 때까지 구단의 보드진에 합류해 스카우터로 일했다.


5. 기록[편집]



5.1. 선수[편집]




5.2. 감독[편집]




6. 여담[편집]


  • 17살 때, 훈련을 마치고 히버니언 선수단과 저녁 식사를 하며 열띤 토론을 펼치다가 수프에 있던 뼈를 삼켜 호흡 곤란으로 쓰러진 일화가 있다. 당시 클럽 트레이너였던 패니 캐논이 등을 강하게 때려서 뼈를 빼냈다고 한다.

  • 1905년 리버풀이 유한회사로 전환되면서 구단의 주식을 매입한 선수들 중 하나였다.

  • 1902 아이브록스 참사 당시 스코틀랜드 대표팀으로 경기를 뛰고 있었다. 끔찍한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기도 했다.

  • 총 14명의 자녀들을 낳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6명의 아들이 군대에서 복무했고, 그 중 4명은 장교로 복무를 마쳤다.


[1] 2달 단기 계약[2] 지금의 FC 핼리팩스 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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