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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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Цесаревич России

파일:1664291680850.jpg
이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Poмaнoв)
출생
1904년 8월 12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사망
1918년 7월 17일 (향년 14세)
러시아 SFSR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에프 하우스
신체
키 168cm[1]
아버지
니콜라이 2세
어머니
헤센의 알릭스
형제
누나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종교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서명
파일:Alexei Nikolaevich Sinature.svg

[ 시성 정보 ]
시성
1981년: 해외 러시아 정교회
2000년: 러시아 정교회
축일
그레고리력: 7월 17일
율리우스력: 7월 4일
호칭
해외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순교자[1]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수난자[2]
성인 추대 종파
러시아 정교회
해외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안티오키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러시아 그리스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귀한 아들로 태어나다
2.2. 병약한 신체와 혈우병
2.3. 화목한 가정과 OTMAA라고 불린 5남매
2.4. 라스푸틴의 등장
2.5. 2월의 러시아 혁명 이후
3. 유해 발굴, 그리고 음모론(생존설)
4. 가족관계
5. 대중매체



1. 개요[편집]


파일:Alexei Nikolaevich Romanov.jpg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으로, 니콜라이 2세장남이며 러시아의 마지막 황태자,(체사레비치)로 유명하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8월에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사이의 1남 4녀 중 막내이자 고명아들로 태어났다. 적갈색 머리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회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년이었다고 한다.

이름의 모티브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로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가 지어준 이름이다. 표트르 대제의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가 역모에 휘말려 끔찍하게 죽은 뒤로 로마노프 왕조에서는 황태자의 이름을 알렉세이라고 짓는 것을 기피하게 됐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를 존경하였기에 아들에게 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의 운명도 비참하게 끝을 맺고 만다.


2. 생애[편집]



2.1. 귀한 아들로 태어나다[편집]


파일:1666200128342.jpg
알렉세이는 니콜라이 2세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막내이자 고명아들로 태어났다. 황제 부부는 혼인한 이후 딸만 내리 넷을 낳은 뒤에야 비로소 후계자가 될 귀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2], 알렉세이가 태어났을 때 두 사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니콜라이 2세 부부는 막내아들을 '햇님'이라고 칭할 정도로 무척 사랑했다.[3]

2.2. 병약한 신체와 혈우병[편집]


그러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혈우병 보인자였기 때문에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할머니 영국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전된 것이다.

참고로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받은 후손은 알렉세이뿐만이 아니라 여럿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딸들은 혈우병 보인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들이 유럽 각국의 왕실로 시집가서 유럽 왕실마다 혈우병이 퍼진 것이다. 게다가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라 불릴 정도로 자손들이 많았기 때문에 피해규모가 더욱 컸다.[4] 알렉산드라 황후의 작은오빠로 알렉세이 황태자의 작은 외삼촌인 프리드리히도 혈우병을 앓다가 죽었다.

안타깝게도 알렉세이 역시 혈우병 유전을 피하지 못했고, 그 바람에 그토록 오래 기다려 얻은 아들이었음에도 알렉세이의 혈우병은 로마노프 왕조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데 일조하게 된다.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알렉세이는 "동화 속 왕자님"같은 미소년이었다고 하나, 혈우병 때문에 안색이 늘 창백했으며 잔병치레가 잦은 병약한 아이였다고 한다. 감기에 걸려 코를 세게 풀기라도 하면 코 안의 점막이 헐어서 바로 피가 나왔다. 때문에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4명의 누나(황녀)들, 그리고 주변 시종들은 늘 그의 건강 때문에 노심초사했다고. 알렉세이 황태자 자신 또한 자신이 오래 살 수 없단 걸 알고 있어서, 첫째 누나인 올가 공주에게 "내가 언제 지금같은 생활을 누리지 못할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어린 시절엔 손님들이 앉은 테이블 밑에 들어가서 장난을 치는 걸 좋아했고, 파티장에서 뛰어다니며 측근들의 진땀을 빼게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여느 또래처럼 활동적인 면모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병약하다 보니 활동적으로 노는 것이 금지된 것에 불만이 많았고 자전거를 타는 것도 금지, 누나들과 함께 테니스를 치고 싶다고 했다가 거절당해서 화를 낸 적도 있다. 놀다가 다칠 수 있다 보니 사촌들과도 거의 놀지 못했고 또래 친구도 거의 없었다고.

대신 그 몇 안 되는 또래 친구들과는 사이가 좋았는지 러시아 혁명 이후 유배를 갈 때 친구 중 측근 세드네프의 조카인 레오니드의사 데레벤코[5]의 아들 콜랴는 유배길까지 같이 따라왔다고 한다. 레오니드는 로마노프 일가가 처형되기 전날까지 같이 살면서 요리사 카리토노프의 조수 일을 하곤 했는데, 아무래도 어린 데다 황족도 아니어서인지 볼셰비키가 특별히 처형 전날에 떠나게 해서 살아남는다. 하지만, 레오니드는 1942년쯤에 반동으로 몰려 총살당했다고 한다.

레오니드 본인과 로마노프 일가에게는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삼촌을 만나러 가게 한다"고 말했는데, 사실 당시 레오니드의 삼촌은 이미 볼셰비키에게 사살된 상태였다. 이를 몰랐던 알렉산드라 황후는 레오니드를 걱정하는 일기를 썼고 누나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의사 봇킨은 사령관 유로프스키를 찾아가 "레오니드를 돌려보내 달라"고 한다. 유로프스키는 "곧 돌아올 거다"라고 대답했지만 모두 납득하지 않았다고 하고 그날 밤 니콜라이 2세 일가는 모두 살해되었다.

한편 콜랴는 로마노프 일가와 함께 살지는 않았고, 근처에 있는 저택에 연금되어 알렉세이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훗날 소련 붕괴 이후 90대의 나이로 생전의 로마노프 일가에 대한 인터뷰를 하며, 알렉세이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당시만 해도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살아있다고 소문이 많던 알렉세이에 대한 걸 자세히 알지 못하고 유해가 발견되기 전인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2.3. 화목한 가정과 OTMAA라고 불린 5남매[편집]


파일:166922055913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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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TMAA.jpg
로마노프 황가의 남매들.
왼쪽부터 셋째 마리야, 둘째 타티야나, 넷째 아나스타시야, 첫째 올가, 다섯째 알렉세이. 하나같이 외모가 준수하다.[6]
이렇게 몸이 좋지 않다 보니 야외 활동에도 자연히 많은 제약이 따라서 그가 남긴 일기를 보면 친구들과 직접 같이 놀지는 못하고 "친구들이 노는 것을 지켜 봤다"는 기록만 있다. 혈우병 때문에 몸이 늘 불편해서 신경질적인 모습도 자주 보였다. 실제로 알렉세이가 공식 석상에서 아프다며 칭얼대자 첫째 누나 올가 니콜라예브나 황녀가 그러지 말라고 점잖게 만류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알렉세이는 도리어 더 신경질을 내며 홧김에 9살이나 위인 큰누나뺨을 때리는 무례한 짓을 하기도 했다. 당시 주변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지만 올가 황녀는 동생의 미성숙함에도 애써 웃어 넘겨 상황을 무마시켰다.[7]

황태자의 건강 문제로 황제의 장녀인 올가 황녀의 제위 계승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러시아 제국에서는 과거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파벨 1세가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로, 즉위 후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황녀들에게 제위 계승권이 없었다.[8]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니콜라이 2세도 여성의 제위 계승을 인정하는 법안을 만들려는 시도는 있었다.

파일:1666192057493.jpg
어쨌든 알렉세이가 지병 때문에 종종 예민하게 굴긴 했어도 니콜라이 2세 일가는 대체로 화목한 가정이었고 알렉세이도 4명의 누나들과 친한 편이었다. 특히 친한 누나는 바로 위의 누나이자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녀로서 수많은 매체에서 다뤄진 그 유명한 아나스타시야 황녀였다. 아나스타시야는 아파서 힘들어하는 알렉세이와 재밌게 놀아줘 웃게 만들고 늘 다정히 돌봐줬다고 한다. 장난기가 많았던지라 알렉세이와 내기를 해서 이긴 뒤, 동생이 분개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기도 했지만 일부러 져 주기도 했다고. 둘이서 암호를 만들어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누나들은 서로가 일기 등에서 머리글자인 'OTMA'(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로 표현할 정도로 자매들끼리 서로 친했고 5남매 모두 우애가 좋아서 막내 남동생 알렉세이 황태자와 함께 OTMAA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혈우병 때문에 예민한 모습을 자주 보였지만 평소엔 조금 게으르긴 해도 사려깊고 인정있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밀리터리를 좋아했으며 시종들은 "알렉세이 황태자는 지병을 앓았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민감했다"고 회고했다.

2.4. 라스푸틴의 등장[편집]


한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외아들의 혈우병을 치료하기 위해 종교적인 방법까지 시도했다. 그때 한 사람을 기용했는데, 그가 바로 떠돌이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이었다. 신기하게도 라스푸틴이 알렉세이를 위해 기도해 주면 알렉세이가 차도를 보이는 등 효과가 있었다고 하는데, 예전부터 악마의 힘이나 마법을 사용했다는 말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단순히 안정을 취하게 해 스스로 회복하게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9]

사실 이는 생각해보면 의외로 단순하다. 안 그래도 병약해서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못해 우울하고 신경질적이던 알렉세이에게 있어선 사무적이고 딱딱한 의사들의 처방보단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자상한 아저씨의 편안한 말 한마디가 더 마음에 안정을 줬을 것이다. 거기다가 당시 혈우병은 의사들도 손쓸 수 없는 병이었으니, 심리적 안정이나마 줄 수 있는 라스푸틴의 방법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었기도 했던 것.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exei_tren.jpg
혈우병 때문에 단명할 거라는 예상이 많았다. 당시에 혈우병 환자들은 대개 젊은 나이에 부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등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삼촌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도 혈우병 환자였고 실족사했다.[10] 따라서 실제로 알렉세이 황태자가 총살당하지 않았더라도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기다 (당시에는 그토록 해롭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지만)[11] 그 몸상태에 담배까지 피워댔으니 더 그렇다. 알렉세이 본인도 자신이 오래 살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 알렉세이는 '훌륭한 황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고 한다. 밀리터리 마니아라 제1차 세계대전에 군복을 입고 (후방이었겠지만) 병장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에선 아버지를 따라가 육군본부에서 지냈으며, 보이스카우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때 하인들과 함께 병정 놀이를 즐겨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황태자만을 위한 모신나강을 선물했을 정도.

그러나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질병도 아니고 전쟁도 아닌 혁명이었다.

2.5. 2월의 러시아 혁명 이후[편집]


황제가 없으면 대체 누가 러시아를 통치한단 말입니까?

아버지의 퇴위 소식을 듣고 보인 반응


1917년 러시아 혁명(2월 혁명)이 일어난 이후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녀들과 황태자는 차르스코예 셀로에 연금되었다. 임시정부의 수장 케렌스키는 이들을 외국으로 망명시키고 몸값이라도 뜯어낼 생각을 했으나 협상국 어느 나라도 이들을 받아주기를 꺼렸다. 당시 차르의 삽질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지고 1차 대전이 길어지면서 국민들이 떼죽음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들을 받아줬다가는 반정부 운동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볼셰비키라고 해도 황제 일가가 전쟁과 실정에 책임이 있을지언정 일국의 황족인 이상 설마 죽이겠느냐'는 생각도 있었다.[12]

이어 10월 혁명이 벌어져 볼셰비키가 집권하자 이들은 우랄산맥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알렉세이는 혈우병이 도지는 바람에 다리를 아예 못 쓰게 돼서, 니콜라이 2세가 아들을 직접 안고 이동해야 했다고 하니 당시 황제 일가족이 겪은 비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18년 7월, 14번째 생일을 불과 1달쯤 앞두고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적군에 의해 니콜라이 2세와 일가족 모두 피살당했다. 혈우병이 심해져 처형된 지하실로 갈 때도 니콜라이 2세가 안아서 옮겼고 황후는 사령관 야코프 유롭스키에게 "아픈 알렉세이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달라"고 청했다 한다. 알렉세이는 병약한 몸이었음에도 첫 번째 총격으로 부상만 입고 죽지 않아 볼셰비키들은 알렉세이의 머리에 총을 쏘아 살해했다.

다음날에는 알렉세이의 둘째 이모인 옐리자베타 대공비도 살해되었다.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둘째 언니로, 알렉산드라 황후보다 10년 먼저 러시아 제국에 시집 와서 살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세르게이 대공[13]과 옐리자베타의 결혼식에서였다.

세르게이 대공이 죽은 후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자기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하고 수녀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혁명의 와중에 다른 황족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exeiOlgaRus.jpg
첫째 누나 올가 황녀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 2달 후 그들은 총살당했다.

3. 유해 발굴, 그리고 음모론(생존설)[편집]


그의 시신은 넷째 누나 아나스타시야 여대공처럼 오랫동안 발굴되지 않아서 자신이 살아남은 마지막 러시아 제국 황태자라고 주장하는 이는 여럿 있었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혈우병 환자인 데다가 처형 당시에 몹시 허약해져 있었다. 그런 건강상태의 사람이 총상이나 총검에 찔려 자상을 입고도 살아남기란 지극히 힘든 일이라, 생존설을 반박하는 쪽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자신이 알렉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나타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사람은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Василий Ксенофонтович Филатов, 19071988)였다.

1907년에 태어난 그는 공식적으로 알렉세이보다 3살이 어렸다. 세례성사견진성사를 받았던 성당에 출생기록이 남아있었으므로, 나이가 거짓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일개 구두 제화공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르간·피아노·하프시코드·아코디언 등 여러 악기들을 연주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차이콥스키·쇼팽 등 고전음악과 러시아의 민속음악·오페라에도 조예가 깊었고, 러시아/역사, 특히 전쟁사에 박식해[14] 아이들에게 항상 자세히 이야기하곤 했으며, 독일어·그리스어·라틴어·영어·프랑스어 등 6개국어 이상을 구사했다. 또한 푸시킨·체호프·괴테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의 시를 외우고 있었다.

즉 노동자 계급으로 태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매우 다방면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 저 수준의 교양을 갖추려면 최소한 엄청나게 부유한 집안의 자제 정도는 되어야 했다. 더구나 13세부터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13세가 채 되기도 전에 저 정도의 학식을 갖출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는 뜻이 된다. 이 정도 수준이면 상류층과 관계가 없기도 힘들다.

그는 13살부터 22살까지는 구두 수선공이었고 이후엔 고등학교 지리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임종을 앞둔 시점에 아나스타시야를 자기 누나라고 하면서 자신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태자라 고백했다. 실제로 필라토프의 전체적인 골격과 얼굴 생김새 등이 알렉세이와 매우 유사했으며[15], DNA 검사 결과 자손들의 유전자와 로마노프 왕조의 유전자가 일부 일치했다. 관련 글 또한 필적이 같았다는 말도 있다. 알렉세이와 필라토프의 청년 시절 얼굴을 비교해 비율 분석을 했더니 이목구비 비율조차 비슷하게 나온 적도 있다.

비록 필라토프가 혈우병 증세를 보이진 않았어도[16] 유전자 검사 결과가 일부 일치하는 것으로 나오자, 이는 거의 결정적인 증거로 취급되었다. 사실 일부 학자들도 이렇게나 알렉세이와 일치하는 점이 많았던 필라토프를 알렉세이라고 믿고 싶어 했었다. 실제로 1991년에 발굴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시신에서도 아나스타시야와 알렉세이는 없었는데, 이것이 알렉세이 생존설의 한 증거이자 필라토프가 알렉세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도 했다.

물론 필라토프를 알렉세이로 보기 어려운 근거도 상당히 있었다. 필라토프는 혈액 관련 질병이 있긴 했으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생전에 병원도 거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고 유배생활 중에 걷지도 못하게 되었던 알렉세이가, 갑자기 건강체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필라토프는 "진짜 바실리 필라토프는 죽었고, 그 부모가 알렉세이 황태자였던 나를 거둬 자신들의 아들인 바실리 필라토프의 인생을 살게 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도 없었다. 갓난아기도 아니고 10대 초반의 남자아이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했을 법한데, 필라토프의 어린 시절 이웃들은 "그런 사실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2007년에 셋째 누나 마리야 여대공과 함께 진짜 알렉세이의 시신이 발굴되었다. 결국 필라토프는 진짜 알렉세이가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여담이지만 2007년에 발굴된 시신 3구의 분석으로 아나스타시야 여대공의 시신은 1991년에 이미 발굴됐던 9구의 시신 중 하나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당시에 마리야로 판명됐던 시신이 사실 아나스타시야의 시신이었던 것. 당시 처형에 가담했던 자들의 친척 등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 알렉세이와 마리야의 시신을 묻고 그 근처 다른 곳에 남은 시신들을 묻었기 때문에 알렉세이와 마리야의 시신만 뒤늦게 발굴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알렉세이의 시신은 찾았지만, 바실리 필라토프가 왜 자신을 황태자라고 주장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자신이 알렉세이라고 주장했던 자들 태반은 아나스타시야를 사칭한 안나 앤더슨[17]처럼 돈과 명예를 얻어보려고 되도 않는 사기를 친 것이었지만, 이 자는 그 어떤 가짜들보다도 파급력이 큰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도 평생 나서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아나스타시야까지 운운하며 자기가 알렉세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DNA 검사 결과, 바실리 필라토프는 정말 로마노프 왕조의 후예가 맞았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생판 남인 사람끼리 DNA 정보가 일치할 확률은 사실상 제로인 점을 감안하면 우연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일각에선 로마노프 왕조의 방계 후손[18]이거나 혹은 니콜라이 2세의 혼외자가 아니겠냐는 주장이 있고, 혼외자라 일반 귀족으로 숨겨 키워서 로마노프 왕조 숙청 때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필라토프 본인도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의 사촌 또는 이복동생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소련 치하에서 자신의 친척들인 로마노프 왕조 사람들이 숙청당하는 것을 보고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19] 임종 직전에야 그걸 공개했는데, 노년에 기억에 혼선이 생겨 자신이 알렉세이 본인이었다고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의문점은 많지만 당사자인 필라토프 본인이 이미 사망했고, 자녀들도 부친의 임종 직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데다가 그 후에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서, 학계에서도 더 이상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4. 가족관계[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Alexei Nikolaevich, Tsarevich of Russia)
니콜라이 2세
(Nicholas II)
알렉산드르 3세
(Alexander III)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Princess Dagmar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헤센의 알릭스 공녀
(Princess Alix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의 카를 공자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20]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5. 대중매체[편집]


1986년에 방영한 TV영화 <아나스타샤>에서는 당시 12살이었던 아역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알렉세이를 연기했는데, 이것이 그의 연기 데뷔작이었다. 극중에서 알렉세이는 유배 생활에 절망하다 계단에서 구르는 방식으로 자살 시도를 하는 바람에 크게 다쳐 다리를 못 쓰게 되는 것으로 묘사됐다.

사무라 히로아키의 만화 춘풍의 스녜그로치카에서는 알렉세이 황태자가 사실은 생존해 있다는 가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BLOOD+알렉세이는 이 인물이 모티브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선 역시나 혈우병으로 고통받는 모습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그리고리 라스푸틴 대신 개입한 이선의 덕에[21] 한의학으로 출혈 방지 및 식이요법을 통한 관리를 받게 되었고[22]이로 인해 로마노프 왕조가 라스푸틴의 영향력에서 영구히 벗어나는 나비효과가 발생했다. 물론 라스푸틴이 없어도 러시아 제국은 차르부부의 무능으로 망하지만, 주인공의 도움으로 망명에 성공한다.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국가/구 소련에서 코미 공화국 우파연합 일원인 세르게이 타보리츠키는 알렉세이의 생존을 확신하며 자신이 섭정을 자처하는 군벌이다. 호르티 미클로시프란시스코 프랑코 같은 실제 독재자들이 실제로 왕없이 섭정을 자처하며 통치했지만 타보리츠키는 진짜로 알렉세이가 살아있다고 믿으며 그를 신이 내린 러시아의 구원자로 여긴다.[23]그리고 게임 후반부에 스스로 알렉세이임을 자처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스포일러
그는 알렉세이가 아니라 폴란드 출신의 전 NKVD 요원이였던 미하일 골레니옙스키로, 자신을 알렉세이 황태자라고 주장하며 러시아 제국의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사회주의와 타보리츠키가 사용하던 황제 이데올로기를 섞어서 진정한 러시아의 안정을 추구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였다. 현실 역사에서 미하일은 폴란드 보안기구의 장교이자 미국의 스파이였던 인물로, 실제로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였다고 주장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은 알렉세이가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타보리츠키의 폭정과 정권 붕괴로 인해 초래된 극심한 혼돈 상태에 빠진 러시아에 도움을 주면 괜찮다며 묵인한다. 다만 바로 옆 부라티아 지역에 자리잡은 군벌 수장인 안드레이 디키는 미하일의 정체가 폴란드인인 것을 알고 그를 멸시하며, 그를 제거하고자 이츠쿠르크에 전쟁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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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살 당시 13세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때 장신이 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작 부친인 니콜라이 2세는 로마노프 왕조 황제치고는 매우 왜소한 편이다. 하지만 만나이 13세일뿐, 세는 나이 15세에 만 14세를 앞뒀던 시점이라 현대의 중학교 2학년 나이였기에, 현대의 중2 신체검사때 168인 학생들이 성인까지 다 장신이 되는건 아닌만큼, 그렇게 대단한 장신이었을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2] 러시아 제국파벨 1세 이후 아들에게만 황위 계승권을 부여하고 있었다.[3] 참고로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딸부잣집에 유일한 아들이 혈우병 환자여서 부각이 잘 안 되는데 니콜라이 1세 이래로 러시아 황실은 아들부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니콜라이 1세가 4남 4녀, 알렉산드르 2세가 6남 2녀(귀천상혼 자녀까지 합하면 8남 4녀), 알렉산드르 2세의 남동생들인 콘스탄틴 대공이 4남 2녀, 니콜라이 대공이 2남, 미하일 대공이 6남 1녀를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차남 알렉산드르 3세가 4남 2녀, 그 밑에 동생인 블라디미르 대공이 4남 1녀를 두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많은 황족들이 총살당했지만 자손들이 워낙 많아서 현재도 로마노프 가문의 후손들이 많이 있다.[4] 빅토리아 여왕의 자손들에 대해서는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조.[5] 알렉세이를 보모처럼 돌봐준 군인 데레벤코와는 성씨가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여담으로 의사 데레벤코는 아들과 함께 로마노프 일가의 유배길에 자발적으로 따라온 반면, 군인 데레벤코는 러시아 혁명 이후 태도가 변해 자신이 돌보던 알렉세이를 구박했다고 한다.[6] 여담으로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은 모두 미인이었지만 특히 둘째인 타티야나가 가장 미인이라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타티야나 황녀가 무도회에 참석하면, 그녀와 꼭 춤을 추고자 하는 남자 귀족들이 줄을 섰다고.[7] 그래도 아무리 성숙하다곤 해도 올가 역시 한창 예민할 10대였던지라,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알렉세이는 며칠 동안이나 저녁 디저트를 큰누나에게 상납하며 싹싹 빌었다(...).[8] 사실 이는 어머니에 대한 반감만이 그 이유라기보다는 유럽에서 '미개하다'고 비난받던 러시아의 지명상속제를 파벨 1세가 서구화 과정에서 개혁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9] 일설에는 당시 주치의들이 부종으로 인한 고통이라도 줄여주기 위해서 아스피린을 계속해서 처방한 결과, 그 부작용인 항응고 작용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는데, 라스푸틴이 투약을 중단시킴으로써 상태를 호전시켰다고도 한다.[10]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치명상은 아니어서 상처가 잘 치료되었다면 살았을 테지만, 혈우병으로 인해 출혈이 멈추지 않아 죽었다고.[11] 엄밀히 말하면 담배의 해악성은 이미 그 전에 알려져 있었다. 다만 지금처럼 폐암의 원인이니 하는 수준이 아니라, 가래가 많이 끓고 이가 누래지는 등의 약소한 해악성만 알려진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는 상하류층 모두 기생충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담배의 유독성 때문에 기생충들이 죽거나 활동이 잠잠해지는 효과도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알려진 담배의 부작용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져 무시될 정도였다.[12] 실제로 그나마 망명에 성공한 황족들은 모두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이 죽은 뒤에 도망다니다가 망명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나마도 남자들은 전부 자력으로 도망가고 황태후와 공주들만 받아줬다.[13] 니콜라이 2세의 숙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의 5남이다.[14] 알렉세이 역시 밀덕이었다. 러시아 제국군 군복을 맨날 입고 돌아다녔을 정도.[15] 사진을 찾아보면 수염을 기른 필라토프는 니콜라이 2세와도 좀 닮긴 했다.[16] 다만 군대는 혈액 관련 질병 때문에 면제받았다고 한다.[17] 심지어 죽을 때에도 자신은 아나스타시야 황녀라고 주장하며 무덤에까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라고 새겼으나, 사후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아나스타시야는 커녕 로마노프 왕조와 일체 혈연관계가 없는 희대의 사기꾼으로 밝혀졌다.[18] 가장 유력한 추측은 니콜라이 2세의 남동생 미하일 대공의 혼외자라는 설이다.[19] 러시아 내전 당시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이 소련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웠고, 스탈린의 죽음으로 끝난 대숙청을 무사히 넘겨도 로마노프 일족들은 좋은 대접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소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생각해보자.[20]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21]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고향에서 벌어진 고소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를 떠난 상태였다. 당연히 이는 주인공이 손을 써 놓은 것.[22] 실제 비타민 K는 혈액 응고의 효과가 있어 혈우병 치료에도 도움이 되는데 이를 이용해 비타민 K가 많이 함유된 해조류, 녹색 채소, 식물성 기름이 중심이 된 식단을 짜줬다. 이선은 이걸 K-의학이라고 농담을 한다.[23] 현실의 타보리츠키는 이와 달리 알렉세이가 살아있다고 믿지도 않았으며 살아남은 황제 일가 친척을 왕위 계승 대상으로 옹립할 것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