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유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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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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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142~



1. 개요
2. 유묵 목록
2.1. 백인당중 유태화
2.2.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2.3. 연년세세화상사 세세년년인부동
2.4. 치악의악식자 부족여의
2.5. 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아기안면 화국미성유강개 정략불개진가련
2.6. 견리사의 견위수명
2.7. 용공난용 연포기재
2.8. 인무원려 난성대업
2.9. 오로봉위필 청천일장지 삼상작연지 사아복중시
2.10. 세한연후 지송백지부조
2.11. 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
2.12. 장부수사 심여철 의사임위 기사운
2.13. 박학어문 약지이례
2.14. 제일강산
2.15. 청초당
2.16. 고막고어자시
2.17. 인지당
2.18. 인내
2.19. 극락
2.20. 운재
2.21. 욕보동양 선개정략 시과실기 추회하급
2.22. 국가안위 노심초사
2.23. 위국헌신 군인본분
2.24. 천여불수반수기앙이
2.25. 언충신 행독경 만방가행
2.26. 임적선진 위장의무



1. 개요[편집]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뤼순 감옥에서 남긴 한문 휘호이다.

총 200점 이상으로 추정되며 안중근 의사 기념관측은 57점을 인정하고 있다. 안중근은 시대 상황상 모든 유묵을 일본인에게 남겼으며 이중 26점이 대한민국에 반환 또는 인도되어 보물 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 되었다. 이 중 1점(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 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는 본래 청와대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분실된 상태이다.[1] 그 외에 1점(日韓交宜善作紹介: 일한교의선작소개[2])은 한국인 학자가 만든 일본 도쿄에 있는 국제한국연구원에 일본인이 기증하였는데 연구원 측에서 관리를 잘못하여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중근은 매 휘호마다 大韓國人 安重根이라는 서명과 함께 무명지 한마디가 잘린 자신의 왼손바닥에 먹물을 묻혀 찍어 낙관을 대신하였다. 안중근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글씨마다 그의 힘과 기개를 느낄 수 있는 엄청난 명필인데다, 옥중에서 자주 글씨를 쓰기는 하였지만 그 기간이 너무 짧아 유묵의 수가 한정되어 있는 점,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유묵의 내용과 글씨를 쓰던 당시 상황까지 겹쳐[3] 그의 유묵은 근현대 명사들의 휘호 중 최고의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되며, TV쇼 진품명품에서 “안중근의 유묵은 값을 매겨 평가할 수 없다”(priceless)는 판정[4]을 하기까지 했다.

문단의 순서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문화재 순서대로, 해외에 있어서 문화재가 아닌 것은 기타 문단에 넣는다.


2. 유묵 목록[편집]


보물로 지정된 순서(569-X호)로 분류하여 나열한다.


2.1. 백인당중 유태화[편집]


百忍堂中有泰和

백 번 참는 집안에 큰 평화가 있다

  • 보물 569-1호.


2.2.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편집]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 보물 569-2호.
  • 독서와 관련된 유명한 결구. 이 오언절구는 추구(推句)[5]에 수록돼 있으나, 안중근의 유명세 탓에 "안중근이 말한 명언"으로 한국 민간에 알려졌다. 원출전은 주지유의 《답야절문(答野節問)》에 수록된 사언절구 "三日不讀, 口生荊棘; 三日不彈 手生荊棘" (3일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고 3일간 가야금을 타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는다)이다.
  • 남산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자연석에 새긴 비가 서 있다.


2.3. 연년세세화상사 세세년년인부동[편집]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꽃은 서로 비슷하나,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네

  • 보물 569-3호


2.4. 치악의악식자 부족여의[편집]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

낡은 옷과 거친 밥상을 부끄러워하는 자와는 의를 논할 수 없다.

  • 보물 569-4호.
  • 보물로 지정된 유물 중 유일하게 유실된 상태이다. 박정희 정부 당시 청와대에 기증되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게 되면서 개인 유품은 박정희 대통령의 자녀 중 청와대에서 생활한 세 명(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을 대표해 큰 딸인 박근혜에게 전달되었고 공용 물품은 청와대에 남았다.

그러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도난문화재에 준하게 취급되고 있는데, 정황상 박근혜가 물건 관리를 허술하게 하여 분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는 유물 가치가 높은 김재규가 제작한 "박정희 파텍 필립 뇌물 시계" 역시 분실한 사례가 있는데, 해당 시계는 김재규가 박정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중앙정보부 예산을 유용해 제작한 시계로 안중근 유묵과 마찬가지로 전두환에 의해 박근혜에게 전달되었지만, 박근혜는 이 시계에 대해 '"흉물스러운 물건이라 잘 보관하지 않았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답변한 바 있다.

따라서 이 안중근 유묵이나 역사적 가치가 높은 김재규 시계나 기타 박근혜가 보관 중이던 물건들은 박근혜의 관리 부실로 폐기물로 인식되어 한꺼번에 버려지거나, 박물관 수장고에서 뒤늦게 "발견" 되는 것처럼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박근혜가 여러 번 이사를 거쳤음에도 확인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분실물들은 버려진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2.5. 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아기안면 화국미성유강개 정략불개진가련[편집]


東洋大勢思杳玄 / 有志男兒豈安眠 / 和局未成猶慷慨 / 政略不改眞可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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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대세 생각하면 아득하고 어두우니 / 뜻있는 남아 어찌 편히 잠들랴

평화 시국 이루지 못함이 개탄스러운데 / (일본은) 침략 정책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련하네

  • 보물 569-5호
  • 칠언절구 형태의 유일한 유묵이다. 동양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을 한탄하며 일본에게 계속 침략을 하면 그들이 불쌍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6. 견리사의 견위수명[편집]


見利思義見危授命

이로움을 보았을 때에는 의로운지에 대해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에는 목숨을 바쳐라



2.7. 용공난용 연포기재[편집]


庸工難用連抱奇材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나무를 쓰기 어렵다.

  • 보물 569-7호.


2.8. 인무원려 난성대업[편집]


人無遠慮 難成大業

멀리 앞을 내다보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

  • 보물 569-8호


2.9. 오로봉위필 청천일장지 삼상작연지 사아복중시[편집]


五老峯爲筆 / 靑天一丈紙 / 三湘作硯池 / 寫我腹中詩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 하늘같은 종이 한 장 위에

삼상의 물을 벼루물 삼아 / 내 마음에 품은 시를 쓰리라

  • 보물 569-9호
  • 오언절구 형태의 유일한 유묵이다.


2.10. 세한연후 지송백지부조[편집]


歲寒然後知松栢之不彫

해가 춥고 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 보물 569-10호


2.11. 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편집]


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임 생각 천리 길에 /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 행여 이 정을 저버리지 마소서.

  • 보물 569-11호


2.12. 장부수사 심여철 의사임위 기사운[편집]


丈夫雖死心如鐵義士臨危氣似雲

무릇 장부는 죽더라도 그 마음은 무쇠같으며 의사는 위기에 닥치더라도 그 기운이 구름과 같다.

  • 보물 569-12호.


2.13. 박학어문 약지이례[편집]


博學於文 約之以禮

글을 많이 배우고 예로서 요약한다.

  • 보물 569-13호


2.14. 제일강산[편집]


第一江山

제일가는 강산

  • 보물 569-14호


2.15. 청초당[편집]


靑草塘

푸른 풀이 자라는 연못

  • 보물 569-15호


2.16. 고막고어자시[편집]


孤莫孤於自恃

혼자 잘난 척하는 것보다 외로운 것은 없다.

  • 보물 569-16호.


2.17. 인지당[편집]


仁智堂

어질고 지혜로운 집

  • 보물 569-17호


2.18. 인내[편집]


忍耐

  • 보물 569-18호


2.19. 극락[편집]


極樂

  • 보물 569-19호


2.20. 운재[편집]


雲齋

하늘 위에 있는 나의 집

  • 보물 569-20호


2.21. 욕보동양 선개정략 시과실기 추회하급[편집]


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遇失機 追悔何及

동양을 보존하려면 / 먼저 정략을 바꾸어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놓치면 /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 보물 569-21호.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2.22. 국가안위 노심초사[편집]


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의 안위를 위해 애쓰고 걱정하다.

  • 보물 569-22호.


2.23. 위국헌신 군인본분[편집]


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 보물 569-23호
  •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이다. 특히 육직 부대라면 영내에서 자주 볼 슬로건이며, 타군에서도 정훈교육 자료로 많이 쓴다.
  • 안 의사가 사형 직전 자신을 감시하던 간수 지바 도시치에게 적별선물로 써준 글귀. 이 글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지바는 안중근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안 씨, 나는 일본의 군인, 특히 헌병이기 때문에 당신과 같은 훌륭한 분을 중대범인으로 간수하게 된 것이 매우 괴롭소."
그때 안중근은 되레 자신의 감시자를 위로한다.
"아니오. 당신은 군인으로서 당연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오. 이토 때문에 굴욕적으로 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뒤에, 나는 동지들과 대한 제국 의병대를 결성하고 그 참모 중장이 되었고, 이 의병에 속하고 있는 동지들은 각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독립과 평화를 위해 동맹하는 것이며 농부는 농사에, 선전 유세를 담당하는 사람은 선전 유세로, 이와 같이 각기의 임무를 별도로 하고 있소. 이토를 죽이게 된 것도 나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소.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일단 유사시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 본분이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자기의 임무에 최후까지 충실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오."[6]

지바 도시치는 다시 한번 감동하며 안중근에게 휘호를 요청하지만 안중근은 정중히 거절한다. 그러나 사형 집행되던 바로 그 날, 우리가 익히 아는 마지막 날의 모습대로 하얀 명주 한복을 입은 안중근이 지바를 부른다.
"지바 씨. 그때 말한 거 오늘 씁시다."
안중근은 자신의 임무에 괴로워하던 군인 지바에게 이런 휘호를 써 준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爲國獻身 軍人本分).〉

《안중근 평전》, 김삼웅
  • 후에 지바 도시치는 간수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철도원으로 일한다. 그는 이 글귀를 소중히 간직한 채 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후손이 1979년 9월 2일 안 의사 탄신 100돌을 기려 안중근기념관에 이를 넘겨주면서 70년 만에 고국을 밟게 되었다. #


2.24. 천여불수반수기앙이[편집]


天與不受反受其殃耳

하늘이 준 것을 받지 아니하면 도리어 그 벌을 받는다.

  • 보물 569-24호
  • 소장처: 국립제주박물관
  • 보물로 지정됐던 당시에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었다가 2020년 9월 개인 소장가로부터 기증받아 다음해인 2021년 11월 26일 국립제주박물관에 복합문화전시관이 들어서자 복합문화전시관 개관 특별전인 '제주와 박물관, 동행'展에서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2.25. 언충신 행독경 만방가행[편집]


言忠信 行篤敬 蠻邦可行

말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오랑캐 나라에서도 제대로 행할 수 있다

  • 보물 569-25호


2.26. 임적선진 위장의무[편집]


臨敵先進 爲將義務

적을 만났을 때 선봉에 서는 것이 장수된 자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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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황상 10·26 사태 이후 박근혜에게 인도되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나, 그 이후 왜 분실된 것인지는 오리무중이다.[2] 일본과 한국의 친선은 양국이 서로를 잘 알게 되는 것에 있다는 뜻. 취조, 재판 등에 입회해 통역을 맡았던 소노키 스에키에게 처형 전달인 2월에 써 준 것. 안중근 의사가 일본을 증오한 게 아니라 동양평화와 한일우호를 염원했다는 증거인 귀중한 유묵이다. 소노키 스에키는 이 유묵을 소중히 간직했으며, 이를 한국에 기증한 사람도 이 통역관의 후손이다.[3] 유묵 같은 필기류의 유물은 필체도 필체지만 그 글씨를 쓴 사람의 행적에 따라서 가치가 크게 달라진다. 예컨대 안중근의 유묵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지만, 역시 명필로 알려진 친일파 이완용의 유묵은 거의 무가치로 평가받는다.[4] 보험가로 6억을 내긴 했지만, 실제로 한 말을 들어보면 가격 책정을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다.[5] 작자 시기 미상. 여러 책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놓은 초학자용 한문 교재[6] 정황상 이 말이라도 안 했으면 지바는 안중근의 마지막을 지키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